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g.Sub] 마태복음 2장 [우리말성경] Matthew 2 [유대 사람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
Ⅰ. 그리스도를 찾는 동방 박사들의 질문 2:1-8
자신이 열방들의 소망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세상에 오심이 전혀 축하받지 못하고, 주목되지 않았으며, 그의 탄생 역시 눈에 띄지 않은 채 무시되었다는 사실은 주 예수께 지워진 겸비의 표식이었다. 그가 '세상에 오셨으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 아니, 그가 '자기 땅에 왔으나 자기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그럴지라도 이후의 그리스도의 생애에서처럼 그의 탄생시의 극도로 비천한 가운데에도 몇 줄기 영광의 빛이 쏟아졌다. 그리스도가 나신 후 맨 처음으로 그를 주목하여 본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영광스런 일들을 보고 들은 목자들(눅 2:15)이었는데, 그들은 '그 사실을 널리 알렸고' 듣는 자들은 모두 그 일을 기이히 여겼다(17,18절). 그 후에 시므온과 안나가 그들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으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했다(눅 2:38). 그러므로 유대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은 이러한 암시들을 알아차렸을 것이며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아를 두 팔을 벌려 환영해 맞아들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후 거의 2년 동안 그가 베들레헴에 계셨지만 동방 박사들이 올 때까지는 그 이상 아무도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것을 볼 때 무관심하기로 작정해 버린 사람들은 아무리 해도 일깨울 도리가 없음을 알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사실들을 관찰해 볼 수 있다.
1. 동방 박사들이 그리스도에 관해 묻던 시기(1)
이때는 헤롯왕이 다스리던 시기였다. 이 헤롯은 에돔 사람으로서, 그 당시 로마 제국의 최고 통치자였던 아우구스투스와 안토니우스에 의해 유대 왕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거짓과 포악이 가득한 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헤롯 대왕이란 칭호를 받았다.
2. 이 박사들의 신분과 직업(1)
여기서 그들은 술사들(개역한글성경에서는 박사들-역주)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단어를 좋은 의미로 해석하는데, 바사인들에게 있어서 박사들은 철학자들이며 제사장들이었다. 다른 학자들은 그들이 부정한 마술을 행하였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단어는 마술사 시몬(행 8:9,11)과 박사 엘루마(행 13:6)에게 사용되었으며 그 밖에 다른 어떤 의미로는 성경에 사용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들이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든지간에 그들이 그리스도를 찾아 나서고자 했을 때부터 실로 그들은 지혜자들(개역 한글 성경에는 박사들-역주)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확실히 알 수 있는 몇 가지 사실들이 있다.
첫째로 그들은 이방인들로서 이스라엘 국가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무시하였으나 이 이방인들은 그를 찾아 나섰다. 흔히 수단을 가장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이 목적과는 가장 동떨어져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참조 마 8:11,12). 둘째로 그들은 학자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술책을 즉, 진기한 기술을 부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훌륭한 학자들은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한다. 또한 그들이 그리스도를 비울 때 비로소 그들은 그들의 학문을 완성시킨다. 셋째로 그들은 점치는 풍속으로 잘 알려진(사 2:6) 동방 사람들이었다. 아라비아는 동방의 나라(창 25:6)라고 불리우며 아라비아들은 동방 사람들(삿 6:3)이라고 불리웠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져 온 선물들은 바로 아라비아의 산물들이었다.
3. 박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찾도록 만든 것(2)
그들은 동방에 있는 그들의 나라에서 전에 보지 못했던 특이한 별 하나를 보았다. 그들은 이 별이 유대땅에서 태어난 한 특별한 인물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이 별은 보통 별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에 그들은 필시 이 별이 특별한 어떤 일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천사에 의해 유대 목자들에게 알려졌으며 별에 의해 이방 철학자들에게 알려졌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그들 자신의 언어로 그리고 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방법으로 말씀하셨다. 그들이 동방에서 보았고, 그리스도께서 누워계신 집으로 인도하던 그 큰 별은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안내하기 위해서 세워 둔 촛불이었다. 우상 숭배자들은 별을 하늘의 천군으로 숭배하였는데, 특별히 동방 민족들이 그러했다. 그런데 이처럼 오용된 별이 바르게 사용되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했다. 이방의 신들이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이다. 동방 박사들의 행동은 당시 동방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품고 있었던, 어떤 위대한 군주가 나타나리라는 기대에서 나온 소치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 마음 속에 신적인 감동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이 별을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하늘이 주신 표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하셨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4. 박사들이 그리스도를 찾아 나섬(2)
그들은 이 왕에 대해 더 자세히 알라 보려고 동방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왔다. 그들은 어쩌면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런 왕이 태어난다면 머지 않아 우리 나라에서도 그에 대한 소식을 들을 것이다. 그때 가서 그에게 경배드려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더 잘 알고 싶은 마음에 견딜 수가 없어서 그를 찾아 나서는 긴 여행을 떠났다. 진실로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찾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은 그를 찾는 데서 따르는 고통과 위험을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들의 질문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사람이 태어났는지 태어나지 않았는지를 물은 것이 아니라 그가 어디에서 태어나셨는가를 물었다. 그리스도에 관해 어떤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더욱더 알기를 갈망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이 질문에 대해 선뜻 답을 들을 것이며 모든 예루살렘 거민들이 이 새 왕의 발 앞에 부복하여 경배드리는 것을 보게 되리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에게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못하였다. 세상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욱 엄청난 무지가 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틀림없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리라고 우리가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실상은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들은 이곳 저곳 찾아 다니며 계속해서 물었을 것이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어떤 사람들은 그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어째서 그 사람을 찾소?"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았기 때문이요"라고 박사들은 대답한다. 그러면 또 그들이 묻는다. "당신들은 그에게 무슨 볼 일이 있오? 동방 사람들이 유대인의 왕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요?" 박사들은 즉시 "우리는 그를 경배하러 왔소"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처럼 그 마음 속에 샛별이 떠올라 그리스도에 관해 조금이라도 알게 된 사람들은 자진해서 그를 경배하려고 해야 한다.
5. 이 질문에 관한 예루살렘의 반응(3)
그 소식은 마침내 왕궁에까지 이르렀으며 '헤롯은 그 소식을 듣고 매우 당황하였다'(3절). 헤롯이 메시야와 그의 왕국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과, 다니엘의 날짜 계산에 의해 정해진 그의 출현 시기에 관해 전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자신이 그렇게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통치해 왔기 때문에 그는 그러한 약속들이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그러한 예언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왕국은 견고히 서서 영속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당황하며 낙담했겠는가! 그러나 에돔 사람 헤롯은 당황하였을지라도 예루살렘 거민들은 그들의 왕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으리라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예루살렘이 헤롯과 함께 소동하며' 이 새 왕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무슨 나쁜 결과가 미치지 않을까 하여 불안해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단지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필연적인 지배권의 혁명으로부터 오는 현재의 몇 가지 어려움들 때문에 하나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보다는 오히려 죄의 노예 상태를 택한다. 헤롯과 온 예루살렘은 메시야의 왕국이 세속적 권력과 대립하여 충돌할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그렇게 소동하였다. 그러나 메시야를 왕으로 선포한 그 별은 그의 왕국이 이 낮은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천상적인 것임을 명백하게 암시하였다.
6. 박사들의 질문에 대한 제사장과 서기관들의 답변(4-6)
아무도 유대인의 왕이 어디 있는지에 대해서 확실히 말할 수 없었다. 그러자 헤롯은 그가 태어나리라고 기대되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요 7:42)는 것은 대개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헤롯은 이에 대해 고문들의 조언을 얻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이 방면에 정통한 사람들, 즉 모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불러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악한 의도를 마음에 품고서 선한 질문을 한다.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이 질문에 답변하는데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의견이 분분하지 않았고 모두가 일치하여 메시야는 틀림없이 다윗 성 베들레헴에서, 여기서 말한 대로 한다면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신다고 말하였다. 베들레헴이란 덕 집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베들레헴은 참된 만나 즉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 온 떡'으로서 태어나실 그리스도에게는 가장 적합한 장소이다. 베들레헴의 영광은 다른 성읍들처럼 사람들 수의 많음에 있지 않고 거기에서 태어나신 왕의 위대성에 있다. 즉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은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시 87:6)한 바로 이 사실에서 베들레헴이 이스라엘의 다른 모든 성읍들 위에 뛰어난 탁월함을 가졌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 즉 유대인의 왕이 나오리라.' 베들레헴은 다윗의 성이었고 다윗은 베들레헴의 영광이었다. 따라서 다윗의 후손이며 계승자는 거기에서 태어나야 했다. 베들레헴 성문 곁에는 다윗이 그렇게 마시기를 원했던(삼하 23:15) 유명한 샘이 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히 먹고 남을 떡뿐만 아니라 와서 값 없이 마실 수 있는 생명수도 또한 얻게 된다.
7. 이 질문으로 인해서 야기된 헤롯의 유혈 계획(7,8)
헤롯은 이제 늙었고 벌써 35년간이나 통치해 왔다. 이 왕은 이제 갓 태어났고 그래서 앞으로 수년 동안은 굉장한 어떤 일을 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롯은 그를 시기하였다. 왕위에 앉은 자가 그의 계승자를 생각하는 것도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일인데, 하물며 그의 대적자를 생각하는 일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이 어린 왕의 피밖에는 아무 것도 그를 만족하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1) 그는 간교하게 이 계획을 세웠다(7,8). 그는 이 문제에 관해 박사들과 이야기 하기 위해 '그들을 가만히 불렀다.' 그는 자신의 두려움과 질투를 솔직하게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죄인들은 종종 자기 혼자만이 간직하는 은밀한 두려움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헤롯은 박사들에게서 별이 나타난 때를 묻고나서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더 자세히 알아보고 그 결과를 자기에게 보고하도록 명령하였다. 만약 그가 신앙심이란 허울을 뒤집어 쓰지 않고서 이렇게 했다면 즉 그가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의 이러한 모든 행동은 의심을 받았을 것이다. 종종 가장 사악한 악은 경건이라는 가면으로 자신의 모습을 숨긴다.
(2) 묘하게도 그는 그 일을 박사들에게 맡김으로써 우롱을 당하였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불과 10여 킬로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만일 헤롯이 정탐꾼들을 보내어 박사들을 감시하도록 했다면 박사들이 예수께 경배하자마자 곧 달려 들어 그 자리에서 그 아기를 손쉽게 처치해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Ⅱ. 아기 예수에 대한 박사들의 경배 2:9-12
우리는 여기에서 이 새로 태어난 유대인의 왕에 대한 박사들의 겸손한 경배와 그들이 아기에게 바친 경의를 보게 된다. 그들은 아기를 찾기까지 찾으리라는 결심을 하고서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으로 떠났다. 그러나 아주 이상하게도 그들만이 베들레헴에 갔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경배하기 위해서 먼 나라로부터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친족인 유대인들은 한 걸음도 옮기려 하지 않았고 그를 환영하기 위해서 지척에 있는 이웃 성읍에 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비록 우리가 혼자일지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경배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지간에 우리는 주님을 섬겨야 한다.
1. 그들이 이전에 자기 나라에서 보았던 그 별에 의해 그리스도를 찾음(9,10)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들을 알게 된다.
(1)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참으로 은혜롭게 인도하셨다. 그 별이 처음 나타났을 때 그들은 어디에 가서 이 왕에 대한 소식을 물어야 할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별이 사라졌을 때는 그들은 그 왕을 찾기 위해서 일상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평범한 수단을 사용할 수 있는 곳에서는 특별한 도움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있는 데까지 그 문제를 추적해 갔다. 그리고 마침내 베들레헴으로 향하는 여행에 올랐다. 그러나 그곳은 인구가 조밀한 성읍이다. 베들레헴에 가서는 어디에서 그를 찾을 것인가? 생각이 요기에 미치자 그들은 당황하며 어찌 할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거기에 버려 두시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보라 동방에서 보던 별이 그들을 앞서 갔다. 만약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의 의무를 계속해서 해 나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스스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며 우리를 지도하실 것이다. 오랫동안 그들에게서 사라졌던 별이 이제 그들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은 빛이 그들을 위해 보존되며 비춰진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이 별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표식이었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안내자로서 그의 백성들을 앞서 가신다. 그리스도를 안내자로서 그의 백성들을 앞서 가신다. 그리스도를 찾는 자들의 마음 속에는 떠오르는 하나의 샛별이 있다(벧후 1:19).
(2) 그들은 크게 기뻐하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갔다.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10절). 이제 그들은 자기들이 잘못 생각하지 않았으며 이 긴 여행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하였다. 하나님의 임재와 은총의 표식은 그 가치의 귀중함을 아는 사람들의 영혼을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채우고야 만다. 우리가 사람에게서는 아무리 적게 기대하여도 지나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는 아무리 많이 기대할지라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 박사들은 그 별을 보자 황홀한 기쁨에 도취되어 버렸다. 이제 그들은 곧 의의 태양이신 주 그리스도를 보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금 샛별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르는 길을 보여 줄 모든 것을 기쁘게 여겨야 한다. 이 별은 박사들을 맞이해서 왕의 알현실로 그들을 안내하기 위해 보내진 것이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의를 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선대하시겠다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고 계시다(사 64:5). 하나님은 때때로 어린 신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삶을 다시 시작할 때 당하는 어려움들에 임해서 그들에게 큰 격려가 되는 그의 사랑의 표식들을 보여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2. 아기 예수께 대한 박사들의 태도(11)
우리는 여기서 그들이, 마굿간이 이 아기 왕의 궁전이며 그에게 딸린 수행원이라고는 초라한 그의 어머니밖에 없음을 알았을 때 얼마나 실망했겠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박사들은 이 초라한 휘장을 꿰뚫어 볼 수 있을 만큼 아주 지혜로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탐문이 실패하였거나 헛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찾던 바로 그 왕을 만났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그에게 그들 자신을 바치고 난 다음 그들의 예물을 드렸다.
(1) 박사들은 그들 자신을 그에게 바쳤다. '그들은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였다.' 비록 헤롯이 왕으로서의 최고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갖추었을지라도 박사들이 그에게 그와 같은 경의를 표했다는 기록을 우리는 보지 못한다. 그러나 이 아기에게 그들은 이같은 경의를 표하였다. 단지 왕에게 드리는 것으로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으로서의 경의를 바친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난 자들은 누구나 그 앞에 엎드리어 그를 경배하고 그에게 복종한다. 그는 네 하나님이시니 그를 경배하라.
(2) 박사들은 그에게 예물을 드렸다. 동방에서는 사람들이 왕에게 경의를 표할 때 예물을 바쳤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 바쳐야 한다. 먼저 우리 자신을 그에게 산 제사로 드리지 않는한 우리가 드리는 어떠한 예물도 주께서는 받지 않으신다. 박사들이 드린 예물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었는데, 이것은 돈과 동네 상당하는 물건들이었다. 하나님의 섭리로 이것들은 현재 빈궁한 처지에 빠져 있는 요셉과 마리아에게 시기적절한 도움을 주기 위해 보내진 것이다. 이 예물들은 박사들의 나라에서 나는 것들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가지고 그에게 경배해야 한다. 그들은 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예물로서 그에게 황금을 드렸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서 유향을 드렸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향기로써 하나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차 죽으실 사람으로서의 그에게 몰약을 드렸는데 이는 몰약이 죽은 자의 시체를 썩지 않도록 보존하는 데 쓰였기 때문이다.
3. 박사들이 아기 왕께 경배한 후에 고국으로 돌아감(12)
헤롯은 전에 그들에게 그에 관한 소식을 자기에게 알려 달라고 명령했었다. 만약 박사들이 반대 명령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자신들이 헤롯의 명령대로 함으로써 그의 간교한 계획의 도구 노릇을 하게 된 것을 의심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그렇게 했을 것이다. 정직하고 선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은 곧잘 다른 사람들도 으레 그러려니 하고 믿기 때문에 세상이 실제로 그렇게 악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헤롯이 아기 예수께 대하여 꾸민 해악을 막으셨다. 그들은 헤롯에게로도 예루살렘으로도 돌아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그리스도를 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려고 하지 않은 자들은 그리스도께 관한 소식을 들을 만한 가치가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그 소식을 그들의 동포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 이후 그들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전혀 들을 수 없다.
Ⅲ. 그리스도께서 애굽으로 피난 가심 2:13-15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헤롯의 핍박을 피하기 위해 애굽으로 피난가심을 본다. 그리스도께서 유아시에 받은 존경은 마땅히 그가 받았어야 할 것에 비교하면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받은 지극히 작은 존경마저도 그를 명예롭게 하기보다는 위험에 빠뜨리고 말았다.
1. 요셉에게 내려진 피신 명령(13)
요셉은 아이에게 어떤 위험이 닥쳤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위험을 빠져 나가야 할지 모르고 잇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셨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마 1:20) 꿈 속에서 천사를 시켜 그에게 말씀하신다. 여기서 요셉은 그들에게 어떤 위험이 닥치고 있는지를 듣게 된다. 즉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를 대적하는 적들의 모든 잔인한 계획과 목적들을 다 아신다. 영광스러운 예수께서는 이같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괴로움을 겪으셨다. 일반적으로 노년에 고통과 수고를 겪는 사람들도 유년기에는 평화롭고 조용한 시기를 보낸다. 요셉은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해 할바를 지시 받았다.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하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일찍부터 그리스도께서는 후일에 자신이 세운 규칙(마 10:23)에 대해 모범을 보이셔야만 했다. 즉 '이 동리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리로 피하라'는 것이다. 자연 법칙 중 하나로서 자기 보존은 필시 하나님의 법의 한 부분에 속한다. 피하라. 그러나 하필이면 애굽으로 피해야 하는가? 애굽은 우상 숭배와 폭정 그리고 하나님 백성에 대한 적대 행위로 잘 알려진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이 거룩하신 아기 예수께서 피하실 피난처로 정해졌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기만 하면 가장 악한 장소라도 하나님의 목적을 가장 잘 돕도록 만드실 수 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고려해 볼 수 있다.
(1) 이 명령은 요셉과 마리아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려는 유혹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이 아이가 우리가 그에 대해서 들은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같이 초라하고 창피스러운 후퇴 말고는 벌레같은 인간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다른 방법이 없겠는가?" 그들은 얼마 전에 그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스라엘 땅은 그렇게 빨리 성화를 부려 그를 내쫓는가?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와 아주 가까운 관계를 맺게 하심으로써 아기와 그 모친을 위해 얼마나 훌륭한 준비를 해놓으셨는가를 우리는 여기서 보게 된다. 이제 박사들이 가져왔던 황금이 그들의 비용을 부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재난을 미리 내다 보시고 사전에 그 재난에 대비하도록 준비해 두신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은 하나님이 계속해서 그들을 보호하고 인도하시겠다는 것을 나타내며, 요셉은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명령을 들을 것을 기대하며 새로운 지시가 없이는 움직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한다.
(2) 애굽으로의 피신은 우리 주 예수께서 받으신 수치의 표식이었다. 베들레헴의 사관에 그를 위한 방이 없었던 것처럼 이제 유대 땅에는 그가 평온히 지낼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어느 때든지 우리와 우리의 아기들이 곤경에 처할 때면 그리스도께서 어린 시절에 겪었던 곤경을 기억하자.
(3) 또한 이러한 명령은 아기 예수께 대해서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분노를 표시한 것이다. 예수께서 자기를 무시한 자들을 떠나가신 것은 당연한 일이다.
2. 이 명령에 대한 요셉의 순종(14)
그 여행이 아기와 그 모친에게는 불편하고 위험스러웠을 것이다. 그럴지라도 요셉은 하늘의 뜻에 불순종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꾸물거리며 더디게 순종하지도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자마자 즉시 일어나 밤에 애굽으로 떠났다. 여기에서 보듯이 결단코 순종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순종의 행위를 재빠르게 해야 한다. 이제 요셉은 그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렇게 했듯이 '갈 바를 알지 못한 채'(히 11:8) 무조건 하나님을 의지하고 떠나갔다. 요셉은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갔다. 어떤 학자들은 이 말씀에서 아기가 중요한 인물로서 먼저 언급되고 마리아는 요셉의 아내로 불리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더 존귀한 신분을 나타내는 그의 모친으로 불리고 있는 사실에 유의한다. 그들은 헤롯이 죽기까지 계속해서 애굽에 있었다. 그들은 성전과 성전 예배로부터는 거리가 먼 곳에, 우상 숭배자들이 우글거리는 가운데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 대한 예배 의식들에 참여치 못하고 악한 자들과 함께 있게 되는 것이 운명의 탓일 수는 있으나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럴지라도 그 생활은 선한 백성들에게 슬픔이 될 수 밖에 없다.
3. 이 모든 일에 있어서의 성경 성취(15)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노라'(호 11:1). 다른 어느 복음서 기자들보다 마태는 그리스도에 관한 일에 있어서 성경의 성취 사실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다. 이제 선지자의 이 말씀은 의심할 것 없이 하나님께서 내 아들 내 장자라고 말씀하신(출 4:22)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해내신 사건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 말씀이 유추의 방법에 의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다. 성경에는 많은 예언들의 성취 사실들이 있다. 하나님은 매일 성경을 성취시키고 계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낯선 땅 속박의 집 애굽에 있는 것이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그들이 애굽에 잠시 숨겨질 수는 있을지라도 그곳에 버려지지는 않을 것이다.
Ⅳ. 헤롯의 야만적인 유아 학살 2:16-18
1. 헤롯의 분노(16)
헤롯은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분노한다. 그는 박사들이 돌아오기를 오래 기다렸다. 그러나 조사해서 알아본 결과 그들이 다른 길로 해서 고국으로 떠났다는 말을 듣게 되자 '심히 노하였다.' 그는 자기의 계획이 좌절되자 더욱더 난폭해지고 필사적으로 발악하였다.
2. 헤롯의 정치적 전략(16)
이러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제거하려고 계략을 세웠다. 그가 은밀하게 아기 예수를 처치할 수 없었다면 이제 대대적인 학살 가운데 그를 몰아 넣을 수는 있다고 헤롯은 생각하였다. 그런데 궁금한 점은 어떻게 헤롯이 그처럼 피비린내 나는 야만적인 일을 해낼 만큼 비인간적인 하수인들을 구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악한 자의 손에 악을 행할 악한 도구들이 부족한 일이란 결코 없다. 이제 헤롯은 70세의 고령이 되었기 때문에 이 당시 두 살도 채 안된 한 어린 아기가 조금이라도 그에게 어떤 방해를 주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이처럼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은 순전히 그 자신의 오만하고 잔인하며 야만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벌인 살육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살펴 보자. 첫째, 나이에 있어서 그는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였다.' 아마도 이 당시 예수께서는 한 살도 채 못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헤롯은 혹시라도 그의 먹이를 놓치게 될까 하여 두 살 이하의 어린 아기들을 전부 죽였다. 둘째, 장소의 범위에 있어서 그는 베들레헴뿐만 아니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즉 그 성읍에 딸린 모든 마을들에 있는 사내 아이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전도서 7:17에서 말한 대로 '악이 도에 지나친' 경우였다. 마구 날뛰는 분노가 불법적인 권력을 손아귀에 쥐게 되면 종종 사람들로 하여금 너무나 터무니 없고 엄청난 잔인한 일들을 저지르도록 만든다. 으리는 이 아이들이 그와 같은 일을 당했다고 해서 '이스라엘에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큰 죄인들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이 유아들의 살해를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순교를 당한 것이었다. 그들은 후에 그들을 위해서 자신의 피를 흘리실 그리스도를 위해 피를 흘린 것이었다. 이 아기들은 고귀한 순교자들의 군대의 보병들이었다.
3. 이 일에 있어서의 성경의 성취(17,18)
이에 '라마에서 한 소리가 들렸다'고 한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렘 31:15). 이 예언은 예레미야 시대에 이루어졌었다. 그러나 이제 그 예언이 이 유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큰 슬픔 속에서 다시 성취되었다.
(1) 그 예언이 애곡하는 장소에 있어서 성취되었다. 애곡하는 소리가 베들레헴으로부터 라마에 이르기까지 들렸다. 이것은 헤롯의 잔인한 학살 행위가 라헬의 아들들 가운데 베냐민의 기업에 속하는 '베들레헴의 모든 지경'에까지 미쳤기 때문이다. 라헬의 무덤은 베들레헴 근처에 세워졌었다(창 35:16,19,참조. 삼상 10:2). 아이를 잃은 이 어머니들은 '베노니'(슬픔의 아들)를 낳다가 죽은 라헬의 처지와 비슷하였는데, 그들은 라헬의 무덤 가까이에 살았고 그들 중 다수는 라헬의 후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슬픔이 여기에서는 라헬의 애곡으로 고상하게 표현되었다.
(2) 그 예언이 애곡하는 정도에 있어서 성취되었다. 그것은 슬픔과 애곡과 큰 통곡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말로도 그들이 이 엄청난 재난으로부터 느낀 감정을 다 표현할 수 없다. 애굽에서 장자들이 죽었을 때 큰 통곡이 있었다. 그처럼 여기에서도 우리가 본능적으로 깊은 애정을 갖게 되는 갓난 아기가 죽임을 당했을 때 큰 통곡이 있었다. 이 슬픔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들은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다.' 이 세상에서 슬퍼해야 할 일이 없다면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는가!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슬픔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슬픔에 대해서는 우리가 위로받기를 거절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들이 위로받기를 거절한 것은 자식이 없으므로 즉 아기들이 산자의 땅에서 끊어져 그들의 어머니의 품에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참으로 없어져 버렸다면 전혀 소망이 없는 것처럼 슬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아주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단지 먼저 간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지금도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버린다면 위로 받을 수 있는 최상의 근거를 우리는 상실하게 된다(살전 4:13). 이 예언을 더 깊이 살펴 보면 우리는 라마에서의 큰 통곡은 단지 가장 큰 기쁨의 서언일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다음에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너의 최후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렘 31:16,17)는 말씀이 뒤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악한 일일수록 그만큼 빨리 호전될 것이다.
Ⅴ. 그리스도의 귀환 2:19-23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땅으로 다시 돌아오신 사실을 본다. 애굽은 그리스도께서 잠시 피하여 머무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으나 거주하여 살기에는 적당치 않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보냄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에게로 돌아가야만 했다.
1. 그리스도로 하여금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만든 헤롯의 죽음(19)
유아들을 학살한 후로 그리 오래지 않아 헤롯은 죽었다. 그와 같이 급작스런 죽음은 하나님의 보응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모든 죄 중에서 무고한 피를 흘린 죄가 가장 빨리 보응을 받는다. 헤롯은 성질이 과격하고 매우 조급했기 때문에 그 자신이 스스로에게 고통거리였으며 그를 시중드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공포를 주었다.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자들을 대적하고 핍박한 자들이 어떤 인간들이었는가를 보라! 기독교를 핍박한 자들은 거의가 먼저 인간성을 벗어 던진 그런 자들이었다.
2. 그들의 귀환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과 요셉의 순종(19-21)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셨고 요셉은 자기를 그곳으로 보내신 분이 다시 그곳에서 그에게 명령을 하시기까지 애굽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가 어디로 움직이든지 간에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분명히 보고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가시는가를 살피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이 없이는 어느 곳으로도 움직여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은혜로운 방문을 하실 수 없는 곳이란 있을 수 없다. 주의 천사들은 애굽에 있는 요셉이나 바벨론에 있는 다니엘에게 그리고 밧모섬에 있는 요한에게도 찾아 간다. 먼저 천사는 요셉에게 헤롯과 그의 공범자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20절). 그들은 죽었으나 어린 예수는 여전히 살아계셨다. 핍박받은 성도들이 때로는 살아 남아 그들을 핍박하던 자들의 무덤을 밟기도 한다. 이처럼 교회의 주께서 환난의 폭풍을 겪으셨고 많은 교회들도 그와 같은 시련을 겪었다. 그 다음으로 천사는 요셉에게 해야 할 바를 지시한다. 일어나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즉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갔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디로 인도하시든지간에 또 그들을 어디에 머물게 하시든지간에 그의 지시를 따른다.
3. 요셉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더 자세한 지시(22,23)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또 이스라엘 땅의 어느 곳에 정착해야 할지에 대한 지시를 받았다. 하나님은 처음에 내린 명령과 함께 이 지시들을 그에게 주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그를 기다리며 그로부터 더 자세한 지시를 듣기를 기대하도록 하시기 위해 점차적으로 그의 뜻을 계시하신다. 요셉이 꿈 속에서 받은 이 지시들은 필시 전에처럼 천사의 사역에 의해 주어졌을 것이다. 이 거룩한 왕의 가족이 받은 지시는 다음과 같다.
(1) 유대 땅에 정착하지 말라는 것이었다(22절). 요셉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께서 반드시 거기에서 자라나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켈라오가 그의 부친 헤롯을 대신해서 유대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서 사려깊게 아기를 위해 염려 하였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대적하기 위해서 적들이 어떻게 자리를 계승해 가는가를 보라. 하나가 잠들면 이내 다른 하나가 나타나서 옛날의 적대 행위를 계속해 나간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요셉은 아기 예수를 유대 땅에 데려가서는 안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다만 그 위험이 하나님의 영광과 자녀들의 연단을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기 자녀를 위험의 구렁텅이에 던져 넣지 않으신다.
(2) 갈릴리에 정착하라는 것이었다(22절). 그때 당시 갈릴리는 성격이 온화하고 조용한 빌립이 다스리고 있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하나님의 섭리는 보통 그의 백성들에게 폭풍우를 피해 지낼 수 잇는 조용한 곳을 마련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들은 바로 그런 피난처로 보내졌는데, 그곳은 스블론 땅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언덕 위에 세워진 나사렛 성읍이었다. 그곳은 바로 우리 주의 모친이 거룩한 일에 대해서 알았을 때 살고 있던 곳(눅 1:26,27)이며 어쩌면 요셉도 거기에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들이 잘 알고 있고 그들의 친척들이 있는 곳으로 보내졌다. 그곳이야 말로 그들이 지내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그들은 계속해서 거기에 살았고 이 사실로 인해서 우리 주께서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우셨다. 그런데 그 점이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그가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는 말씀이 성취되었다(23절). 여기서 그 명칭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그 이름이 본래 나사렛 출신의 사람이라는 것 이상의 아무 의미를 갖고 있지 않을지라도 명예스럽고 존귀한 명칭으로 생각될 수도 잇다. 이 명칭속에는 그리스도께서 이사야 11:1에서 말한 그 '사람 곧 '그 가지'라는 것을 말해주는 어떤 암시 혹은 신비가 있다. 또한 그 명칭은 그리스도께서 위대한 나실인임을 말해 준다. 사실 그리스도는 엄격한 의미로 말하자면 나실인이 아니셨다. 왜냐하면 그는 포도주를 마셨고 시체를 만지기도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홀로 거룩하셨으며 엄숙한 임명과 헌신에 의해서, 삼손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구별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구속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따로 구별되셨기 때문에 더욱 탁월한 의미에서 나실인이셨다. 둘째, 이 명칭은 비난과 멸시를 받는 이름으로 생각 될 수 잇다. 나사렛 사람이라 불리우는 것은 곧 멸시할 만한 사람이라고 불리우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 선한 것도 기대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존경도 받을 가치가 없는 그런 곳의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이 명칭은 후에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별명으로 붙여졌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나사렛 사람이라 불리우셨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게 되는 어떤 비난도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
#1-8 Those who live at the greatest distance from the means of grace often use most diligence, and learn to know the most of Christ and his salvation.
But no curious arts, or mere human learning, can direct men unto him.
We must learn of Christ by attending to the word of God, as a light that shineth in a dark place, and by seeking the teaching of the Holy Spirit.
And those in whose hearts the day-star is risen, to give them any thing of the knowledge of Christ, make it their business to worship him.
Though Herod was very old, and never had shown affection for his family, and was not himself likely to live till a new-born infant had grown up to manhood, he began to be troubled with the dread of a rival.
He understood not the spiritual nature of the Messiah's kingdom.
Let us beware of a dead faith.
A man may be persuaded of many truths, and yet may hate them, because they interfere with his ambition, or sinful indulgences.
Such a belief will make him uneasy, and the more resolved to oppose the truth and the cause of God; and he may be foolish enough to hope for success therein.
#9-12 What joy these wise men felt upon this sight of the star, none know so well as those who, after a long and melancholy night of temptation and desertion, under the power of a spirit of bondage, at length receive the Spirit of adoption, witnessing with their spirits that they are the children of God.
We may well think what a disappointment it was to them, when they found a cottage was his palace, and his own poor mother the only attendant he had.
However, these wise men did not think themselves baffled; but having found the King they sought, they presented their gifts to him.
The humble inquirer after Christ will not be stumbled at finding him and his disciples in obscure cottages, after having in vain sought them in palaces and populous cities.
Is a soul busy, seeking after Christ? Would it worship him, and does it say, Alas! I am a foolish and poor creature, and have nothing to offer? Nothing! Hast thou not a heart, though unworthy of him, dark, hard, and foul? Give it to him as it is, and be willing that he use and dispose of it as it pleases him; he will take it, and will make it better, and thou shalt never repent having given it to him.
He shall frame it to his own likeness, and will give thee himself, and be thine for ever.
The gifts the wise men presented were gold, frankincense, and myrrh.
Providence sent these as a seasonable relief to Joseph and Mary in their present poor condition.
Thus our heavenly Father, who knows what his children need, uses some as stewards to supply the wants of others, and can provide for them, even from the ends of the earth.
#13-15 Egypt had been a house of bondage to Israel, and particularly cruel to the infants of Israel; yet it is to be a place of refuge to the holy Child Jesus.
God, when he pleases, can make the worst of places serve the best of purposes.
This was a trial of the faith of Joseph and Mary.
But their faith, being tried, was found firm.
If we and our infants are at any time in trouble, let us remember the straits in which Christ was when an infant.
#16-18| Herod killed all the male children, not only in Bethlehem, but in all the villages of that city.
Unbridled wrath, armed with an unlawful power, often carries men to absurd cruelties.
It was no unrighteous thing with God to permit this; every life is forfeited to his justice as soon as it begins.
The diseases and deaths of little children are proofs of original sin.
But the murder of these infants was their martyrdom.
How early did persecution against Christ and his kingdom begin! Herod now thought that he had baffled the Old Testament prophecies, and the efforts of the wise men in finding Christ; but whatever crafty, cruel devices are in men's hearts, the counsel of the Lord shall stand.
#19-23 Egypt may serve to sojourn in, or take shelter in, for awhile, but not to abide in.
Christ was sent to the lost sheep of the house of Israel, to them he must return.
Did we but look upon the world as our Egypt, the place of our bondage and banishment, and heaven only as our Canaan, our home, our rest, we should as readily arise and depart thither, when we are called for, as Joseph did out of Egypt.
The family must settle in Galilee.
Nazareth was a place held in bad esteem, and Christ was crucified with this accusation, Jesus the Nazarene.
Wherever Providence allots the bounds of our habitation, we must expect to share the reproach of Christ; yet we may glory in being called by his name, sure that if we suffer with him, we shall also be glorified with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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