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플라벨(John Flavel, c.1627–1691) 그리스도는 지금도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 가운데 고난을 받으십니다. 그리스도의 신비적 몸이 받는 이런 고난이 그 정도의 가치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만, 교회의 고난은 참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여겨집니다.
청교도와 함께 그리스도와의 연합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한복음 17:23)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에 있는 감정의 일치는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을 증명해 줍니다.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함께 웃고 웁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하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불완전했다는 말이 아닙니다(“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10:14]). 하지만 이 두 구절은 그리스도가 이중의 고난을 받으신다고 말합니다. 일찍이 중보자로서의 인격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완벽하고 충만한 고난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더 이상의 고난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자신의 교회와 지체들 가운데 고난을 받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지금도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 가운데 고난을 받으십니다. 그리스도의 신비적 몸이 받는 이런 고난이 그 정도의 가치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만, 교회의 고난은 참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여겨집니다. 지체가 고난을 받을 때는 머리도 고통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천국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하고 외치시는 사도행전 9장 4절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신비한 연합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가 우리의 고통을 느끼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끼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존 플라벨(John Flavel, c.1627–1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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