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일 주님은 나의 최고봉 "능력의 중보(Vital Intercession)" by 오스왈드 챔버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에베소서 6:18)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다 보면, (우리의 중보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기도 응답으로 인하여,) 그들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대가를 치르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때 위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 사람을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서서히 이끌고 계시는데 우리는 그를 불쌍히 여겨 간섭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일치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는 사라지고 대신 그들을 향한 동정심과 배려만 남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꾸짖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완벽하게 신뢰하지 않으면 능력 있는 중보기도는 불가능해집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신뢰의 관계를 가장 많이 파괴하는 것은 (사람들을 향한) 개인적 동정심과 편견입니다. 하나님과의 일치가 중보 기도의 열쇠입니다. 주님과 일치되기를 거절하는 때를 보면 죄 때문이라기보다 다른 사람들을 향한 동정심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것도 죄보다는 동정심일 때가 많습니다. 자신을 향한 동정심과 다른 사람을 향한 동정심은 우리로 하여금 “나는 그 일이 발생하도록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하게 합니다. 그 즉시 우리는 하나님과 생생한 관계를 상실하게 됩니다.
생동하는 중보기도는 자기 연민과 거리가 멉니다. 중보 기도자는 자신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중보기도에는 자신을 고려할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중보기도를 통하여 당신은 다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철저하고 완전하게 일치됩니다.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하여 분별력을 주신 이유는 중보기도를 하라고 주신 것이지 남의 결점을 찾아 비판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5월 3일 능력의 중보 Vital Intercession
Vital Intercession By Oswald Chambers
…praying always with all prayer and supplication in the Spirit… —Ephesians 6:18
As we continue on in our intercession for others, we may find that our obedience to God in interceding is going to cost those for whom we intercede more than we ever thought. The danger in this is that we begin to intercede in sympathy with those whom God was gradually lifting up to a totally different level in direct answer to our prayers. Whenever we step back from our close identification with God’s interest and concern for others and step into having emotional sympathy with them, the vital connection with God is gone. We have then put our sympathy and concern for them in the way, and this is a deliberate rebuke to God.
It is impossible for us to have living and vital intercession unless we are perfectly and completely sure of God. And the greatest destroyer of that confident relationship to God, so necessary for intercession, is our own personal sympathy and preconceived bias. Identification with God is the key to intercession, and whenever we stop being identified with Him it is because of our sympathy with others, not because of sin. It is not likely that sin will interfere with our intercessory relationship with God, but sympathy will. It is sympathy with ourselves or with others that makes us say, “I will not allow that thing to happen.” And instantly we are out of that vital connection with God.
Vital intercession leaves you with neither the time nor the inclination to pray for your own “sad and pitiful self.” You do not have to struggle to keep thoughts of yourself out, because they are not even there to be kept out of your thinking. You are completely and entirely identified with God’s interests and concerns in other lives. God gives us discernment in the lives of others to call us to intercession for them, never so that we may find fault with them.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에베소서 6장 18절).
중보기도 할 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짐작 이상으로 큰 희생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직접 응답하셔서 우리가 중보하는 사람들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이때 위험한 것은 동정심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하시는 일을 간섭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연합하지 않고 마음대로 그를 동정한다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끊어지고 맙니다. 이는 동정심과 염려를 앞세우고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알지 못하면 생명력 있는 능력의 중보를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중보 하기 위해서는 먼저 확신에 찬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이 관계를 가장 방해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동정심, 선입견, 편견입니다. 참된 중보를 할 수 있으려면 하나님과 같은 생각과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연합하지 못하는 이유는 죄라기보다는 동정심입니다. 죄는 우리가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가지는 관계를 방해할수 없을지 모르지만 동정심은 능히 그 관계를 훼방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그 사람에게 일어나지 못하도록 내가 막아 주겠어”하며 나서는 것은 어설픈 동정심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즉시 하나님과 우리의 생명력있는 관계가 끊어지기 시작합니다.
당신이 생명력 있는 중보를 하면 ‘가련한’ 당신을 위해서는 기도할 시간도, 그럴 마음도 없어집니다. 자신에 대한 생각을 몰아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에게는 아예 그런 상념이 남아 있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당신은 다른 생명들을 위하여 전적으로 하나님과 같은 관심을 품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른 이들의 삶을 분별하게 하신 것은 그들의 결점을 찾아내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위한 중보자로 보시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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