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0편 [쉬운성경] Psalm 90 [...them are struggle and sorrow; indeed, they pa...
시편 90편은 그 동안 영원하신 하나님을 안전한 거처로 삼아왔지만, 자신들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 죽음의 선고를 받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다시 한 번 긍휼을 베풀어주실 것을 중보하며 간구하는 기도 시편이다. 이 시편은 내용상 91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도 주제적으로는 대조를 이룬다. 즉 90편 1절이 과거부터 주의 종들의 거처가 되셨던 하나님의 징계를 말하고 있다면, 91편 9절은 하나님을 거처로 삼은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노래하고 있다. 또한 91편 1절과 92편 13절은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집, 즉 성전에 거하는 자들의 안전함을 노래한다.
시편 90편은 ‘하나님의 사람’(신 33:1; 수 14:6; 스 3:2) ‘모세의 기도’이다(표제). 이 시편은 신명기 32~33장의 어휘들을 공유한다(참고 15절의 ‘날’ ‘년’; 신 32:7; 16절의 ‘행사’; 신 32:4; 33:11). 이러한 표제는 시편 90편을 모세의 중보기도로 읽게 한다. 즉 불순종한 이스라엘로 인해 진노하신 하나님께 모세가 이스라엘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중보 기도했던 것처럼(출 32:11~13; 34:9; 민 14:13~19; 신 9:25~29; 시 106:23),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을 위해 중보하며 기도하는 시로 읽을 수 있게 한다. 실제로 시편 제4권(90~106편)에는 모세의 이름이 일곱 번이나 등장하면서(90편 표제; 99:6; 103:7; 105:26; 106:16,23,32) 모세의 지도 하에서 이루어진 출애굽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간 이스라엘에게 새롭게 일어났음을 암시하고 있다. 구조적으로 시편 90편은 다음과 같이 구분될 수 있다.
대대에 주의 종들의 거처가 되신 영원하신 하나님(1~2절)
하나님의 죽음의 선고 아래 있는 인생들(3~6절)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고통으로 가득한 짧은 인생(7~10절)
짧은 인생을 헤아리는 지혜로 주의 진노를 벗어나게 해달라는 기도(11~12절)
고통으로 가득한 주의 종들의 삶을 회복시켜주시길 구하는 기도(13~17절)
본문 주해
제1연: 대대에 주의 종들의 거처가 되신 영원하신 하나님(1~2절)
1절과 17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주’(아도나이)로 부르는데 이것은 여호와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심과 온 세상의 통치자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가 되시는 것은 그분의 영원성에 기초한다(2절). 이러한 하나님의 ‘영원성’은 인생의 짧음과 대조되면서(3~6, 9~10절) 인간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근거도 된다(13~17절). 이처럼 만물과 인류의 주님이신 영원하신 하나님은 인류의 ‘거처’(1절; 91:9)로 고백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인류의 피난처나 ‘안전한 집’이 되셨음을 의미한다(71:3; 91:9; 26:8; 68:7). 즉 인류는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만 그 안전과 번영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성전은 당신의 백성들의 안전한 거처인 여호와 하나님을 상징한다(46편; 91:1 ‘지존자의 은밀한 곳’; 92:13 ‘여호와의 집’ ‘하나님의 궁정’).
제2연: 하나님의 죽음의 선고 아래 있는 인생들(3~6절)
하지만 사람이 그 안전한 거처였던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하나님의 죽음의 선고(3절; 창 3:19)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죄를 범한 인간에게 하나님은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시 104:29; 146:4; 전 12:7)고 선언하셨다. 3절에서 시인은 바로 창세기 3장의 상황을 상기시키면서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가 처한 상황을 사망의 선고 아래 놓여 시들어버리는 인간의 일반적인 상황과 연결시키고 있다.
죽음의 선고 아래 놓여 있는 인생의 짧음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4절과 5절은 연결하여 읽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4절은 “비록 … 같을지라도”로 번역되는 것이 좋다. 즉 시인은 4~5절에서 비록 하나님께는 천년이 지나간 날이나 밤의 한 경점(3~4시간)처럼 짧게 보이지만, 고작해야 70~80년밖에 되지 않는 인생(10절)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순식간에 인생들을 ‘쓸어 가시기에’ 그들의 삶은 잠깐 자는 것 같고, 아침빛에 싹이 돋아 자라지만 저녁에는 곧 시들어 말라버리는 풀과 같다고 고백한다(5~6절).
5상절은 한글 번역과 달리 “주께서 그들을 잠 잘 때에 쓸어 가시며”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이 번역도 순식간에 사라지는 인생의 짧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5하절과 6절은 아침에 돋아났지만 뜨거운 한낮의 햇볕에 스러지는 가나안 지역의 풀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인생의 짧음에 대한 주제는 시편 여러 곳에서 표현되고 있다(37:2,20,36; 39:5,11; 62:9; 78:39; 89:47; 102:3,11; 103:15~16; 109:23; 144:4 등).
제3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고통으로 가득한 짧은 인생(7~10절)
시인은 인간의 삶이 죽음 아래서 그처럼 짧고 허무하게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 때문이라고 고백한다(7절). ‘하나님의 노’ ‘분내심’은 항상 의롭다. 즉 그것은 죄에 대한 정당한 심판이다. 하나님께는 어떤 죄도 숨길 수 없다. 하나님의 거룩한 빛 아래서는 우리의 마음 한 구석에서 했던 악한 생각이나 어두운 비밀까지도 다 드러나고 만다(8절). 만약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악들에 대해서 징계하신다면 인간의 일생은 고통과 한숨 가운데서 끝날 수밖에 없다(9절). ‘일식 간’으로 번역된 단어는 순간처럼 지나가는 모습을 말하기도 하지만 ‘한숨’과 ‘비탄’을 의미할 수도 있다.
10절에서 시인은 천 년을 하루나 한 순간으로 여기시는 하나님 앞에서(4절) 길게 살아야 칠십 혹은 팔십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의 짧음과 허무함을 고백한다(‘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10절). 더욱이 그 짧은 인생의 ‘자랑’(최선의 것)이라고 해봐야 수고(고통)와 슬픔뿐이라고 탄식한다.
제4연: 짧은 인생을 헤아리는 지혜로 주의 진노를 벗어나게 해달라는 기도
(11~12절)
계속해서 시인은 수사의문을 통해서 누가 하나님의 진노의 크기를 헤아릴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11절). 짧은 인생의 고통과 슬픔이 보여주듯이 인간이 끝까지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참혹한 결과는 아무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자신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인 죄인들의 인생이 얼마나 짧고 허무한 것인지를 잘 깨닫고, 속히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길 기도한다(12절).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가 없으면 교만하고 어리석은 인생들은 마치 죽음이 없는 것처럼 살 것이고, 하나님께 심판을 받지 않을 것처럼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두려움에 상응하는 엄청난 진노’(‘진노의 두려움’,11절)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12절의 기도는 현재 시인과 이스라엘 공동체가 당하는 고통이 죄의 결과임을 깨닫고, 속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요청하는 기도로 볼 수 있다.
제5연: 고통으로 가득한 주의 종들의 삶을 회복시켜주시길 구하는 기도
(13~17절)
12절에 암시된 회개 후에 시인은 고통당하는 자신과 이스라엘 공동체를 긍휼히 여기시고 삶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본격적으로 기도한다. 13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돌아오소서’라고 기도한다. 주의 진노 아래서 고통당하고 있는 시인과 그의 공동체가 그들의 고통과 삶의 허무함이 그들의 죄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인생들을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신(3절) 하나님께, 하나님을 안전한 거처로 다시 찾는 ‘주의 종들’에게 돌아와 주실 것을 요청하는 기도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돌아오심은 당신의 종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 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 ‘긍휼히 여겨주실 것’을 간구한다. 시인은 하나님의 진노와 고통의 밤이 지나고 속히 하나님의 구원의 아침이 도래하기를 기도한다(14절). ‘아침’은 하나님의 구원과 기도 응답의 시간이다( 46:5; 143:8). 하나님의 인자하심(사랑)으로 인해 그러한 구원이 도래할 때, 주의 종들은 평생 동안 진정한 만족 가운데서 기쁨과 찬양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노래했던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인 인생의 허무함이나 고통(3~10절)과는 뚜렷하게 대조된다.
15절에서 시인은 그러한 기쁨이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징계하신 날과 햇수만큼 충분히 회복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이것은 죄로 점철된 삶의 덧없음과 고통을 헤아리지 못해서 당한 자신들의 고난이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해서 충분히 보상 받게 해달라는 간구이다. 이것이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적용된다면 70년간의 포로 생활을 넉넉하게 극복할 만한 하나님의 구원과 채워주심을 구하는 기도가 될 것이다. 시인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영광, 즉 놀라운 구원을 지금의 주의 종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후손들에게도 나타내시길 기도한다(16절). 이전 세대에도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1절). 더불어 하나님의 은총(아름다움)이 주의 종들에게 임하게 하셔서 그들이 행하는 일들이 ‘견고하게’ 해달라고 두 번이나 강조해서 간구한다(17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행하실 때에라야 ‘하나님의 종들의 행사’도 견고하게 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지속적인 복과 은혜를 간구하는 것이다. 주의 진노 아래 있는 인생의 자랑이 수고와 슬픔뿐이라면,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있는 인생의 모든 일들은 만족과 기쁨과 찬양 가운데서 견고하게 세워져 감을 고백하는 기도이다. 이 기도에 대한 응답은 뒤따르는 91, 92편에서 풍성하게 표현되고 있다.
설교를 위한 적용
우리를 빚으시고 온 세상을 만드신 영원하신 하나님을 진정한 안식처로 여길 때 소망이 있다(1~2절).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는 이 땅에서의 삶을 참으로 고통스럽고 허무하게 만들었다(3~10절). 하나님 안에 있지 않은 죄인들의 일생은 겉으로 보기에는 세상적인 쾌락과 권력과 부로 그럴 듯하게 치장되어 있지만, 잠시 돋았다가 곧 시들어 없어지는 풀과 같이 허무한 삶이다(5~6절; 약 1:10~11). 마치 아버지의 품을 떠난 둘째 아들이 잠시 쾌락을 누리면서 방탕하게 살았던 기간과도 같다(눅 15:13).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인간의 힘이나 지혜나 권력이나 부를 끝까지 의지하는 인생들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이스라엘이 하나님보다 애굽을 더 의지하고, 이방 신들과 인간 왕을 더 의지했을 때, 그들은 순식간에 망하여 바빌론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이 모든 인생들에게 선고한 ‘흙으로 돌아가라’는 명령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3절).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우리의 짧고 허망한 인생과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영원하고 풍성한 거처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 방탕하게 생활했던 지난날들의 죄악에서 돌이켜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갈 때에만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눅 15:20~24). 아버지의 집, 하나님 안에서만 진정한 회복과 즐거움과 참된 인생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죄와 심판 아래서 신음하며 죽어가던 우리에게 참된 안식처이신 하나님께로 갈 길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을 허무하게 만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가 아버지 품 안에서 풍성하고 의미 있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13~17절; 요 3:16~17; 롬 5:2~5; 8:18; 고후 4:16~18). 이것이 복음이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고 베드로전서 1장 24~25절은 명백하게 선언하고 있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 없는 삶의 덧없음과 고통스러움을 깨닫고 이 복음을 따라 우리의 영원한 거처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불순종하여 징계를 받은 주의 자녀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회개하는 자들에게 ‘돌아오시는’(13절) 하나님께로 즉시 돌아가야 한다. 거기에 진정한 희망이 있다. 그래야 우리의 짧은 인생이 참된 만족과 기쁨으로 가득 채워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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