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은 당신이 있는 곳에서 당신을 만나 주신다 (굶주린 마음과 습득된 입맛, 일상에 거하시는 성령님, 누구의 행위?, 표현에서 형...
3. 성령은 당신이 있는 곳에서 당신을 만나주신다
p.96 예전은 우리 마음의 눈금을 조정하는 기술이다. 예전은 우리의 사랑이 특정한 '텔로스'를 겨냥하게 만들어서 우리의 사랑을 훈련한다.
p.100 생각만으로 새로운 굶주림을 얻을 수 없다...새로운 습관을 갖기 위해서는 새로운 실천이 필요하다. 새로운 습관을 갖기 위해서는 전혀 새로운 실천이 필요했다. 이렇게 습득된 습관을 버리기 위해서는 대항형성적 실천, 나의 굶주림을 유지하는 다른 주기와 반복적 행위가 필요했다.
p.103 실천이 습관을 낳았고, 이제 그 습관은 내가 그 실천과 그 실천이 약속하는 바를 원하게 만들었다. 새로운 갈망을 원하게 만들었다.
p.104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성 형성을 위해서는 수 많은 습관의 재형성이 필요하다. 우리가 평생에 걸쳐 수 많은 무질서한 습관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영성형성을 중시하는 것 자체가 성령이 주시는 선물이다.
p.106 사랑이 습관인 동시에 굶주림이라면, 궁극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취향과 갈망도 같은 방식으로 바뀔 것이다. 성찰은 중요하다. 하지만 성찰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습관을 새겨 넣음으로써 우리의 굶주림을 재형성하는 새로운 실천을 시작하겠다는 자극을 얻어야 한다.
p.107 거룩해지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 과정은 오디오북을 듣는 것보다는 웨이트 와처스 프로그램과 더 비슷하다.
p.108 제자도는 일종의 이민과 같아서, 어둠의 왕국에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의 왕국으로 이주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천상의 여권을 받는다. 새로운 왕국으로 옮겨 가는 것은 다른 영토로 순간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삶의 방식에 익숙해지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새로운 습관을 획득해야 한다.
p.111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신다는 성육신적 교휸에 관한 예화다. 주님은 우리가 습관의 동물임을 아신다. 그 분이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굶주림에 의해 움직이는 것을 아신다. 습관을 형성하는 실천이 우리 안에 우리의 욕구와 갈망을 새겨넣은 것을 아신다.
p.112 달라스 윌라드가 훈련의 영에 관해 말할 때, 영적훈련은 변화시키시는 성령의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통로다. 즉 변화시키시는 성령의 사역이 가장 강력하고 열정적으로 이뤄지는 공간은 그럴 가능성이 가장 적어보이는 곳이 바로 교회다.
p.115 성령은 이런 물질적 실천을 통해서, 그 안에서 우리를 만나시고 자라게 하시고 변화시키시며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다. 교회의 예배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성령이 강력히 임재하시는 독특한 공간이다. '예전과 의례'의 핵심은 하나님이 중심이신 강력한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예배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p.116 종교개혁자들은 에전을 하나님의 행위와, 우리가 믿음으로 그 행위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했다. 예배는 하나님이 임재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자리다.117
p.121 예배는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형성되는 것이다. 예배는 그저 우리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행하시는 공간이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다시 훈련시키시는 체육관이기에 제자도의 핵심이다.
p.125 예배의 핵심이 형성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왜 형식이 중요한지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p.126 에배는 일차적으로 혁신적 창의성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지혜로운 수용과 신실한 반복을 위한 공간이다.
p.129 예배를 하나님이 당신의 가장 근원적 습관을 다시 만들어 가시는 하향적 만남으로서의 초대로 이해할 때 반복은 전혀 다르게 보일 것이다. 반복은 하나님이 우리 습관을 바로 잡으시는 방식이다. 형성적 패러다임에서 반복은 거짓이 아니다. 당신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복없는 형성은 없기 때문에 이 점이 중요하다.
p.130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실천이 필요하며, 실천하기 위해서는 반복이 필요하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믿기 위해서 질서에 속해 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지향을 재조정하시고 우리 욕망을 재형성하시고 우리 사랑의 습관을 바로 잡으시는 무대다.
예배는 그저 우리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행하시는 공간이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다시 훈련시키시는..'(p.125)
The Spirit Meets You Where You Are
굶주린 마음과 습득된 입맛: 배고픔의 습관 바로 잡기
• "예전들은 눈금매기기 (교정) 기술이다.
예전들은 우리 사랑을 어떤 특정한 목적 (telos)를 향하여 표적으로 삼도록 훈련한다."
우리 마음은 실존적 나침판, 혹은 몸과 직결된 자동 유도 장치와 같다.
어떤 특정한 시각으로 제시하는 좋은 삶에 대한 전망은 이러한 매력이 있다.
바로 이 매력이 우리 행동과 태도를 포함한 모든 삶의 방식을 형상한다.
그래서 예전은 눈금을 조정하는 기술이다.
예전은 어떤 특정한 텔로스를 겨냥하도록 우리의 사랑을 훈련시킨다.
하지만 모든 예전이 또같지 않다.
갈못된 텔로스를 겨냥하도록 만드는 예전들이 우리 주변에는 경쟁하고 있다.
따라서 대항 예전, 복음의 예전, 하나님 나라의 예전으로 눈금조정을 해야할 필요가 있다.
모두가 굶주린 마음을 지니고 있다
(Everyone's got a hungry heart)
오호라!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이사야 55장 1절)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라 (마 5.6)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마음은 위장과 같다.
우리의 지성은 카르디아 (κᾰρδῐ́ᾱ), 그리고 내장 (σπλάγχνα)와 연결된다.
카르디아는 직감 (gut feeling)이다.
gut, 즉 내장이다.
추악한 아니러니
『온 삶을 먹다 (Bringing It to the Table)』
웬델 베리가 내 마음을 바꿔 놓았다!
그런데 나는 코스트코 음식 매장에서 웬델 베리를 읽고 있었다!
여전히 맥도날드의 드라이브 스루를 이용한다.
내가 원하는 바와 내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바 사이의 간격을 보여주는 생생한 그림
음식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얻는다고 해서 새로운 식습관을 가지게 되지는 않는다.
새로운 습관을 위해서는 전혀 새로운 실천이 필요하다.
"대항 형성적 실천" - 다른 주기와 반복적 행위
(1) 언약 공동체의 일일원이 되기로 맹세 (community)
(2) 내가 원하지 않았던 실천에 열심 (commitment)
운동 프로그램
운동이 좋아서가 아니라 유익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 단계로는 부족하다.
운동을 원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새로운 식단
고기와 감자만 좋아하는 사람이었음을 깨달았다.
성찰을 촉구한다.
이 단계로는 부족하다.
반복을 통해 새로운 식습관이 자동화되었을 때, 새로운 식습관을 가지는 사람이 된다.
여기까지는 습관이 굶주림을 변화시키는 삶의 방식으로 진입하는 단계에 불과하다.
결국, 의례가 습관을 바꿔놓고, 바뀐 습관은 새롭게 질서가 잡힌 굶주림을 만들어낸다.
새로운 굶주림이 만들어질 때에, 바로소 삶의 방식이 바꿨다.
실천이 습관을 낳았고, 이제 그 습관은 그 실천과 실천으로 원하는 바를 원하도록 만들었다.
중요 부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자전거.
샌들린은 8개월간의 연습 끝에, 이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엣 습관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샌들린의 어린 아이들은 단 2주만에 이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
정보와 지식 습득이 아닌 습관 형성이 중요하다.
사랑은 습관인 동시에 굶주림이다.
궁극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취향과 갈망도 비슷하게 변한다.
잘된 형성과 잘못된 형성에 대한 성찰 (reflection)이 중요하다.
성찰은 새로운 습관을 새겨 넣음으로써, 우리의 굶주림을 재형성하는 새로운 실천을 하겠다는 자극 (stimulus)에 중요한 촉매 (catalyst).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왜 왜 중요한가?
우리의 사랑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욕망의 방향을 재설정하고, 우리의 굶주림을 다시 훈련하라고 촉구하시는 공간이다.
말씀을 섭취하고, 다시 말씀을 주시는 분을 욕망하는 새로운 굶주림을 획득하는 곳이다.
기독교 예배가 왜 중요한가?
하나님과 그 분이 욕망하시는 바에 대한 새로운 굶주림을 획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도록 그 분의 창조 세계로 보냄을 받는 잔치이다.
교회의 실천은 마음의 근육, 세상에서 움직이고 행동하는 방식을 좌우하는 근본적 욕망을 반복하여 훈련시키는 영적 운동이다.
장 깔뱅에게 교회는
체육관, 운동장, 학교이자 거룩하게 하시고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파이데이아 (paideia)를 배우고 가르치는 준비와 실천의 공동체이다.
예전은 눈금을 조정하는 기술이다.
우리 마음은 실존적 나침반, 혹은 몸과 직결된 자동 유도장치와 같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 마음이 지향하도록 조정된 일종의 자북을 향해 자석처럼 당겨진다. 좋은 삶의 특정한 전망에 대한 이런 이끌림이 우리의 행동과 태도를 포함한 모든 삶의 방식을 형성한다.(우리의 사랑이 특정한 ‘텔로스’를 겨냥하게 만들어서 우리의 사랑을 훈련한다. 하지만, 어떤 예전은 우리 마음의 눈금을 잘못 조정하여 가짜 자북이나 경쟁하는 자북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하지만 이렇게 잘못된 방향을 지향하는 마음의 나침반을 고치려면 눈금을 재조정해야 한다. 우리의 사랑이 세속 예전으로 무질서해질 수 있다면, 대항하는 예전 곧 복음으로 “가득 차 있으며” 하나님과 그 나라를 가리키는 구체적이며 공동체적인 실천으로 그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아야(눈금을 재조정해야) 한다는 것도 참이다.
신학자(노래꾼인 브루스 스프링스틴) 제시한 또 다른 은유를 생각해 보자. “모두가 굶주린 마음을 지니고 있다.” 성경도 굶주림이라는 은유를 사용해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갈망을 일종의 굶주림이나 욕망, 갈증으로 묘사한다.(시42:1-2, 이사야55:1, 마5:6) 즉, 당신이 먹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
당신이 먹고 싶어 하는 바가 바로 당신이며, 이것은 습득된다. 굶주림은 그 자체가 특정한 실천으로 형성된 습관이다. 완싱크의 말처럼 먹는 행위는 대부분 “아무 생각 없이” 이뤄진다. 우리가 어리석거나 무지해서가 아니라, 먹는 행위가 습관의 힘이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인간 행위, 즉 2장에서 설명한 자동성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듯이 입맛은 습득된다. 예를 들어, 수많은 가공식품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액상과당은 가공식품의 부정적인 효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더 많이 먹고자 하는 욕망을 만들어 낸다. 그 결과 “조작된” 입맛 때문에 먹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기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우리의 가장 깊은 실존적 굶주림, 즉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절대로 만족을 줄 수 없는 우상을 갈망하고 목말라 하도록 은밀히 훈련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말 어려운 점은 이것이다. 생각만으로는 새로운 입맛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생각만으로는 새로운 굶주림을 얻을 수 없다. 좋은 식습관을 원한다. 그러나 생각만으로, 안다고 해서 새로운 식습관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원래의 식습관을 제거하고 대체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실천이 필요할 것이다. (p101 ) 새로운 훈련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식습관과 운동 프로그램에 임해야한다. 운동이 좋아서가 아니라 운동이 유익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운동을 시작한다.(p102) 또 성찰을 촉구한다. 하루 종일 무엇을 먹고 마시는지 생각해 보라고 요구한다. 당신은 계산하고 할당해야 한다. 먹는 음식을 의식하고 양심적으로 거절해야 한다. 반복을 통해 그런 식습관이 자동화되었을 때 당신은 새로운 식습관을 지닌 사람이 된다. 처음에는 흡사 운전을 배우는 십대처럼 의식이라는 빙하 위에 있는 눈덩이로 식생활을 관리하고, 모든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습관이 당신의 굶주림을 변화시키는 삶의 방식으로 진입하는 단계에 불과하다. <결과는 어땠을까? 나는 새로운 굶주림을 갖게 되었다. 내가 샐러드를 갈망하거나 그리스식 요거트를 먹고 싶어 하거나 초콜릿을 거부할 것(이것은 훨씬 더 큰 기적이다.)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의례가 내 습관을 바꿔 놓았고, 바뀐 습관은 새로운(바르게 질서 잡힌) 굶주림을 만들어 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성 형성을 위해서는 수많은 습관의 재형성이 필요하다. 우리가 평생에 걸쳐 수많은 무질서한 습관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의 영성 형성이 그리스도의 몸의 가장 중요한 소명 중 하나인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란 모든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나라를 지향하는 습관을 형성하는 실천에 몰입할 기회를 얻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의 영성 형성을 중시하는 것 자체가 성령이 주시는 선물이다. .... 옛 습관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샌들린의 아들의 경우는 전혀 달라서, 단 2주 만에 “거꾸로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영적 통찰을 얻을 수 있다. 가정과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정보만 주입하는 데만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 어려서부터 아이들의 습관 형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랑이 습관인 동시에 굶주림이라면,
궁극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취향과 갈망도 같은 방식으로 바뀔 것이다. 성찰(나의 예는 말씀과 기도)은 중요하다. 성찰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습관을 새겨 넣음으로써 우리의 굶주림을 재형성하는 새로운 실천을 시작하겠다는 자극을 얻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의 사랑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욕망을 재정향하고 우리의 식욕을 다시 훈련하라고 촉구하시는 공간이다. 사실 말씀으로 영양을 공급받는 곳, 우리가 “말씀을 먹고” 생명의 떡을 받는 곳이 바로 교회가 아닌가? 교회의 실천은, 우리를 마음의 근육, 즉 우리가 세상에서 움직이고 행동하는 방식을 좌우하는 근본적 욕망을 훈련시키는 반복 행위로 이끄는 영적 운동이기도 하다. <“칼뱅에게 교회는 체육관, 운동장, 학교,(우리가 바라고 기도하기는) 거룩하게 하시고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파이데이아’를 배우고 가르치는 준비와 실천의 공동체다”> 즉 거룩해지고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성화 과정은 오디오북을 듣는 것보다는 웨이트 와처스 프로그램과 더 비슷하다. 성화가 내 지식과 행동의 간격을 메우는 것(말하자면, 더 이상 코스트코에서 웬델 베리의 책을 읽지 않는 것)과 같다면, 그것은 곧 내가 원하는 바를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려면 가장 뿌리 깊은 습관이 바뀔 수 있도록 순순히 훈련과 섭생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하나님의 영은 바로 그 공간, 그 간격에서, 번개 같은 마법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적 습관을 징집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구체적 실천을 통해 우리를 만나 주신다. 성화를 그리스도로 “옷 입는” 법을 배우는 것(롬13:14, 골3:14)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그분의 몸,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가 되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 일상에 거하시는 성령님
p108 이야기 (한 마을에 홍수가 나기 직전이었다. 그 마음에는 하나님이 이 재앙에서 자신을 구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이 도와주러 오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물이 무릎까지 차오르고 이웃들이 노 젓는 배를 타고 마을을 빠져나갈 때, 카누에 탄 친구들이 지나가면서 “어서 타! 널 구하러 왔어” 라고 말했다. 그 남자는 “아냐, 난 괜찮아, 하나님이 구해 주실 거야”라고 대답했다. ............................수위는 계속 올라가고 창문 사이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터보트에 탄 그리스도인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배에 탄 사람들이 계속 배에 타라고 재촉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결국 남자는 지붕 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헬리곱터가......그는 이번에도 하나님이 자신을 구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며 헬리곱터에 타지 않았다. 구조요원은 그를 설득하려고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 이 이야기는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그 후에 천국에서 이 당황한 남자는 주께 정중히 여쭈었다. “하나님이 저를 구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어디에 계셨습니까?” “무슨 소리냐?” 주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카누와 모터보트와 헬리콥터를 보내지 않았느냐?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랐느냐?” 오래 된 이 이야기는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다. 하나님이 일상에서 우리와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우리는 너무나 자주 특별한 것에서 성령을 찾는다. 우리는 은총이 언제나 “가장 새롭고 가장 좋은 것”과 직결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새로운 것에서 하나님을 찾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단순하고 평범한 식사에서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이 무질서한 세속 예전으로 사랑이 잘못 형성된 습관의 동물이라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시는 최선의 선물은 당신의 사랑을 재형성하고 다시 훈련시키는 성령으로 충만한 실천이다. 따라서 그분은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대항 형성적 실천을 통해, 굶주림을 만들어 내는 의례와 사랑을 빚어내는 예전을 통해 우리를 만나 주신다. 그분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로, 성령이 주시는 힘 덕분에 가능한 실천을 우리에게 주신다. 이것이 바로 달라스 윌라드가 “훈련의 영”에 관해 말할 때 의미했던 바다. 즉, 영적 훈련은 변화시키시는 성령의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통로다.
교회예배가 제자도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영성 형성은 평생에 걸쳐,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주 계속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말씀과 성찬대 주위에 모인 회중의 예배의 삶에서 퍼져 나오며 거기서 영양을 공급받는다. 교회 없이는 성화도 없다. 크레이그 다익스트라 -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많은 실천의 실천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무언가를 성취해서가 아니라, 이런 실천이 “성령이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예전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는” 법을 배우는 방식이다.
● 누구의 예배? 누구의 행위?
“예배” 라는 단어를 들을 때 우리 중 90%는 아마도 설교(가르침) 전에 드리는 “음악”이나 “찬양”을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예배를 일차적으로 우리가 하는 무언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왜 예배가 제자도의 핵심인지를 바르게 이해하려 한다면, 예배에 대한 이해를 확대하고, 확장하고, 솔직히 말해 수정할 필요가 있다. 예배는 전적으로 몸으로 하는 실천이지만 물질적이기만 한 행위는 아니다. 예배는 온전히 자연적이지만 절대로 자연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 예배는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라는 초대다. 간단히 말해, 몸에 의한 행위의 중요성을 예배의 자연화로 이해하여 성령의 역동적 임재를 부인해서는 안 된다. 그와 반대로 성령은 이런 물질적 실천을 통해서, 그 안에서 우리를 만나시고 자라게 하시고 변화시키시며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다. 마르바 던 – 하나님은 우리 예배의 주체인 동시에 대상이시다. “예전과 의례”의 핵심은 “하나님이 중심이신 강력한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예배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예배의 일차적 목적은 “내가 느끼는 필요를 충족시키는” 경험이 아니며, 예배를 단지 욕망의 교수법으로 환원해서도 안 된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이시며, 예배는 그분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주체인 동시에 대상이시라고 말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예배의 청중인 동시에 행위 주체이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하는 행위, 그분을 위해 하는 행위다. 하나님은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 예배 가운데 활동하신다.
종교개혁자들은 예전을 하나님의 행위와, 우리가 믿음으로 그 행위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개혁주의 예전을 지배하는 사상은 이중적이다. 즉, 예번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임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확신과 우리가 성령의 사역을 통해 믿음과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행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확신이다. 예전은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의 만남, 양자가 행동하지만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시고 우리가 응답하는 만남이다. 칼뱅 – 성례전이 “엄밀히 말해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고 강조했다. “세례나 주의 만찬에서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저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은총을 받는다. 우리 쪽에서 보면 세례는 수동적인 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을 내어드리는 믿음 말고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분을 예배할 때 그분은 교회의 예배 가운데 일하신다. 따라서 예배는 하나님 임재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자리다. 예배에서 이뤄지는 하나님의의 행위에 대한 강조에는 은혜로 가능해진 하나님과 백성의 상호작용, 부르심과 응답, 은총과 감사라는 예전적 형식도 포함된다.
“기독교 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하향적’ 움직임은, 성자를 통해 성령에 의해 교회에 신적 본성을 자비롭게 거저 드러내시는 성부의 계시에서 출발한다. 예배에서 인간의 응답이라는 ‘상향적’ 움직임도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이 주도하신다. 인간의 응답인 ‘찬양과 감사의 제사’는 내주하시는 성령을 원천으로 삼는 믿음에서 나온다.”(에베소서2:8-10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전의 갱신에 관한 이런 역사적 통찰이 오늘날에도 유효할까?
우리에게도 다시 한 번 예배 개혁이 필요할까?
결국 현대의 복음주의 예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개신교 종교개혁의 원인이었던, 각본에 따라 이뤄지는 자연주의와 예배를 구경꾼으로 만드는 수동성을 흉내 내고 있는 게 아닐까?
“현대적 예배”라는 지금의 형식은 어떤 식으로 우리를 예배의 유일한 “행위자”로 만들고 있을까?
우리가 예배에서 하나님의 행위의 우선성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예배 가운데서 일하시는 것조차 보지 못하게 만들까?
우리는 “임재”에 초점을 맞추는 정태적인 중세의 패러다임에 또 다시 사로잡히고 만 것은 아닐까? (예를 들면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나” 보다 “하나님, 그리스도”라는 말이 적게 나온다. “나 주를 경배하리, 나 엎드려 절하며....) 우리가 예배의 주요 행위자라고 암묵적으로 가정할 때, 우리는 예배를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예배”를 우리가 모여서 찬양하는 시간, 에배 중에서 우리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시간으로 축소시킨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단 한 분의 관객”이신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고 생각한다. 예배가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표현이라면 우리가 가장 원치 않는 바는 위선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표현은 정직하고 참되고 참신하고 순수하고 “진정한” 것이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 보여 주기 위해 예배한다면, 똑같은 행위를 반복해서 할 때 스스로 위선적이라고 느끼기 시작 할 것이다. 예배는 표현으로 이해할 때는 예배의 진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참신함을 추구한다.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표현”의 패러다임은 이제 예배 형식과 복음 내용의 미심쩍은 구별과 결합된다.(죽은 의례의 회칠한 무덤에 불과 하다.) 현대적이고 매력적이고 적절한 방식으로 복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버릴 수도 있고 버려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나는 매일 성경묵상에서 이사야 1장 말씀이 생각난다. 하나님이 제사ㆍ예배 싫다!!!)
현대의 구도자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낯설고 이상한 오래되고 케케묵은 중세의 실천에 동참하라고 요구하는 대신, 너무나도 익숙해서 그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현대의 실천을 채택하여 예배를 개조한다. 고딕 성당의 위협적이며 으스스한 분위기 대신에, 커피숍이나 공연장, 쇼핑몰 같은 분위기에서 드리는 예배로 초대한다. 참신하고 익숙한 형식으로 예수를 제시하기 위해서(“전통”으로 취급해 폐기할) 역사적 예배라는 물려받은 옛 형식으로부터 “예수”를 정제해 낸다. 커피숍에서 이뤄지는 거룩한 경험을 통해 와서 예수를 만나라. 쇼핑몰을 본떠서 개조해서 익숙하게 느낄 만한 예배 공간으로 와서 복음을 들으라. 형식 자체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과 관계 맺는 법을 가르치는 욕망의 교수법이다. 복음 메시지를 정제해서 쇼핑몰이라는 형식에 심고자 할 때,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만날 수 있는 참신한 방법을 찾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 실천 형식 자체에 이미 세상을 이해하는 특정한 방식이 가득 차 있다. 쇼핑몰 예전은 모든 것을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사용 가능한 상품으로 이해하는 소비주의를 마음 차원에서 가르치는 공간이다. 예배를 표현으로 이해하는 이러한 상향식 패러다임이, 특히 북미 복음주의 권에서 예배를 떠올릴 때 우리 머릿속에 즉각 떠오르는 이미지를 상당 부분을 특징짓는다.(구 글에서 “예배”를 검색(예를 갖추어 절한다, 신앙의 대상에게 존경과 숭앙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교회에 가장 중요한 목적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고,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가장 큰 계획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예배를 잘 드려야한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책임이며, 의무이다.)할 때 나오는 이미지를 살펴보면 내 말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배를 표현이라고 생각한다면 의례를 “행위에 의한 의로움”과 혼동하고 말 것이다. 즉 표현주의는 상향식 관점에서 인간의 노력에 가치를 부여하며, 그 결과 오히려 행위에 의한 의로움에 더 가까워진다.
예배는 위로부터 아래로 이뤄진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 헌신을 보여 드리고 찬양을 드리기 위해서만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지향을 재조정하시고 우리 욕망을 재형성하시고 우리 사랑의 습관을 바로잡으시는 무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행하시는 공간이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다시 훈련시키시는 체육관이기에 제자도의 핵심이다.
● 형식이 중요하다
예배의 핵심이 형성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서소 왜 형식이 중요한지를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기독교 예배에서 우리가 순종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실천을 통해 하나님은 그분의 왕국을 향해 우리의 사랑을 재 습관화하신다. 예배는 일차적으로 혁신적 창의성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지혜로운 수용과 신실한 반복을 위한 공간이다. 목적 지향적이며 역사적인 기독교 예배의 형식에 관해 말할 때 나는 “현대적” 예배에 반대해 “전통적” 예배를 옹호하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기타에 반대하고 파이프 오르간을 옹호하거나 찬양대와 드럼에 대한 논쟁에서 어느 한쪽을 편들려는 게 아니다. 나의 주장은 더 근본적이면서 덜 과거 지향적이다. 기독교 예배가 성경 이야기로 빚은 실천의 집합체일 때 예배는 제자도의 핵심이 된다. 성경 이야기가 중심이고 성령으로 가득한 예배만이 대항하는 세속 예전으로 형성된 습관을 제거할 수 있는 대항 형성적 실천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예배가 세속 예전에 예수라는 이름만 덧붙인 형태에 불과한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예배는 예배라는 이름을 취하면서도 그 능력은 거부한다. 따라서 예수에 관한 노래를 부르지만 예배 “경험”의 형태나 형식은 소비주의 복음을 부추길 뿐이며, 예수와의 무의식적 만남을 또 다른 상품으로 취급할 뿐이다. 이런 현대적 예배 형식에는 ‘샬롬’에 대한 하나님의 전망이 아니라, 소비와 폐기를 통한 행복이라는 소비주의의 전망을 ‘텔로스’로 삼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이 배워야 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를 위해 어떤 실천을 채택할지를 더 의도적이고 의식적으로 결정했다. 그들은 예전적 삶의 정신은 이스라엘에서 그 기원을 찾았지만, 단순히 회당을 “예수화”하지는 않았다.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형성할 주기와 실천을 가려내고자 할 때 신실한 혁신이 이루어졌다. 여기에는(예를 들어, 우리에게 세례와 주의 만찬을 주셨던) 예수님의 명령에 대한 구체적 응답뿐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지향하는 예전에 포함될 형성적인 문화적 실천을 신중하게 고르고 재전유하고 재조정하는 과정도 포함된다. 따라서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셨던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뤄진 예배 공동체를 특징지어야 할 문화적 실천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교회)은 계속해서 노력해 왔다. 역사적 기독교 예배의 유산이, 예수님이 약속하셨듯이 성령이 진리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의 축적된 지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예배가 단순히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형성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형성하는 예배 형식에 의식적이며 의도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
예배를 하나님이 당신의 가장 근원적 습관을 다시 만들어 가시는 하향적 만남으로의 초대로 이해할 때 반복은 전혀 다르게 보일 것이다. 반복은 하나님이 우리 습관을 바로잡으시는 방식이다. 형성적 패러다임에서 반복은 거짓이 아니다. 당신은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복 없는 형성은 없기 때문에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덕의 형성을 위해서는 실천이 필요하며, 반복 없는 실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삶의 다른 모든 영역, 예를 들어 골프 스윙과 피아노 연주, 수학 실력을 기르고자 할 때 반복을 좋게 받아들인다. 주님이 우리를 습관의 동물로 창조하셨다면 어떻게 반복이 영적 성장에 해롭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오스카 와일드의 도발적인 글 “예술가로서의 비평가”는 우리에게도 적절한 통찰을 제공한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실천이 필요하며 실천하기 위해서는 반복이 필요하다. 이 글 속 대화에서 길버트가 “당신은 사랑하기 원하는가?”하고 묻는다. “사랑의 연도를 사용하라. 그러면 그 말들이 세상이 그 말들의 원친이라고 믿는 갈망을 만들어 낼 것이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넉넉히 쏟아부으신 그 사랑을 길러 내기 위해 그분이 우리에게 이 사랑의 연도를 주셨다. 기독교 예배라는 예전은 우리가 반복해서 드리는 바로 이 사랑의 연도다.
2017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북어워드 수상
2017 달라스 윌라드 센터 북어워드 수상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
우리가 예배하는 대상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우리는 왜 우리가 마땅히 사랑해야 할 분 대신에 다른 신들을 사랑하게 되는지 잘 모른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기 원하지만, 오히려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를 형성하는 문화의 힘과 우리를 변화시키는 기독교 실천의 가능성을 깨닫도록 도와준다.
예배는 문화를 만들려는 우리의 노력이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지향하도록 우리의 사랑과 갈망을 길러 내는 “상상력 저장고”다. 그렇기에 교회와 신자 공동체의 예배가 기독교의 형성과 제자도의 중추요 중심이 되어야 한다.
저자는 영화, 문학, 음악 등의 예를 창의적으로 활용하여 독자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한편, 결혼과 가족, 청소년 사역, 신앙과 일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추가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형성하는 개인과 공동체의 실천에 대해서도 제안한다.
▒ 출판사 리뷰 ▒
당신의 생각이 당신일까, 당신의 습관이 당신일까? 흔히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고 행동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별 생각 없이, 미처 의식하지도 못한 채 하는 행동이 얼마나 많은가? 어쩌면 습관처럼 배인 일상이 오히려 실제 나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리고 그 습관과 일상이 실제 나의 영성이라면, 어떨까?
내가 사랑하는 것이 곧 내 자신이다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주장을 귀하게 여긴다. 진리를 알면, 그래서 시각이 바뀌면 행동은 자연스레 따라서 달라진다고 가정한다. 모르기 때문에, 눈이 가려서 무지하기에 어리석은 행동을 되풀이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어떤가? 안다고 행동이 바뀌는가? 어째서 많은 이들이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해 잘 알지만 행동은 그대로인가? 지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지식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정의한다고 했다.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바로 우리라는 것이다. 그렇다. 행동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생각이 바뀌지 않아서가 아니라, 생각만 바뀌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까지 바꿀 수 있다면, 그제야 비로소 행동이 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비로소 우리의 ‘존재’가 달라질 것이다.
경험하고 예배하고 사랑하라
제임스 스미스는 “문화적 예전” 3부작의 첫 책인 《하나님나라를 욕망하라》에서 우리의 행동을 바꾸고, 심지어 정체성을 바꾸는 세속 사회의 예전을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가령, 대형 쇼핑몰은 “소비주의 복음”을 설파하는 현대의 신전이다. 사람들이 쇼핑몰 안에 들어가 그 속의 ‘은혜’를 체험하는 행위는 종교적 예배와 유사하다. 생각이 아니라 경험이 바뀌면서 새로운 정체성이 움튼다. 이처럼 작동하는 세속 사회의 예전은 쇼핑몰 말고도 도처에 널려 있다. 그들은 우리를 예배하게 만들고, 마침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바꾸어 낸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신자로 태어난다. 이렇게 거대한 해일이 덮치는데도 교회는 여전히 생각만을 바꾸려고 해서는 곤란하다. 하나님나라를 욕망하게 만들어야 하는 절박한 필요에 직면해 있다.
핵심을 적용한 확장판
이 같은 주장을 담은 《하나님나라를 욕망하라》는 출간 이후 각계각층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저자는 대중적인 수준에서 책을 썼다고 생각했지만 일반인이 소화하기에는 다소 버거워서, 책 내용을 조금 더 쉽게 풀어 써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고 그에 부응해 《습관이 영성이다》가 세상에 나왔다. 제임스 스미스가 그간의 대중 강연에서 강조한 핵심만을 선별해 묶고, 더 나은 이해를 위해 새로운 비유와 이미지, 예시를 추가해 재구성했다. 특히, 《하나님나라를 욕망하라》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세 분야에 기존의 주장을 새로이 적용했다. 그렇게 해서 가족과 가정(5장 가정의 예전), 어린이와 청소년(6장 신앙 교육의 예전), 믿음과 일(7장 소명의 예전)에 관한 장이 탄생했다.
출간 이후 <퍼블리셔스 위클리>(“저자 개인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문학과 철학, 영화, 예술 작품에서 인용한 예시들은 이 강력하고 영감 있는 영성 훈련 연구서를 훨씬 더 이해하기 쉽고 매력적으로 만들어 준다”), <뉴욕 타임스>(“인간은 자신이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욕망하는 것으로 주로 정의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우리 정체성의 핵심이요, 우리 행동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새해 결심이 늘 작심삼일로 끝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의 주장을 한번 시도해 봄 직하다”) 등 주요 매체와 단체의 주목을 받았으며, 2017년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북어워드와 달라스 윌라드 센터 북어워드를 수상했다. 책 내용을 소개하는 저자의 강연 동영상과 ‘토론 가이드’를 활용한다면 더 큰 유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더 깊이 있는 논의를 원하는 독자는 “문화적 예전” 3부작에 도전해 봐도 좋겠다.
이 책은 문화 창조자들의 영성을 다루면서, (내가 바라기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몰입하는 것이 제자도의 핵심이며 원동력임을 보여 준다. 예배는 문화를 만들려는 우리의 노력이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지향하도록 우리의 사랑과 갈망을 길러 내는 “상상력 저장고”다. 정의를 추구하고 문화를 새롭게 하고 모든 창조세계의 잠재력을 펼치라는 소명을 수행하는 것에 열정을 느낀다면, 당신의 상상력을 형성하는 일에 투자해야 한다. 잘 예배해야 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예배한다.
_머리말 중에서
그러므로 제자도는 앎과 믿음의 문제라기보다 열망과 갈망의 문제다. 그분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우리의 사랑이나 갈망을 그분의 사랑이나 갈망과 일치시키라는 명령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원하고, 하나님이 욕망하시는 바를 욕망하고, 하나님을 열망하며 갈망하고,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시는 세상을 간절히 구하라는 명령이다. 이것은 “하나님나라”라는 줄임말로 요약할 수 있는 전망이다.
_1장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 중에서
우리가 날마다 반복하는 의례를 문화적 실천으로, 즉 “예전”으로 읽어 낼 수 있다. 이렇게 예전이라는 렌즈를 착용하면 우리는 경기장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국가주의와 군사주의의 신전으로 바라볼 것이다. 예전적 시선으로 대학을 바라보면 대학의 “사상”과 “메시지”가 동아리와 대학생 운동선수들의 의례보다 덜 중요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그저 (우리가 보는) 내용 때문에 스마트폰에 대해 걱정하기보다 하루 종일 우리를 거기에 묶어 두는 의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실천의 형식이 나를 우주의 중심으로 만드는 자기중심적 전망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_2장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바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중에서
제자도는 일종의 이민과 같아서, 어둠의 왕국에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의 왕국으로 이주하는 것이다(골 1:13).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천상의 여권을 받는다. 그분의 몸 안에서 그 왕국의 “주민”처럼 사는 법을 배운다. 새로운 왕국으로 옮겨 가는 것은 다른 영토로 순간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삶의 방식에 익숙해지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새로운 습관을 획득해야 한다. 경쟁하는 왕국의 습관을 버려야 한다. 기독교 예배는 우리가 하늘의 시민, 장차 올 왕국의 백성으로 변해 가는 과정이다.
_3장 “성령은 당신이 있는 곳에서 당신을 만나 주신다” 중에서
기독교 예배는 우리로 하여금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대양으로 항해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고 우리 안에 장차 올 나라인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히 11:16). 성경이 그리는 ‘샬롬’, 곧 어린 양이 우리 빛이 되시는 세상, 칼을 쳐서 쟁기를 만드는 세상, 모두가 풍요를 누리는 세상, 모든 족속과 방언과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같은 찬양을 부르는 세상, 정의가 물같이, 공의가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는 세상은 기독교 예배에서 재연되어야 할 전망이다. 이 전망이 우리를 사로잡을 것이다. 그저 우리가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임을 “알기”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 예배라는 가시적 실천이 이를테면 그 전망을 성경 이야기의 은유와 시편의 시, 찬송가와 합창곡의 박자, 떡과 포도주라는 만질 수 있는 성례전의 요소, 스테인드글라스에 그려진 이미지를 통해 그려 보이기 때문이다. 이 모두가 우리 상상력에 영향을 미치며 우리가 무언가를 원하도록 가르친다.
_4장 “당신은 어떤 이야기 안에 있는가?” 중에서
가정의 형성적 의례는 단순한 “사적” 실천이 아니라, 공적 영향력을 미친다. 공동체의 형성이나 예배처럼 가정의 형성도 보냄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대하고 악한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물러나 숨을 수 있는 “순수한” 가정을 만들려는 게 아니다. 이런 태도는 “가라”는 사명을 축소시킬 수밖에 없다. 그 대신 우리는 가정의 형성적 리듬에 대해 의도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가정이 우리를 형성하고 우리가 문화 명령과 대위임을 수행하고 우리 이웃에게,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하는 또 다른 재정향의 공간이 되기를 원한다.
_5장 “마음을 지키라” 중에서
따라서 교육이 형성적이고자 한다면, 더 구체적으로는 학생을 기독교 신앙 안에서 형성하고자 한다면, 먼저 형성하는 이들을 형성해야 한다. 교육자인 우리가 전인적 인격체를 형성하는 교육과 학생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진선미를 사랑하는 훈련을 시키는 고전적 교육 기획에 동참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먼저 재형성되고 변화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교육 개혁은 우리에게서 시작된다.
_6장 “자녀를 잘 가르치라” 중에서
당신이 사랑하는 바가 바로 당신이며 당신이 원하는 바를 만든다면, 신실한 창조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원하는 바가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무의식, 즉 지배하는 이야기들의 저장소를 잘 돌보아야 한다. 당신이 예배하는 것을 조심하라.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바를 결정하고, 따라서 당신이 만드는 바와 당신이 일하는 방식을 결정할 것이다.
_7장 “당신은 원하는 바를 만든다” 중에서
머리말
1장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 ― 예배하는 인간
2장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바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 ‘세속’ 예전을 읽는 법
3장 성령은 당신이 있는 곳에서 당신을 만나 주신다 ― 포스트모던 시대를 위한 역사적 예배
4장 당신은 어떤 이야기 안에 있는가? ― 형성적 기독교 예배의 서사 구조
5장 마음을 지키라 ― 가정의 예전
6장 자녀를 잘 가르치라 ― 신앙 교육의 예전
7장 당신은 원하는 바를 만든다 ― 소명의 예전
축복 기도
감사의 글 / 더 읽어 볼 책 / 주 / 찾아보기
우리 생각이나 행동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형성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에 대한 사용자 친화적 입문서. 죄와 덕이 각각 왜곡된 사랑과 제대로 된 사랑이라면, 우리가 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우리의 예배 대상을 바꾸는 것이라면, 이 책은 우리가 기독교 사역을 하는 방식을 재고하도록 인도할 것이다. 저자는 이것이 어떻게 공동 예배와 기독교 교육, 영성 형성과 세상에서의 소명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기초적인 생각들을 제시한다. 매우 중요하면서도 도발적인 책이다!
― 팀 켈러 리디머장로교회 설립목사
“당신은 무엇을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저자는 이 설득력 있는 책에서 특유의 편안함과 에너지와 통찰력으로,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뿐 아니라 그 대상을 사랑하는 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는지를 탐색한다.
― 미로슬라브 볼프 예일대학교 교수
스미스는 얽히고설킨 생각의 타래를 풀어 주는 탁월한 은사가 있다. 이 책에서도 그는 우리가 마음과 생각을 잘 정돈함으로써 우리 상상력을 해방시켜 하나님나라에 온전히 사로잡히도록 돕는다. 그가 이 책에서 독자들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우리가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찾고 발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 마크 레버튼 풀러신학교 총장
제임스 스미스의 글에는 이해심과 권위와 온기가 넘친다. 명저다!
― 코넬리우스 플랜팅가 주니어 캘빈신학교 명예총장
저자는 지혜롭고 도발적인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대담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일까?” 정직하게 대답하려는 이들에게 이 질문은 절대 편한 질문이 아니다. 스미스는 우리에게 정직한 답을 요구하는 한편, 삶의 예전 곧 습관과 실천을 통해 하나님과 이웃에게 마음을 열기 위해 힘쓰는 그리스도인들을 기다리고 있는 새롭고 풍성한 삶을 보여 준다.
― 앨런 제이콥스 베일러대학교, 《유혹하는 책읽기》 저자
모든 ‘일반 독자’는 주목하시라. 학자나 전문가들이 아니라(물론 그들도 환영한다), 조잡한 사고와 최신 유행 구호에 지친 독자들이여, 오라. 이 책은 마치 최고의 강의와 같아서 탁월한 교사와 매력적인 주제가 당신을 기다린다. 무엇을 주저하는가?
― 존 윌슨 <북스앤드컬처> 편집자
이 책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을 바탕으로, 기독교 제자도의 본질 곧 예배와 예전을 통한 총체적 삶의 변화를 모색한다. 스미스는 그 어떤 작가보다, 어떻게 욕망이라는 습관을 통해 믿음이 우리에게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지,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가 갈망하는 바를 온전히 만족시켜 주시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예수의 제자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책이다.
― 샌드라 맥크라켄 가수 겸 작곡가
지난 10년간 《하나님나라를 갈망하라》처럼 내게 큰 영향을 미친 책은 없었다. 나와 온 교회는 제임스 스미스의 저작에 큰 빚을 졌다. 그 책의 내용을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만든 것이 《습관이 영성이다》이다. 제자도라는 과제를 다시 상상해 보도록 돕는 도구가 될 이 책은 모든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 부모의 필독서다.
― 젠 폴락 미셸 2015년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올해의 책 Teach Us to Want 저자
지금으로부터 20년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 책을 언급할 것이다. 스미스는 영성에 대해 지나치게 지적인 관점과 지나치게 정서적인 관점을 모두 분석한다. 덕이 습관에 뿌리를 박고 있고, 습관은 사랑에 뿌리를 박고 있으며, 사랑은 예배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그의 지적은 정확하다. 교회는 도발적이고 실제적인 이 책의 지적을 따라야 할 것이다.
― 러셀 무어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리뷰
캘빈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제임스 스미스는 현대 미국 문화의 세속 예전들에 대해 사려 깊은 분석을 제시한다. 그는 세속 예전을 “우리의 정체성과 존재 목적에 관한 궁극적인 이야기로 가득 채워진 의례”로 정의하고, 제대로 예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무의식을 재조정할” 필요성을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쇼핑몰을 “소비주의 복음”을 설파하는 현대의 신전으로 바라보는 흥미진진한 시각을 통해 저자는 독자들로 하여금 형성적 체험을 제공하는 다른 세속 신전들에 대해서도 “예전적 감사”를 실시하도록 초대한다. 저자는 죄의 고백과 성례전, 결혼 예식 등 예배의 극적 내러티브를 하나씩 펼쳐 가면서, 진정한 예배는 “신체적이며 감각적이고 직감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야기의 힘과 “신앙의 역사적 실천”을 강조한다. 가정과 교회에서의 반복적인 영적 실천에 도덕적 성품을 형성하는 힘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예배하는 바가 곧 우리가 사랑하는 바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예배하는 바가 된다.” 저자 개인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문학과 철학, 영화, 예술 작품에서 인용한 예시들이 이 강력하고 영감 있는 영성 훈련 연구서를 훨씬 더 이해하기 쉽고 매력적으로 만들어 준다.
― <퍼블리셔스 위클리> 리뷰
포스트모던 기독교 내의 신학철학 운동인 ‘급진 정통주의’에서 가장 주목 받는 기독교 철학자. 현대 프랑스 사상을 연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칼뱅, 에드워즈와 카이퍼에 이르는 신학적 문화 비평의 전통에서 영향을 받은 그는 철학, 신학, 윤리학, 미학, 과학, 정치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학계와 사회와 교회를 이어 주는 자신만의 독특한 은사를 발휘하면서 이 분야의 선구적 사상가로 발돋움했다. 현재 캘빈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문화적 예전” 3부작의 첫 책으로 진정한 제자도의 길이 참된 욕망의 형성이라고 주장한 《하나님나라를 욕망하라》 출간 이후,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에게서 그 책의 내용을 조금 더 알기 쉽게 설명해 줄 수 있느냐는 요청이 쇄도했다. 《습관이 영성이다》는 《하나님나라를 욕망하라》를 단순히 풀어 쓴 요약본에 그치지 않고, 다년간의 대중 강연에서 그의 주장의 핵심만을 담아 구체적인 예와 함께 신선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제시한다. 출간 이후 <퍼블리셔스 위클리>, <뉴욕 타임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등 주요 매체와 단체의 주목을 받으면서 2017년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북어워드와 달라스 윌라드 센터 북어워드를 수상했고, 크리스천 북어워드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출신으로 워털루대학교와 엠마우스성경대학을 졸업하고, 기독교학문연구소ICS와 빌라노바대학교에서 철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나님나라를 욕망하라》, 《하나님나라를 상상하라》,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 《급진 정통주의 신학》, 《칼빈주의와 사랑에 빠진 젊은이에게 보내는 편지》, 《해석의 타락》 등 여러 책을 저술하고 편집했다. 최신 저서로 Awaiting the King이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 <뉴욕 타임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북스앤드컬쳐> 등의 잡지와 신문에도 정기 적으로 기고하고 있다. <코멘트>지의 편집장이기도 하다.
* 홈페이지: http://jameskasmit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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