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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년 8월 9일, 칼 프레더릭 어거스트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1803-1851)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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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9일 “칼 귀츨라프, 나는 이 땅에 뿌려진 하나님의 진리의 씨가 소멸되리라고 믿지 않는다.” 오늘은 칼 프레더릭 어거스트 귀츨라프( 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 , 1803-1851)가 별세한 날입니다. 1851년 8월 9일, 우리나라를 최초로 방문했던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는 홍콩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는 선교지에서 아내를 잃고 재혼한 부인과 사별했으며, 세 번째 부인 가브리엘과 유럽여행을 마 치고 홍콩에 돌아와 갑자기 숨을 거두었습니다. 혈육 없이 죽은 귀츨라프는 결코 가여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본, 중국, 방콕, 자바, 그리고 조선에 이르기까지 믿음의 자취를 남겼으며, 상하이 앞의 귀츨라프 섬과 귀츨라프 등대, 홍콩의 귀츨라프 거리는 지금도 중국과 영국의 평화로운 관계를 위해 효과적으로 중재한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해서 가고, 그리고 다시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양선 곧 외국 선박 문제에 대해서 근대사에서 잊혀질 수 없는 커다란 공헌을 하나 남기고 떠났다. 그는 떠나기에 앞서 조선 관리들을 만나, 외국의 선박이 이 나라에 표류해 왔을 경우 그 곤경에 합당한 보호를 해주고 필수품을 공급하며……안전한 귀환을 보장해 줄 것을 간절하게 부탁한 일이 있었다. 여기 대하여 조선 관리들은 진지한 얼굴로 화답을 했던 것이다. 그런 대우를 꼭 하겠노라는 대답을 한다. 그리고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고 나선다. 그런 보호와 안전 귀환을 하고 난 다음에는 어떤 형태의 보상이나 치하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한국인의 인정이 그런 것이었다. 귀츨라프가 떠날 때 “눈물을 흘린” 이 선량한 백성의 모습이 그의 가슴 속에서 떠난 적은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이 자그마한 “협정”이 우리 근대사에서는 최초의 외교교섭으로 기록된다. [민경배, 『한국 기독교회사』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7), 141.] 귀츨라프의 이야기는 현대 교회가 기대하는 간증이 아닙니다.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