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1-4장 [새번역] Book of Ruth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 여인이 자기 아내가 되자, 그는 그 여인과...

슬픔을 당하는 나오미(룻기 1:1-5)
이 이야기의 연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첫째 구절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왕이 없어"
혼란스러웠던 때가 아니고 "사사들이 다스렸던 때" 였다(1절). 그러나 어느 사사 때 이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으며 짐작해 보기도 힘들다. 그러나 그것은 사사기 시대의 초기임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룻과 결혼한 보아스는 여호수아 시대에 정탐꾼을 받아들였던 라합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에훗의 시대라 하는데, 저 해박한 지식이 소유자 패트릭(Patrick) 주교는 그것이 기드온
시대의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로는 기드온 시대에만 미디안 사람의 침입으로 기근이
들었다는 것이 적혀 있기 때문이다(삿 6:3, 4).
사사들이 이런 저런 여럿 성읍을 통치하고 있을 때, 한편 하나님께서도 베들레헴을 특별히 주시하고
우리의 메시야이신 왕을 유념하고 있었다. 바로 그 메시야는 이 밤의 두 여인 라합과 룻의 후손으로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다. 이것은 그들의 죄에 내린 하나님의 심판이었다(레
26:19, 20). 하나님의 전통에는 여러 가지 화살이 들어 있다. 사사들이 다스리던 시대에는
백성들이 적군으로 인하여 항상 억압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런 심판으로도 회개치
않았을 때에는, 또 저런 심판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에는 그가 또한 이기실" 것이기
때문이다. 나라가 평안케 된 때에는 식량이 풍부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베들레헴, 곧 "떡집"
이라는 의미를 가진 베들레헴에까지도 기근이 들었다. 즉 그들의 허영과 방종을 억제하고 고치기
위하여 "기름진 땅은 황폐하게 되었다."
Ⅱ. 여기에 기근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한 가정의 얘기가 나온다. 바로 엘리멜렉의 집안이다.
엘리멜렉이란 이름이 뜻하는 것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로서, 이것은 사사들이 다스리던 시대의
이스라엘 나라에 퍽 적합한 이름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왕이었으며, 그들이 그 왕과
더불어 있었고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어서 그들은 기근 가운데서라도 편안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 이름은 나오미로 나의 온후한 또한 즐거운 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들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으로 그것은 병과 소모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들은
허약하여 오래 살지를 못했다.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것에서부터 허약과 연약, 시듦과 죽음이
나오는 것이다.
Ⅲ. 베들레헴에 살던 한 집안이 기근 때문에 살아갈 수가 없게 되자, 요단 건너편에 있는 모압
지방으로 이주해 왔다(1,2절).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들었을 때에는 모압 지방에서는 풍족한
식량이 있었던 것 같다. 하나님의 섭리는 가끔 그의 선물을, 하나님을 알고 숭배하는
자들에게보다는 그를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더욱 풍성히 내려 주신다. "이스라엘이 그릇 그릇마다
비게 되었을 때 모압은 예로부터 평안하였다" (렘 48:11). 이것은 하나님이 모압을 이스라엘보다
다 사랑한 때문이 아니고, 저들은 "이 세상에서 저들의 유업" 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멜렉은
모압으로 가서 영구히 묵지 않고 기근을 피하기 위해 잠시 우거했다. 이와 비슷한 경우에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이삭은 블레셋 땅으로 갔었다.
1. 아비멜렉은 그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그의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데리고 갔다. 이것은 퍽
기특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할 자이다" (딤전 5:8). 그는 자기가 곤경에 처하게 되었을 때, 자기의 집을 버리고, 자기의
아내와 자식들은 자기들의 생계를 스스로 꾸려 나가도록 버려두며, 자기 자신만의 행운을 찾아
나서지 아니했다. 오히려 어진 남편과 자애로운 아버지로서 자기가 길을 떠나면서 그들을 데리고
갔다. 그는 타조처럼 그들을 버리지 아니했다(욥 39:16).

2. 엘리멜렉이 모압 지방으로 이주할 이 경우는 어떻게 평가하여야 좋을는지 나로서는 잘 알 수 없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는 그들이 단지 나그네로서 가나안에 잠시 머무른 것이었으므로 다른
지방으로 옮겨 갔다는 것은 타당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자손은 이미 그곳에
뿌리박았으므로 이 교도의 땅으로 옮겨가서는 안 되었다. 엘리멜렉의 경우에는 어떤 이유를
들어서 정당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만일 그가 잘못 일을 처리하여 그의 재산을 탕진하고 그의
토지를 팔거나 저당잡히게(4:3, 4 의 내용으로 보면 그런 것 같다.)되어,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보다 더 궁핍한 처지를 당하게 되었다면 그의 이웃은 하나님의 율법대로 그를 도왔을
것이다(레 25:35). 그러나 그의 경우는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풍족한 상태로
떠났기 때문이다. 집에 남은 사람들이 있음을(21절) 보건대, 그는 그다지 극도로 궁핍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목숨을 부지할 수는 있었던 것 같다. 게다가 엘리멜렉에게 지워진 부담은 두
아들뿐으로 가벼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웃들과는 달리 그는 "기근의 때에 만족을 찾을 수
없었고" 전처럼 그의 식탁이 풍성하지 않는 한 기근의 날 속에서 만족할 수 없었다면, 그리고
또한 어느 적당한 시기에 풍족한 때가 오리라는 희망과 그것을 기다릴 만한 참을성이 없었다면,
그것은 그의 잘못이고 그에게 내려주신 훌륭한 땅과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요, "그의 형제들의
손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그는 그의 형제들과 더불어 자기의 땅을 지켜야 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다른 사람에 나쁜 본을 보인 것이다. 만일 모든 사람이 그처럼 했다면 가나안에는 아무도
살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신 땅을 싫어 하며, 그곳에서 다소의 불편을
느꼈을 때 즉시 그곳을 떠나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불만이 있고 신뢰감이 없으며, 정신이
불안정하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에게 지워진 십자가가 우리의 길을 막는다고
하여 그것을 피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장소를 바꾸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므로, 우리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엘리멜렉이 그 땅을 떠났을 때, 왜 그는
모압 지방으로 갔는가? 이에 대해 그는 아마 이스라엘의 어떤 지파가 요단 건너편에 있는 모압
지방에서 풍족히 살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가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스라엘 백성이된 그의 동료들을 사랑했다면 그렇게 쉽사리 마음을 정하여 모압 지방으로
가서 모압인들과 섞여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Ⅳ. 엘리멜렉이 죽은 후 그의 두 아들은 모압의 여인들과 결혼하였다(4절). 모든 사람들이 이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시리아역에는 "그들이 이방인 아내를 취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다" 고 되어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이스라엘 땅에 되돌아간 후에 결혼하기까지 기다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하더라도, 고향까지의 거리도 그렇게 멀지 않았으므로, 거기에 사람을 보내어
자기들의 아내가 될 여자들을 데려올 수도 있었던 것이다. 모압 지방에 살게 되면 그의 아들들이
모압 사람들과 친족관계를 갖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엘리멜렉은 조금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젊은이가 나쁜 친구를 사귀게 되면 아무리 교육을 잘 받고, 유혹에 물들지 않도록 잘 무장되었다
할지라도, 그 젊은이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또 "그것으로 해서 어떠한 결말을 초래할는지" 그를
키운 자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오르바는 자기의 신에게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15절). 즉 아직껏 그 여자는 모압의 신들을 섬기고 있었다.
룻은 모압의 왕 에글론의 딸이었다는 것은 근거 없는 유대인들의 전설이다. 그러나 시리아의
역본은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또한 룻과 결혼한 보아스는, 엘론이 죽은 후 20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입산과 동일 인물이라는 전설 - 시리아의 역본 해설자의 주장 - 은 역시 근거 없는
일이다.
Ⅴ. 엘리멜렉과 그의 두 아들이 죽자 나오미는 비통한 지경에 이르렀다. 남편이 죽고(3절), 갓 결혼한
두 아들이 죽었다(5절). 이에 대해 시리아역은 두 아들이 이방인 여자들과 결혼하여 율법에 대해
죄를 범하였으므로 "그들의 날수가 단축되었다" 고 말하고 있다.

1.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며, 죽음의 화살은 어느 곳으로든지 날아든다.
2. 우리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번영을 기대할 수 없다. 옳지 못한 방법으로 
자기의 생명을 구하려는 자는 그것을 잃게 될 것이다. "
3. 한 집안에서 어떤 사람이 죽으면 잇달아 다른 사람이 죽는 일이 가끔 일어난다. 한 사람의 죽음은
다른 사람의 죽음의 자리를 마련한다. 즉 한 사람이 죽었을 때 그 고통은 사라지지 않고 하나님은
같은 종류의 또 다른 고통을 주신다. 남편이 죽은 후 나오미는 그의 아들들에게 더욱 많은 애착과
신뢰를 주었다. 아들들에 대한 위로의 그늘 밑에서 나오미는 그가 이 이교도들 가운데 살게 될
거라고 생각했으며, 그 자신이 아들들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을 아주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아침에는 푸르고 무성하던 것이 곧 시들어 밤에는 바싹 마르게 되어 잘리워져 버렸다."
그리하여 결혼한 지 얼마 안되어 자손도 얻지 못한 채 두 아들은 죽고 말았다. 이처럼 우리의
기쁨은 기약 없고 덧 없을 뿐이다라는 확신 속에서, 죽음이라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지혜이다. 그러나, 두 아들과 남편을 잃은 나오미의 경우는 얼마나 쓸쓸하고 비통한
것인가? "아들을 잃고 남편을 잃은 두 가지 일이 한 순간에 온전히 그녀에게 닥쳤으니 어떻게
그녀가 위로받으랴" (사 47:9; 51:9). 이렇게 좌정하고 있는 자에게 위로를 보낼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다.
돌아오는 나오미 (룻기 1:6-18)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엿볼 수 있다.
Ⅰ. 나오미는 자기의 고향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좋은 마음이 생겼다(6절). 비록 기근이
들었을 동안에는 그곳에 머무를 수가 없었으나, 기근이 그친 후에도 그곳을 떠나 있으려 하지
않았다. 비록 모압 지방은 그녀에게 안식처와 부족한 식량을 채워 주었지만, 그녀는 영원히 그곳에
머무를 의도는 품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이것이 나의 영원한 안식처로다" 라고 말씀하신 곳, 곧
하나님의 성소가 있는 곳은 이 거룩한 땅 이외에는 있을 곳이 없었다.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마침내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비록 오랫동안 싸우시나
영원토록 싸우지는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저들이 압제의 심판 밑에 괴로움을 당하게
하셨다가도 잠시 후에 그들을 구원할 자를 보내시어 그 괴로움을 끝내게 하셨다. 마찬가지로
여기에 나오는 기근의 심판에서는 그러했다. 즉, 하나님은 드디어 자비로웁게 "그의 백성들을
권념하사 그들에게 식량을 주셨다." 하나님의 선물은 풍족하다. 하나님은 이렇게 찾아 오셔서
생명의 양식인 빵을 주심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살게 하여 주신다." 기근 후에 오는 이러한
자비는 더욱 감격스러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항상 부족함이 없이 지내어 기근이
무엇인가를 잘 모를 때 라도, 우리는 식량을 아주 하찮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2. 나오미는 자기의 백성으로 인하여 이스라엘로 돌아갔다. 그녀는 자기 나라에 대해 자주 안부를
물었다. 즉 지금 무엇을 추수하고 있으며, 어떻게 시장이 되어가고 있는가를 물었지만, 소식은
한결같이 침울한 것이었다. 그러나 비가 올 것 같지 않은 하늘을 열심히 관찰하다가 드디어
손바닥만한 구름 한 점을 발견하고 그것이 하늘 전체로 퍼지는 것을 알리는 예언자의 종처럼,
나오미는 드디어 그녀의 백성이 풍족하리라는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가려했다. 그녀는 자기가
돌아갈 곳은 그 곳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오미는 모압 지방과 새로운 인연을 맺었지만
그것이 이스라엘에 있는 그녀의 친척들을 잊게 할 수는 없었다. 비록 어떤 일로 해서 우리가 옳지
못한 곳에있었을지라도 그 일이 해결이 된 후에는 결코 거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어찌할
수 없이 하나님의 규례에 참예하지 못하게 되고 악한 사람들과 마주 대하게 된다는 것은 커다란

고통이다. 그러나 그러한 악조건이 끝났을 때에도 계속 그런 상황에 있는다면 그것은 큰 죄가
된다. 두 아들이 죽은 후 나오미가 즉시 돌아가려고 한 것은,
(1) 그녀는 자기 가족들에게 내려진 고통은 그들이 모압 지방에 머무른 것에 대한 형벌이라는 것을
그녀가 깨달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이 "징벌의 소리라는 것과 하나님이 명하시는 말씀" 을 듣고
그 여자는 순종하여 돌아가기로 했다. 만일 남편이 죽은 후 곧 두 아들을 데리고 돌아갔더라면
나오미는 두 아들의 목숨을 잃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는 그가
이기실 것이다." 만일 하나의 고통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그 속에서 자기의 죄와 임무를 깨닫지
못하였다면 다른 고통이 오게 된다. 한 집안에 죽음이 닥쳤을 때에는 그들에게 어떠한 잘못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므로 그것을 바로 잡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의 친척이 죽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임무에서 벗어나지 않았는가를 살펴서 의무를 행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게 하고는 우리의 죄가 생각나게" 하신다(왕상 17:18). 하나님께서 가시덤불로 우리의
길을 방해하시는 것은, 나오미가 그의 나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라" 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이다(호 2:7).
(2) 모압 땅이 이제 나오미에게는 슬픈 곳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녀의 남편과 아들들이
죽어서 땅에 묻혔지만, 그들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우울한 날들을
보냈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우거하고
있는 곳에서 위로와 안락을 빼앗아 가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믿음과 소망을 갖고 다른 땅에
있는 우리의 집으로 서둘러 돌아가도록 하신다. 땅이 우리를 비통에 빠지게 하면 우리는 하늘을
사모하게 된다.
Ⅱ. 두 며느리, 그 중에서도 특히 한 며느리는 시어머니 나오미에 대해 깊은 애정을 기울이고 있었으며,
그녀 또한 그들에게 관대한 마음으로 보답했다.
1. 유다 땅으로 돌아가는 길에 두 며느리가 다 친절하게 나오미와 얼마만큼 동행해 주었다. 두
며느리는 나오미에게 모압 땅에서 계속 살자는 말을 결코 하지 않았다. 한 며느리가 자기의
나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을 때에도 그 여자는 헤어질 때까지 매우 예의 바르게 그리고
공경스럽게 나오미를 대했을 것이다. 또한 나머지 두 사람은 그들이 그녀와 동행할 수 있는
국경선까지 함께 가서, 그 여자의 길을 전송했으며, 그들이 간 곳까지 그 여자의 짐을 거들어
주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여자는 어떤 종도 데리고 가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7절).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된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매우 자애롭고 그들의 사랑을 받아
모든 시어머니의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오르바와 룻 두 며느리도
그렇게 멀리까지 동행한 것을 보면, 퍽 친절한 성품을 지닌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친족관계를
만들어 준 그들의 "남편들은" 죽었지만, 그들은 단합하여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며느리는
모압 신을 숭배하였으나(15절), 나오미는 끝까지 이스라엘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또한 그 런 일 때문에 친척들 가운데서 행해지는 호의나 사랑, 친절이 방해받지는 않았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빈번히 불화를 일으키나(마 10:35), 그들이 화목하게 사는 것은 퍽 훌륭한
일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에 있는 모든 자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이들을 본받자.
2. 그들이 얼마만큼 나오미와 함께 갔을 때 나오미는 깊은 사랑으로 그들에게 돌아갈 것을 권유하
(8,9절), "너희는 각각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고 하였다. 그들의 남편들과 살었던 슬픈 집을
떠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다행히도 부모님들이 살아 계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돌아가서
그들은 다른 나라로 돌아다닐 필요없이 우대를 받고 편히 지낼 수 있었는지는도 모른다. 그들
자신의 어머니는 정착하고 집을 갖고 있으나, 시어머니는 그 자신의 처소마저 불안정할 때도 더욱
시어머니와 함께 있는 것보다 그들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있는 편이 훨씬 좋다는 것을, 나오미는
그의 며느리들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1) 그리하여 나오미는 그들을 칭찬해 주면서 보냈다. 어떤 경우에도 선행을 행한 자들은 마땅히
칭찬을 받아야 하며, 나오미도 이들을 이렇게 칭찬했다. "너희들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하였도다." 즉 "너희들은 죽은 너희 남편들에 대해 좋은 아내였으며, 나에게는 좋은
딸이었고, 그 어느 친척에게도 너희의 의무를 잘 해냈다." 는 것이다. 죽음이나 그 밖의 어떤
일로 인하여 우리가 우리들의 친척과 헤어지게 되었을 때 함께 있는 동안 우리가 그들과의
인간관계에서 우리의 의무를 다하려고 애썼다는 사실을 그들이나 우리 스스로의 양심이 증언해
준다면, 그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그것은 이별의 고통을 덜어 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그들과 함께 있을 동안 우리는 그들에게 성실히 대함으로써 헤어지더라도 친척들에 대한 우리의
과실로 인해서 가슴 아프게 후회하지 않아야 된다.
(2) 기도로써 그들과 헤어졌다. 친구들이 헤어질 때에 서로 기도해 주면서 헤어진다는 것은 퍽
아름다운 일이다. 나오미는 그들에게 축복을 기원하면서 그들을 집으로 돌려 보내려 하고
있는데 시어머니가 축복한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축복할 때에 나오미도
두번씩이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단 하나의 참 신이신 여호와의 이름을 말하였다. 이 때,
그의 딸들에게 모든 선함의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을 섬길 것을 명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나오미와 그의 친척들에게 보여준 친절에 대한 보답을 하나님께서 해 주시기를 나오미는
기도하고 있다. 그들의 친척들에게 호의를 베푼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애로움이 함께 하실 것을
바라며, 그것을 기도드릴 수도 있다. "한 그릇의 물을 대접하는 자는 또한 그 자신이 그것을
대접받게 될 것이다." 그들은 다시 결혼했다면 행복해졌을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편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고 했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바울 사도의 지시에 따르면(딤전 5:14), 과부가 된 젊은 여자가 "시집 가서 아이 낳고 집을
다스린다는 것" 은 퍽 온당한 일이다. 훌륭한 아내였던 여자가 특히 자식 없이 과부된 자들이
남편과 더불어 다시 축복받을 수 없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 여자가 결혼하여 있는 것이 더 편안한 상태이다. 이 세상에서는 남편의 집에서 얻는 평안이
자기 어머니나 시어머니 집에서 얻는 평안보다 더 큰 것이다.
[3] 그 안식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이 안식처 밖에서도 우리가 만족을 얻을 수 있다면
역시 그곳에도 하나님은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남편의 집에서마저 아무런 안식도 누리지
못하고 불공평하게 멍에를 메고 있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고통을 생각하면 인척관계가 줄은
자들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영혼의 안식처로 삼자.
하늘 아래 있는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완전한 안식처일 수는 없다.
(3)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깊은 애정을 품고 그들을 돌려 보내려 하고 있다. 그리하여 나오미는
"그들에게 입맞추며," 더 좋은 것을 나눠주고자 하지만 그녀는 어떤 보석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이별의 입맞춤은 진실된 사랑의 표적이 될 것이며, 비록 그녀가 그들을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할지라도 살아있는 동안 즐거운 마음으로 이를 기억할 것이다. 만일 친척들과 헤어져야
한다면,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헤어져야 하며, 비록 이 세상에선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영원한 사랑의 세계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3. 두 젊은 과부는 어지신 자기들의 시어머니와 헤어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이 경건한
이스라엘 여인은 그들에게 훌륭한 생활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헤어지게 되었을 때 두 며느리는 이별을 서글피 여겨 소리를 높여 울며 시어머니를
따르겠다고 말했다(10절). "우리는 당신과 함께 당신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그리하여
어머니와 운명을 함께 하겠나이다." 이처럼 시어머니를 사랑하고 이들처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호의를 갖는다는 것은 퍽 희귀한 일이다. 후에 자기의 신에게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오르바도

역시 처음에는 나오미와 함께 할 것을 결심했던 것 같다. 그녀도 헤어지는 것을 울며 반대했지만,
결국 계속 고집하지는 못했다. 확고한 결심이 없는 감정은 보통 사그러지게 마련이다.
4. 나오미는 그들이 자기와 함께 하고자 하는 것을 단념시키고 있다(11-13절).
(1) 나오미는 자기의 괴로운 심정을 술회했다. 만일 가나안에 다른 아들이 있거나 또 어느 가까운
친척되는 남자가 있어 이 두 과부된 며느리를 결혼시키고 죽은 자의 아들이 자라는 것을 바랄
수가 있고, 저당잡힌 재산을 다시 찾을 수 있다면, 이들은 베들레헴에서 편안히 정착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위로받을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오미에게는 어떤 아들이나
친척되는 남자가 없었으므로 며느리에게 그녀가 남편을 얻기에는 너무 늙어 며느리의 남편될
자식을 가질 수가 없다는 말로 설득시키고 있다. 나오미는 이미 늙어서 결혼이나 이 세상의
새로운 생활을 생각하게 보다는 죽어서 저 세상으로 가는 일을 생각할 나이였다. 나오미가
남편을 가졌다 하더라도 아이를 낳기를 기대할 수 없었고, 설사 그녀가 아들을 난다 하더라도
그 아이들이 자라 결혼할 연령이 될 때까지 두 며느리를 그대로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나오미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결혼을 제안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도 막연했다. 나오미가 궁핍함을 슬프게 생각하는 것은 그녀의
마음대로 그들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1] 나오미는 고통 속에서 그 자신을 정죄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책망은 주로 그녀에게 내려진
것이었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도다. 나는 죄인이므로, 여호와께서 나를 책하셨도다.
나는 이 징벌을 감수하리로다."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비록 다른 사람이
그 고통을 나누어 가지더라도 우리는 징벌의 소리를 듣고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 내려진 책망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2] 나오미는 그녀에게만 내려져야 할 고통이 두 며느리에게도 돌아온 것을 가장 애통하게 여기고
있다. 죄인은 나오미였는데 고통은 그 며느리들이 당했다.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인자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자는 자기 자신의 고통보다 남이 당하는 슬픔이나
자기로 해서 남이 당하는 고통을 매우 가슴 아프게 여긴다. 나오미는 자신의 궁핍함은 잘
참고 견딜 수 있었으나, 두 며느리들의 곤경을 보고는 퍽 애석하게 생각했다. "그러므로 내
딸들이 돌아가라. 슬프게도 나는 능력이 없이 너희들에게 호의를 베풀 수 없구나."
(2) 그러나 나오미가 두 며느리를 함께 데리고 감으로써 그들을 모압의 우상 숭배에서 구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섬기게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녀와 함께 가고자 하는 며느리를 말린
것은 과연 잘한 일인가? 물론 나오미는 그들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랬다.
[1] 그러나 만일 그들이 나오미와 함께 한다고 하더라도 나오미는 그들이 자기들의 말 때문에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친척의 호의와, 친구에 대한 감사나 동료들 때문에
개종하게 되는 사람들의 결심은 그리 진지하지도 못하고, 또 오래 계속하지도 못한다.
[2] 만일 그들이 나오미와 함께 간다고 하더라도, 나오미는 이들에게 신중히 선택하도록 기회를
주어서 그들이 앉아서 계산해 보고 할 일을 고려한 다음에 신앙의 고백을 하게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 우리는 최악의 경우를 들어 주는 것이 좋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구주께서 그를
열심히 좇고자 하는 자와 나눈 이야기를 살펴보자. "주여,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나이다." 
오너라."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사는 것대로 너도 살 수 있겠는가.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다" 는 것을 알라. 그러므로 이것을 네가 잘 판단하여 네가 나와 함께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마 8:19, 20). 나오미는 이런 식으로 두 며느리를 충고했다. 진지하게 생각한

끝에 얻게 된 결심은 항상 마음 속 깊이 간직될 수 있으며, 반대로 성급히 익은 열매는 곧
썩어버리게 된다.
5. 오르바는 그녀 자신의 부패한 성향에 쉽게 굴복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기의 고향, 친족,
그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그곳에서 부르는 강력한 요청에 찬성한 것이다.
두 며느리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애틋한 말에 몹시 감동되어 "소리를 높여 다시 울었다" (14절).
그러나 두 며느리가 받은 감동은 서로 달랐다. 즉, 오르바가 받은 영향은 죽음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향기였다. 그들이 가나안으로 가게되면 불편한 생활을 할 것이라는 나오미의 말을 자세히
음미한 것이 오르바를 모압 지방으로 돌아가게 한 계기가 되었고, 그것이 그녀의 변절을 변명할
구실을 준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나오미의 말로 인하여 룻의 결심은 더욱 확고하게
되었고 나오미를 좇도록 하였다. 이 때처럼 룻이 나오미의 지혜와 선함에 강하게 마음이 이끌린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룻이 받은 영향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였던 것이다.
(1)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맞추어 애정어린 작별을 영원히 고했다. 마치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나서 집과 작별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말한 자처럼, 이 후로 오르바는 나오미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오르바의 입맞춤은 나오미에 대한 애정과 헤어지기 싫어하는 심정을
나타내고 있지만, 오르바가 자기 나라를 떠날 만큼 나오미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히 여기고 그를 따르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는데 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모든 것들을 버릴 만큼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만 그를 떠나는 것은
그보다 다른 것을 더욱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재물이 많은 젊은 청년은 근심하며
그리스도를 떠났다(마 19:22).
(2) 그러나 "룻은 그녀를 붙좇았다." 룻이 집을 나설 때 이미 나오미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룻은 나오미가 들려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그 율법을 섬기려 하여 이미 전부터 결심하였는지도 모른다.
6. 나오미는 되돌아간 동서를 가리키며 룻에게 돌아가도록 열심히 권유하였다. "네 동서는 그
백성에게 돌아갔으며 또한 그 신에게로 돌아갔노라" (15절). 오르바가 시어머니와 같이 살
동안에는 무엇을 하였든지 간에, 그모스신을 섬기는 사람들 중에서 살게 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받드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성도들과의 교통을 끊어 버리고 모압
백성에게로 돌아간 자들은 분명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모압의 우상을 섬기게 될 것이다. 이제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고 한 말은 "돌아갈 의사가 있으면, 지금 가라. 이것은 너의 지조에
대한 최대의 시련이니라. 이 시련을 이기면 영원히 나의 사람이 되리라" 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일을 당하면 오르바와 같이 변절하는 자들도 있겠고, 룻처럼 그의 온전함과 진실함이
드러나게 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7. 룻은 자기가 결코 나오미를 떠나지 않을 것이며 자기 나라와 옛 친척들에게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엄숙하게 선언함으로써 모든 논쟁을 결말지었다(16,17절).
(1) 이보다 더 용감하고 훌륭한 것은 없다. 동서는 그의 나라로 돌아갔지만 룻은 동서와는 다른
마음과 의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더 나은 것을 선택하도록 우리의 영혼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한 본보기라 할 수 있다. "나를 이끄소서." 그리하면 "우리가 당신을
따르겠나이다. "시어머니의 만류는 룻의 결심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마치
여호수아가 그의 백성들에게 "너희들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느니라" 라고 했을 때 그들이 더욱
열렬히 "아닙니다. 우리는 할 수 있나이다" 라고 말한 경우와 같다.

[1] 룻은 나오미에게 더 이상 돌아가란 권유는 하지 말 것을 요청하고 있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 강권하지 마옵소서." 즉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아
이미 전에 내 마음이 결정되었으니 아무리 어머니께서 권유하셔도 변할 수 없아오니, 이제
그만 권유하옵소서" 하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한 사람에게 그 결심을
바꾸라고 권유하는 것은 매우 불쾌하고 성가신 일이다. 그 권유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권유하지 말라" 면서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꾸 귀찮게
권유하면 "나를 방해하지 말라" 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거스르는 자, 특히 하늘
나라에 있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 우리의 길을 방해하는 대적이 무엇인가를 잘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의 친척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신앙적인 사업을 하는
일을 방해를 하려 한다면, 그들은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없다.
[2]결코 나오미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따르겠다는 룻의 결심은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룻은
하나님과 하늘나라를 섬길 결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룻이 사랑하는 것은 그 어머니의
아름다움이나 부유함이나 화려함 (이 모든 것은 곧 시들어 사라져 버린다.)이 아니라, 그
어머니의 지혜와 덕성과 우아함이었다. 그 때처럼 그렇게 빈궁하고 우울한 형편 속에서
나오미는 그러한 품위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룻은 나오미를 떠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첫째, 룻은 나오미와 함께 동행하려 한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겠나이다. 비록
내가 들어 보지도 못한 나라였거나 풍문에 퍽 좋지 못한 곳이었을지라도 따르겠나이다. 내
나라를 멀리 떠난다 해도 어머니와 함께 가는 길은 즐거울 것입니다."
둘째로, 룻은 나오미와 함께 기거하려 한다. "어머니께서 유숙하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초막집에 거한다 할지라도, 아니, 돌베개 베고 자던 야곱의 숙소보다 못하더라도 나는
따르겠나이다. 당신의 뜻을 어디에 세우든지 나도 함께 따르겠나이다."
세째로, 룻은 나오미의 이해관계는 곧 자기의 이해관계와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옵니다." 나오미의 성품으로 미루어 보아 룻은 이 위대한 백성이
슬기로우며 이해심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룻은 그 선한 어머니를 보고 어머니의
백성을 판단하였는데 그 어머니는 어디를 가든지 그녀의 나라를 영예롭게 하였다. 
사람들에게 더 좋은 나라. 즉, 하늘나라를 알려 주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처럼). 그리하여
룻은 자기도 이 백성들 중의 하나가 되면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곧 나의 백성이므로 나는 그들과 사귀고 그들과 더불어 화평하고 그리고
그들을 염려해 주어야 합니다."
네째로, 룻은 나오미의 믿음을 따르려 한다. 그리하여 룻은 자기자신을 usque ad aras 참된
제단에 바칠 것을 결심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나는 이제 헛되고
거짓된 모압의 모든 신들을 버리겠나이다. 나는 단 한분의 참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받들고, 그만을 믿고, 그를 섬기며, 내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겠나이
." 이것은 룻이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영접하겠다는 뜻이다.
다섯째로, 룻은 기꺼이 나오미와 함께 죽으려 한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겠나이다." 룻은 그들이 함께 죽는 것을 아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나오미가 더
나이가 들었으므로 룻보다 먼저 죽을는지 모르나 그 후에도 룻은 그 집에서 살 결심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룻이 이 세상에서 그 생명을 다하게 되었을 때 나오미처럼 죽음 가운데서도
행복에 동참할 수 있기를 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룻은 나오미가 죽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죽었다는 표적을 위해 똑같은 장소에서 죽기를 원하고 있다. "나로 하여금 의로운 나오미처

 죽어 내 생의 끝이 나오미의 것과 같게 해 달라."
여섯째, 룻은 나오미와 같은 무덤속에 묻혀 그 여자 곁에 눕기를 원한다. "거기에 나도
장사될 것이다." 룻은 자기가 한 일을 남겨두기 위해서라도 그의 몸을 모압 땅으로 옮겨가는
것을 원치 않고 있다. 나오미와 자기 영혼이 함께 하고 다시 저 세상에서 살아난 후 영원히
함께 살기를 원하므로 그들이 함께 섞여 한 줌의 흙이 될 것을 바라고 있다.
[3] 룻은 나오미를 따르려는 결심을 다음과 같은 맹세로 확고히 하고 있다. "만일 내가 죽는 일
이외에 어머니를 떠나며,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은
저주를 나타내는 고대의 문체이다.) 이 확고한 맹세로써 이들 사이에 논쟁은 끝이 났고, 룻이
나오미를 결코 버리고 떠나지 않겠다는 선택에 대한 의무만이 남았을 뿐이다.
첫째, 죽음만이 이들을 잠시 떼어놓을 수 있을 뿐이다. 룻은 자기가 죽어 나오미와 같은
장소에 묻힐 것을 약속한 것이지 동시에 같이 죽겠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룻이 먼저
죽게되어 이들이 잠시 떨어져 있게 될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 무엇으로도 갈라 놓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도 죽음은 기어이 그들을 갈라 놓고야 만다. 죽음은 이별의 시간으로 우리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준비해 두고 있어야 한다.
둘째, 아무것도 룻과 나오미를 헤어지게 할 수 없게 되었다. 룻의 가족이나 백성들이 보여준
호의나 그들에 대한 기대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친절이나 그들이 당한 궁핍과
치욕조차도 이들을 헤어지게 할 수 없었다. "아닙니다. 나는 결코 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나이다."
(2) 이것은 하나님과 신앙에 대한 단호한 귀의의 한 전형이었다. 우리도 어느 때는 이러한 결단이
있어야 한다.
[1] 우리는 여호와를 우리의 하나님으로 모셔야 한다. "이 하나님이 영원토록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로다. 그리하여 나는 그가 나의 하나님임을 인정하나이다."
[2]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영접했을 때는, 모든 점에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을
우리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비록 가난하고 멸시받던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역시 우리의 백성이 된다.
[3] 우리의 운명을 그들과 같이 함으로써,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우리는 같은 멍에를
짊어지고 거기에 충성스럽게 따라야 하며, 같은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며, 추방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명하신 곳이라면 가야 하고, 감옥일지라도 하나님의 명이라면 서슴지 않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죽을 것을 명하시면 서슴지 않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죽을 것을 명하시면 우리는 죽을 수 있어야 하며, 의로운 무덤속에 우리의 뼈를
묻어야 한다. 비록 그들의 무덤이 "보통 사람의 무덤" 과 같은 모양이라도 그들의 무덤에는
평화와 영원한 안식이 있다.
[4] 우리도 인내심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라야 하며, 룻이 나오미를 따른 것보다 더
확고하게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룻은 죽음이외에는 아무것도 나오미로부터 자기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단언을 했지만, 우리는 죽음마저도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명을
방해하지 못하게 해야 하며, 죽음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행복을 막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5] 우리는 이 경건한 결심을 결코 깨뜨리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깊이 조심하며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해야 한다. 결심은 굳을수록 좋다. 정직하게 계획하는 자에게는
확신이 있는 것이다.
8. 나오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18절). "나오미는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것이 바로 나오미가 얘기한 목적으로서 그 여자와 같이 따르려는 나오미의 마음을 확고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룻이 나오미의 의도를 알았다는 것을 보고, 나오미는 아주 흡족하여 "룻에게
말하기를 그쳤다." 나오미는 방금 룻이 말한 엄숙한 선언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결단력은 이렇게 유혹을 물리쳤다. 확고한 마음으로 믿음의 길을 갈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자는,
도둑을 맞아 들이려는 반쯤 열려진 문 같아서 쉽게 유혹에 넘어간다. 그러나 이에 대한 확고한
결심이 선 자는 문을 꼭 잠그고 마귀와 대항하여 결국 그것을 몰아내게 된다. 시리아의 역본은
나오미와 룻의 논쟁을 다음과 같이 쉽게 설명해 놓고 있다. 룻이 말하기를 "어머니를 떠나라고
강권하지 마옵소서, 변절자가 될까 두렵나이다." 나오미가 말하되, "우리는 안식일과 성스러운
날들을 지키도록 명을 받았으며, 그 날에는 안식일의 노정으로서 이천 큐빗 이상은 갈 수가
없노라." 룻이 말하되,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겠나이다." 나오미가 말하기를 "우리는
이방인과 함께 밤을 지내지 않도록 명을 받았도다." 룻이 말하기를, "허나 어머니가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나오미가 이르기를 "우리에겐 우리가 지켜야 할 613개의 계율이
있노라." 룻이 말하되, "당신의 백성이 곧 나의 백성이므로 그들이 지키는 것을 나도
지키겠나이다." 나오미가 가로되, "우리는 다른 이상한 신을 섬길 수 없느니라." 룻이 말하되 
당신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리이다." 나오미가 이르기를 "우리에겐 악한자들은 돌로 쳐
죽이고, 불태워 죽이고, 목졸라 죽이고, 또 칼로 죽이는 네 가지 종류의 처벌법이 있느니라."
룻이 대답하되 "하오나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 나도 죽으리이라." 나오미가 말하되, "우리에겐
지정된 묘지가 있느니라." 룻이 답하되, "나도 거기에 묻히겠나이다. "
베들레헴에 돌아온 나오미(룻기 1:19-22)
나오미와 룻은 피곤한 걸음 걸이로 (매우 피곤한 여행길이나 그 동안 이들은 서로 훌륭한 대화를
나누고 나오미는 룻에게 좋은 교훈을 많이 들려주어 이들의 여행길은 덜 피곤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드디어 베들레헴에 이르렀다. 그들이 함께 도착했을 때는 "보리 추수를 시작할시기" 로
모든 곡식 중 처음 추수하는 계절이었다. 그 다음에는 밀을 추수하는 시가가 온다. 이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는 사실을 모압 지방에서도 들었는데, 이제 그것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룻은 그 풍요한 나라의 최상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때 그 백성들은
겨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시간은 여호와의 손 안에 있듯이", 그들의 모든 일과 시간도
그러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주목되어 있다.
Ⅰ. 이들을 보자 이웃 사람들은 동요를 일으켰다는 것.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었다" (19절).
나오미의 오랜 친지들은 그녀 주위에 모여들어 그녀가 간 곳에 대해 묻기도 하고 그녀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것을 기쁘게 맞아 주었을 것이다. 만일 이들이 떠들썩 했던 것이 나오미를
만난 반가움 때문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들은 나오미의 초라한 모습에 떠들썩했는지도 모른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나오미가 전에 퍽 훌륭하게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사람들이 동요를 일으키진 않았을 것이다. 귀하고 부유하게 살던 사람들이 가난해진다거나
불명예스럽게 되면, 그들의 몰락은 더욱 두드러져 가난해진다거나 불명예스럽게 되면, 그들의
몰락은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 마련이다. 그들은 "이 사람이 나오미냐" 고 물었는데, 그들은 바로
그 성읍의 여인들이었다. 원어의 단어가 여성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오미와 이전에 친했던
사람들은 이 지경이 된 나오미를 보고 놀랐다. 고생으로 늙고 상한 나오미를 보자 사람들은 그들의
눈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고, 그 여자가 그리도 신선하고 아름답고 명랑했던 이전의 그 나오미라고
생각할 수가 없어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이 사람이 나오미냐!" 장미가 만발해 있을 때와 시든

모습과는 너무도 다르다. 이전에 풍부했던 때의 나오미에 비해 지금 그녀는 얼마나 초라한가! 그
여자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저 여자가 그 이웃과 같이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에서 돌아다니던
사람이냐? 그래, 저 꼴이 뭐람" 하고 경멸하고 비웃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매우 야비하고 비열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몰락을 보고 쾌재를 부르는 사람처럼 야비한 자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정과 연민을 가지고 묻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가 바로 좋은 집에서
풍족하게 살면서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던 바로 그 여자냐? 재물이란 얼마나 헛된 것인고!"
처음 성전의 장엄미를 알고 있던 자들이 제 2성전의 초라함을 보고 울었듯이, 여기서도 역시
그러했다. 고통이란 순식간에 엄청난 변화를 야기시킨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병과 늙음으로 인해서
사람이 많이 달라지고 용모와 성격이 심히 변한 것을 보게 되면, 우리는 베들레헴 사람들의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사람이 나오미냐? 그 누구도 그가 나오미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은총을 베푸시사 우리에게 이 모든 변화를 주시며 특히 저
위대한 변화를 내려 주신다.
Ⅱ. 나오미의 성격은 퍽 침착했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자가 그녀의 빈곤함을 비웃더라도 나오미는
궁핍함 속에서도 긍지를 느낄 수 있었으므로,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경건한 인내력으로 이 비난을 참아내고 고통 중에 당하는 모든 슬픈 것들을 이겨내었다(20,21절).
"나를 나오미라 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즉 "나오미란 이름은 기쁨 또는 온후함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모든 나의 즐거움은 사라졌도다. 이제 나는 비탄에 젖은 여인이 되었으므로 차라리
나를 괴로움이나 고통을 뜻하는 마라라고 칭하라." 나오미는 이렇게 그녀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우리도 이처럼 우리의 형편을 잘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1. 나오미의 신분은 바뀌었지만 그녀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경건한 마음을 잃지 않았으며, 어떠한
격렬한 불평도 갖지 않았다. 다음을 관찰해 보자.
(1) 그녀에게 온 변화는 물론 몹시 슬프고도 우울한 것이었다. 나오미는 "풍족한 가운데 나갔다."
그 때 그녀에게는 두 아들과 남편이 있었다. 이 세상에서는 친척들 간의 화목에서부터 많은
위안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나오미는 남편과 아들을 잃고 "빈털털이로 돌아오게 되었
." 아마도 그녀는 가지고 떠난 모든 물건과 기대를 잃고 빈 손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이 세상의 풍요는 이토록 불확실한 것이다(삼상 2:5). 우리는 그런 풍요함속에서도
궁핍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성스러운 영적인 풍요는 결코 비어지지 않으며, 이것은 더 좋은
몫이니 "아무도 빼앗지 못하리라."
(2) 나오미는 그러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전능한 손길을 인정하고 있다.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신 분은 여호와이시며, 나를 괴롭게 하신 분도 전능자이시다." 고통에 처했을 때에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고귀한 영혼을 만족시키는 것은 없다. 
이는 여호와이시도다" (삼상 3:18; 욥 1:21). 특히 우리에게 고통을 주신 분은 바로 엘샤다이
곧, 전능자이심을 안다면, 우리가 그 분과 더불어 다투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요, 다만 그분께
복종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요 유익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약을 맺을 때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이름으로 나타나셨다. 곧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창 17:1). 하나님께서 계약의
하나님으로서 고통을 주신다면, 그 모든 우리의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우리의
필요에 넉넉히 채워주실 것이다. 우리에게서 재물을 앗아 가시는 하나님은 또한 이렇게 우리를
당신 자신으로써 채워 주실 것인가를 알고 계신다.
(3) 나오미는 자기가 당한 고통을 매우 감격스럽게 말하고 있다. 그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고통의 잔은 쓰라림으로, 나중에는 거기에서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을지라도",
그 당시로서는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이다" (히 12:11). 욥은 고통 중에서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신다" 고 불평하고 있다(욥 13:26).

(4)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치셨으므로 그 고통이 왔다고 고백한다.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도다." 하나님이 우리를 교정코자 하실 때에는, 우리를 "치시고" 우리와 싸우신다(욥
10:17).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노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징계의
채찍에는 한 음성이 있으니 곧 증거의 음성이다.
2. 나오미는 이러한 변화에 순응하고 있다.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라. 나는 나 자신에게나 내
이웃에게 즐거운 자가 아니도다. 차라리 나의 현재 상태에 더 적합하게 나를 마라라 칭하라."
귀하고 풍족하였던 자가 비천해지고 빈곤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즐겨쓰던 헛된 이름이나
명예의 칭호를 쓰는 수가 흔히 있다. 그러나 나오미는 그렇지 않았다. 나오미의 겸손한 성품은
이렇게 비참해진 상태에서 영광스런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것을 용납치 않았다. 하나님이
나오미에게 심한 고통을 주었을 때 그녀는 그 섭리에 순응하여 자기를 고통이란 뜻을 지닌
마라라고 칭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우리를 겸손케 하시려는 섭리를 당하여서는 우리의 심령을
겸손케 해야 마땅하다. 우리의 형편이 낮아졌을 때에는 우리의 마음도 낮아져야 한다. 고통
중에서도 그러한 위로를 받는다면 그 고통은 우리에게 거룩한 유익을 줄 것이다.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정당하게 초대된 고통은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 Perdidisti tot mala, si nondum misera
esse didicisti 고통을 겪는 법을 아직 모르는 자는 여지껏 겪은 고통이 무의미해지고 만다(sen
ad Helv). "환난은 인내를 낳는다."

보아스의 밭으로 간 룻(룻기 2:1-3)
나오미는 이제 그녀의 옛 친구들이 살고 있는 베들레헴에 도착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Ⅰ. 그녀의 부유한 친족 중에 보아스라는 유력한 자(1절)가 있었다. 시리아역은 그 귀절을 "율법에
있어서의 유력자" 라고 해석하고 있다. 만일 보아스가 재물과 성서에 있어서의 다 같이 유력한
자라면, 그것은 가장 희귀하고 훌륭한 결합이었다. 그런 자야말로 참으로 유력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아스는 광야에 있을 때 유다 지파의 한 방백이었던 나손의 손자였고, 여리고의
기생 라합에게서 나은 살몬의(아마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보아스 곧 그 안에 힘이 있다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당시에는 몰락되어 비천해진 엘리멜렉의 가문에 속한 자였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보아스는 위대하고 부유한 사람이었으나 그는 가난한 친족들을 갖고 있었다. 모든 나무 가지가 다
꼭대기 가지가 될 수는 없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자기의 비천하여 보잘것
없는 친족을 부끄럽게 여겨서는 안 되며, 이들에게 거만하거나 경멸을 품거나 이들을 부당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2. 나오미는 가난하고 비천한 과부이긴 했지만 부유한 친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뽐내지도 않았고, 또 그에게 부담을 끼치지도 않았으며, 고통을 당하여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그에게 어떤 도움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지도 않았다. 자기들은 가난하나 부유한 친척을
가진 자들은, 서로 다르게 하시는 것이 (우리는 그것을 묵인해야 한다.) 현명하신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친족을 가진 것을 뽐내는 것은 커다란 죄이며,
그들을 의지하는 것은 크게 어리석은 일이다.
Ⅱ. 나오미에게는 룻이라는 가엾은 며느리가 있었다.

1. 룻의 형편은 매우 비천하고 가난했다. 그것이 유대교인으로 개종한 이 젊은 여자의 믿음과 지조에
큰 시련을 주었다. 베들레헴 사람들이 서로 번갈아 가며 나오미와 그 며느리를 좋은 집으로
초대했다면 퍽 좋았을 것이다. (그것은 이 나이 많은 과부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며, 이
새로운 개종자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의 진미를 맛보기는 커녕 이들은
필요한 식량을 얻기 위해 보이는 대로 이삭같은 것들을 주워야 했으며, 이것마저 없다면 이들은
굶어 죽을 지경이었다. "하나님은 세상의 가난한 자를 택하셨다." 는 사실을 유의하자. 그러나
비록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하셨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흔히 그들을 멸시하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
가난하기가 일쑤이다.
2. 이러한 형편에 처했으면서도 룻의 성품은 매우 착했다(2절). "룻은 나오미에게 말했다." 즉,
여기서는 궁핍하여 살아갈 수가 없으니 나로 하여금 모압 땅에 다시 돌아가게 하옵소서. 
여기에는 식량이 없으나 나의 아버지의 집에는 식량이 풍족히 있나이다" 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룻은 "그녀가 떠나온 곳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이 바로 돌아 가기에 알맞은 기회였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녀의 하나님이었으나
비록 하나님이 룻을 죽인다 하더라도 그녀는 하나님을 의지할 것이며, 결코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요청이란 단지 "나도 밭에 가서 이삭을 줍게 하옵소서" 하는 것뿐이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곱게 자라난 자라도 나중에는 어떤 곤경에 처하게 될는지 또 식량을 얻기 위해 어떤 천한
일을 하게 될는지는 알 수 없는 법이다(애 4:5). 이렇게 우울한 지경에 처할 때에는 룻을
생각하자. 그녀는 다음과 같은 본을 보였다.
(1) 겸손의 본, 하나님이 그녀를 빈곤하게 했을 때, 룻은 "구걸하면서 이삭 줍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고 비천한 생활을 기꺼이 받아 들이며 그녀의 운명에 순응하였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를 굽히고 구걸하기보다는 차리리 굶어 죽는 편을 택한다. 그러나 룻은
그렇지 않았다. 룻은 자기가 비천하게 자라나지 않았다는 말을 시어머니에게 하지는 않았다.
비록 그녀가 천하게 키워지지 않았지만 이제 그녀는 초라한 형편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 불만을 느끼지 않았다. 그것은 나오미의 훈계 때문이 아니라, 룻 자신의 마음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젊은이에게 있어서 겸손은 가장 찬란한 장신구이며, 가장 좋은 전조라 할
수 있다. 룻을 영예롭게 한 것은 바로 이 겸손이었다. 이삭을 주우러 가려던 그녀가 얼마나
겸손한 말을 하고 있는가 주시해 보자.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룻은 "내가 가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그러나 아무도 내 자유를 막지 못할
것이옵니다." 라고 말하지 않고, "누군가 내게 이삭 주울 자유를 허락해 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내가 나아가 이삭을 줍겠나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빚을 독촉하듯이 남에게 친절을 강요해서는 안 되며 겸손하게 친절을 요구해야
한다. 또 극히 작은 친절이라도 그것을 호의로 받아들여야 한다. 가난한 사람은 간청하는 것이
좋다.
(2) 근면의 본. 그리하여 그녀는 나오미에게 "내가 이 마을의 처녀들을 만나러 가게 해 주옵소서.
아니면 들에 나가 맑은 공기를 즐겁게 마시게 해 주옵소서. 나는 온종일 찌푸린 얼굴로
어머니와 함께 앉아 있을 수 없나이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 룻이 원하는 것은 오락이 아니라
일이었다. "내가 가서 이삭을 줍게 하옵소서.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겠나이다." 라는 것이었다.
룻은 정숙한 여자라 놓고 먹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고하는 것을 즐겼다. 이것은 젊은
사람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젊은이는 늙기 전에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할 일을
발견하면 자기들의 힘으로 그것을 해야 한다." 부지런한 성품은 이 세상 뿐만 아니라 저 세상을
위해서도 좋은 징조가 된다. 잠자는 것이나 오락이나 빈둥거리는 것을 삼가고 오직 일을

사랑하라. 이것은 또한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의 생계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비록 천한 직업일지라도 정직하게 일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는 안 된다.
e.rgon ouden ovuei/doj 어떤 일도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다. 죄악은 우리가 부끄럽게 여겨야 할
일이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은 어떠한 것도 부끄럽게 여겨서는 안 된다.
(3) 시어머니를 존경하는 분. 비록 나오미는 그녀의 시어미였지만, 이제 그녀의 남편은 죽었으므로
아내의 의무에서 해방되었다. 따라서 시어머니에 대한 의무도 또한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룻은 충성스럽게 나오미를 보살폈다. 룻은 나오미에게 알리지 않고 또 허락 받지 않고
외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젊은이는 그의 부모와 가장에게 존경심을 가져야 하며, 이것이
마땅히 그들에게 표해야 할 존경이다. 룻은" 어머니 만일 어머니가 나와 함께 간다면 나도 이삭
주으러 가겠나이다." 라고 말하지 않고, "어머니는 집에서 쉬시옵소서, 제가 가서 일하겠나이다
" 라고 말했다. Juniors ad labores, 젊은이는 일해야 한다. 젊은이는 나이든 사람들의 충고를
들어야 하며, 그들을 부려먹어서는 안 된다.
(4)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본. 이것은 "내가 뉘게 은혜을 입으면 그들 따라서 이삭를 줍겠나이다."
라는 룻의 말에 나타나 있다. 룻은 어디에 가야 할지 또 누구에게 물어보아야 할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자기를 도울 사람을 보내 주시리라는 것을 믿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선한 생각을 계속 갖도록 해야 하며, 우리가 올바로 한 그것은 우리를 도우리라는 것을 항상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룻에게도 도움을 주셨다. 그리하여 안내자나 동행인 없이 룻이
홀로 이삭 주우러 나갔을 때 "우연히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다" (3절). 그녀에게 이것은
우연한 일 같았다. 그녀는 이 밭이 누구의 것인지 몰랐고, 다른 사람들보다 유별난 목적을 갖고
그 곳에 간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여기에 우연히라는 단어를 넣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가 그녀의 발걸음을 이 밭으로 인도하여 주셨다. 하나님은 작은 일에까지 지혜롭게
명령하신다. 전혀 우연한 것처럼 보이는 일들도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백성의 선함을 나타내는
데 이바지한다. 우리에게는 우연인 것처럼 보이나 하나님의 섭리가 계획하여 일어나게 하신
작은 일로부터 많은 중대한 일이 발생한다.
이삭을 줍는 룻(룻기 2:4-16)
이제 보아스 자신이 마차를 타고 와서 그의 하인과 이 초라한 이방인에게 품위 있는 모습을 드러내었다.
Ⅰ. 익은 곡식을 추수하기 위해 고용된 보아스의 하인들에게 보아스가 나타났다. 추수할 때는 분주한
시기로 많은 일손들이 필요하다.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 유력자 보아스에게는 할 일이 많았고,
따라서 많은 하인이 필요했으며 그는 그들의 생활을 돌봐야 했다. 재물이 불어갈수록 그것을
취하는 사람 또한 늘어가도다. 그러므로 주인은 그의 눈으로 그것들을 보는 것 이외에 무슨 기쁨이
있겠는가? 보아스는 여기에서 훌륭한 주인의 한 본을 보인다.
1. 보아스에게는 곡식을 베는 일꾼들을 거느린 한 사환이 있었다(6절). 큰 집안에서는 하인들을
감독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며, 그는 하인들의 일과 식량을 분배해 주어야 한다. 교역자들은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그러한 종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슬기롭고도 충성스러워야 하며, 여기
나오는 사환처럼 "주님께 모든 일들을 고해야 한다" (6절).
2. 그러나 보아스는 직접 곡식을 베는 일꾼들에게 왔다. 얼마나 일이 진전되었는가를 살피려고 온
것이다. 만일 잘못된 것이 있으면 바로잡고,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다시 명령을 내리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그 자신에게도 유익한 일이었다. (자기의 일을 전적으로 남에게 맡기는 자들은 일을

절반도 다 못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일꾼들에게 격려가 되는 일이었다. 그 종들은 그들의
주인이 찾아와 자기들을 돌보는 것을 보게 될 때, 이들은 더욱 흥겹게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편안한 생활을 하는 주인들은 부드러운 마음으로 하인들의 노고와 이들에게 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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