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주님은 나의 최고봉 "마음을 꿰뚫는 질문(The Piercing Question)" by 오스왈드 챔버스

 (주님은 나의 최고봉 )


3월 1일 핵심을 찌르는 질문


요 21:17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지금 베드로는 아무 것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참조, 마 26:33-35). 자연적 개별성은 호언장담합니다. 그러나 인격성의 사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뼈 아픈 질문에 의해서 발견됩니다. 베드로는 일반 자연인들이 훌륭한 사람을 사랑하는 그러한 차원에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기질적인 사랑으로서 개별성까지 깊게 닿을 수 있지만 인격의 중심부까지는 닿지 못합니다. (역자 주 - 개별성(individuality)이란 각 사람을 구별시키는 각 개인의 특이성을 말합니다. 개별성은 독자성 또는 독립성과 연결됩니다. 역자가 “개성”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개별성”이라고 쓴 이유는 개성은 개발될 수 있는 것이지만 개별성은 타고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인격의 중심부 또는 인격적인 본성, 또는 인격성(personality)은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어 오직 인간에게만 부여된 특성을 말합니다. 이 단어는 영혼 또는 인격과 대체될 수 있는 단어지만 한글 “인격”이라는 단어는 성품과 혼동될 수 있기에 역자는 인격성 또는 인격적인 본성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죄성과는 무관한 것으로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을 의미합니다.) 참된 사랑은 결코 호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는 자마다…” 라고 하셨는데, 이는 말로만 사랑을 고백하지 말고 모든 행위로 고백하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간교함에 대하여 아파한 적이 없다면 아직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역사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가 주는 그 어떤 아픔보다 우리를 더 아프게 합니다. 오히려 죄는 감각을 무디게 하기 때문에 점점 아픔이 줄어듭니다. 주님의 질문은 우리의 감정을 더욱 예민하게 하여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양심적인 차원 뿐만 아니라 가장 깊은 인격적 차원까지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심지어 혼과 영을 찔러 쪼개기까지 하므로 거짓이란 있을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질문을 감상적으로 받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실 때는 그 아픔이 너무나 커서 당신은 멋진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 아픔이 너무 커서, 주님의 말씀에 합당하지 않은 모든 것들은 고통을 당합니다. 주님의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고통이 임하는 것은 결코 실수나 우연일 수 없습니다. 아픔의 그 순간이 사실은 위대한 계시의 순간인 것입니다.



3월1일 마음을 꿰뚫는 질문 The Piercing Question

The Piercing Question By Oswald Chambers


Do you love Me? —John 21:17


Peter’s response to this piercing question is considerably different from the bold defiance he exhibited only a few days before when he declared, “Even if I have to die with You, I will not deny You!” (Matthew 26:35; also see Matthew 26:33-34). Our natural individuality, or our natural self, boldly speaks out and declares its feelings. But the true love within our inner spiritual self can be discovered only by experiencing the hurt of this question of Jesus Christ. Peter loved Jesus in the way any natural man loves a good person. Yet that is nothing but emotional love. It may reach deeply into our natural self, but it never penetrates to the spirit of a person. True love never simply declares itself. Jesus said, “Whoever confesses Me before men [that is, confesses his love by everything he does, not merely by his words], him the Son of Man also will confess before the angels of God” (Luke 12:8).


Unless we are experiencing the hurt of facing every deception about ourselves, we have hindered the work of the Word of God in our lives. The Word of God inflicts hurt on us more than sin ever could, because sin dulls our senses. But this question of the Lord intensifies our sensitivities to the point that this hurt produced by Jesus is the most exquisite pain conceivable. It hurts not only on the natural level, but also on the deeper spiritual level. “For the Word of God is living and powerful…, piercing even to the division of soul and spirit…”— to the point that no deception can remain (Hebrews 4:12). When the Lord asks us this question, it is impossible to think and respond properly, because when the Lord speaks directly to us, the pain is too intense. It causes such a tremendous hurt that any part of our life which may be out of line with His will can feel the pain. There is never any mistaking the pain of the Lord’s Word by His children, but the moment that pain is felt is the very moment at which God reveals His truth to us.

Jesus: The Way, The Truth, & The Life: John 21:15-17 - Peter is restored  publicly by Jesus after denying Him three times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복음21:17)


베드로는 이제 아무것도 선언하지 않습니다.(마26:33~34) 육신적인 인간은 맹세하고 선언합니다. 우리의 인격적인 본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질문에 찔림을 받을 때 드러납니다. 베드로는 육신적인 인간의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적인 사랑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사랑은 자아의 깊은 데까지는 미칠 수 있지만 영혼까지는 미치지 못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아무것도 선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즉 말로써만 아니라 그가 하는 모든 일로써 고백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속여 온 온갖 눈가림들을 정면으로 마주치는 아픔을 겪지 않는다면,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보다 더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죄는 우리의 감각을 둔화시킬 뿐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아픔은 우리가 극도의 고통을 받을 때까지 우리 마음을 예민하게 합니다. 그 말씀은 자연적인 방법뿐 아니라 오묘하고 개인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영과 혼을 찔러 쪼개기까지 하므로 어떤 거짓도 우리 안에 남아 있지 못합니다. 주님의 질문을 감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주님이 직접 말씀하시면 아픔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그럴듯한 말을 늘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 아픔은 매우 커서, 주님의 뜻에 맞지 않는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이 고통을 겪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은 그분의 자녀는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 아픔의 순간은 위대한 계시의 시작입니다.

<마태복음 26:33~35>


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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