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g.Sub] 에스라 2장 [우리말성경] Ezra 2 [몇몇 족장은 예루살렘 여호와의 집에 도착해 그 자리에 하나님의 집을 재...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내용을 관찰할 수 있다.

Ⅰ. 포로에서 돌아온 가족들에 대한 기록과 각 가족의 수에 관한 기록이 보존되어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신앙과 용기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신념과 자기 고국땅에 대한 애착의 대가요, 그들의 명예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선한 모범을 따르는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우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영광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초청을 맞아들인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은 이것보다 더 신성한 기록인 "어린 양의 생명책에서" 영예롭게 발견될 것이다. 포로에서 돌아온 가족들의 명부가 보존된 것은 역시 후손들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즉 후손들은 그 기록을 통해서 자기들의 근원과 가족 관계를 알 수 있었다.

1. 그들은 "도(道)의 거민" 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유다는 한때 혁혁했던 왕국이요, 다른 여러 왕국들이 그 나라의 부속 도였다. 그래서 그 부속 도들은 유다에 종속되어 의존했었다. 그러나 이제 유다 자체가 하나의 도가 되어서 바아사왕으로부터 법률과 직권을 위임받게 되었고, 바사왕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의는 민족을 존귀케 하나, 죄는 민족을 왜소하게 만들고 비참하게 한다는 것을 깨달으라. 그러나 이와 같이 그들이 종이 됨으로써(약속으로는 자기들의 땅이었던 곳에서 나그네 노릇을 한 족장들처럼) "더 좋은 나라" "사라져 버릴 수 없고" 한 부속 도가 될 수 없는 "거룩한 나라" (히 11:16)를 회상하게 되었다.

2. 그들이 "각각 본성(本城)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즉 이전에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지정해 준 도성을 말한다. 적어도 그 때에 지정된 그 비슷한 도성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이의가 있을 법도 한데, 자기들의 도성이 없다고 항의한 자들은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3. 지도자들이 첫째로 언급되어 있다(2절).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그들에게 있어서 모세와 아론이었다. 전자는 그들의 우두머리 방백이고, 후자는 우두머리 제사장 격이었다. 느헤미야와 모르드게가 여기에 언급되어 있다. 혹자는 우리가 뒤에 가서 볼 수 있는 그 유명한 사람들과는 동명이인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마 동일한 사람이었으나, 후에 자기들의 나라를 섬기기 위해 궁정으로 되돌아 갔을지도 모르겠다.

4. 이들 중 어떤 가족들은 그들 조상들의 이름을 따라 이름을 지었고, 또 어떤 가족들은 자기들 이전에 살던 지명을 따라 불리우고 있다. 우리들에게도 많은 성(姓)이 사람들이 이름을 따르거나 지역의 이름을 따르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5. 여기에 기록된 가족들 중 어떤 가족의 숫자는 느헤미야 7장의 기록과 다소간 차이가 있다. 느헤미야 7장에서도 이 목록이 반복되어 있는데, 그것은 여기에서 따간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처음에 기록된 자들의 이름 중 어떤 것은 나중에 가서 빠졌을지 모른다. "가겠습니다" 해 놓고 가지 않는" 자손이 생겼다면, 그런 경우에는 그들이 속했던 가족의 숫자는 감소되었을 것이다. 또 이와 달리 처음에는 사양했던 자들이 "후에 회개하고 갔을" 지 모른다. 그런 경우에는 숫자는 증가되었을 것이다.

6. 여기에는 "엘람의 자손" 이라 불리는 가족이 둘 있다(하나는 7절, 다른 하나는 31절).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두 가족의 숫자는 다 같이 1254명이라.

7. "높으신 주" 라는 뜻의 이름인 아도니감의 자손은 바로 "짐승의 숫자" 인 666이다(계 13:18). 계시록에서는 이 수를 "사람의 수" 라고 말하고 있다. 휴 브러턴 씨(Mr. Hugh Broughton)는, 그 숫자가 본문의 아도니감과 관계된 것이라고 본다.

8. 베들레헴 사람(21절)이라는 명칭의 사람들은-그 도성이 다윗의 도성이었지만-불과 123명뿐이었다. 베들레헴은 "유다의 수천 성읍들 중에서도" 작은 도성이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메시야가 나오게 되어 있다(미 5:2).

9. 아나돗은 베냐민 족속에게 유명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 가계에 속한 사람은 128명뿐이었다(23절). 이것은 아나돗 사람들이 그들 도성에서 난 예레미야를 박해함으로써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남은 자가 없으리라. 내가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곧 그들을 벌할 해이니라" 는 저주이다(렘 11:21, 23). 그리고 "가련하다. 너 아나돗이여" 라고도 했다(사 10:30). 선지자를 박해하는 것은 파멸을 가장 빨리 가져오는 길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설명이 있다.

Ⅰ. 돌아온 제사장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의 수가 현저하게 많았었다. 귀환자 전체의 약 10분의 1이 된다. 전체 수가 42,000명 정도(64절)인데, 4제사장 가족들의 수가 4,200명이 넘고 있다(36-39절). 이 수는 하나님의 몫인 열 중 하나-즉 축복된 비율이다. 여기에 기록된 제사장들 가족들 중 세 가족은 그 반열의 우두머리였다(대상 24:7, 8, 14). 네 번째 가족이 바스훌이었다(38절). 이들이 예레미야를 학대한 바스훌(렘 20:1)의 후손이라면, 그렇게 악한 사람이 이렇게 선한 씨를 얻고 그 수도 많아졌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Ⅱ. 레위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나는 이들의 수가 적음에 대해 이상히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을 합쳐서 350명이 되지 못했다(40-42절). 옛적에는 레위 족속들이 대제사장들보다 더 그들의 직무에 열성이었다(대하 29:34).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경건한 열심을 가졌다는 평판은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바람은 임의로 불어" 방향을 바꾼다.

Ⅲ. 느디님 가족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들은 생각건대 기브온 사람들로 추측된다. 기브온 사람들은 처음에 여호수아에 의해(수 9:27) 생명이(이름의 뜻대로) "주어졌고", 그 후에는 사울에게 추방되었다가 다시 다윗이 하나님의 전을 섬기는 레위인들에게 붙여 나무 베는 자와 물긷는 자로 삼았던 자들이다. 그리고 솔로몬은 자기의 종들과 그들이 같이 일하게 하였으며(외간상으로는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나타나 있지 않다), 여기서 성전 하속들 중에 들어 있고, 느디님 사람이란 명칭으로 계수되어 있다(55, 58절). 비록 천한 위치에서 일할망정 하나님의 전에 속해 있다는 것은 명예롭다는 것을 기억하자.

Ⅳ.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이요, 또 제사장들로 간주되었으나, 그런 영예로운 호칭이 불분명한 자들도 있었다.

1. 자칭 야곱의 자손이라고 하나 이스라엘인임을 입증할 수 없는 자들도 상당히 있었다(59, 60절). 그러나 그런 자들이 자기의 가문을 밝힐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의 전과 그 백성에 대한 애착은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들도 예루살렘에까지 올라가고자 했던 것이다. 이들은 참으로 "유다의 근원에서 나온" (사 48:1) 참 이스라엘의 씨들이었지만, 그 물의 맛을 잃어버린 그런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2. 또 여기에는 제사장임을 입증할 수 없으나, 사실은 아론의 씨라고 생각해야 될 사람들도 있었다. 문자로 보존되지 아니한 것은 얼마 안 가서 잊혀지는 수가 허다하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다음 몇 가지를 들을 수 있다.

(1) 그들은 어떻게 하여 자기들의 증빙자료를 상실했는가? 그들 조상 중 한 사람이 다윗 때에 훌륭한 사람이었던 바르실래의 한 딸과 결혼했다. 그래서 그는 이 훌륭한 가문과의 결연을 자랑했고, 제사장의 가족으로서의 이전 명칭보다 바르실래의 가문을 더 좋아하여 그 가문의 이름을 따라 그의 후손이라고 불리기를 원했다. 그렇게 되자 그들의 족보도 아론의 계보가 아니라 다윗 계보에 들어가게 되어, 결국은 가계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바벨론에서는 제사장 직분으로 인해서 오는 특권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므로 제사장 계보에 드는 것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자기들의 사역직이나 사역자와 자기들과의 인척 관계가 자기 자신을 경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내가 나의 직무를 존귀케 하리라" 고 말씀하신 분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2) 그들이 그 결과를 잃은 것이 무엇인가? 그들은 자기들의 제사장 직임을 증거할 수 없게 되자, 제사장이 될 수 없었었고 제사장 직위에 쫓겨나며 제사장 직분을 모독한 자로 여겨졌다. 이제 제사장들은 자기들의 권리를 회복했고, 제단도 다시 섰으므로 점차 본래의 직위가 회복될 터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천부의 권리를 인간적인 영광과 바꾸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마땅히 그 직위에서 쫓겨나고 "지성물(至聖物) 먹는 것이" 금지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당신을 섬기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실 것이다. 그들의 제사장 직분을 몰수 한사람은 총독이었다. 혹자는 현재의 총독 스룹바벨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느헤미야였다고 생각한다(느 8:9; 10:1 에는 그를 총독이라 했다. 그리고 그가 몇 년 후에 돌아와서 이 명령을 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금령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일시적인 정지에 불과했으며, 이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 볼 수 있는 "우림과 둠밈을 가진" 대제사장이 나올 때까지일 뿐이었다. 그런 때가 오기를 바랬다. 그러나 제2 성전에서 대제사장은 있었지만, 그런 시기는 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우림보다도 더 훌륭한, 완전한 표준 구약 성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신탁이 없어지자 가장 위대한 신탁인 메시야를 대망하도록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 우림과 둠밈이란 메시야라는 신탁의 한 모형에 불과했다. 제2 성전에는 법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또 있었다면 옛 것인지 새로 만든 것이었는지 확실치 않다. 실체가 다가오게 되자, 점차 그림자들은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법궤가 없다는 것 때문에 어떤 손상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암시하고 계신다(렘 3:6, 17). "그 때에, 곧 예루살렘을 여호와의 보좌라고 부르는 날에, 모든 민족이 그리로 모이는 그 날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시는 이야기되거나 기억되지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없이도 그들이 만사를 잘 해나갈 것이기 때문이니라.
여기에서는 다음의 내용을 볼 수 있다.

Ⅰ.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총계가 나와 있다. 앞에 나온 전체 숫자는 실제로 3만 명에도 이르지 못한다(29,818명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계수에 들어오지 못한 자가 만 2천 명 이상이었다. 이들은 아마 다른 이스라엘 족속, 즉 유다 족속과 베냐민 족속 이 외의 사람들로서, 그들의 가족이나 그들이 속했던 성읍을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는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1. 이 수는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간 숫자의 두 배가 넘는다. 이것을 볼 때, 애굽에서와 같이 고난의 때가 그들의 수효가 증가하는 때였다.

2. 그 민족의 출발은 극소수였다. 그러나 그들의 열조에게 주어진 약속으로 말미암아, 그 후 거의 500년이 지나, 로마에 의해 최후로 멸망받기 전에는 대단히 큰 숫자의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 고 하실 때는 "하나의 작은 자가 천 명이 될 것이다."

Ⅱ. 그들을 따른 수행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종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종들이 비교적 소수이고(65절) 짐을 진 짐승들의 수효가 그와 비슷하다는 것은 이상할 게 없다(66, 67절). 그들의 형편은 과거와 같지 않았다. 그들 중에 "노래하는 남녀" 가 200명이었다는 사실이 명시되어 있다. 이들은 아마 "그들의 애통을" 보조하기 위한 자라고 생각된다(대하 35:25 에 있는 자들과 같이). 이런 때가 오면 그들이 애가를 부르며 "울며 행하리라" 는 것이(렘 50:4) 미리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Ⅲ. 그들이 성전 건축을 위해 바친 공물. 이 내용은 68, 69절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1.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으로 올라왔다" 고 했다. 그러나 거룩하고 아름답던 그 전이 지금은 폐허가 되었고 쓰레기 더미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제단이 없어지자 "그 제단이 있던 장소" 에서 제사를 드렸다(창 13:4). 그리고 바로 이런 태도가 "성전의 티끌까지도" 사랑하는(시 102:14) 참 시온의 아들들의 자세이다.

2. 그들은 "그 곳에 성전을 세우기 위해" 예물을 즐거이 드렸다. 그들은 먼저 성전을 세우려고 했던 것 같다. 비록 그들이 여행에서 방금 돌아와 삶을 시작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들은 성전 건축을 위해 즐거이 예물을 드렸다. 아무도 자기들의 신앙을 위해 드는 비용 때문에 불평하지 말자.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께 바칠 때 그 대가를 다시 얻게 된다는 것을 믿게 하자. 이들의 헌물은 다윗 때에 방백들이 드린 헌물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다윗 시대에는 헌물을 달란트로 바쳤으나(대상 29:7), 지금은 몇 다릭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러한 몇 다릭도 그들의 능력에 비추어 본다면 과부의 동전 두 입과 같이 수천 달란트와 같이 하나님이 받으실 것이다. 금 6만 1천 다릭이란, 컴블란드(Cumberland)의 계산에 의하면, 상당히 많은 파운드에 해당된다. 그의 계산에 의하면, 1마네 60세겔이다(즉 30온스). 이것은 영국 돈으로 7파운드 10온스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본문의 5천 마네는 영국 돈으로 3만 5천 파운드 정도의 돈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바벨론에서 그들의 인원 증가에도 축복하신 것과 같이 재산 증가에도 축복하신 것 같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번성케 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즐거이 하나님 전 건축을 위해 바쳤다.

3. 그들은 "본성(本城)에" 거하였다(70절). 그들의 도성이 보수되지는 못했지만, 그곳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기들의 도성들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사는 것을 만족해 하였다. 또 화려함이나 풍요함이나 권세도 없었지만 자유와 자기 소유에 대해 감사했다. 그들은 대단히 빈곤했으나, 그들의 통일과 단결이 그 빈곤의 결과를 좋게 만들었다. 그들 모두와 모든 재산을 위해 충분한 터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 중에 다툼이 없었고 오히려 완전 조화만이 있었는데, 이것은 그들의 안정을 말해주는 좋은 전조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후대에 가서 그들이 서로 불화했을 때는 그 불화가 파멸의 전조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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