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로마교회는 복음을 다시 들어야 했다(Ⅰ) 옥한흠 로마서강해 "로마교회가 복음을 다시 들어야 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1권 <내가 얻은 황홀한 구원> 31쪽에 있는 글입니다.

 

 

2. 로마교회는 복음을 다시 들어야 했다(Ⅰ)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장 8~17절

 



 

  로마서의 주제를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1장 1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복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란 쉽게 말해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는 복음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주신 성경 말씀 전부가 복음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산모가 밤중에 난산을 할 때에 산부인과 의사가 온다는 전갈은 낭보 중의 낭보가 되는 것처럼, 죄와 죽음의 노예가 된 우리에게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은 가장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 생활을 좀 한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말에는 매우 익숙해 있습니다. 그러나 1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복음'이란 표현은 좀 낯설게 들립니다. 우리가 성경의 진리를 조금만 깊이 이해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말은 신구약에 들어 있는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한 보다 차원 높은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낼 계획을 세웠습니까? 누가 우리를 구원할 계획을 세웠습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창세 전부터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에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말은 더 광대하고 더 깊은 뜻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말을 로마서 서두에서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로마서에 제일 많이 사용된 단어가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총 153번이나 나옵니다. 헬라어 원문을 가지고 분석해 볼 때 46단어마다 한 번씩 하나님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 66권 중 다른 성경 어디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높은 빈도입니다.
 복음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이처럼 파격적으로 많이 사용된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실 계획, 즉 복음이 하나님의 가슴에서부터 나왔다는 것을 가르쳐 주려는 데에 그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결국, 복음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우리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우리의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열리게 됩니다. 우리의 입술은 하나님을 향해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바울이 이 사실을 가장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하나님은 그 마음을 아무리 헤아리고 헤아려도 끝이 없다는 말입니다. "왜 나 같은 것을 구원하려고 하셨는지! 왜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허락하셨는지!" 아무리 연구하고 생각해도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로마서를 마무리하는 16장 27절에 가서는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이 하나님의 뜨거운 가슴에서 나온 은혜임을 알면 누구나 바울처럼 하나님을 향해 두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이 로마교회에 복음을 전한 이유
 
 1장 1~17절에만 '복음'이라는 단어가 7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그리고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구절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15절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5절).
 
 참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본래 안 믿는 사람에게 전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복음을 전한다 하면 우리는 불신자들을 연상하게 됩니다. 로마서 15장 20절을 보면 바울에게도 똑같은 원칙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복음이란 예수를 모르는 자에게 전하는 것인 만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인 당시 상황에서 굳이 예수를 알고 있는 자들에게 또 다시 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자신의 원칙을 어겨 가면서 15절에서 보듯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그처럼 간절히 원했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할 만큼 흥미 있는 질문입니다. 먼저, 로마에 있는 교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한번 살펴봅시다.
 6절을 봅시다. 이미 우리가 검토한 것처럼 로마에 있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 즉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고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7절을 봅시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성도'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믿음이 좋았던지 8절에 보면 그들의 믿음이 온 사방에 소문이 났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좋고 신앙 생활 잘 하는 교인들에게 왜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했는지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울이 얼마나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 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10절을 보아야 합니다.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절에서는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을 너무 보고 싶어하는 자신의 심정을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13절)
 
 이 말에서 그가 한 번만 노력한 것이 아니라 기회만 있으면 로마교회에 가서 복음 전하려고 애를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5절에서도 '할 수 있는 대로' 다시 말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로 달려가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자신의 심경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바울이 왜 그렇게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애를 썼을까 하는 난제를 놓고 여러 가지 견해를 내놓았습니다. 그들이 내놓은 학설은 모두 12가지나 됩니다. 그중에 몇 가지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예방적인 의도에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로마서가 쓰여질 당시만 해도 로마 교인들은 복음을 바로 듣고 은혜 안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당시 대부분의 초대 교회가 겪었던 것처럼 이단이 들어와 탈선할 위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릇된 복음에 빠지지 않게 예방하려고 다시 한 번 복음 전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도 있습니다. 유언적인 의도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유언이란 죽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이 아닙니까? 바울은 이 로마서를 기록한 다음에 부득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통해서 아는 바와 같이 그 당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간다는 것은 사지로 끌려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를 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성령께서 거기에 가면 결박 당하고 죽음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만일 그곳에 가서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면 로마에 갈 기회는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였을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유언하는 심정으로 이 로마서를 기록하여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전략적인 의도에서 그랬다는 학설도 있습니다. 로마는 그 당시 세계 제일의 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하지 못하고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시실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로마는 중요한 전략 목표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거기에 가기 앞서 미리 로마서를 통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후에 로마에 가도 선교하기가 훨씬 더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준비 작업으로 이 서신을 먼저 썼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상에 소개한 어느 견해들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목회자입니다. 오랫동안 목회를 하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바울이 로마교회에 왜 복음 전하기를 간절히 소원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목회적인 의도에서 로마서를 기록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저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의도적으로 복음을 한 번 더 전하려 했다고 생각합니다. 로마 교회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에는 적어도 20년 가까운 전통을 가진 교회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벌써 로마 교회 안에는 첫 믿음의 순수성과 열정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꽤 많았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절대로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13절 이하에 보면 바울이 아주 엄격하게 경고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얼마나 무서운 충고입니까? 예수를 믿고 교회에 드나들고 있지만 무엇인가 잘못된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복음을 다시 듣고 은혜를 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저는 바울이 영적으로 힘을 잃어 가고 있는 그들에게 다시 한 번 복음을 생생하게 전하려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상실한 교회
 
 우리 모두는 역사가 오래된 교회일수록 복음이 죽어 있기 쉽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50 ~ 60년 되었다고들 하는 교회에 한번 가 보세요. 예수의 사랑이 식어버린 지 오래라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는 교회가 많습니다. 십자가의 피가 말라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교회일수록 복음의 메시지가 힘을 잃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영적으로 심각한 병을 안고 있는 사람들을 조사해 보면 대부분 예수 믿은 지 오래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왜 저렇게 영적으로 흐리멍텅할까? 왜 저렇게 답답할까?" 하고 염려가 되는 사람들을 유의해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한결같이 예수를 믿은 지 오래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은 교회 밖보다 교회 안에 많다." 십자가 앞에서 다시 한 번 깨어져야 할 사람이 교회 안에 있고, 하나님의 사랑 앞에 그 굳고 교만한 마음이 녹아져야 할 사람들, 예수님의 이름 앞에서 자기 자신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은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바로 교회 안에 있습니다. 로마 교회 안에 있었고, 또한 한국 교회 안에 있습니다.
 교회를 다녀도 복음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래 예수님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대해서 무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해서 무지하고, 영생을 얻는 문제에 대해서도 무지합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할 로마 교회 교인들인 것입니다.
 교회 안을 둘러보십시오. 복음에 대해 이상하게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하면 얼굴이 금방 굳어져버립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셨다고 하면, 눈을 반짝이며 설교자에게 집중하던 사람이 눈을 감아버립니다. 거부 반응이 심한 것입니다. 그들이야말로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복음에 대해 의심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곡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더욱이 한심한 사실은 복음 이야기만 하면 교만한 태도를 드러내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다 안다는 식의 태도를 취합니다. 십자가 설교만 하면 다 안다, 죄 용서받아야 된다는 말만 하면 다 안다, 모두가 이런 식입니다. 그리고는 마음을 굳게 닫고 자기 생각에 빠져버립니다. 큰 문제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복음은 매일 새롭게 전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해 불감증이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저거 언젠가 들었던 설교인데 또 하는구나" 하며 시큰둥하게 반응합니다. 예를 들자면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는 복음을 다시 듣고 그 고질적인 병을 고쳐야 할 사람들이 예상 외로 많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적인 차원에서 볼 때 왜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로마교회에만 복음이 필요합니까?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필요합니다.
 
 구원의 감격을 회복시키는 복음
 
 우리가 복음을 다시 들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로마서 1장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세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 중 한 가지 사실은 복음을 다시 들으면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고 지속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지금까지 제가 예를 들었던 모든 영적인 질병들이 다 고침을 받습니다.
 그러면 구원의 감격이란 무엇입니까? 구원의 감격이란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요, 구원받은 자로서의 기쁨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 구원받은 자로서의 기쁨, 이 감사와 기쁨을 한데 묶어서 우리는 구원의 감격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몰랐던 사람들이 처음으로 은혜를 체험했을 때 느끼는 신선한 감정과 흡사한 것입니다. 중생받지 못한 채 교회 생활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새사람으로 태어났을 때 갑자기 가슴속에 밀물처럼 밀려오는 가슴벅찬 기쁨일 수도 있습니다. 오래 교회 다니다 은혜가 메말라 병들어 있던 자의 영혼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단비를 맞고 회생하는 환희일 수 있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그가 20대 초반에 복음을 다시 듣고 체험한 구원의 감격에 대해서 이렇게 시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오! 죄의 무게가 사라지고, 수심에 잠긴 내 영혼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식이 자리잡게 되었을 때 내 영혼이 얼마나 큰 기쁨으로 가득 찼던가! 그것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었고 영광으로 가득찬 기쁨이었다. 그날은 영원히 기억에 남을 날이었음에 분명하다. 내 기쁨은 마치 홍수처럼 강둑을 넘어 범람했다."
 좀 특별한 사람의 체험이어서 다소 거리감을 느낄지도 모르지만 우리에게 구원의 감격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는 데 매우 적절한 예가 아닌가 합니다.
 우리 중에는 비슷한 구원의 감격을 경험한 분들이 꽤 많을 것입니다. 반드시 휫필드와 같은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격의 정도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강하게, 어떤 사람은 참 좋다 할 정도로 체험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구원받은 감격, 즉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기쁨은 복음을 다시 들을 때 우리 영혼의 샘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생수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 예수 믿으면서 맛본 감격을 죽을 때까지 잃어버리지 않고 항상 유지하는 것을 봅니다. 기가 막히게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반면에 우리 중 십중팔구는 그 감격을 오래 지속하지 못합니다. 한 2,3년 기뻐하고 좋아하다가, 어떤 사람은 겨우 한두 달 그렇게 감격해서 좋아하다가 맥없이 식어버립니다. 이것은 구원의 감격을 지속하기가 생각보다 어렵다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가 다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감격에 대해 경험적으로 잘 아는 사실들이 있습니다. 일종의 불가피한 영적 원리라고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첫째로 복음을 깨닫지 못하면 그 감격을 알 수 없고, 둘째로 오래 가면 식기 쉽고, 셋째로 죄를 범하든지 영적으로 병들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에 해당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마음을 열고 복음을 진지하게 반복해서 들으면 깨닫지 못하거나 식거나 깡그리 없어지는 병폐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복음
 
 우리 모두가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도 아직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이해가 안 되어 어리둥절해 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복음을 듣는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를 계속 듣는다는 말도 되고, 배운다는 말도 되고, 깨닫는다는 말도 되고, 묵상한다는 말도 되지만, 또 그 메시지가 주는 은혜 안에 거한다는 말도 됩니다.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항상 가까이 모시고 그 분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주셨는지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음속에 깊이 담고 묵상하는 삶을 사는 사람, 그리고 언제든지 예수님, 십자가, 구원, 죄사함, 영생, 하나님나라와 같은 기본적인 메시지를 들을 때마다 귀가 번쩍번쩍 열리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일컬어서 복음을 다시 듣는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습니까? 복음을 자주 듣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 아는 것', '또 그 말' 하며 귀를 닫고 있습니까?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11절).
 
 한 번 읽어서 금방 무슨 뜻인지 전달이 잘 안 되는 말씀입니다. 무슨 은사 집회를 하려는 것인가 하는 착각도 하게 됩니다. 그러나 15절과 비교해 보면, 바울이 가서 로마 교인들과 특별히 함께 나누기를 원했던 신령한 은사는 한마디로 복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가서 기가 막히고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인 복음을 나누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믿음을 다시 한 번 견고케 하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믿음이 든든해지면 그 다음에 구원의 감격이 옵니다. 의심하던 사람이 믿음이 확고히 서면 구원받은 기쁨이 찾아옵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던 자가 진리를 깨닫고 믿음이 강해지면 기쁨이 찾아옵니다. 구원받은 감격이 마음속에서 솟아오릅니다.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12절).
 
 무슨 뜻입니까? 복음을 다시 듣고 은혜를 받으면 믿음이 강하게 세워진다는 말입니다. 심령이 환하게 열린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구원받은 기쁨이 가득하게 될 것이고, 그 다음에는 서로 쳐다보기만 해도 좋습니다. 서로 보면 기뻐요. 내가 저 형제를 보면 기쁘고, 저 형제는 나를 보면 기쁘고, 목사는 교인들을 보면 감사하고, 교인들은 목사를 보면 감사하게 됩니다. 형제가 은혜 가운데서 감격하는 모습을 보면 신선한 위로가 또 됩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에서 이러한 위안을 주고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가 3년 동안 목회를 했던 에베소교회에 대해서도 성도들이 복음을 좀더 깊이 알기를 소원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 1:17).
 
 그의 진지한 중보 기도가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는 교인들을 놓고 새삼스럽게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음 절이 그 해답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이 말씀에는 에베소 교인들이 믿은 지 3년이 되지만 계속 구원의 감격 속에 거하는 자들이 되도록 복음을 매일 새롭게 깨닫기를 원하는 목회자로서의 바울의 소원이 들어 있습니다. "복음을 들어라. 복음을 묵상하라. 복음 속에 잠겨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고 살아라. 하나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한시도 잊지 말아라. 너희 눈이 밝아져서 날마다 예수 다시 보기를 바란다." 3년 동안 예수 믿은 사람도 이와 같은 은혜가 필요했다는 말입니다.
 1년 반 동안 바울이 목회했던 고린도교회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1년 반 동안 있으면서 바울이 말했던 것은 예수, 십자가, 부활이지 그 이상 다른 이야기는 안 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믿었지만 그들에게는 복음이 계속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보다 더 좋은 것 없고, 구원받은 것보다 더 기쁜 것 없다!
 
 저는 교회 안에 있는 분들 가운데서도 다시 복음으로 태어나야 할 상태에 있는 분들이 많다고 봅니다. '다 안다'는 악한 교만을 뿌리치십시오. '또 그 말 한다'고 하는 마귀의 속삭임을 뿌리치십시오. 누구든지 이와 같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면 이미 구원의 감격이 식어 있는 사람입니다. 죄를 범해서 송두리째 잊어버렸는지, 예수 믿은 지 너무 오래되어서 다 식어버렸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모두가 구원의 감격을 다시 한 번 절실히 회복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의교회에는 새가족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는데 새로 등록을 하신 분은 예수를 수십 년 믿은 분이나 갓 믿은 분이나 구별하지 않고 무조건 새가족 모임에 들어가라고 권유합니다. 대부분이 잘 참석합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고의로 안 들어가는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주로 예수 믿은 지 오래 되고 타 교회에서 상당히 인정을 받았던 분들입니다. 그들은 뭘 새삼스럽게 새가족 모임 같은 데 들어가서 유치하게 예수가 누구냐를 처음부터 배우느냐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어느 여 집사님 이야기입니다. 서울 시내 큰 교회를 수십 년 다녔고 십 년 이상 주일 학교 교사로 봉사했으며, 또 담임 목사님으로부터 상당히 신임을 받고 있었던 분입니다. 그가 강남으로 이사를 오게 되어 부득이 교회를 옮기게 되었나 봅니다. 어떻게 해서 사랑의교회에 등록을 하였는데 처음부터 들은 말이 새가족 모임에 나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안 들어가려고 하니 미안하고 들어가려고 하니 마음이 찜찜했다고 합니다. 결국은 할 수 없이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서 앉았는데 공부를 하면서도 마음이 계속 언짢았습니다. 왜 자기가 이런 데 와서 앉아 있나 하고 생각하니 자존심이 상해 견딜수 없습니다.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 매우 기분을 상하게 했습니다. 하여튼 고슴도치처럼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는데 귀는 열려 있으니까 말은 들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해 차근차근 가르쳐 주는 대로 듣고 있던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그 다음 시간에도 매한가지였습니다. 5주를 연속하면서 계속 시간마다 감격하고 흐느꼈습니다.
 새가족 모임을 수료하는 시간에는 몇 사람에게 간증을 시키는 순서가 있었는데 전도사님이 이 집사님을 불러내었습니다. 다음은 그의 간증의 한 부분입니다. "사실 나같이 오래 예수 믿고 교회에서 인정받았던 사람을 새가족 모임에 들어가라고 했을 때는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좀 거만한 마음을 가지고 앉아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십자가에 대해서, 부활에 대해서 조용히 다시 듣고 앉아 있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내가 크게 잘못 생각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는 예수에 대해서 다 아는 것 같았는데 듣고 보니 너무 모르고 있었고, 나는 십자가의 진리를 이미 터득한 줄 알았는데 듣고 보니 그 은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미 은혜 충만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구원의 감격이 식어버린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새가족 모임을 통해 예수님을 다시 만난 것에 감사합니다. 내가 다시 중생 받았음을 감사합니다. 교회에서 등록하는 분들에게 왜 새가족 모임에 들어가라고 권유하는지 이제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로마교회가 복음을 다시 들어야 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합니다. 다시 태어나야 되고, 다시 감격해야 되고, 잃어버린 구원의 감격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15절을 다시 봅시다. 주님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펜을 들고 '너희에게도' 옆에다 자신의 이름을 쓰세요.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교회에 있는 ○○○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로 이 말씀이 이 시간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음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너는 예수 믿는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구원의 기쁨이 없지 않니? 구원받은 감격을 어디다 쏟아버렸느냐?" 주님이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항상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복음을 듣는 것입니다. 자나깨나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갑바도기아 성도들처럼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 우리의 가슴속에 차오르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신 일을 연구하십시오. 이것이 복음을 듣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쉬지 않고 묵상하십시오.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걸으면서도 묵상하고, 바빠서 정신 없을 때도 묵상하고, 피곤하여 세상 살 맛이 없을 때도 묵상하고, 남이 모르는 고통을 안고 잠 못 이루는 밤을 만났을 때도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복음을 다시 듣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죄 용서함을 받는 놀라운 평안이 우리 가슴에 조용히 스며들어와 가득히 채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특권의식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그러면 어떤 상황 아래에서도 우리 자신이 결단코 초라하게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자주 눈을 들어 예수님이 열어 놓으신 천국의 문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세상의 값비싼 것들이 별로 부러워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소망이 가슴 속에 계속 꽃필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을 다시 듣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복음을 듣고 구원의 감격을 안고 살기 좋아했던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습니다. "예수보다 더 좋은 것 없고, 구원받은 것보다 더 기쁜 것 없다." 이 말 한 마디에 구원의 감격이 다 들어 있습니다. "예수보다 더 좋은 것 없고 구원받은 것보다 더 기쁜 것 없다!" 이 말이 남의 것이 아닌 내 말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복음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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