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권 [베드로전서 1:3-12 설교, 강해 3, 2021년 11월 28일 주일] 그들은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께...

산 소망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풍성하신 긍휼을 따라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로부터 살리시어 산 소망을 얻게 하심으로
4.  여러분을 위해 하늘에 쌓아 둔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얻게 하셨습니다.
5.  여러분은 마지막 때 나타내려고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해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6.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온갖 시험을 당해 잠시 근심하게 됐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합니다.
7.  그것은 여러분이 당하는 믿음의 시련이 불로 단련해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8.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으나 사랑합니다. 지금도 여러분은 그분을 보지 못하지만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즐거워합니다.
9.  이는 여러분이 믿음의 결과로 영혼의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10.  이 구원에 관해서는 여러분이 받을 은혜에 대해 예언한 예언자들이 열심히 찾고 연구했습니다.
11.  그들은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께서 당하실 고난과 그 뒤에 받으실 영광에 대해 미리 증거하실 때 그리스도의 영이 무엇을 가리키며 어느 때를 지시하는지 알아보려고 살폈습니다.
12.  예언자들이 섬긴 이 일은 자기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것임이 여러분에게 계시됐습니다. 이제 이 일은 하늘에서 보내신 성령 안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로 인해 여러분에게 전파된 것이며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3.  Praise be to the God and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In his great mercy he has given us new birth into a living hope through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from the dead,
4.  and into an inheritance that can never perish, spoil or fade -- kept in heaven for you,
5.  who through faith are shielded by God's power until the coming of the salvation that is ready to be revealed in the last time.
6.  In this you greatly rejoice, though now for a little while you may have had to suffer grief in all kinds of trials.
7.  These have come so that your faith -- of greater worth than gold, which perishes even though refined by fire -- may be proved genuine and may result in praise, glory and honor when Jesus Christ is revealed.
8.  Though you have not seen him, you love him; and even though you do not see him now, you believe in him and are filled with an inexpressible and glorious joy,
9.  for you are receiving the goal of your faith, the salvation of your souls.
10.  Concerning this salvation, the prophets, who spoke of the grace that was to come to you, searched intently and with the greatest care,
11.  trying to find out the time and circumstances to which the Spirit of Christ in them was pointing when he predicted the sufferings of Christ and the glories that would follow.
12.  It was revealed to them that they were not serving themselves but you, when they spoke of the things that have now been told you by those who have preached the gospel to you by the Holy Spirit sent from heaven. Even angels long to look into these things.

3.  ευλογητος ο θεος και πατηρ του κυριου ημων ιησου χριστου ο κατα το πολυ αυτου ελεος αναγεννησας ημας εις ελπιδα ζωσαν δι αναστασεως ιησου χριστου εκ νεκρων
4.  εις κληρονομιαν αφθαρτον και αμιαντον και αμαραντον τετηρημενην εν ουρανοις εις υμας
5.  τους εν δυναμει θεου φρουρουμενους δια πιστεως εις σωτηριαν ετοιμην αποκαλυφθηναι εν καιρω εσχατω
6.  εν ω αγαλλιασθε ολιγον αρτι ει δεον εστιν λυπηθεντες εν ποικιλοις πειρασμοις
7.  ινα το δοκιμιον υμων της πιστεως πολυ τιμιωτερον χρυσιου του απολλυμενου δια πυρος δε δοκιμαζομενου ευρεθη εις επαινον και τιμην και δοξαν εν αποκαλυψει ιησου χριστου
8.  ον ουκ ιδοντες αγαπατε εις ον αρτι μη ορωντες πιστευοντες δε αγαλλιασθε χαρα ανεκλαλητω και δεδοξασμενη
9.  κομιζομενοι το τελος της πιστεως υμων σωτηριαν ψυχων
10.  περι ης σωτηριας εξεζητησαν και εξηρευνησαν προφηται οι περι της εις υμας χαριτος προφητευσαντες
11.  ερευνωντες εις τινα η ποιον καιρον εδηλου το εν αυτοις πνευμα χριστου προμαρτυρομενον τα εις χριστον παθηματα και τας μετα ταυτα δοξας
12.  οις απεκαλυφθη οτι ουχ εαυτοις ημιν δε διηκονουν αυτα α νυν ανηγγελη υμιν δια των ευαγγελισαμενων υμας εν πνευματι αγιω αποσταλεντι απ ουρανου εις α επιθυμουσιν αγγελοι παρακυψαι


영원한 구원의 산 소망 (베드로 전서 1:3-5)

지금부터 우리는 본 서신의 본문에 해당하는 부분을 다루어 보기로 한다. 여기에서는 찬양하는 내용으로 시작되고 있다.

Ⅰ. 신도들의 위임과 행복한 상태에 대한 축하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다른 서신들도 이러한 방법으로 시작되고 있다(고후 1:3; 엡 1:3). 여기에서 우리는 아래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1. 이룩되어진 임무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축복하심을 정당하게 인식함으로 그를 찬양하게 된다.

2. 이러한 축복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하나님의 관계에서 묘사되어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란 말씀에서 그 관계를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삼위일체 중 한 분이신 한 위(one person)에 대해 그 사명을 나타내는 세 가지 명칭이 있다.

(1) 그는 절대 권위의 군왕 또는 군주로서의 "주"가 되신다.

(2) "예수"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제사장 혹은 구세주를 의미한다.

(3)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름 부음 받은 하나의 예언자를 나타낸다. 그는 그의 교회의 교리와 인도와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은사를 부여하신다. 축복을 받으신 이 하나님은 그의 인간성에 따라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되시며 그의 아버지는 그의 신성에 의하여 하나님이 되셨다.

3. 우리에게 하나님을 찬양할 의무가 주어지는 이유는 그의 "풍성하신 자비"에 기인된다. 우리의 모든 찬양은 하나님 자신의 자비하심에 기인한 것이지 결코 인간의 공로나 특히 개심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를 다시 낳으셨으며" 이 사실로써 하나님은 우리의 감사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특히 우리들이 그 열매를 생각해 볼 때 그 열매는 우리 안에 탁월한 소망의 은총이 되는 것이며, 이 세상적인 것이나 위선자들과 같은 허무와 죽음 그리고 멸망의 소망과 같은 것이 아니다. 산 소망과 생명과 강함과 민첩함과 참는 소망을 낳게 하신다. 이러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신" 기초에 기반을 둔 것이다. 여기에서 아래와 같은 사실을 배우도록 하자.

(1) 선량한 그리스도인은 조건이 극히 나쁘다 할지라도 아직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할 크나큰 이유가 있다. 죄인이 현재의 번영에도 불구하고 슬퍼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항상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이 선량한 사람들은 그들의 더함 없는 고난 속에서도 아직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를 가지고 있다.

(2) 우리들의 기도와 찬양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언급해야만 한다. 이는 우리와 우리의 예배가 그를 통해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3) 최선의 사람은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에 대해서 그들의 최선의 찬양을 드려야 할 의무를 지닌다. 세상에 있는 모든 악은 인간의 죄에 비롯된 것이나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기인하는 것이다. 중생함도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로써 성취되는 것이며 나머지의 모든 것이 다 이와 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에 의존하고 있다. 중생의 본질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3장 3절을 참고하기 바란다.

(4) 중생은 영원한 생명의 산 소망을 낳는다. 모든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은 소망없는 피조물이다. 중생한 인간인 척하는 모든 것은 다 뻔뻔스럽고 주제넘은 일이다. 정당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다시 낳는 것이다. 이러한 중생은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져 주시는 은혜에 의한 것이다. 새롭고 영적인 생명으로 거듭나는 사람은 새롭고 영적인 소망으로 다시 낳은 사람이다.

(5) 그리스도의 소망은 탁월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 탁월성은 산 소망이라는 것이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영생의 소망은 그로 하여금 생명력 있게 하며, 민첩하게 하고, 도와주며, 그를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것이다. 소망은 그 영혼으로 하여금 힘을 주어 움직이게 하며, 참고 힘을 내며 끝까지 견디도록 한다. 중생하지 못한 자의 환상적 소망은 헛되며 파괴적인 것이다. 위선자와 그의 소망은 죽어 모두 사라질 수밖에 없다(욥 27:8).

(6)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하심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근거요, 초석이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심판자로서의 아버지의 행위이시며, 정복자로서의 아들의 행위이시다. 그의 부활은 우리의 속죄를 위해 아버지께서 아들의 죽음을 수락하신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는 죽음과 무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영적 원수들에 대해 승리하신 것이다. 그것은 역시 우리들 자신의 부활도 보증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무리사이에는 뗄 수 없는 연관이 이룩되었으므로 그들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덕으로, 아니 심판자로서의 그의 능력에 의하여 부활하게 된다. 골로새서 3장 1절에 보면 "우리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영생의 소망을 이룩할 수 있는 튼튼하고 견고한 두 개의 기반을 가지고 있다.
Ⅱ. 이 사람들의 거듭남과 영생에 참여케 되었음을 축사한 후 사도 베드로는 이들에게 가장 적합한 말로 생각되는 "기업"이란 개념으로 생명을 계속 묘사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본래 타고 난 유업에서 쫓김을 당함으로 궁핍과 핍박 속에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슬픔을 달래기 위해 사도 베드로는 그들이 상실한 것보다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기업으로 그들이 거듭나게 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유대인들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물려주신 기업의 땅인 가나안 땅에 대한 크나큰 애정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가혹한 심판으로 간주되는(삼상 26:19) 주의 기업에 머물러 살 수 없이 쫓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그들을 위로하는 길은 그들을 위하여 예비된 하늘에 고귀한 기업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일이다. 가나안 땅의 기업은 그들이 장차 받을 기업에 비교하면 단순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해 보자.

1. 하늘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의심할 수 없는 기업이다. 거듭난 모든 자들은 기업을 받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그의 자녀를 상속자로 삼는 것과 같다. 사도 베드로도 로마서 8장 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선물을 모든 사람에게 주신다. 그러나 기업은 모두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자녀에게만 주신다. 곧 중생하고 그의 양자로 선택된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받는다(히 9:15). 이 기업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는 바가 아니다. 하나님의 선물이요, 우리들의 공로인 대가가 아니라 태초로부터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에게 불변의 언약으로써 이 기업을 주신 것이다.

2. 이 기업의 비교할 수 없는 탁월성은 네 가지를 들어 말할 수 있다.

(1) 이 기업은 썩지 아니할 것으로, 그 기업의 창시자의 속성과 동일한 것이다. 즉 로마서 1장 23절에 나타난 바 "하나님은 썩지 아니할 하나님"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모든 부패는 좋은 것을 나쁘게 변하도록 한다. 그러나 하늘은 이러한 변화가 없고 종말도 없다. 즉 하늘의 장막은 영원하며 소유주는 영원히 존재한다. 곧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고전 15:53)라고 하신 말씀과 같다.

(2) 이 기업은 히브리서 7장 26절에 나타난 바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는" 분이신 대제사장이 지금 가지고 계시는 기업과 같이 더럽지 아니한 것이다. 이 세상을 부패하게 하며 동시에 세상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두 가지의 크나큰 더러움 즉 죄와 비참함은 우리들이 받는 기업에는 없다.

(3) 그 기업은 쇠하지 않는다. 언제나 생기와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성도들은 항상 즐겁게 그리고 만족스러워하고 있다. 그들은 조금도 피로의 기색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실증도 느끼지 않고 있다.

(4) 이 기업을 "너희들을 위하여 하늘에 간직해 두신 것이라"고 하는데 이 같은 말씀은 우리에게 세 가지의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다.

[1] 그것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기업이다. 하늘에 있는 것은 모두 영광된 것이다. (엡 1:18)

[2] 하늘에 간직되어 있는 것은 우리들이 그것을 받기까지 안전한 가운데 보존되어 있다.

[3] 어떤 사람들을 위하여 이 같은 기업을 예비하셨는가 하는 것이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그것은 그들의 이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특성에 의해서 서술되고 있다. 하늘에 예비해 두신 기업은 "너희들"과 "우리들" 그리고 산 소망을 얻도록 "거듭난 모든자"를 위한 것이다. 이 기업은 그들을 위해 예비된 것이다. 오직 그들만을 위해 예비된 것이지, 어느 다른 이들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 아니다. 모든 나머지 사람들은 영원토록 갇히게 될 것이다.
Ⅲ. 이러한 기업이 먼 미래의 것으로 서술되고 시간과 공간적으로 먼 것이기 때문에 도중에 그들이 미치지 못할지도 모르므로 사도 베드로는 아직도 그들의 마음속에 약간의 의혹과 불안을 예측하고 있다. "비록 하늘에 안전히 보존되어 있는 기쁨이 있을지라도 우리들은 많은 시험과 불행 그리고 연약함을 피할 수 없는 이 세상에 아직 거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그곳에 확실히 이르게 될 안전한 상태에 거하고 있는가?" 이에 대해 사도 베드로는 그들이 안전하게 그곳으로 인도되고 들리울 수 있다고 대답한다. 이는 영생에 안전한 도달을 방해하는 파괴적인 시험과 손해로부터 그들은 보존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것을 상속하는 자는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아무런 보장도 없으나 하늘의 상속자는 그 소유를 누릴 수 있는 확실한 보장이 있다. 여기에서 약속된 축복은 보호함을 받는다. 우리는 "보호함을 받는다. " 이는 보호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목적을 이루게 하는 수단은 우리들 자신의 "믿음"과 관심이다. 우리들이 보호함을 받는 궁극의 목적은 "구원"이다. 그리고 모든 결과를 보게 되는 것은 "마지막 때"이다. 여기에서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1. 그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스런 보살핌은 그들에게 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영광으로 보존케 하신다. 그들이 보호함을 입었다고 하는 것은 위험과 구원을 동시에 암시하고 있다. 그들은 공격을 받게 되나 정복을 당하지는 않는다.

2. 영생으로 향한 갱신의 보전은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이다. 일의 위대함이 원수들의 수와 우리 자신의 연약함의 힘은 될 수 없는 오직 하나님의 전능하심만이 구원으로 인간의 영혼을 보존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성서는 인간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라고 나타내고 있다. (고후 12:9; 롬 14:4)

3.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보존은 인간 스스로의 구원을 위한 어떠한 노력이나 관심으로 대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의 믿음이 필요하다. 곧 인간의 구원에 대한 열망과 그리스도의 초청과 약속에 따라 그를 의지함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무엇이든지 공격적인 것을 피하며 "은혜를 갚는데 대한 관심"과 항상 기도에 힘써야 할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참고 역사하며 정복하는 믿음으로 인해 우리들은 하나님의 도우심 아래 구원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은혜의 상태에서 영광의 상태로 영혼을 보존하는 주권자이다.

4. 이 구원은 "마지막 때에 나타나도록 준비되어" 있다. 여기에 성도의 구원을 위해 강조되는 세 가지 사실이 있다.

(1) 구원은 지금 준비되어 있고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다.

(2) 비록 그 구원이 지금 예비되어 있다 하더라도 많은 부면이 감추어져 있고 구원을 추구하지도 않는 어두운 세상뿐만 아니라 구원의 후예들 자신들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요한 1서 3장 2절 말씀대로 "장래에 어떻게 된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했다. "

(3) 구원은 "마지막 때" 혹은 심판의 마지막 때에 "완전히 나타나게" 될 것이다. "생명과 영생도 복음에 의하여 밝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 생명은 임종시에 더욱 영광스럽게 나타나게 된다. 그때에 영혼은 그리스도의 현존 앞에 받아들여지며, 그의 영광을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때에 성도의 충만하고도 놀라운 행복이 최후로 완전히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때에 그들의 육체가 부활하여 그들의 영혼과 연합하며 천사들과 인간들에게 심판이 내려질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공개적으로 당신의 종들을 영화롭게 하며 충만케 해 주실 것이다.
 
1:6
믿음의 시련 (베드로 전서 1:6-9)

"그러므로"라고 한 첫 마디의 말은 앞서 말한 바 성도들의 현재 상태에서의 탁월성과 장래에 대한 그들의 크나큰 기대에 대해서 사도베드로가 말하고 있다. 6절에 있는 말씀은 아래와 같이 풀어서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얼마간 혹은 잠시 동안 많은 시험으로 인하여 조심하지 아니할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

Ⅰ. 사도 베드로는 그 성도들이 큰 역경 가운데 있었다고 하는 것을 시인하고 있으며, 그들의 슬픔을 완화시키기 위한 일들을 제의하고 있다.

1. 훌륭한 그리스도인마다 크게 기뻐할 수 있는 바를 항상 소유하고 있다. 크나큰 기쁨은 자체는 용모나 행위에서 나타나지만 특별히 찬양과 감사에서 드러난다.

2. 선량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최대의 기쁨은 영적이며 거룩한 것들에서 비롯되며 그의 하나님과 또는 하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관계에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크나큰 기쁨을 얻는다. 그의 기쁨은 훌륭한 가치가 있는 본질로 이루어진 보화로 인해 이룩된 것이며, 그 본질에 대한 명제는 확실한 것이다.

3. 크게 기뻐할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최선의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시험으로 인해 크게 근심하게 된다. 각가지의 모든 역경은 시험과 믿음의 시련, 인내 그리고 항구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경은 좀처럼 혼자 오지 않으며 여러 가지로 다른 모습을 지니고 찾아오게 된다. 이러한 결과는 크나큰 근심을 이루게 된다. 보통 인간과 같이 우리들은 개인적 또는 가정적인 문제로 슬픔에 싸이게 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가 우리를 자주 슬프게 한다. 그리고 불쌍한 자에 대한 동정,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것, 그의 교회의 재난과 인간 스스로의 어리석음이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인류의 멸망은 슬기롭고 경건한 마음에 계속적인 슬픔을 자아내게 한다. 이러한 사실은 로마서 9장 2절에 "내게 큰 조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는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4. 선량한 사람들은 고뇌와 슬픔이 있으나 얼마 동안이요, 잠깐이다. 그들의 고뇌와 슬픔은 심하나 잠깐 동안이다. 인생의 삶 자체가 잠간이요, 생의 슬픔이 생 자체보다 더 오래 존속할 수 없다. 어떠한 고뇌의 단축은 그 고뇌의 근심을 약화시킨다.

5. 크나큰 근심은 때로 그리스도인의 선량함에 필요하다.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 "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의도적으로 괴롭게 하시지는 않으나 우리들의 요구와 부족에 비례하여 분별력을 가지시고 행하신다. 이러한 경우에 편리함이나 적합함이라기 보다 절대로 필요한 것이 되므로 그 표현이 "꼭 있어야 한다"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러한 고통으로 요동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3:3)라고 하신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근심을 낳는 이 고통은 우리에게 필요할 때에만 오는 것이지 아무 때나 임하지 아니하며 필요 이상 오래 머무르지도 아니한다.
Ⅱ. 사도 베드로는 고통의 목적과 그 고통 배후에 있는 성도들의 기쁨의 근거를 말하고 있다(7절). 선한 사람들의 고통의 목적은 "그들의 믿음의 시련이다. " 그리고 이러한 연단의 본성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 것이다. " 시련의 결과는 바로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다. 아래의 사실을 주목해 보자.

1. 성실한 그리스도인들의 고통은 그들의 믿음의 시련을 위해 계획되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그의 백성을 단련시키려 함이지, 그들을 멸망시키려 하심이 아니며, 그들의 진보를 위함이지 파멸을 위함이 아니다. 시련은 그 말이 의미하듯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가치와 강함을 증거하는 어떤 고통을 통하여 인간에게 이루어진 하나님 경험과 탐구이다. 이 시련은 믿음에 임하게 되는데 이는 믿음의 시련이 어떤 다른 은혜보다 결과적으로 우리 안에 모든 선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기독교는 우리들의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만일 우리에게 이 믿음이 없다고 하면 우리 안에 영적인 선함이란 존재하지 아니한다. 그리스도는 "사도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기도하셨다. 만일 이 믿음만이 이룩된다면 나머지 모든 것은 견고히 서게 될 것이다. 선한 사람들의 믿음이 단련받는 것은 그들 자신이 믿음의 위로를 받으려 함이며 하나님은 믿음의 영광을 또한 다른 사람들은 믿음의 축복을 얻으려 함이다. 연단된 믿음은 어떤 연단된 금보다 귀하다. 여기에 믿음과 금 곧 믿음의 연단과 금의 연단 두 가지의 비교가 있다. 금은 모든 금속 중 최고의 가치와 순수성과 실용성 그리고 지속성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덕성 가운데 가지고 있는 믿음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믿음이 영혼을 하늘나라에 인도하며 종국에 가서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스런 열매를 맺기까지 믿음은 지속하는 것이다. 믿음의 시련은 금의 시련보다 더 귀한 것이다. 양자에는 순수함과 찌끼에서의 분리, 그리고 사물 안에 건전함과 양호함의 발견이 있다. 금은 불 속에서 연단됨으로 늘어나거나 더해지지 아니하며 오히려 믿음은 당면하는 반대와 고통으로 성취되며 증진되어지고 증가된다. 금은 종국에 가서 "없어질"이란 말씀과 같이 없어진다. 그러나 믿음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한다. 누가복음 22장 32절에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으니"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다.

2. 믿음의 연단은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된다. 영광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가게 되는 존경과 가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인간은 성도들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찬양이란 존경의 표현, 혹은 선포가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마지막 날에 "오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여…"라고 하시며 그의 백성들을 명하실 것이다. 영광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광채로써 영광과 찬양을 받음으로 하늘에 찬란히 빛난다.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라"(롬 2:10). 만일 연단된 믿음이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된다면 이 사실은 그 믿음이 고난으로 인하여 공격을 당하고 시련을 겪는다고 하여도 금보다 더 귀한 것이므로 당신에게 믿음을 권유하게 된다. 만일 당신이 현세에서의 실용면에서나 마지막 날의 사건으로써 믿음과 금의 가치를 평가할 때는 아무리 세상이 그것을 믿을 수 없는 역설로 취급한다 하여도 이 사실은 진실로 남게 된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 다시 나타나실 것이며 그가 그렇게 나타나실 때에 성도들도 그와 함께 나타나고 그들의 장엄함은 찬란히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연단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들은 더욱 빛날 것이다. 연단은 곧 끝날 것이다. 그러나 존귀와 영광과 찬양은 세세토록 지속될 것이다. 이 사실이 당신으로 하여금 현재의 고통을 잊게 할 것이다. 또한 "그들은 좀더 찬란하고 영원한 영광을 여러분들을 위하여 이루신다. "
Ⅲ. 사도 베드로는 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두 가지 설명으로 특별히 칭찬하고 있다.

1. 믿음의 대상이 되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예수의 탁월을 들고 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 주님이 육신으로 계실 때 보았으나, 이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은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믿었다(8절).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마귀도 실로 그렇게 믿는다), 예수의 능력을 믿고 따른다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다. 이러한 것은 복종과 의지, 그리고 예수로부터 약속된 선한 모든 것을 기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성도들의 괄목할 만한 신앙의 소산물이다. 결과는 사랑과 기쁨이다. 이 기쁨은 표현할 수 없는 크나큰 기쁨이다. 즉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너희가 기뻐하느니라." 아래의 사실을 알아두자.

(1)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나타난 사실에 어느 정도 접근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감각은 느낄 수 있고 실제적인 것과 소통이 원활하나, 이성은 보다 높은 차원의 안내자이며 이는 보다 확실한 추론에 의하여 원인의 작용과 사건들의 확실성을 주도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은 한층 멀리 올라간다. 그리고 감각과 이성이 발견해 낼 수 없는 특이한 풍요함을 우리에게 확신시킨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증이다.

(2) 진정한 믿음은 결코 혼자 있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강한 사랑을 낳게 한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그에 대해 성실한 사랑을 가진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께 대한 최대의 존경에서 나타나며, 애정은 그를 갈망, 그와 같이 하기로 결심한 의지, 기쁜 생각과 즐거운 봉사와 고난 등등이 사랑의 본질을 나타냈다.

(3) 그리스도께 대한 진실한 믿음과 사랑이 있는 곳에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이 있다. 이 기쁨은 표현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최선의 발견은 기쁨을 맛봄으로 이루어진다. 곧 그 기쁨은 하늘에 충만된 영공이다. 성장한 그리스도인의 현대의 기쁨 속에는 충만한 하늘과 장래의 영광이 가득차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믿음은 슬픔의 조건을 몰아내고 기쁨에 대해 최선의 동기를 부여한다. 선한 사람들이 때로는 어둠 속을 걷게 되나 이는 그들 자신의 실수와 무지, 혹은 두렵고 우울한 기질, 또는 약간의 죄된 행위나 얼마간 그들의 기쁨을 저하시키는 신의 슬픈 사건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주 안에서 기뻐할 이유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구원으로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합 3:18). 그들은 매일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았으므로 이 초대로 그리스도인들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9절). 여기에서 아래 사실을 주목해 보자.

[1] 성도들이 받을 축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혼의 구원이다. "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영혼(전체 인간에게 자리 잡고 있는 가장 고귀한 부분)이다. 구원은 여기에서 "믿음의 결국"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종국에 가서 믿음은 끝난다. 믿음은 영혼의 구원을 도우며 그의 사명을 이루고는 영원히 사라진다.

[2] 사도 베드로는 현재를 말한다. 곧 지금 여러분들은 실로 "믿음의 결국"(영혼의 구원)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3] 여기서 사용된 말은 시합장에서 승리자가 심판으로부터 면류관이나 상급을 받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와 같이 영혼의 구원은 이 그리스도인들이 구하는 상급이요, 이를 위해 수고하는 면류관이며 매일 매일 그들에게 더욱 더 가까워지는 목적이다. 이러한 점을 알고 넘어 가자.
첫째,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날그날 영혼의 구원을 성취하고 있다. 곧 구원이란 이생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결코 죽음으로 중단될 수 없으며, 영원으로 계속 되어지는 하나의 영구한 사건이다. 이러한 신자들은 거룩함과 경건한 마음, 그들의 사명과 하나님과의 교제, 기업의 획득, 그리고 거룩한 성령의 증거를 얻음으로 천국의 시작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사실이 괴로운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명확히 언급되었다. 그들은 세상에서 패하는 편에 있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무엇을 얻고 있는가를 상기시키고 있다. 만일 그들이 보다 못한 행복을 상실했다면 그들은 항시 그들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다.

둘째, 그리스도인이 그의 영혼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당당하다.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자신의 행복은 밀접히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하나를 정당하게 구한다면 다른 하나도 얻어야만 한다.


1:10
예언자가 나타낸 구원 (베드로 전서 1:10-12)

사도 베드로는 그의 편지를 받을 사람들에 대해 기술하며 그들이 놀라운 진보를 이룩했음을 선포한 후 계속해서 그가 구한 바 지니고 있는 근거를 그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은 유대인이요, 구약에 대해 대단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는 새로운 교리가 아니라 옛날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핀 것과 같은 것임을 그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하여 선지자들의 권위를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Ⅰ.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피던 "선지자들"은 그들 자신의 연구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바 곧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언한다든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특별한 일을 행하고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입은 자들이다.

Ⅱ. 선지자들의 연구의 대상은 구원과 "너희에게 임할 하나님의 은혜"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만백성에게 주어질 보편적인 구원과 유대인들에게 특별히 주어질 구원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들에게 임할 은혜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에 임할 빛과 은혜와 위로의 영광스러운 때가 임할 것을 내다보았는데 이러한 것은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복음의 시대에 나타날 사건 등을 보기를 원하고 듣기를 바랬던 바이다.

Ⅲ. 선지자들의 탐구하는 방법은 이러하였다.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피는 것"이다. 이 말들은 원광석에 이르기 위하여 땅을 파며, 흙뿐만이 아니라 바위를 꿰뚫는 광부들에 비교되리 만큼 강하고 두드러진 것이다. 곧 이 경건한 선지자들은 알기 위한 열심과 메시야 시대에 나타날 하나님의 은혜를 연구하는데 대단히 열심이었다. 영감을 받은 그들의 존재는 그들의 연구를 무용지물로 만들지 아니했으며,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혜와 지식을 증진시키는 일반적인 모든 방법을 활용하여야만 했다. 다니엘은 크게 사랑을 받고 영감에 충만한 사람이었으나 책과 연구를 통하여 시대의 징조를 이해하였다(단 9:2). 그들의 계시도 연구와 명상과 기도를 필요로 했다. 많은 예언들이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첫 의도에는 가까이 있는 어떤 인물이나 혹은 사건을 다루었으나 그들의 궁극적인 의도는 고난받는 자에 대한 혹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주목해야 할 몇 가지 사실을 기록해 보자.

1.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인간 구원의 교리는 가장 위대하고 현명한 사람들의 연구와 찬양의 대상이 되어 왔다. 자아의 고귀함과 위대하고 현명한 사람들의 이에 대한 관심은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의한 인간 구원의 교리를 연구하는데 가장 세심한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2. 선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나 또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많은 감동 감화를 받는다. 예언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유대인에게나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긍휼로 크게 기뻐하였다.

3. 크나큰 구원의 성취와 놀라운 은혜를 입은 자들은 그 구원을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야 한다. 이러한 것이 영감을 받은 선지자들에게 필요하였다면 우리와 같이 연약하고 무지각한 인간들에게는 더욱 더 필요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4. 복음으로 비롯된 은혜는 복음 이전에 있었던 모든 것을 능가한다. 복음의 분배는 복음 이전에 있었던 어떤 분배보다 가장 영광스럽고, 확실하며 이해하기 쉽고, 광범위하며, 효과적인 것이다.
Ⅳ. 고대의 선지자들이 주로 연구하였던 특수한 일들은 11절에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연구의 주요한 과제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때문에 선지자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보다 더 알고 싶어하였다.

1.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사망, 그리고 그 사망의 영광스러운 결말.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에 대해서 선지자들은 알기를 원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선지자들로 하여금 복음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전체적으로 보게끔 하였다. 그 복음의 개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다시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이다.

2. 메시야가 나타날 때와 그때의 형편을 말하고 있다. 의심할 것이 없이 이 경건한 선지자는 열심히 인자의 날을 보기를 열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에 다음 가는 것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그 목적에 대해 어떠한 것을 지시하는 한 선지자들은 메시야의 날이 성취되는 시간에 집착되었다. 그때(time)의 본질이 조용한 어느 한 때인지, 또는 괴로운 때인지, 평강 또는 전쟁의 어느 한 때를 이름인지 그들에 의해서 엄밀히 고려되었다. 아래의 몇 가지 사실을 알아보자.

(1)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육신을 입기 전에는 하나의 본질을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영은 당시 선지자들에게 임하였었고 또한 영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존재하여야만 했다.

(2) 삼위 일체의 교리는 구약 성서에 있어서 성도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선지자들은 그들 안에 있는 영에 의하여 감동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곧 이 영이 그리스도의 영임을 알았는데 이 영은 결과적으로 그리스도 자신과 구별되는 것이었다. 여기에 복수(plurality, 複數)가 나타나며 구약의 또 다른 부분으로부터 삼위 일체가 정립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3) 여기에 묘사되어 있는 성령의 역사는 성령이 하나님이 되심을 증거하고 있다. 성령께서 선지자들에게 이미 오래 전 그들에게 임한 여러 가지 사건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을 "지적하고" 나타내 증거 하셨다. 또한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확신시키기 위한" 이적을 행함과 그의 고난을 받는 성도로 하여금 믿을 수 있게 함으로 그 사건의 확실성을 "증거 하거나" 오래 전 명확성을 제시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지전능하심으로 이러한 사실들이 그리스도의 영이 하나님 되심을 증거 한다.

(4) 여러분들이 영광에 이르기까지는 그리스도 예수의 예를 보아 봉사와 고난의 때를 예측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주님을 능가하지는 못하였다." 고난의 시기는 짧다. 그러나 영광은 영원하다. 고난의 때로 하여금 매우 날카롭고 가혹한 것으로 내버려 두라. 그것은 결코 상하게 하지 못하며, "우리에게 보다 놀랍고 영원한 영광을 이룩할 것이다."
Ⅴ. 그들의 꾸준한 연구와 노력이 성공의 열매를 얻게 되었다. 그들의 알려고 하는 경건한 노력은 헛되지 아니했다. 이는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평온케 하며 위로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만족할 만한 계시를 나타내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한 일들이 당대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확고하며 확실한 것이다. 이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한 말씀과 같이 사도들의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성령의 완전한 지도 아래 온 세상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이것은 "천사들도 살피기를 원하는 바이다."

여기에 세 종류의 연구가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인간 구원의 대 사실을 탐구하는 자들이 있다.

1. 인간 구원의 사실을 "열심히 연구하는" 선지자들이다.

2. 모든 예언을 탐구하는 사도들은 그 예언의 성취를 증거 하는 자들이며 복음을 선포하는 가운데 그들이 알고 있는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자들이다.

3. 천사들은 이 사실에 대해 아주 주의 깊게 알아보려고 한다.
아래의 사실을 알아보자.



(1) 그리스도의 지식과 우리의 임무를 추구하는 부지런한 노력은 확실히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예언자들은 계시로써 응답을 받는다. 다니엘은 열심히 연구하며 해답을 얻었다. 곧 베레안(Bereans)들은 성서를 연구하여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

(2) 가장 경건하고 선량한 사람들은 때때로 그들의 정당하고 고귀한 요청을 거부당한다. 선지자들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를 알도록 허락 받은 이상으로 그들이 알기를 원하는 것은 합당하고 귀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거부당하기가 일쑤이나 선량한 부모들이 그들의 부도덕한 자녀들을 위하여 또는 가난한 자들이 빈곤 때문에 선량한 사람이 죽음에 대항하여 드리는 기도는 합당하며 귀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그들의 정직한 요구가 가끔 거부를 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필요에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신다.

(3)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게 보다 남들에게 유용한 존재가 되는 것이 영광이요, 실재적인 것이 된다. 선지자들은 자신들을 섬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섬겼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롬 14:7)라고 하신 말씀과 같다. 인간이 자신의 목적만을 위하고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것보다 더 인간의 본성이나 기독교의 원리에 위배되는 일은 없다.

(4) 하나님의 계시는 비록 점차적이며 지극히 조금씩 나타나는 것일지라도 모두 완전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교리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온 것으로 정확히 일치한다.

(5) 복음주의 적인 전도자의 능력은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성령에 의존하고 있다. 복음은 성령의 임무다. 곧 복음 선포의 성공여부는 성령의 역사와 축복에 기인한다.

(6) 복음의 신비와 인간 구원의 방법은 매우 존귀한 것이므로 축복 받은 천사들이 열심히 그것들을 살펴보기를 원한다. 그들은 이 사실을 탐구하는데 진지하고 정확하며 근실하다. 그들은 인간 구원의 모든 계획을 깊은 주의와 흠모의 정을 가지고 숙고하고 있다. 특별히 사도들이 지적하고 하는 관점은 "아홉 천사 중 둘째 천사인 케루빔 천사가 하나님의 보좌를 계속적으로 흠모하듯이" 이것들은 천사들이 내려와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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