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직 신앙 고백서 강해 (12) 14조 인간의 창조와 타락 "Creation and Fall of man/Incapacity to...
Article 14: Of the Creation and Fall of man, and his Incapacity to perform what is truly good.
We believe that God created man out of the dust of the earth, and made and formed him after his own image and likeness, good, righteous, and holy, capable in all things to will, agreeably to the will of God. But being in honor, he understood it not, neither knew his excellency, but willfully subjected himself to sin, and consequently to death, and the curse, giving ear to the words of the devil. For the commandment of life, which he had received, he transgressed; and by sin separated himself from God, who was his true life, having corrupted his whole nature; whereby he made himself liable to corporal and spiritual death. And being thus become wicked, perverse, and corrupt in all his ways, he hath lost all his excellent gifts, which he had received from God, and only retained a few remains thereof, which, however, are sufficient to leave man without excuse; for all the light which is in us is changed into darkness, as the Scriptures teach us, saying: The light shineth in darkness, and the darkness comprehendeth it not: where St. John calleth men darkness. Therefore we reject all that is taught repugnant to this, concerning the free will of man, since man is but a slave to sin; and has nothing of himself, unless it is given from heaven. For who may presume to boast, that he of himself can do any good, since Christ saith, No man can come to me, except the Father, which hath sent me, draw him? Who will glory in his own will, who understands, that to be carnally minded is enmity against God? Who can speak of his knowledge, since the natural man receiveth not the things of the spirit of God? In short, who dare suggest any thought, since he knows that we are not sufficient of ourselves to think anything as of ourselves, but that our sufficiency is of God? And therefore what the apostle saith ought justly to be held sure and firm, that God worketh in us both to will and to do of his good pleasure. For there is no will nor understanding, conformable to the divine will and understanding, but what Christ hath wrought in man; which he teaches us, when he saith, Without me ye can do nothing.
제14조. 인간의 창조와 타락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땅의 흙으로부터 창조하신 것과, 그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만드시고 조성하셔서 그들의 의지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게 하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고귀한 지위에 있을 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탁월함을 인식하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고의로 자신을 죄에 굴복시켰고, 그 결과 사망과 저주에 굴복 당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받은 생명의 계명을 범하였고, 그 죄로 인해 참된 생명이신 하나님과 분리되었으며, 그들의 전 본성(whole nature)은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몸과 영혼의 사망에 처해졌으며, 사악하게 되고 비뚤어지게 되었으며, 모든 면에서 부패하게 되어,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모든 탁월한 선물들을 잃어버렸고, 다만 변명할 수 없을 만큼의 흔적만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라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 안에 있는 빛은 모두 어둠으로 변했습니다. 여기에서 요한은 인류를 ‘어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관하여 이와 반대되게 가르치는 모든 가르침을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의 종이고, 하늘로부터 받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요 3:27).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요 6:44)고 하셨으니, 누가 감히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다고 뽐낼 수 있겠습니까?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롬 8:7)는 사실을 안다면, 도대체 누가 자기의 의지를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를 받지 않는다”(고전 2:14)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누가 자기의 지식에 대해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스스로는 우리 자신에 관해서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으며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난다”(고후 3:5)는 말씀을 안다면 누가 감히 한 생각이라도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따라 우리로 하여금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빌 2:13) 하였던 사도의 말씀은 마땅히 확고하고 변함없이 세워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 같이,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지 않는 한 하나님의 지식과 뜻에 일치하는 어떤 지식이나 뜻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사람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받는다 그러나 여기에 놀라운 구속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내가 죽어 있는 동안 내가 ‘밑바닥까지’ 이르게 되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보내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내가 떨어져 있는 밑바닥까지 내려 오셔서 나를 끌어올리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위대하신 사역은 하나님께서 나같은 비참한 죄인을 구원하심에서 나타난 당신의 자비와 인자하심의 모든 면에서 더욱 더 자세히 설명됩니다. 하나님께서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도 또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그리스도, 그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고 합니다(고후4:4). 또한, 골1장 15절에서도 그리스도에 관하여“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완전한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하나님과 같은 형상을 반사합니다. 그래서 이전에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예수님께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소서”라고 했을 때, 예수께서 응답하시기를,“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셨습니다(요14:8,9).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가 낙원에서 완전했던 것처럼 완전하시고, 완전하게 하나님을 반영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진리의 하나님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당신의 자녀들을 보호하시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으로 반사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의를 반사합니다.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반사하고,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을 완전하게 반사하십니다. 구속받은 사람은 성신에 의해서 재창조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희생제사로 죄 값을 지불하심으로 선택받은 사람들을 사단의 편에서 하나님의 편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권세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된 사람은 성신의 중생케 하는 사역이 아니고는 죽은 자로 남아있고, 죄 가운데 마비되어 있게 됩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3주일(8문답)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은 부패하여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중생함 없이는” 악을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재창조하고, 사람을 변형시키기 위해서 성신을 주시어 사람이 다시 한번 당신께서 태초에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기록하기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합니다(고후3:18). 성신의 재창조 사역은 바울이 골로새서에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3:9-10). ‘새로운 사람’, ‘재창조된 사람’은 ‘방식(pattern)’, ‘틀(mould)' 곧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재창조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개념을 다시 에베소서에서도 언급합니다.“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4). 재창조된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의 의와 거룩에 대한 어떤 것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32주일 86문답은 성경을 이런 방식으로 요약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시고, 당신의 성신으로 우리가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형상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재창조된 사람은 다시 완전하게 하나님을 반사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위에서 인용한 고후3장 18절 본문에서 “변형되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이 말씀은 성신께서 행하시는 중생의 사역이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라 사람의 생애의 과정에서 계속되는 과정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33주일 88, 89문답에서 회심과 옛 본성을 죽이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함에 있어서, 회심은 죄를 더욱 더 미워하고 피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완전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일은 마지막 날까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유 의지를 가지지 못한다 사람이 모든 면에 있어서 “악하고 뒤틀리고 부패하게 되었다”고 하는 성경에 기초한 고백을 포함하는 14조는 “따라서 우리는 이 사실과 어긋나게 사람의 자유의지에 대하여 가르치는 모든 교훈을 배격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모두 죄의 종에서 지나지 않고(요8:34) ‘하늘에서 주시지 않으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기’(요3:27) 때문입니다.”라고 진술합니다. 타락 전에 아담(그리고 그 안에서 모든 인류)은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아담은 두 왕국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머물러 있으려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거나 혹은 하나님의 왕국과 사단의 왕국의 경계선을 넘어서 사단의 왕국에 연합할 수도 있었습니다. 타락과 함께 아담(우리도 마찬가지로)은 사단의 왕국을 선택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아담은 사단의 왕국의 경계 안에서만 자신이 어떤 행동의 과정을 선택할 수 있다는 그런 의미에서만 자유의지를 가집니다. (우리는 이것을 낭떨어지로 굴러 떨어지는 차와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차가 떨어지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운전자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운전대를 좌우로 조정하는 것뿐입니다.) 사단을 선택한 아담은 하나님을 선택하고, 두 왕국 사이의 경계를 넘어서서 다시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가려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상실했습니다. 결국 사람은 사단과 함께 죽었고, 그 죽음은 하찮은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안에서 선택받은 사람들을 사단의 왕국에서 그 경계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왕국으로 다시 데리고 오게 하려고 그리스도를 파송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되돌아 온 사람들은 자유의지를 받지 않았습니다. 죄가 그들 안에 여전히 남아있어서 구원받은 사람들도 어떤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사람은 죄를 택하기로, 사단의 편을 택하기로, 사단의 왕국의 경계를 넘어서려고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로 당신의 택자들을 보존하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다시 데리고 오십니다. 하나님의 구속받은 자녀들이 행할 수 있는 선은 선을 행하려는 그들의 자유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 순수하게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사역의 결과입니다. 선행은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나의 의무이므로 나는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께 봉사할 수 있도록 해 주신 사실에 대해 나 자신에게가 아니라 주님께만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세가지 관계의 회복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결과 우리는 다시 하나님을 반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예배와 인간의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과 그 축복에 대한 감사가 시작됩니다. 우리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기에 하나님께 이제 순종함으로 그리고 그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들을 부여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순종하는 가운데 우리의 이웃과의 관계나 자연과의 관계에 있어서 바른 기능을 감당하는 능력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반사한다는 것은 하나님처럼 행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인류가 하나님과 같은 모양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란 표현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람이 하나님처럼 행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대리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땅의 창조물들로 하나님이 어떠한지를 볼 수 있도록 하려고 작정하셨습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을 반사하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처럼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창조물들이 사람들을 봄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사람은 거룩하게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고, 인자하시고, 지혜로우시고, 질투하시는 것처럼,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서 이 모든 하나님의 속성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성별, 인종, 연령, 은사, 재능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반사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음을 의미합니다. 각각의 사람은 동일한 이유 때문에 존재합니다. 즉 각각의 사람은 하나님을 반사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닮은 다른 사람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1장 26절에서, 우리는 또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비춘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사역(과업)을 통하여 행해진다는 것을 배웁니다.“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다스린다”는 것은 “통치하는 것” 혹은 “인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다스리는가? 사람은 하나님 당신께서 다스리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사람은 왕의 자격으로 모든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다스려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창조물들을 다스리는 그 방식으로 하나님을 반사합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통치해야 합니다. 창조물들이 사람을 위하여 땅 위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사람은 창조물들을 위하여, 창조물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땅 위에 존재합니다. 이것은 시편 8편에서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면밀하게 살펴본 다윗은 사람의 상대적인 무가치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말하기를,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라고 합니다(3,4절). 사람은 그 자신이 살고 있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과 비교할 때 작고 하찮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저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5절)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른 창조물들과 구별되게 다르게 만드시어, 그를 당신께 가까이 있는 위치에 두셨습니다. 즉 사람을 하나님 당신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셨습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이 하나님의 고귀한 사역을 찬양합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6-9절).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이 고귀한 소명은 또한 이른바 문화명령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모든 창조물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들을 다스립니다. 그래서 두 번째 의미인 이제 인간은 그들의 이웃을 향해 올바른 관계에 서 있을 수 있게 됩니다. 그들을 위한 기도와 안녕과 복지에 관심을 가지고, 사회에 정의에 대한, 인권에 대한,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에 필요를 채우는 것을 관심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이웃이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의 동료 인간을 섬기는데 자기의 모든 재능을 사용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우리의 언어의 재능들을 이웃을 헐뜯거나 그의 명예를 떨어뜨리는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명성을 유지하며 그를 격려하는 일에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의 창조적이고 예술적인 능력으로 타인의 삶을 부요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실제로, 우리의 날마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반사함으로 우리는 실제로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곧 복음전도는 나의 태도와 말과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을 반사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복음전도는 항상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나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반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제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대군주로서가 아니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만물들을 돌보는 청지기로서 바라보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 지식은 왜 내가 일해야 하고,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나의 일에 관점을 제시해줍니다. 재산을 소유하며 땅을 경작하고 직장에서 일을 하며 학교에서 공부하는 일을 통해서 자신의 부를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이익과 복리를 위한 일로 하는 것입니다. 나는 우연히 지금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나는 한 가지 이유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되는 일이 교회와 관계를 갖습니다. 형상이 새로워짐이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거룩케 하시는 교회와 관련이 된 것입니다(엡5:26).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형상은 교회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 속에서, 혹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속에서 가장 충만한 상태로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갱신은 크리스챤들 간의 교제를 통해 교회 가운데서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는 자들은 그의 동료 크리스챤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게 됨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그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인하여 우리들은 부요케 됩니다. 그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들을 수 있습니다. 신자는 그의 동료 크리스챤들의 모범을 통해서 고무되며 그들의 기도를 통해 그의 삶이 유지되며 그들의 사랑의 훈계를 통해 바르게 인도되며 그들의 지지를 통해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결론적 고찰 첫째 우리는 인간을 바라볼 때 항상 그들의 미래적 견지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마지막의 완성을 향하여 가고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그들의 곤혹스러운 많은 결점을 지닌 비천하고도 비틀거리는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훗날 해처럼 빛날 자들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가르침은 교회의 복음 전도적인 사명에 대해 크나큰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타락한 인간일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존엄성과 가치를 부여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자들이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저주해서는 안되며 그들을 사랑하며 그들에게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비록 이 사람이 지금은 그의 죄된 생활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치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가치한 자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자기의 일을 그 사람을 사용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변화시켜서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을 반영하고 있는 재능들을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들고 나가서 이들이 지닌 잠재적 역량들이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에 필요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에서 그들로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단지 그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그들의 전 생애 속에서 바른 기능을 하여 하나님께 더 영광을 돌려드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총체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전체 인류 안에서입니다. 헤르만 바빙크는 이와 같이 말합니다. 개체로서의 인간이 아닌, 심지어 함께 어울려진 남자와 여자로서가 아닌, 전체로서의 인류가 비로소 온전히 발전된 하나님의 형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너무 부요하기에 한 사람 인간으로서는 그가 제 아무리 엄청난 재능을 부여받았다고 해도 온전히 그것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 형상은 그 깊이와 부요함에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인류 전체로서만 드러낼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흔적들이 시간과 공간상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수많은 일들 속에 흩어져 있듯이 하나님의 형상도 또한 우리들의 이전과 이후에 걸쳐 존재하는 모든 총체적 의미의 인류에게 그 모든 발전, 모든 역사, 확장되어온 땅의 정복, 지식과 예술의 진보등이 속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만 그 자신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날이 가고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서 계속적으로 자신을 더 크게 나타내신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 또한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다른 개인들과 집단들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형상의 다양한 국면들을 어렴풋하게나마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역사와 인간의 모든 다양한 문화적 공헌들을 함께 모두어 생각할 때 하나님의 형상의 온전한 부요함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예술가, 과학자, 철인, 또한 이에 준하는 자들을 통해서 우리의 지식, 예술, 기술의 진보의 창고에 쌓여진 그 모든 것들은 사람에게 모든 재능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내고 있는 거울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종족이나 국적이 다른 집단의 사람들의 업적과 공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국가 계층간의 간격을 뛰어넘게 합니다. 다가올 세상에 완성된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각시대 각처로부터 온전히 부활하여 영화롭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그를 반영하는 재능들과 은사들을 갖고 새 땅에 서게 될 것입니다. 죄와 결함이 완전히 제거된 이 모든 재능과 은사들이 최초로 온전하게 사용되어 질 것이며 하나님 자신의 놀라운 미덕들을 흠없고 티없이 반영하는 형상의 보유자들의 예배와 섬김과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원히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때에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 성취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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