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 데이비스 선교사(Joseph Henry Davis, 1856~1890) 조선에 뿌려진 두 번째 한 알의 밀알

 조선에 뿌려진 두 번째 한 알의 밀알 데이비스 선교사

              Joseph Henry Davis 1856~1890           *첫 번째는 토마스 선교사


◑간략한 역사


조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는

이 분은 호주출신으로 조선에 제일 먼저 왔던 분이다.


데이비스는 호주 멜버른 출신인데, 40일간 항해를 끝내고,

1889.10.02. 일본을 거쳐 부산으로 입국했다. 당시 33세였다.

(그는 누나 메리 데이비스 Miss Mary T. Davies, 1853-1941 와 함께 입국했다.)


당시 모든 선교사는 처음 도착하는 곳이 부산이었다.

왜냐하면 배를 타고 오는데, 일본을 경유해서 오니까,

일본에서 부산을 경유, 제물포 (인천) 도착이 된다.


부산에 처음 왔던 데이비스 선교사는, 부산에서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

그렇지만 먼저 서울에 올라가서, 5개월동안 우리 말을 배운다.


그래서 5개월 후에, 그는 우리 말로 더듬거리며 설교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부산 경남 지역에 선교하기 위해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서 전도하며 내려오는데,

1890년 3월 14일 서울을 떠나, 20일을 걸어서, 4월4일에 부산에 도착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바로 그 다음날, 4월 5일 날 소천하셨다.


그래서 ‘토마스 선교사’가 조선에 뿌려진 첫 번째 한 알의 밀알이라면,

‘데이비스 선교사’는, 조선에 뿌려진 두 번째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사망 원인은, 수많은 마을을 거쳐서 내려오는 사이에,

특유의 열정으로, 열심히 마을마다 들러서 전도하시다가

전염병이 발생한 마을에도, 들리신 것이다.

그래서 천연두와 폐렴에 걸려서, 소천 직전 5일 동안 아무것도 못 드신 것이다.


1890년, 4월 5일 오후 1시경 데이비스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부산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이 일에 충격 받은 누나 메리 데이비스는 (당시 서울에 남아 있었음) 호주로 철수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으로 신비한 방법으로 역사하셨다.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6개월 만에 순교한 데이비스 선교사 소식이 알려지면서,

호주에서 대거 ‘데이비스 선교사를 뒤따르는 후배 선교사’들이 자원한 것이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알이,

그 후에, 해방 전까지 78명, 해방 후까지 약 120명의 호주 선교사가,

대거 한국으로 들어오는, 큰 열매를 낳았던 것이다.  


그래서 특히 호주 선교사들은,

그 후에도 부산 경남 지역에서만 주로 활동했다.


그 이유는, ‘부산에 오자마자 하루 만에 돌아가신 데이비스 선교사를 추모하며,

데이비스 선교사가 죽은 부산에서 사역하자’는

어떤 정신적 전통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국 선교사들은 '지역분배'를 할 때, 부산경남지역을 호주 선교회에 일임했다.)

 

그래서 데이비스 선교사는, 자기 혼자서는 결코 해내지 못할 일을

수 십 배로, 그의 후배 선교사들이 해 내는

놀라운 <한 알의 밀알>이 되었던 것이다.


1891년부터, 부산 경남은, 호주 선교사들이 대거 입국하면서,

호주선교활동의 큰 부흥을 이룬다.


이때 맥카이 선교사도 들어오는데,

맥케이 선교사의 부인이, 부산에 오자마자 3개월만에 또 소천하셨다.

이 분도, 데이비스 선교사와 함께, 부산에 묻히셨다.


그들이 이 땅에서 순교한지 120년만에,

데이비스 선교사, 맥카이 선교사 부인 등의 묘지가 경남 창원시에 복원되었다.

그리고 거기에 <경남 선교 120년 기념관>을 만들었다.


*이것은 데이비스 선교사가 1889년에 입국한 것을 시발로 120년 만에,

 2009년 경남 창원시에 세워진 기념관이요, 복원 묘지이다.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                             메리 데이비스와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 남매



◑호주에서 온 첫 선교사 데이비스  (자세한 역사)


이상규교수님 글 스크랩


호주 빅토리아장로교가 파송한 최초의 한국 선교사이자

부산, 경남지방 선교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첫 선교사는

조셉 헨리 데이비스(Rev. Joseph Henry Davies, 1856-1890)였다.


호주장로교회는 미국 북장로교회의 첫 한국선교사였던 알렌(Dr. H. N. Allen)이

입국한지 5년 후인 1889년 10월 헨리 데이비스목사와

그의 누나 메리 데이비스(Miss Mary T. Davies, 1853-1941)를 한국에 파송하였는데,

이것은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의 시작이었다.


데이비스의 내한은 전적으로 데이비스의 자신의 결단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는 호주의 영국교회선교회(CMS, Church Missionary Society)의 파송을 받아

인도에서 사역한 일이 있어, 다시 인도로 가기를 원했으나


중국 푸초(福州)지방에서 선교하던 영국교회 선교회 소속 선교사

월푸(John R. Wolfe)의 한국선교에 대한 호소를 듣고

그의 누이 메리(Mary Davies)와 함께 한국선교를 자원하게 된 것이다.


19세기 말인 1880년대 한국은 극동의 고집스런 나라였고,

외국과의 모든 활동이 단절된 ‘은둔의 나라’(Hermit Kingdom)이었다.


1876년 개항과 더불어 쇄국정책이 파기되고,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 이후

서방국가들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시작했으나

아직도 오랜 전통의 굴레 속에서 반(反) 외세적 성향이 강했다.


특히 선교의 자유가 공적으로 인정되기 이전이었으므로

빅토리아 장로교회는 한국선교의 필요성은 인정했으나

현실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데이비스는 한국선교를 자원하였고,

그의 짧은 기간 동안의 사역과 갑작스런 죽음은

결과적으로 호주교회의 한국선교를 <불 붙이는> 하는 동력이 되었다.


1. 출생 및 성장 배경


조셉 헨리 데이비스(이하 데이비스)는

1856년 8월 22일 뉴질랜드의 왕가라이(Wangarai)에서

9남 3녀 중 차남으로 출생하였고,

그가 4살 때인 1860년 부모를 따라 호주 멜버른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부모님은 “플리머스 형제단(Plymouth Brethren)"에 속한

매우 경건하고도 열심 있는 신앙인이었다.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은 자녀들의 생애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이 분명하다.

그의 12남매 중(장남은 어린 나이에 죽었음) 4사람,

곧 메리(Mary, 1853-1941)와 조셉 데이비스가 한국 선교사로,

동생 타보르(Tabor)와 사라(Sarah)가 인도 선교사로 자원했고,

존(John)이 장로교회 목사가 된 것만 보아도 그렇다.


데이비스의 동생이었던 존의 기록에 따르면

조셉은 이미 11살 때 신앙이 확고한 고백을 가졌고,

그 후 계속하여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며,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살았다고 술회하였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데이비스 자신의 표현대로

“어릴 적부터” 선교사로서의 생애를 결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아버지는 조셉이 겨우 12살 때 세상을 떠났고,

그의 어머니 또한 병약한 상태였으므로

그는 이때부터 대가족을 이끌어가야 하는 힘겨운 임무가 부과되었다.


그는 이미 11살 때부터 아버지의 법률사무소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으므로

아버지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며 법률서기로 일하면서 가족을 부양하였고,

이름 그대로 주경야독의 젊은 날들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에도 조셉에게는 복음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았다.

후일의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법률관계 직종이 유익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그는

법률서기직을 그만두고 당시 멜버른의 대표적인 남자 학교였던

투락 칼리지(Toorak College)의 교사로 일하면서 멜버른대학교 문과에 등록하였다.


대학 재학중이던 1876년 곧 그의 나이 20세 때 직접적으로 복음을 위해 일할 목적으로

호주 CMS(Church Missionary Society)소속 인도 선교사로 자원하였다.

이것은 선교사로서 그의 생애의 시작이었다.


그의 이와 같은 결단에는, 자기 자신의 강한 신앙적 신념도 있었지만,

직접적으로는 그의 누이동생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그의 여동생 사라는 아직 10대 소녀에 지나지 않았으나

1875년 남부 인도의 벨로레(Vellore)에 CMS선교사로 파송됨으로써

인도에 파송된 호주 역사상 최초의 여선교사가 되었다.


조셉 데이비스는, 그의 동생으로부터 인도에 선교사가 매우 부족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인도로 향했던 것이다.

이때를 전후하여 데이비스의 가족들은 오랫동안 몸담아 왔던 플리머스형제단을 떠나

코필드(Caufield)에 위치한 성공회(The Church of England) 소속인

성 메리교회(St. Mary)로 이적한 것으로 보인다.


인도에서의 그의 사역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결정적인 문제는 그의 건강이었다.

건강의 악화로 더 이상 선교지에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자

그는 결국 선교사로서 우선 합당한 자질과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은 채

1878년 5월 21일 멜버른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인도에서 보낸 21개월간의 사역은

앞으로의 그의 생애를 위한 중요한 교훈을 남겨준 것이다.


2. 대학 교육과 교육 사업


멜버른으로 돌아온 조셉 데이비스는 멜버른 대학에 등록하여

헬라어와 라틴어를 공부하였고,

제2학년 과정을 마칠 때는 고전어 부분 특별상(Classical Exhibition)을 받았다.


그 다음해에는 고전어 외에도 자연과학 분야, 곧 지학, 화학, 식물학,

비교 해부학 그리고 귀납 논리 등을 공부하고

1881년 3월 멜버른대학을 졸업할 때는 고전어 부분 최우수상

(An Exhibition and Honour Man in Classics)과

자연과학 부분 특별상(a Scholar in Natural Science)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학적 능력을 인정하여 멜버른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의 리퍼(Leeper)박사가

그를 사강사(Tutorship)로 초청하였으나 거절하고

교육 사업을 시작하기로 작정하고,

1881년 4월 코필드문법학교(Caufield Grammar School, 한국의 초, 중등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5세 때였다.


이때부터 1888년까지 그가 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코필드 학교는 명문 사립학교로 발전하였고

자신의 개인적인 명성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단 쟁기를 잡은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교육 사업은 선교를 위한 일종의 준비사역이었지, 그의 생애 목표는 아니었다.

학교를 운영하면서도 항상 인도로 돌아갈 날을 고대하였고

그날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코필드학교 역사관에 보관된 그의 일기 속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3. 한국 선교사 지원


어느덧 어린 동생들이 장성하여 자립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1886년에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더 이상 가정의 일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는 다시 선교지로 돌아가기로 작정하고

지난 7년간 키워 온 학교를 성공회 목사였던 바르넷(Rev. E. J. Barnett)에게

인계하고 1888년 4월 다시 인도 선교사로 지원하였다.


데이비스 자신은 인도로 가기를 원했으나

중국 푸초(福州)에서 선교하던 CMS소속 선교사였던 월푸(Archdeacon John R. Wolfe)가

한국의 부산을 방문한 이후, 한국 선교의 필요성과 긴박성을 호소했던 바


그의 편지가 성메리 교회의 메칼트니(H. B. Macartney) 목사가 편집, 발행하는

「국내, 국외 선교」(The Missionary at Home And Abroad)에 발표되었는데,

이 호소는 데이비스로 하여금 한국으로 향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한국에는 1885년 이래로 미국 북장로교와 북감리회가 선교를 시작했으나

아직까지 소수의 선교사만이 사역하고 있었으므로

인도보다 더욱 긴박한 선교지라고 파악되어, 그는 한국 선교사로 자원하였다.


그는 한국 선교사가 되기 위한 목적으로, 성공회와의 관계를 마치고,

빅토리아주 장로교회로 이적하게 되었다.


데이비스가 장로교 목사로서 한국으로 향하게 된 배경에는

멜버른의 투락(Toorak)장로교회의 젊은 목사였던 이윙(John F. Ewing)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멜버른 남노회는 데이비스가 에딘버러에서 6개월간의 신학 교육을 마치고

시험에 합격하면, 목사로 안수할 것을 가결했다.


당시 에딘버러 대학교의 뉴칼리지(New College)는

스코틀랜드 자유(장로)교회(Free Church of Scotland)의 신학 교육기관으로 우수한 학교였으며

데이비스는 이곳으로 갔고, 이곳에서 오직 신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데이비스 자신의 회고에 의하면, 이때야말로 오직 공부에만 전념했던

유일한 날들이었고, 가장 복된 날들이었다고 회상했다.

이곳에서 일정 기간 교육을 마치고, 1889년 5월 13일 멜버른으로 돌아왔다.


그가 당시 주일학교 아동들을 위한 잡지였던

「주일학교와 선교」(Sabbath School and Missionary Record)라는 잡지에 쓴 편지를 보면,

에딘버러에 체류하는 동안 마침 휴가중이었던 한국 선교의 선구자

존 로스(John Ross)를 만났고

그를 통해 한국에 관한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 (1888~1889년 사이)

  

그는 멜버른 남노회가 실시한 목사 고시에 합격하였고,

빅토리아주 장로교단 설립 50주년 총회기념인 1889년 8월 5일

스카츠 장로교회(Scots Church)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빅토리아 장로 교단의 목사가 된 그는 1년 전 창립된 청년 연합회인

YMFU(Young Men's Sabbath Morning Fellowship Union)의 재정 지원 하에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았고,


그의 누이 메리 데이비스는 뜻 있는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멜버른교회 기독교연합회

(Suburban Christian Union)의 지원하에 함께 한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 선교운동은 빅토리아주 장로교회 해외선교부를 통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겨우 창립 일주년 밖에 안 된 26개 교회 청년 약 300여명으로 구성된

청년연합회를 통해 시작됐던 것이다.


이때로부터 청년연합회는 1907년 장로교회 해외선교부가 정식 선교사를 파송,

지원할 때까지,

후에 언급될 장로교 여전도회 연합회(PWMU)와 더불어 매우 값진 기여를 하게 된다.

 

4. 한국에서 보낸 6개월


한국 선교사로 정식 부름 받은 데이비스는

1889년 8월 16일 금요일 저녁 멜버른 시내 YMCA 홀에서 거행된 환송회를 끝으로

멜버른에서의 모든 공식적인 일정을 마치고

8월 21일 그의 누나와 함께 멜버른을 떠나 한국으로 향했다.


이것이 한국으로 향한 첫 여행이자

그의 생애에서는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마지막 여행이 될 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가 40여일 간의 지리한 항해를 끝내고 부산항에 입항한 때는

1889년 10월 2일이었다.


항해 도중 데이비스 남매는 일시 본국에 귀국했다가,

다시 임지인 서울로 돌아가는 당시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였던

벙커(D. A. Buncker)씨 내외를 만나 한국의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벙커씨의 안내로 부산을 둘러본 후 다시 출항하여

10월 4일 오전 11시에 제물포(인천)에 도착하였다.

  

이 때로부터 서울에서 보낸 5개월간 데이비스는 한국어 공부에 최선을 다했다.

12월 26일자로 쓴 그의 편지를 보면 “조선말(Chosen Mal) 공부에 바빠

심지어는 가족들에게 편지 쓸 시간조차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는 원래 언어에 재능이 있었으므로, 그의 한국어 실력은 급속도로 진전되었고,

5개월이 지난 때에는 일상의 대화는 몰론 가벼운 설교까지 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기간 동안 데이비스는 북장로교 선교사와 함께 지내며 사역하였지만,

특히 언더우드와는 각별한 사이였다.

언더우드는, 데이비스를, 그가 만난 선교사 중에 가장 우수한 선교사였다고 평했을 만큼

데이비스의 인품과 실력과 능력을 신뢰하고 있었다.


특히 뜨거운 가슴과 함께 예리한 지성을 겸한 그에게서

언더우드는 동지적 의식을 느끼며

자신과 함께 서울에서 일해 주기를 여러 번 간청하기도 했다.


데이비스는 고전어에 상당한 실력이 있었으므로

아펜젤러 등과 함께 성경 번역하는 일에 전념해 주기를 간청하였으나,

당장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는 의식 때문에

후일의 선교 사역을 위해 준비하는 인내를 겸비하지 못했다.


그는 서울에 도착한 그 다음날부터 거리에 나가 전도하려고 했을 만큼

성격이 급하고 고집스런 면이 없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데이비스와 언더우드는 유사점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언더우드의 부인이 쓴「한국의 언더우드」(Underwood of Korea)에 보면

데이비스는 언더우드와 동일하게 복음에 대한 열심과 정력, 성경 언어에 대한

은사를 지녔다고 기록했고, 두 사람은 똑같이 기도의 능력을 신뢰했을 뿐만 아니라,

언더우드 방에서 함께 기도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고 회상하였다.


데이비스는 서울에서 지낸 5개월 동안 동료 선교사는 물론

서상륜 등 한국인 매서인(賣書人)전도자와 함께 과천, 수원, 용인 등

서울을 중심한 인접 지역을 답사하고 선교를 위한 구체적인 노력을 강구하였다.

 

데이비스는 그가 입국한 이후 서울 지역에는 이미 선교를 개시한 선교부 외에

또 다른 선교사들이 입국할 전망이었으므로

바울의 선교 원리를 따라 일단 선교사가 전혀 없는 지역으로 가서 일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한때 군산 지방으로 가서 선교할 것을 신중히 고려하기도 했다.

만일 그가 군산으로 갔었다면

호주 교회의 한국 선교사, 아니 한국교회사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선교 지역을 결정하기 전에 답사여행을 하기로 하고

일단 부산으로 가기로 작정하였다.

그것은 부산이 한국의 관문일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의 대표적인 항구 도시이며

일본과 인접해 있어 보다 더 효과적인 선교가 가능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에 도착한 그 다음해인 1890년 3월 14일,

누나 메리를 서울에 남겨둔 채

어학 선생과 하인, 그리고 매서할 문서와 약간의 약품 등을 준비하여 서울을 떠났다.


서울을 떠난 그는 수원 등의 경기도 지방과, 공주 등의 충청도 지방을 거쳐

경상도까지 300마일에 이르는 거리를 약 20일 간의 답사여행을 마치고

목적지인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매우 절망적인 상태였다.


이 기간 동안의 매서(賣書)전도 활동을 통해 복음에 대해 수용적인

조선의 현실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리한 도보 여행으로 인해

천연두에 감염되었고 곧 폐렴이 겹쳐 마지막 5일 간은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데이비스가 부산에 도착한 날은 4월 4일 금요일이었다.

이날도 억수같이 비가 쏟아졌다.


당시 부산에 있던 유일한 서구인이었던 캐나다 출신 선교사 게일(J. S. Gale)은

데이비스가 위급하다는 짐꾼의 전갈을 받고, 그가 투숙한 여관으로 급히 달려가

그를 자기 집으로 옮겼다.


그리고 일본인 거류지에 살던 일본인 의사 기타무라(北村)에게 치료를 부탁했다.

의사는 그가 천연두에 감염되었고, 폐렴까지 겹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데이비스는 곧 회복될 것이라고 도리어 게일을 위로하였으나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다. 게일과 데이비스 이 두 사람은 함께 기도했다.

“건강하든지 병들든지, 살든지 죽든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소서”라고.


일본인 의사가 급히 병원으로 옮겼고,

게일과 그의 어학선생 이창직이 그를 간호했으나 불안한 하루를 지내고

다음날인 4월 5일 오후 1시경 데이비스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이 때가 그가 한국에 온 지 6개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가 한국땅을 밟은 지 꼭 183일째였다.

우리 인간적인 시각으로 볼 때는 너무도 짧은 생애였다.


5. 그의 죽음이 남긴 것


데이비스의 죽음과 함께 그 누나 메리도 폐렴으로 얼마간 고생했으나

헤론 의사의 치료로 회복한 다음 한국을 떠났고,

그해 7월 18일 멜버른으로 돌아갔다.


이로서 빅토리아주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는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


데이비스의 죽음은 크게 세 가지 면에서

호주의 교회로 하여금 한국선교를 계속하도록 동기를 부여하였다.


첫째, 그처럼 유능했던 청년 선교사의 갑작스런 죽음은

호주교회로 하여금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다는 점이다.

1890년 5월 6일 멜버른 시내 스카츠 교회(Scots church)에서 거행된

데이비스의 생애를 감사하는 기념 예배에서는


데이비스의 자기희생적인 모범이 강조되었고,

한국 선교가 중단될 수 없는 사명임을 확인하였는데,

이것은 빅토리아주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운동에 정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둘째, 친목과 교제를 위해 시작된 청년연합회로 하여금

선교사를 파송하는 조직체(Missionary sending organization)로

확고한 기틀을 세워 주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1891년에는 존 멕카이목사(Rev. J. H. Mackay) 부부를,

1894년에는 앤드류 아담슨목사(Rev. Andrew Adamson) 부부를,

1902년에는 커렐 의사(Dr. H. Currell) 등을 파송하면서

한국 선교사를 파송, 지원하는 운동을 계속하였다.


셋째, 한국선교를 위한 또 다른 조직으로서 장로교 여전도회연합회

(PWMU, Presbyterian Women's Missionary Union) 조직의 동기를 부여하였다.


한국에서 본국으로 돌아온 메리 데이비스는

한국 선교의 문이 활짝 열려 있음을 말하고

이때야말로 선교를 시작할 적기임을 강조하는 한편,

한국선교를 지원하는 사람을 위해 써 달라고 50파운드를 기증하였다.


또 이 당시 데이비스의 동생 사라는 발라랏에서,

그리고 데이비스의 동생 존 데이비스의 부인은 질롱(Geelong)에서,

하퍼 부인(Mrs. Harper)은 멜버른시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선교운동의 조직화를 위한 어떤 조직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 일련의 움직임이 함께 어우러져서

1890년 8월 25일 정식으로 장로교 여전도회연합회를 조직하기에 이른 것이다.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사실은 이 연합회가 데이비스의 가족들에 의해 발의되었다는 점이다.

이 장로교 여전도회연합회는 처음부터 선교운동을 중요한 목적으로 삼았고,

“여성들에 의해서 여성들을 선교하는 단체”(Mission work among women by women)

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하여 이 PWMU는 1891년 멘지스(Miss Belle Menzies),

페리(Miss Jean Perry) 그리고 파우셋(Miss Mary Fawcett) 등

3명의 미혼 여선교사를 시작으로 하여

약 40여명의 여선교사들을 한국에 파송하여 한국 선교운동에 크나큰 공헌을 남겼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한 알의 밀알이,

그 후에 약 50명이 넘는 호주 선교사가,

대거 한국으로 오는, 열매를 낳았던 것이다.


마치 캐나다의 독립 선교사였던 멕켄지의 죽음으로

캐나다장로교회(후에 캐나다 연합교회)가 한국 선교를 시작했던 것처럼,

데이비스의 죽음은 호주 장로교회로 하여금 한국선교를 시작하게 했다.

출처: https://blog.daum.net/rfcdrfcd/15974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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