마틴 로이드 존스, 로마서 1장 8-11절 강해 설교, 위대한 중보 기도 [로마서 강해 7권, 하나님의 복음] 내 하나님께 감사함...

“첫째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으로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롬1:8-11)

“견고케 하려 함이니” - 사도 바울은 그들을 보고 싶어 하는 자기의 간절한 소원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며 그들을 만나 교제하고 싶어 한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사도가 그들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즐거워는 하지만, 사도는 그들을 견고케 해주고 강하게 해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회심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다. 회심하기만 하면 다 끝난 것이라면 신약의 서신들은 전혀 쓰여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견고케 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 아기’는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먹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훈련받을 필요가 있고, 보살펴 줄 필요가 있다.

우리의 원수 사단이 있어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그 사람은 마귀의 특별한 공격대상과 관심의 대상이 된다. 야고보는 그것이 믿음의 증거라고 말하며, 그래서 그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고 말한다.(약1:2)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에 의심을 주고, 좌절시키려 애를 쓸 것임에 틀림이 없다. 마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그러나 비참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는 데는 가끔 성공을 한다. 거듭났으면서도 삶과 체험에 있어서는 불행해진 사람들이 많다. 여기에 우리는 마귀의 궤휼과 궤계에 대하여 알려주는 교리를 배워야 한다. 그래서 사도는 로마서 6,7,8장에서 죄의 전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에베소 사람들에게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휼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그 점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도록 해야 하고, 또한 회심자들이 ‘뿌리를 잘 내리고 터가 굳어져’ 믿음 안에서 견고케 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려야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진리에 대한 가장 위대한 증거는, 삶을 영위하는 그리스도인들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각 부분에서 견고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의 지성을 강하게 할 필요가 있고, 우리의 마음을 견고케 할 필요가 있다. 사도는 그들의 전인을 굳게 해주고 싶어 한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다”(13)

“첫째로” - ‘첫째로’라고 말하였으나 둘째, 셋째를 말해 나가지 않는다. 문체와 형식에 관한 한 그는 그러한 것들을 별로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면 설교할 때 형식이나 이러한 요점들도 말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고 질문할 것이다. 제 말은 형식이 우리의 이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게 되어 본질을 잊어버리는 경향에 대해 심각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한 예배가 아름다움을 가장 앞세워서는 안 된다. 예배는 진실해야 한다. 진리가 첫 번째로 온다. 만일 우리가 형식의 아름다움이나 그와 같은 것 때문에 진리를 망각한다면, 우리는 심각한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형식에 메여 있거나 고정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영의 큰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다.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보면, 언제나 그러하였음을 발견할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지독히 문체가 좋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설교를 통해서 부흥을 일으키고 정말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여러 요점과 여러 개의 전할 항목들을 가지고, 그 뿐만 아니라 운에 맞추어 무엇을 나열하려는 고집을 피우고 있다. 그러한 것들이 멋있기는 한데, 그러한 것들은 죽음의 멋처럼 보인다. 속에 살아 있는 본질이 없이 그저 생명 없는 형식뿐이라는 것이다. 이 사람 바울은 ‘첫째로’라고 말한 다음에 자기가 말한 것을 잊는 것은 영의 영역에서 살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는 어떤 작은 형식이나 다른 것에 매이지 않는다.

우리가 형식에 노예가 된 것이 아닌지. 우리는 너무나도 세련되어 있다. 너무나도 단정하다. 성령께서 갑자기 임하시게 되면 어쩌나 하고 두려운 마음이 든다. 성령께서 갑자기 임하시면, 거의 정신을 잃어 세웠던 프로그램이 잊혀지고 시간 가는 것도 모르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현대 교회가 위엄을 차리느라 죽어 있게 되거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의 도구가 되지 못할 정도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사람 바울은 그러한 위험에 빠져들지 않았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해 있고, 진리가 그 속에서 불타오르고 있고, 그 진리는 토해내어 진다. 이 사람의 서신들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그 서신들은 힘이 있고 화산처럼 능력을 뿜어낸다. 둘째, 셋째를 말하지 않는 바로 이 사람 때문에 저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내가 나의 하나님께 감사함은” - 그는 위대한 기도의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께’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나의 하나님께’라고 말하고 있다. 시편 18편에 보면 그 시편의 전반부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으로 가득차 있다. 이 점이야말로 기도에 있어서 가장 사활적인 요점이라고 확신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써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은 그저 멀리 떨어져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가까이 계시는 분이시다. 나의 하나님, 어떤 위대한 비인격적인 세력이나 힘이 아니라, 나를 도우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 점은 기도의 진수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까지 진정으로 기도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사도 요한은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말한다. 나의 하나님 바로 그것이 기도의 시작이다. 우리는 우리의 소원을 아뢰며 애걸하기 전에 그 분을 알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여러분은 그 분을 아는가? 그것이 아니고서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조차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모든 신앙의 연합’이라는 따위의 현대적인 대화에 대해서 참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진수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과는 어떠한 교제도 나누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입장에 있어서 본질적인 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제사장이다. 내가 그 분 안에 있지 않고서는, 그 분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없다’ 그 분을 아는 지식이 아니고서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와 긍휼을 얻을 수 없다’

II.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에 찬 앎이 있어야 합니다. 함부로 기도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서론에 해당되는 설명입니다. 또한 그 앎을 통하여 하나님께 로마에 있는 그리고 다른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힘을 다하여 중보기도하는 바울에 대하여 설교하고 있습니다. 
 
시편의 전반부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 점이야말로 기도에 있어서 가장 사활적인 요점이라고 저는 확신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도한다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저 멀리 떨어져 있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우 가까이 계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새 언약 안에 있으며 그것을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레미야 31장에서도 같은 진리를 발견할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 그 말씀을 자주 인용합니다. 특히 8장에서 그러합니다. 새 언약의 본질은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나의 하나님, 어떤 위대한 비인격적인 세력이나 힘이 아니라, 나를 도우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멀리 떨어져 있는 위대한 분과 같은 그러한 분이 아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이요 너희는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볼 때 그 점은 기도의 진수 자체라고 생각됩니다! "나의 하나님." 
 
기도에는 인격적인 관계, 인격적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영생에 대해서 내리신 정의가 그렇지 않습니까?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또한 기도는 함부로 하나님께 못올림이 있습니다. 담력이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10장 19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오직 그 예수의 피만이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갈 수 있으려면 오직 유일한 대제사장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아가는 자들은 지성소에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 하나님 면전에 알현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요점은 사도가 중보의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사도처럼 바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 그는 어디에선가 "모든 교회들을 위한" 염려로 눌린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 손으로 친히 천막을 만들었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고린도에서 매일 밤낮으로 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시간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을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으로 그들을 얻었습니다.
그 모든 짐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위해서, 이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 안에서 성장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 앞에 직면한 위험을 그들이 이겨나가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는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로마 사람들에 대해서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곳에서나 그는 그렇게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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