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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2월 10일,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별세,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던져진 하나의 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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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0일 “칼 바르트, 괴팅겐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면서, 개혁신학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오늘은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가 별세한 날입니다. 1968년 12월 10일 아침, 바르트는 스위스 바젤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베를린 대학과 튀빙겐 대학,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수학한 그는 자펜빌(Safenwil)에서 목회하던 중 자유주의 신학과 결별했습니다. 바르트가 저술한 로마서 주석은 칼 아담이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던져진 하나의 폭탄”이라고 부를 만큼 큰 영향을 끼쳤는데, 바르트는 이로 인해 박사 학위가 없는 상태에서 괴팅겐 대학의 교수로 초빙을 받습니다. 히틀러에 대한 충성 서약 거부로 공직에서 해임된 그는 바젤 대학의 초청을 받아 그곳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칩니다. 바르트는 미완의 대작 『교회 교의학』(13권)을 썼습니다. 첫 학기 때 바르트의 두 시간짜리 강의 제목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해설이었는데……“그는 이 문 헌이야말로 ‘종교개혁의 불안정이 교회적 안정으로 변한’ 순간의 기록이라고 이해했다.”……그 이후로도 계속된 역사적-조직신학적 강의 제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바르트는 개혁 신학의 ‘유산’을 알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다……“그 당시 나는 개혁 교회 신앙고백 문헌을 읽어 본 건 고사하고 갖고 있지도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신학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개혁 교회적이고 칼뱅주의적이었던 터라, 우리 교파만의 특수한 과제를 기쁘고도 양심적으로 이행할 수 있었다.”……“사실 나는 괴팅겐에 와서야 비로소……밤늦게까지 고되게 공부하면서, 개혁 교회 신학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하고 실질적인 비밀을 새롭게 알게 되었고, 그것과 맞붙어 씨름하게 되었다.” 바르트는 이런 공부를 통해서 점점 더 의식적인 개혁주의 신학자가 되었고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순수한 개혁주의 교리에 마음을 두게” 되었다.[Eberhard Busch, Karl Barths Lebenslauf: Nach seinen Briefen 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