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s he who was spoken of through the prophet Isaiah: "A voice of one calling in the desert, 'Prepare the way for the Lord, make straight paths for him.' "

마태복음3:1-6

[새번역]
1.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유대 광야에서 선포하여
2. 말하기를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였다.
3. 이 사람을 두고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4.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었다. 그의 식물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5. 그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부근 사람들이 다 요한에게로 나아가서,
6.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며,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NIV]
1. In those days John the Baptist came, preaching in the Desert of Judea
2. and saying,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near."
3. This is he who was spoken of through the prophet Isaiah: "A voice of one calling in the desert, 'Prepare the way for the Lord, make straight paths for him.' "
4. John's clothes were made of camel's hair, and he had a leather belt around his waist. His food was locusts and wild honey.
5. People went out to him from Jerusalem and all Judea and the whole region of the Jordan.
6. Confessing their sins, they were baptized by him in the Jordan River.

세례요한의 출현 (마태복음 3:1-6)

여기에는 복음 시대를 알리는 여명이었던 세례 요한의 세례와 설교에 관한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Ⅰ. 세례 요한이 출현한 시기. "그 때에," 또는 "그 후에"란 말은 예수님의 유아 시절까지만을 취급한 앞장의 사건들보다 훨씬 후에란 뜻이다. 또한 "그 때에"란 말은 하나님께서 복음이 시작되는 때로 정하신 시기, 즉 "때가 찬" 것을 의미한다. 구약에서도 가끔 이러한 의미로 "그 때에"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로써 다니엘이 예언한 마지막 "한 이레"가, 그 중에서도 메시야께서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그 언약을 굳게 하실"(단 9:27) 마지막 이레의 후반이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의 출현은 모두 때를 맞추어 일어난 것들이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 관하여 출생시와 출생 전에 영광스러운 일들이 언급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그들의 어린 시절에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권능이 그들과 함께 한다는 특별한 징조들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기대되지만 사실은 전혀 그 반대였다. 그리스도가 열 두 살 되시던 해에 성전에서 박사들과 논쟁하시던 것을 제외하고는 요한이나 그리스도에게 서른 살이 되기까지 특별한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다. 그들의 청소년기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으며 그들 생애의 대부분도 모두 어두움과 불명료함(tempus adelon)에 싸여 있다. 이들의 유년시절은 마치 상속자가 비록 후에 그가 "모든 것의 주인"이 되기는 할지라도 나이가 차기 전에는 다른 종들과 다름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외견상 다른 아이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이것은 다음의 사실들을 알려 준다.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하나님으로 역사 하실 때에도 "스스로 숨어 계신다"(사 45:15)는 것을 보여 준다. 야곱은 이러한 하나님에 대해 "여호와께서 이 곳에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창 28:16). 우리의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가에서 내다보시기 오래 전에"(아 2:9) 벽 저편에서 계신다.

2. 우리의 믿음은 주로 그리스도의 직무와 사업에 염두를 두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직무와 사업에서는 그의 권능을 "나타내시지만", 그의 인격에서는 "숨기시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분(God-man)이셨다. 그러나 그가 선지자로 나타나시기까지는 그가 하신 말씀과 행하신 것에 대한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너희는 그를 들을 지어다."

3. 젊은 사람은 비록 자격을 완전히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공적인 업무에 자신을 내세워서는 안 되며, 겸손하고 사양하는 마음, 즉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해야"한다.
마태는 세례 요한의 잉태와 출생에 대해 누가가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마치 광야에서 외치기 위하여 구름에서 떨어져 내려온 것처럼 성년이 된 세례 요한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하고 있다. 3백년 이상 이스라엘 백성은 선지자를 보지 못하였다. 그러한 불빛이 오랫동안 꺼져 있었기 때문에 위대한 선지자로 오실 그분이 그토록 기다려졌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세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선지자나 선지자 행세를 하는 자까지도 없었다. 따라서 말라기 선지자는 구약의 어떤 선지자보다 더 직접적으로 세례 요한을 가리켜 "내가 내 사자를 보내노니"(말 3:1)라고 말씀하였다.

Ⅱ. 세례 요한이 맨 처음 출현한 곳은 "유대 광야"였다. 유대 광야는 전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다. 이 광야에는 여호수아 15장 61, 62절에 그 이름이 나타나는 대로 여섯 성읍과 그 고을들이 있었다. 세례 요한은 이 성읍들과 마을에서 전파하였다. 그 이유는 그가 헤브론 가까이에서 출생하여 그 때까지 이 부근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의 활동 무대는 그가 오랫동안 명상으로 시간을 보냈던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요한은 그가 이스라엘에 나타난 후에도 그가 맡은 일과 어긋나지 않는 한 조용히 지내기를 좋아했음을 보여 준다.

"주의 말씀"이 여기 "광야에서" 요한을 찾아내었다. 어떠한 곳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찾아오지 못할 만큼 멀리 떨어진 곳은 없으며, 오히려 성도들이 하늘과 더불어 가장 신령한 교통을 가지게 되는 것은 이 세상의 소란함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때임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다윗이 시편 63편을 기록했던 곳도 "유대 광야"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하나님과 가졌던 신령한 교통에 대해 많이 언급하고 있다(호 2:14). 율법이 주어진 곳도 광야였으며, "구약"과 마찬가지로 "신약의 이스라엘"이 먼저 광야에 발견되었으며 그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교훈 하셨다"(신 32:10).

세례 요한은 아론의 반차를 쫓은 제사장이었으나 광야에서 전파하는 일을 하였을 뿐, 성전에서 결코 제사장 직무를 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론의 자손이 아닌 그리스도께서는 가끔 성전에 나타나셨으며 마치 권세를 가진 자처럼 성전에 앉아 계시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말라기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너희가 찾는 주께서 홀연히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라"(말 3:1)고 하였다. 이 말씀은 그의 길을 예비하기 위한 사자가 성전에 나타나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아론의 제사장 직분을 밀어내어 광야로 쫓아낼 것을 암시한다.

복음이 광야에서 시작된 것은 광야와 같은 이방 세계에 대한 위로를 의미한바 이제 "내가 사막에 백향목을 심을 것이며"(사 41:18, 19), "광야가 열매맺는 땅이 될 것이며"(사 32:15), "광야가 기뻐할 것이라"(사 35:1)는 예언들이 분명히 성취되었다. 70인역에는 "요단의 광야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곳은 바로 요한이 전파하던 광야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는 스스로를 "은둔자"라고 부르면서 세례 요한을 따르는 행세를 한다. 그러나 성경은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고 해도 가지 말라"(마 24:26)고 말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따르는 자들을 "광야로 유혹하여" 끌고간 자도 있었다(행 21:38).

Ⅲ. 그의 설교. 세례요한은 전파하는 것을 그의 임무로 삼았다. 그는 싸우거나 논쟁하면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전파하면서"(1절)나타났다. 왜냐하면 "전도의 어리석음"에 의해 세워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1. 그가 전파한 내용은 "회개하라"는 것이었다(2절). 그는 이것을 "유대 땅"에서, 소위 "유대인"이라고 하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던 자들 가운데서 전파하였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회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말씀을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라 유대광야, 즉 평범한 시골 사람들 가운데서 전파하였다. 왜냐하면 스스로 유혹의 길을 완전히 벗어나고 도시의 허영과 악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무죄할 수는 없으며, 회개함으로 깨끗함을 받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의 임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죄를 "회개케 하기"위한 것이었다. "회개하라"(Metanoeite)는 말은 "스스로를 생각해 보라"는 뜻이며 처음 생각의 오류를 시정하기 위하여 두 번 생각해 보라, 즉 "되씹어 생각해 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네 생활을 곰곰히 생각해 보고 마음을 고치라. 네 생각이 잘못되었으니 다시 잘 생각해보고 고치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참된 회개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죄와 성결, 이 세상과 저 세상에 대해 그전에 가졌던 것과는 "다른 생각들"을 갖게 되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러한 방향으로 영향을 받게 된다. "마음"의 변화는 "생활"의 변화를 가져온다. 과거의 잘못된 행실에 대해 진정으로 뉘우치는 자는 더 이상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다. 이러한 회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반드시 수행해야 할 의무이며(행 17:30),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의 위로를 받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준비와 자격이다. 만일 사람의 마음의 범죄로 말미암아 악해지고 더럽혀지지 않았더라면 이와 같이 고통스러운 예비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도 인간의 마음에 주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범죄하였으므로 편안해지기 전에 먼저 고통을 받아야 하며, 안식을 얻기 전에 수고해야만 하였다. 아픈 상처는 찾아내어야 하며, 그렇지 않고서는 치료받을 수 없다. "나는 상하게 한 후에, 낫게 하는 자니라."

2. 세례요한은 이러한 외침의 내용을 강화하기 위하여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일시적인 국가적 자비를 얻기 위해서나, 또는 일시적인 국가적 심판을 면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요구 내용은 같으나 그 이유는 새롭고 순전히 복음적인 것이었다. 이제 여기에서는 인간을 사회적 또는 정치적인 자격에서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자격에서 고려되고 있다.
여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한 은혜, 계약의 복음적인 성취, 또는 믿는 자들에 대한 천국의 개방을 의미한다. 이 "왕국"의 주권자는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는 즐거움으로 그의 충실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 이 왕국은 이 세상의 왕국이 아니라 하늘의 왕국이며, 영적인 왕국이다. 그 근원도 하늘이며 그것이 지향하는 곳도 하늘이다. 요한은 이 천국이 "가까왔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그때 천국은 바로 문 앞에 있었으며 성령의 부르심과 복음적 은혜의 풍성함이 완전히 드러남에 의해 우리에게 임하게 되었다.



(1) "가까웠다"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케 하는 가장 큰 "자극제"이다. "죄에 대하여" 또한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은 없다. 이러한 것이 복음적인 회개이며, 이것은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그의 사랑을 느낌으로써, 그를 통한 사죄와 용서에 대한 소망에서 비롯된다. 친절은 남을 정복하며, 겸손케 하고, 녹아지게 한다. 이러한 은혜와 이러한 천국의 법과 사랑을 저버리고 범죄한 나는 얼마나 몹쓸 인간인가!

(2) "천국이 가까왔다"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케 하는 가장 큰 "격려"가 된다. "회개하라, 그러면 네 회개로 네 죄가 사하여질 것이다. 의무의 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러면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비의 길에서 너에게 돌이키시리라." 사죄의 선언은 전에도 도망하고 피했던 죄인을 발견하여 데리고 온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한 사람의 끈과 사랑의 띠로 회개하도록 이끌려진다.
Ⅳ. 세례 요한에게서 성취된 성경의 예언(3절). 세례 요한은 복음 시대와 복음 은혜를 가리키는 가장 복음적인 이사야서의 예언의 첫머리에 언급된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이사야 40장 3,4절을 보라. 여기에서 세례 요한은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1.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다. 세례 요한은 그 자신 스스로가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요 1:23). "나는 소리이다." 이것이 전부였다.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으며, 사람이 그 목소리로 그의 마음을 알게 하듯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세례 요한에 의해 알리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와 같이 받아들여져야 한다(살전 2:13). 바울이 무엇이며 아볼로가 무엇인가? 그들은 한낮 소리에 불과하였다. 요한은 깨우쳐 주는 크게 "외치는 자의 소리"(fwnh bowntoj)라고 불리워진다. 그리스도는 '말씀"이라고 불리우셨는데, 이것은 분명하고 명료해서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소리"였던 세례 요한은 사람들을 일깨웠고, 그 다음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계시록(14:12)에서 보는 대로 그들을 가르치셨다. 즉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레 소리와도 같은 소리가 거문고 타는 소리와 같이 들렸던 것이다"(계 14:3).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삼손의 어머니는 "강한 독주"를 마시지 않았음에도 삼손은 "강한 사람"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의 아버지는 형벌로 말미암아 벙어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었다. 외치는 자의 소리가 벙어리 아버지에게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권능이 하나님께 있으며 사람에게 있지 않음을" 보여 준다.

2. 세례 요한이 맡은 임무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는 것"이었다. 세례요한이 태어나기 전에 그가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주를 위해 한 백성을 예비케 할 것이라는 사실이 예언되었다(눅 1:17). 그는 또한 그리스도의 왕국의 성격을 암시했던 사자였다. 왜냐하면 그는 화려한 옷으로 정장을 한 선구자로서가 아니라 운둔자의 검소한 차림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람들이 지나가기 전에는 그 길을 깨끗이 다듬기 위해 관리들이 파송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였다.

(1) 세례 요한은 그 자신이 그 당시의 세대에 살던 사람들 가운데서 주의 길을 예비하였다. 이 당시 유대인의 교회와 국가에 있어서 모든 것은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있었다. 신앙심은 크게 쇠퇴하였고, 종교의 생명력은 장로들의 유전과 규범에 의해 타락하고 무기력해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위선적인 인물들이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지식과 권력의 열쇠를 그 허리춤에 차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백성들은 유대인의 특권을 극도로 자랑했으며, 그들 자신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을 확신하고 죄를 깨닫지 못하였다. 또한 그들은 겸손케 하기 위해 근래에 로마의 속국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겸손해지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말라기 선지자 시대의 사람들처럼 방자하고 교만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반박하고 부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제 세례 요한은 이러한 산들을 평탄케 하기 위해, 즉 그들 자신이 품고 있는 교만한 마음을 끌어내리고 그들 자신의 죄를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훈이 좀더 잘 받아들여지고 효과적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2) 세례 요한이 가르쳤던 회개와 겸손의 교훈은 그 당시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 있어서도 꼭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로 하여금 영혼 속에 들어오시게 하고 "마음을 낮추어" 그를 다윗의 자손(삼하 19:14)으로 영접하기 위해서는 해야할 많은 일들이 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자신의 의로서는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이 없다. 장애물은 치워 없애기 전에는 언제나 장애가 되기 마련이다. 이와 같이 편견은 제거해야 하며, 교만한 생각은 낮추어야 하며, 또한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해야한다. 영광의 왕이 들어오시기 위해 영원한 문들이 열리기 전에 먼저 놋쇠문들은 깨뜨러져야 하며, 철 빗장은 끊어져야 한다. 죄와 사탄의 길은 "굽으러진 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위해 길을 예비하려면 그 길들이 "곧바르게"되어야 한다(히 12:13).
Ⅴ. 세례 요한의 복장과 모습, 그리고 그의 생활 방식(4절). 메시야를 이 세상의 일시적인 왕으로 기대했던 유대인들은 그의 선구자야말로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옷차림을 갖추고 올 것이며, 또한 그가 타고 올 수레도 역시 굉장할 것으로 추측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그는 "주님이 보시기에는 큰 자"였을 것이나 이 세상의 눈에는 천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리스도 자신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 왕국의 영광은 영적인 것이며, 그 왕국의 백성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가난하게 되고 멸시받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의 영광과 즐거움과 부귀를 다른 세상에서 얻는다.

1. 그의 옷차림은 검소하였다.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끈을 허리에 띠었다." 그는 서기관들처럼 "긴 옷"을 입지 않았고, 왕궁에 있는 자들처럼 "부드러운 옷"을 입지도 않았다. 그는 시골의 촌뜨기가 입는 옷을 입었다. 왜냐하면 그는 시골에서 살았고 그의 모습이나 습관은 이런 환경에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이 그의 섭리 가운데서 우리로 하여금 처하게 하신 장소와 환경에 우리 자신을 적응시키는 것이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요한이 이러한 옷차림으로 나타난 것은,

(1) 그는 야곱과 같이 "평범한 사람"이며, 이 세상과 또한 이 세상의 기쁨과 즐거운 것들에 대해서는 죽은 자와 같음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이 겸손한"자는 그 겸손을 옷차림에 대한 성스러운 무관심에 의해 나타내 보여야 하며, 옷 입은 것으로 자신을 꾸미지 말고, 다른 사람을 옷차림으로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2) 세례 요한의 이러한 옷차림은 또한 그가 선지자임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선지자들은 금욕을 행하는 자로서 거친 옷(털옷)을 입었기 때문이었다(슥 3:4). 또한 이러한 옷차림은 특별히 그가 약속된 엘리야임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엘리야는 "털이 많이 난 사람"이었으며(어떤 사람들은 이 말이 엘리야가 털옷을 입었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또한 허리에 가죽끈을 매었다는 사실이 성경 가운데 특별히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왕하 1:8). 세례 요한은 금욕생활에 있어서 엘리야에게 어떤 면에서도 뒤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이 세례 요한은 "다시 오리라고 한 엘리야"임을 알 수 있다.

(3) 이러한 옷차림은 또한 그가 마음의 결심이 굳은 사람임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그의 허리띠는 그 당시 보통 쓰였던 "좋은" 것이 아니라 "강한" 가죽끈이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 "허리에 띠를 띠고 있는" 것을 주님께서 보게 될 그 종은 복있는 종이다(눅 12:35, 벧전 1:13).

2. 그의 음식 역시 검소한 것이었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다. 이것은 그가 이런 것 외에는 결코 다른 음식을 먹지 않는 것처럼 보일는지는 모르나 그가 한적한 곳에 가서 오랫동안 명상을 계속할 때에는 이런 종류의 음식들로 흔히 배를 채웠기 때문이었다.
"메뚜기"는 나는 곤충의 일종이며 좋은 음식물이며, 구약에서도 정결한 음식으로 규정되어 먹도록 허용되었다(레 11:22). 메뚜기는 요리하는데 번거로운 손질이 필요 없고 소화가 잘되었기 때문에 나이가 늙어 몸이 쇠약해지면 "메뚜기도 위장에 부담이 된다"(전 12:5)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석청"은 가나안 지방에 풍부했던 야생풀이었다(삼상 14:26). 석청은 방울로 떨어질 때 즉시 거두어들이든지, 아니면 사람들이 돌보거나 보살핀 것이 아니고 벌들이 나무나 바위의 움푹한 곳에 스스로 모아둔 것을 거두거나 한다. 이것은 그가 배불리 먹지 못하고 모자란 듯이 먹었음을 말해 준다. 메뚜기와 석청으로 배부르게 먹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세례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마 11:18).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 호기심이나 체면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영적인 일들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규칙적인 식사를 할 겨를이 거의 없었다.



(1) 이 사실은 그가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에 관하여 전파했던 교훈과 일치한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애통하고 억제하도록 촉구하는 임무를 맡은 자는 모름지기 먼저 그 자신이 진지하고 자기 부정적이며 금욕적이고 이 세상을 멸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는 외침이 필요할 정도로 악했던 그 당시 유대의 죄악에 대해 깊이 느낀 감정을 이와 같이 나타내 보였다. 그에게는 모든 날이 "금식하는 날"이었다.

(2) 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의 그의 임무와 일치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생활은 그가 "천국"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았으며 그 권능을 체험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이 신적이며 영적인 즐거움을 알게 된 자는 감각적인 모든 즐거움과 장식을 한낮 거룩한 무관심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는 그들이 이보다 더 좋은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모본을 보임으로써 그는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길을 예비하였다. 이와 같이 이 세상과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의 헛됨을 확신하는 것이 마음속에 천국을 맞아들이기 위한 준비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도다."
Ⅵ. 그를 모시고 따랐던 사람들(5절).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가 다 그에게 나아왔다." 큰 무리가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그에게로 나아왔다. 각계 각층의 사람들, 즉 남자와 여자, 청년과 노인, 부자와 가난한 자, 바리새인들과 세리들, 이 모든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천국"을 전파한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그들이 소문으로만 들었던 많은 것을 직접 듣기 위해 그에게로 나아왔다.

1.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존경심을 가지고 그를 따랐다는 것은 세례 요한에게 주어진 실로 큰 영광이었다. 대개 이와 같이 영광의 그림자조차 좇지 않는 자에게 실로 큰 영광이 주어진다. 또한 금욕적인 생활을 하고 겸손하고 자기를 부정하며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는 존경을 받는다. 사람들은 이러한 분들에 대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남모르는 가치와 존경을 부여한다.

2. 또한 이것은 세례 요한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몰려와 "천국으로 들어가려고"하기 시작하였다(눅 16:16). 복음이 밝아오는 아침의 "태에서" "젊음의 이슬이" 내리는 것을 보며(시 110:3) 이렇게 많은 고기가 모인 곳에 그물이 던져지는 것을 보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3. 이것은 이 때가 바로 어떤 위대하신 분이 나타날 시기였다는 증거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곧 나타나리라고 생각했다(눅 19:11). 그래서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에 나타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는 너무도 다른 생활을 하면서 전파하게 되자 그들은 그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서슴없이 말하였으며(눅 3:15), 이것이 그처럼 많은 군중으로 하여금 세례 요한의 주위로 구름처럼 몰려들게 하였던 것이다.

4. 요한에게서 어떤 유익을 얻으려는 자는 그의 책망을 달게 받으면서 광야로 "나아가야만"한다. 이와 같이 참된 말씀의 젖을 사모하는 자는 그들에게 가져다주지 않아도 그들 스스로가 그것을 찾아낼 것이다. 또한 회개의 가르침을 배우려고 하는 자는 이 세상의 번거로움을 떠나 조용한 곳으로 "나아가야만"한다.

5. 요한의 세례를 받으러 온 자들은 많았지만 참으로 그것을 고수한 자는 소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대와 예루살렘 주변에서 그리스도께서 냉대를 받으셨음을 생각해 보라. 이와 같이 자진하여 듣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참된 신자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의하라. 호기심의 고상하고 다양성 있는 제스츄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좋은 설교를 듣기도 하며, 그 설교에 잠시 동안 도취되기도 하나 그 설교의 권능에는 결코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겔 33:31, 32).
Ⅶ.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맞아들인 의식(6절). 그의 교훈을 받아들이고 그의 가르침에 복종하게 된 자들은 요단강에서 그에 의해 "세례를 받았으며," 이로써 그들의 회개와 메시야의 왕국이 가까웠다는 신앙을 고백하였다.

1. 그들은 "죄를 고백"함으로써 자신들이 회개를 입증하였다. 그들은 아마 세례 요한에게는 일반적인 고백, 즉 그들은 죄인이며 죄에 오염되어 있고 그것을 정결케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고백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들이 특별히 지은 죄를 조목별로 고백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범죄 하였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그들 자신을 "의롭게 하는 것"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으나, 요한은 그들에게 자신들을 "정죄할 것"과 전에 늘 습관적으로 했던 것처럼 일년에 단 한 번, 대속죄일에 온 이스라엘이 모여 그들의 죄를 고백하던 일반적인 회개에 머물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도사린 악한 죄들을 하나 하나 열거하면서 고백할 것을 가르쳤다. 이와 같이 화평과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죄를 참회하는 고백이 요구되며 또한 슬픔과 수치로 겸손해져서 그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자들만이 그리스도를 그들의 의(義)의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요일 1:9).

2. 그들은 이제 "임박한 천국"의 은혜에 대해 세례로써 보증을 받았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불의에서부터 그들을 "깨끗게 하실" 것이라는 표로 물로써 그들을 씻었다.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관례에 의하면, 개종자들을 받아들일 때, 특히 "복음의 의로 난 개종자"들처럼 모세의 율법을 행할 필요가 없고 할례를 받지 않는 개종자들을 그들의 종교 안으로 받아들일 때는 세례를 행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세례 요한이 베푼 세례는 지도자로 추대된 탁월한 종교심을 가진 사람들이 제자들을 받아 들일 때에 행한 세례와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세례 요한의 세례에 대해 "그것이 하늘로부터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라고 질문하신 것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베푼 세례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세례 요한은 이 관례를 따랐으나 그의 세례는 하늘로부터 온 것이며, 그것이 "회개의 세례"(행 19:4)였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세례들과 구별된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고전 10:2). "의식적 예법"은 여러 가지의 "씻는 것이나 세례"에 있었다(히 9:10). 그러나 요한의 세례는 치료하는 율법, 즉 회개와 신앙의 법에 관계된다. 그는 요단강, 즉 이스라엘이 통과했고 나아만이 치유함을 받았던 그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아마도 처음부터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 것이 아니라 후일에 그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요단강으로 옮겨갔을 것이다. 그는 또한 세례를 베풀어줌으로써 그들이 종사하던 직업에 따라 경건한 생활을 하도록 강력히 촉구하였다. 죄의 고백은 언제나 다시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은혜의 힘에 의한 거룩한 결심이 수반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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