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의 향유와 사용(이재국),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 안에 나타난 행복과 치유(박승찬)
출처: http://jinzzabegi.com/?p=3042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 안에 나타난 행복과 치유
박 승 찬**
【주제분류】서양중세철학, 윤리학
【주 요 어】아우구스티누스, 행복, 치유, 행복의 윤리학, 『행복론』
【요 약 문】
현대를 휩쓸고 있는 ‘행복’과 ‘힐링’이라는 용어의 홍수 안에서 오히려 진정한 행복을 찾지 못한 현대인들의 공허감이 느껴진다. 본 논문에서는 그리스도교 최고의 스승으로 존경받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행복이 무엇인지와 각 개인이 겪는 불행으로부터 치유될 수 있는 길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자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은 엄청난 양에 달하기 때문에, 본 논문에서는 『행복론(De beata vita)』으로부터 출발해서 다양한 작품들로 고찰범위를 넓혀 나갔다. 우선 아우구스티누스가 행복을 어떻게 규정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그가 ‘영원불변하고 우리와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을 소유하는 것’, 즉 신을 소유함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1장).
이어서 주의주의자로 알려진 아우구스티누스가 의외로 진리 인식을 행복과 밀접하게 연결시켰다는 사실을 설명했다.(2장) 더 나아가 아우구스티누스가 ‘행복에 도달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사랑의 윤리학과 향유와 사용에 대한 구분을 토대로 어떻게 제안했는가를 살펴보았다.(3장), 이와 반대로 ‘불행에 빠진 이가 치유되기 위해서는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하는가’에 대한 그의 제안을 검토했다(4장).
이러한 관찰을 토대로 현대에 살아가는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의 매우 포괄적인 행복 논의로부터 어떠한 영감을 받을 수 있는지를 고찰했다.
* 본 연구는 2014년도 가톨릭대학교 교비연구비의 지원으로 이루어졌음.
** 가톨릭대학교 철학전공 교수
머리말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는 기술의 도움으로 어느 시대의 인류도 누리지 못한 문명의 풍요를 즐기고 있다. 이처럼 전 세계를 여행할 수도 있고, 원하기만 하면 앉은 자리에서 모든 지식을 섭
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현대인이 어째서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일반인들조차 과거 왕이나 제후만이 누렸을 호사를 누리면서도, 현대인이 공허감과 허탈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근대 이후의 기술 발전에 고무된 인간들은 인간 이성은 끊임없이 진보하며 모든 행복과 자유를 성취하리라고 보는 ‘합리주의적 낙관주의’에 빠져들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낙관적인 기대감은 20세기에 들어서며 체험했던 제1,2차 세계 대전과 환경오염 등의 가공할 결과를 통해 처참하게 무너졌다.
20세기 전반기를 특징지어 온 이러한 실망과 의심을 통해서 인생은 덧없이 지나가고 찰나적이기 때문에 의미 있는 일을 위한 결정적인 투신이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허무주의(nihilismus)가 점차 확산되었다.
이러한 허무주의가 가져온 절망의 유혹이 21세기에 접어든 우리를 여전히 위협하고 있다.
영원하고 불변한 진리에 대한 확신이 사라진 현대 사회에서 심각한 문제로 떠오른 것이 바로 ‘의미의 위기’이다. 이러한 위기가 다가왔을 때 기존의 종교들이 충분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자, 서구를 중심으로 허무주의와 무신론적인 경향이 널리 퍼지면서 현세적인 행복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현대를 휩쓸고 있는 ‘행복’과 ‘힐링’이라는 용어의 홍수 안에서도 분명하게 감지된다. 그러나 ‘힐링을 추구하는 이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병들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위기의식을 지니고 본 논문에서는 현대인들의 진정한 행복 찾기와 치유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상가로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354~430)를 선택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급변하는 현대 사회와 비교될 수 있는 로마 제국 말기의 격변기를 살아갔던 가장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교 사상가이다. 채드윅은 “고대인들 중에서 아우구스티누스만큼 인간의 감정을 반추해 보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없었다”1)고 평가한다.
그는 바로 행복이라는 인간의 감정에 대해서도 매우 풍부한 성찰을 남겨 놓았다.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과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꿰뚫는 통찰력을 지녔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중세의 거의 모든 학자들에게 무려 800년 동안 최고의 스승으로 존경받았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부터 방황했던 아우구스티누스야말로 명예욕과 성욕과 출세욕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던 우리 각자의 모습과 너무도 닮은 ‘가슴 따뜻한 보통사람’이었다. 개인적인 삶 전체를 통해 너무나 진솔하면서도 끊임없이 지혜를 추구했던 아우구스티누스야말로 우리에게 행복이 무엇인지와 각 개인이 겪는 불행으로부터 치유될 수 있는 길을 알려주는 멘토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은 엄청난 양에 달하기 때문에, 논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본 논문에서는 책 한 권 전체가 제목과 내용의 측면에서 행복을 다룬 『행복론(De beata vita)』2)으로부터 출발해서 다양한 작품들로 고찰범위를 넓혀 나가도록 하겠다.
우선 아우구스티누스가 행복을 어떻게 규정했는지를 살펴보고(1장), 주의주의자로 알려진 아우구스티누스가 의외로 진리 인식을 행복과 밀접하게 연결시켰다는 사실을 밝혀보겠다.(2장)
더 나아가 아우구스티누스가 ‘행복에 도달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어떻게 제안했는가’를 살펴 본 후(3장), 이와 반대로 ‘불행에 빠진 이가 치유되기 위해서는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하는가’에 대한 그의 제안을 검토해 보겠다(4장). 이러한 관찰을 토대로 현대에 살아가는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의 매우 포괄적인 행복 논의로부터 어떠한 영감을 받을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다.
1) 헨리 채드윅, 『아우구스티누스』, 김승철 옮김, 시공사, 2001, 13쪽.
2) 이 책의 제목은 직역하면 『행복한 생활』이지만 국내 번역의 제목에 따라 『행복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겠다.
1. 행복이란 무엇인가?
1.1.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생을 관통하는 질문
그리스도교적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이 적극적으로 수용되기 이전까지, 인간의 최상의 선과 최종적인 목적은 신(神)이며, 인간의 행복은 신과 신의 현전에 달려 있다고 가르쳐 왔다.
그리스도교는 일반적으로 동의어인 라틴어 개념인 행복(felicitas)와 지복(beatitudo)을 그리스-로마문화로부터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들의 특수한 내용은 함께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 개념들에게 하나의 새로운 성서적이고 종말론적인 내용을 부여했다.3)
바로 이러한 그리스-로마 문화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긴장감 속에서 자라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행복에 대한 논의는 그의 삶 전체에 걸쳐서 다루어졌던 핵심 주제 중에 하나였다.4)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이 중세 내내 성서적인 ‘마카리스모스’(μακαρισμός, 복됨)과 그리스적인 ‘에우다이모니아’(εὐδαιμονία, 행복)가 계속해서, 종종 매우 격렬하게 충돌하며 만나게 될 다리를 놓아주었다. 그는 ‘베아티투도’(beatitudo)를 ‘에우다이모니아’의 라틴어 번역어인 ‘펠리치타스’(felicitas)와 동의어로 사용했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과연 행복을 무엇이라고 규정했는지에 대해 초기 작품인『행복론』으로부터 출발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행복론』은 집정관을 지낸 철학적인 소양을 갖춘 능력 있는 정치가였던 테오도루스(Flavius Manlius Theodorus)에게 카시키아쿰에서 벌어진 대화의 내용을 보고하는 형식으로 쓰여 진 대화집이다.5)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생일인 11월 13일에 함께 생활하던 친구 및 가족들과 대화를 시작한다.
제1절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복된 삶의 유일한 땅에 이르게 되는 입구인 철학의 항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성에 의해 규정된 항로로 의지 자체를 이끌었어야 함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제4절에서는 자신이 행복한 삶의 땅인 항구에 도착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방황했음을 고백한다.
“내가 열아홉 살 때 나는 수사학 학교에서 『호르텐시우스』라는 키케로의 책 한 권을 손에 넣었다. 그 이후로 나는 철학에 대한 크나큰 사랑에 불타올라 즉시 철학의 길을 갔다. 그럼에도 나는 나를 항로에서 멀어지게 한 안개 속에 곧빠졌다. […] 그러나 내가 다시 똑바로 거기에 서자마자 나는 저 어둠을 쫓아버렸고 명령하는 사람을 따르기보다 오히려 가르치는 사람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확신했다.
나는 눈으로 인식하는 빛을 최고의 신적인 빛의 하나로 경외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마니교도]에게 빠져들었다. […] 내가 이들을 떨쳐버리고 나와서 저 바다를 가로질러 건넜을 때 아카데미아 학파의 사람들이 내가 조종하는 배를 모든 역풍을 이용해 방해하며 나를 오랫동안 바다 한가운데 붙잡아두었다.”
(『행복론』I,4)
이렇게 방황하던 때를 회상하며 아우구스티누스는 비로소 자신을 위탁할 수 있다고 믿은 북극성을 보았다고 고백한다.
“나는 우리 <사제>[암브로시우스]의 강론에서 빈번히 또한 자네와의 대화에서 여러 번 우리가 <신에 대해 고찰할 때나 영혼에 대해 생각할 때 결코 육체적인 것에 속하는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 중에서 영혼만이 <가장> 신에게 가깝기 때문이다.”(『행복론』I,4)
이와 같은 성찰을 토대로 제7절에서 제8절까지는 행복에 대한 논의에 앞서 인간의 육체와 영혼에 대한 논의가 서술되고 있다. 제10절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행복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다.
그에게서 행복한 삶이란 과연 무엇이 었으며,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만일 누군가에게 ‘행복하세요?’라고 묻는다면, 그리 쉽게 ‘네’라고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행복해지고 싶으세요?’라고 묻는다면 거의 모두 이구동성으로 “우리 모두는 행복하기를 원한다.”6)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런 논의의 배경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행복해지고 싶은 자, 즉 행복을 찾는 자는 행복하지 않다’라는 조금은 의아한 주장이 놓여 있다.
행복을 찾고 있는 자는 자기의 현실 삶에서 충분한 만족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삶을 추구하고 있으니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과 함께 그는 ‘욕구하는 것을 소유하고 있는 자는 행복하고, 반대로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자는 불행하고 비참하다’는 일반적인 주장도 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행복론』제10절에서, 자신이 욕구하는 것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 모두 인정했다. 그렇지만 자신이 욕구하는 것을 갖는다면 모두 행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논의할 때 어머니 모니카는 그것이 선한 것이 아니라면 행복해질 수 없다고 대답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말을 듣고 기뻐서 키케로를 인용했다.
“보아라! 철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생각 없이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어 하는 대로 사는 사람은 모두 행복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합당하지 않은 것을 욕구하는 것은 그 자체 이미 가장 큰 불행이기 때문이다.”(『행복론』 II,10)7)
이어서 선하지 않은 것을 원하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아무것도 갖지 못한 것보다 더 큰 불행이라는 키케로의 의견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동의했다. 만일 욕구하고 원하는 대상이 합당치 못한 것이라면 그것을 소유하더라도 행복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다른 작품에서 더욱 분명히 진정한 행복의 조건을 규정한다.
“사람이 사랑하는 바를 소유할 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진정 행복한 사람은 사랑하는 바를 소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할 만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시편 상해』 XXVI,7)
3) J. Ritter/O. H. Pesch/R. Spaemann, "Glück, Glückseligkeit", in: 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 Bd.3 (1974), pp.691-694.
4) 참조: 에티엔느 질송,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이해』, 김태규 옮김,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10, 22쪽; W. S. 뱁코크, 『아우구스티누스의 윤리학』, 문시영 옮김, 서광사, 1998, 75쪽.
5) 『행복론』의 저술 배경에 대해서는 번역의 해제 및 강인모,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을 소유함"의 두 의미 -『행복한 삶에 대하여』를 중심으로」,『범한철학』77 (2015), 115-151쪽 참조.
6) 『행복론』II,10; 『가톨릭교회의 관습과 마니교도의 관습』 I,3,4 참조.
7) 참조:『삼위일체론』 XIII,5,8.
1.2 진정한 행복을 주는 대상의 조건
그렇다면 행복을 위해 사랑할 만한 것, 합당한 것의 조건은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소유했다고 하더라도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이 우연에 종속되어서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상실되는 것이라면 그 자는 다시금 불행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데에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빼앗길 수 있는 것인가’라는 기준을 들여오는데, 이 점에서 행복에 대한 그의 고유한 관점이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만약 행복해지기로 결정했다면, 그는 지속적인 것, 가혹한 운명도 그로부터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을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행복론』 II,11)
그가 보기에 부(富)와 명예 등은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상실할 수 있는 것들이므로 안심하고 향유할 수가 없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인간이 우연히 소유하고 있는 재물은 없어질 수 있다. 이렇게 우연한 재물을 사랑하고 소유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또한 명예도 그것을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더 결정적이기에 타자 의존적이어서 얼마든지 빼앗길 수 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추구하는 대상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 대상 자체가 영속적인 것이어야 하고, 다른 이가 빼앗을 수 없도록 우리와 필연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상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탁월한 인문학적 지식을 지니고 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행복에 관한 고대의 학설 전체, 즉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키케로, 필론 및 플로티노스의 사상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고대 철학자들이 행복의 근거로 자주 언급했던 ‘덕’이 그러한 대상이 아닐까?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덕 그 자체마저도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목표가 될 수 없다.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당신의 영혼의 덕이 아니며, 그것은 당신에게 덕을 주고 당신을 격려하여 바라게 하고 행위하는 힘을 당신에게 주어 온 그분이다.”(『설교집』 CL,8,9)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동료들로부터 ‘신은 영원하고 항상 머물러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냈다. 이를 토대로 그는 ‘신을 소유한 사람은 행복하다.’(『행복론』 II,11)는 결론을 내린다.
신이야말로 기타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된 영원한 존재로서 불변하고 불멸하는 것이요, 또한 만물의 창조자이자 모든 생명의 근원이므로 우리 존재와도 필연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행복론』 제12절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가 신을 소유하는지 물었고, ‘좋은 삶을 영위하는 사람’, 또는 ‘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견들과, 참석자 중 가장 어린 소년(아데오다투스)이 말한 ‘어떤 부정한 정신도 갖지 않은 사람’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어머니 모니카는 마지막 답변에 가장 동의했다.
그렇다면 신을 소유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은 다른 귀중한 소유물처럼 어디서 구입하거나 금고 같은 곳에 보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신을 소유하려면 밖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즉 내면에서 그것을 찾아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과 지혜를 동일시하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에 따라, 신을 소유한다는 것은 마음에 지혜를 갖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음이 바른 절도를 가짐으로써 스스로의 참된 진리를 보유하는 동시에 진리 자체에 참여하게 되면 곧 신을 소유하게 된다.8)
영원한 진리의 인식을 통해서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이미 모든 것이 명확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목표의 설정은 일련의 복잡한 문제들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8) 참조: 『자유의지론』 II,13,37. ‘신을 소유함’과 ‘자비로운 신을 소유함’에 대한 구별과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강인모, 앞의 글 참조.
2. 인간의 행복을 위한 진리 인식의 가능성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신을 소유해야 하며, 이것은 곧 영원한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도대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인가?
이러한 인식이 헛된 희망이 아니고 가능한 일이라면, 진리의 인식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일찍이 “인간은 확실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가?”라는 의심을 품고 일체의 ‘판단을 중지’, 즉 에포케(epoche)함으로써 오류를 피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아카데미아 학파의 회의론에 빠진 바 있다.9)
그러나 신플라톤주의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 인식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라는 회의론자들의 강한 주장은 자가당착이라고 비판했다. 그들의 말이 의미를 지니려면 최소한 그 주장만은 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주장을 펼치는 자들은 반대되는 두 개의 명제(예를 들어 진리 인식은 가능하다 또는 불가능하다) 가운데 하나는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라는 확신을 지니고 있으므로 적어도 모순율을 인정하고 있다. 회의론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약화시켜서 ‘진리 같은 것’에 만족하고 사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용납하지 않는다. 도대체 진리를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진리 같은 것’을 판단할 수 있는가?
『행복론』에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첫째 날의 대화를 마무리하며 아카데미아 학파의 회의론자들이 행복하지도 현명하지도 않다고 공격했다.
“방금 증명되었듯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한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어느 누구도 자신이 <발견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찾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아카데미아 학파 사람들은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한다. <그러므로 [진리를] 발견하기를 원한다. 따라서> 그들은 진리를 <발견하기를 원하지만>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로부터> 그들은 행복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느 누구도 그가 행복하지 않다면 현명하지 않다. 그러므로 아카데미아 학파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현명하지 않다.”(『행복론』 II,14)
이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행복한 삶이란 단순히 영원한 대상을 구하는 것과 동일시될 수 있느냐 아니면 그것을 소유까지 해야 하느냐?’ 하는 질문을 던진다. 이 문제는 아카데미아 학파의 회의론과 그리스도교 신앙 사이에 상치되는 점이 있기 때문에 토론의 열띤 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카데미아 학파의 경우 지혜란 ‘진리에 대한 추구’ 그것과 동일시될 수 있는 것으로 꼭 그것을 얻어야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인은 지혜의 신성(神性)을 부인할 수 없었는데 여기서 지혜란 곧 ‘신의 아들’, 즉 ‘성자’를 뜻하기 때문에 신의 소유, 신을 향유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행복론』의 마지막 날 대화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대화의 서두에서 밝혔듯이 불행은 부족함이므로, 어떤 부족함도 겪지 않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이렇게 그는 부족함에 해당하는 어리석음의 반대인 지혜를 충만함으로 연결시키며, 지혜가 어떤 의미에서 정신의 척도가 되는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지혜는 정신이 지나치게 뻗어나가거나 제한되어 있지 않고 균형을 이루게하는 정신의 척도이다. 정신은 사치, 권력욕, 교만과 이와 유사한 것으로 기운다.
방종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의 정신은 이것들로써 쾌락과 권력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정신은 치욕, 두려움, 슬픔, <탐욕> 그리고 다른 모든 것에 의해 짓눌린다. 불행한 사람이 스스로 인정하듯이, 사람들은 이것들에 의해 불행에 빠진다. 그러나 정신이 지혜를 발견하고 지혜와 더불어 명상한다면, […] 또 정신이 <그 무게에 의해> 움직여져서 신으로부터 멀어지고, 타락하곤 하는 우상의 기만으로 빠지지 않는다면, <어떤 흥분한 이도 공허함으로 빠지지 않는다.> 정신은 어떤 과도함도, 어떤 부족함 그리고 어떤 불행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행복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척도, 곧 지혜를 가지고 있다.”(『행복론』IV,33)
『행복론』에서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여러 저술에서 회의론의 주장을 부정적으로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유한하고 변화하는 인간 정신이 어떻게 영원한 진리에 이를 수 있는
가?”라는 문제를 탐구했다.10) 그에 따르면, 밖에서 진리를 구하는 자는 결코 확실한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 그대 자신 속으로 돌아가라. 진리께서는 인간 내면에 거하신다. 그리고 그대의 본성이 가변적임을 발견하거든 그대 자신도 초월하라.
[…] 제대로 추론을 하는 모든 이는 진리 말고 어디에 도달하겠는가?”(『참된종교』XXXIX, 72)
그런데 밖으로 향하는 눈을 안으로 돌릴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는가?
내면은 진리가 머무르는 공간이기 때문에 이것을 직시하면 우리는 몇 가지 확실한 사실에 도달하게 된다. 그에 따르면 진리는 항상 필연적이고 영원해야 하는데 우리가 감각으로 경험하는 것들은 그렇지 못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 수학적인 진리들, 또는 적어도 모든 수의 기본이되는 ‘1’이라는 개념 외에도 내면에 동일률, 배중률, 모순율과 같은 사고의 근본 원리 또는 아름다움과 추함을 결정하는 기준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영원하고 필연적인 원리는 수학적 원리나 추상적 원리에만 한정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어떤 실재하는 대상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놀랍게도 회의를 해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의 확실한 사실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밝힌다.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내가 만일 오류에 빠진다면, 나는 존재한다.”(Si enim fallor, sum)라고 주장했다.11)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의심스럽고, 어떤 사실에 대해 잘못 알거나 악령에 속아 넘어갈지라도 그렇게 의심하고 속는 나 자신만은 존재한다는 것이다.12)
내면의 진리를 확인하고 나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속적으로 질문을 제기했다. 우리 마음속에서 진리가 인식된다면 그것은 어떻게 우리에게 드러나게 될까? 플라톤은 이 문제를 과거 이데아 세계의 경험과 연관된 ‘상기’
(想起)라는 개념으로 해결했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현재 내면에 있는 것에 정신을 집중하는 행위인 ‘기억’(memoria)을 통해 이에 답했다.13) 그에 따르면 사람들 각자의 마음이 인식하는 여러 ‘진리들’은 모든 진리의 근원이 되는 ‘진리 그 자체’의 빛을 받아서 우리에게 드러나게 된다. 마치 감각적인 사물을 인식하기 위해서 자연적인 태양의 빛이 필요한 것처럼, 불변하는 이성적 인식 대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신적인 빛의 조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14)
『행복론』에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진리의 있음은 최고의 척도에 근거하며 척도는 진리에 의해 인식되므로 척도 없는 진리도 진리 없는 척도도 없다. 최고의 척도는 그 자신에 의해 척도이고 필연적으로 참된 척도이며 아버지가 없는 분인 오직 신만이 최고의 척도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누구든, 진리를 통해 최고의 척도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행복하다. <이는 정신이 신을 가짐을, 즉 신에 완전히 맛들임을 의미한다.> 다른 모든 사람도 신의 재산이지만 그들은 신을 갖지 않는다.”(『행복론』I V,34)
따라서 진리를 통해 척도에 도달한 사람은 행복하고, 신적인 정신을 소유하며 신을 향유한다. 향유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추구하고 사랑하는 것이기에 더 이상 상위의 것이 없는, 오직 최고의 선이자 척도인 신만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15)
아우구스티누스는 『행복론』을 마치며 이제까지의 논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신을 기억하고 신을 찾으며 모든 반감을 제거하고 신을 갈망하라는 경고는 진리 자체의 샘에서 흘러나온다. 저 은밀한 태양이 우리 내면의 빛에 자신의 광채를 부어넣는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참된 것은 이것에 속한다.> […] 그리고 우리가 여전히 추구하는 중에 있는 동안 우리는 <샘> 자체에 의해서, 그리고 저 낱말을 사용한다면, 충만함으로 아직 완전히 채워지지 않았고 아직 우리의 척도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신이 도우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현명하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경외하며 완전히 인식함, 너를 진리로 이끄는 것을 인식함, 우리가 향유하는 진리와 우리가 그것을 통해 최고의 척도와 결합하고 있는 진리가 무엇인가를 인식함이라는 [이 세 가지 인식만이] 정신의 완전한 포만(飽滿)이며 오직 이것만이 행복한 삶이다.”(『행복론』IV,35)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행복의 중심에는 하나의 유일한 실체인 신이 놓여 있다. 위에서 제시된 세 가지 인식만이 행복한 삶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행복은 육체나 외적인 것들보다는 이성을 사용하는 ‘인식’과 관련됨이 핵심적이다. 이 점에서는 행복에 대한 논의에서 이성을 강조했던 고대 철학의 흐름과 비슷해 보이지만, 독특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태양의 비유에서 빛이 없으면 사물을 인식할 수 없듯, 신의 조명이 있어야만 진리의 인식이 가능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성이 인간의 영혼이 지닌 고유한 능력이라고 해서 인간 스스로 이성을 사용하여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신의 도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이 베풀어주는 도움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들의 내적인 선생, 즉 ‘유일한 스승’이라는 표현을 통해 설명한다. 이 내적 스승은 결국 신을 의미하고 그 중에서도 신의 지혜, 진리, 로고스인 그리스도를 뜻한다. 각각 다른 인간들이 같은 진리를 인식하고 그것을 서로에게 말로 전달하여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은 ‘진리 그 자체’인 이 동일한 스승으로부터 나온다. 우리 인간은 이 유일하고 동일한 스승을 가짐으로써 학문의 영역 등에서 진리를 공유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진리를 인식함으로써 소유하는 것이 행복의 필수 조건이지만, 이것은 진정한 행복에 한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갖고 있어도 사랑하지 못하면, 그것이 비록 더없이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이
다.”(『가톨릭교회의 관습과 마니교도의 관습』I,3,4)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궁극의 행복은 지적인 것만도 의지적인 것만도 아니고 인간이 죽은 후에야 가게 될 천상 예루살렘에서 얻게 되는 진리로 말미암는 기쁨, 지복직관(至福直觀visio beatifica)에서야 도달하게 된다.16)
9) 아카데미아파의 회의론과 이에 대한 반박은 카시키아쿰 시절에 저술된 「아카데미아 학파 논박」; 질송, 앞의 책, 86-88쪽 등 참조.
10)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식론 전반에 관해서는 양명수, 『어거스틴의 인식론: 이성과 계시 또는 앎과 믿음』, 한들, 1999; 송병구,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St. Augustinus의 존재론적 인식론』, 한들, 2004 참조.
11) 참조: 『삼위일체론』 X,10.
12) 이 명제와 데카르트의 Cogito 명제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에 대해서는 채드윅, 앞의 책, 90쪽; 질송, 앞의 책, 93쪽 참조.
13) 상기와 기억의 차이에 대해서는 박승찬, 『생각하고 토론하는 서양 철학 이야기 ②:중세-신학과의 만남』, 책세상, 2006[이하 박승찬 (2006)으로 약칭], 50-51쪽 참조.
14) 참조: 『삼위일체론』 XII,15,24; 김태규,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식론-조명의 문제를 중심으로」,『중세철학』16 (2010), 37-78쪽.
15) 신을 향유하는 것의 의미와 다른 피조물을 사용하는 것의 구분에 대해서는 박승찬(2006), 52-54쪽 참조.
16) 아우구스티누스는 『행복론』에서는 추상적인 논의만을 제시하지만 다른 저작들에서는 구체적으로 신을 소유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랑의 윤리학’을 제시한다.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박승찬, 「가톨릭 교육의 스승 아우구스티누스 - 삶의 체험에 기반한 가치교육」, 『가톨릭철학』17 (2011)[이하 박승찬 (2011)로 약칭], 23-32쪽과 그곳에 제시된 참고문헌 참조.
3. 행복한 삶에 도달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
3.1 향유와 사용의 구분에 근거한 사랑의 윤리학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를 밝히는 『행복론』에 대한 설명들을 넘어서서 다양한 저술들을 통해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도 제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그의 ‘사랑의 윤리학’이라 불리는 핵심적인 가르침에 잘 나타나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 이어지는 고대 그리스철학의 주지주의적 전통과는 달리 아우구스티누스는 윤리적인 행위가 지혜와 진리를 사랑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로부터 생긴다고 보았다. 의지의 작용을 제대로 설명하기
는 매우 어렵지만, 어떤 주어진 일에 대해서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동의하지않는다면, 우리는 무언가를 인지하거나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의지’, 특히 사랑이라는 의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윤리학과 심리학에서 중심 개념이고 주제였다.
“나에게서도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입니다. 내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든지간에 나는 사랑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게 됩니다.”(『고백록』XIII,9,10)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윤리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사물들의 가치에 대한 학문적 지식(scientia)이 아니라, 질서를 이해하는 철학적 지혜(sapientia)와 이에 따라 올바로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이러한 입장은 “사랑하시오, 그리고 당신들이 원하는 것을 하시오(Dilige, et quod vis fac)”17)라는 말에 잘 요약되어 있다.18) 이 사랑의 원리야말로 의지의 지향성을 규정하는 보편적인 원리이다.19)
아우구스티누스가 ‘사랑의 윤리학’을 통해 강조하듯이, 행위의 결과가 좋더라도 그 행위자가 다른 목적을 지니고 사랑이 없이 행동했다면, 그 행위를 진정한 의미에서 윤리적 행위라고 부를 수 없다. 그에 따르면, 자연적인 경향성인 사랑(amor, dilectio)20)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따라서 ‘어떠한 종류의 사랑이 인간 행위를 윤리적으로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선 사람이 사물을 사랑하는 태도에 따라 두 종류의 사랑을 구분한다. 즉 그 사물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사랑하는 것을 향유(frui)라고 부르고, 그 외에 있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사물을 사랑하는
것을 사용(uti)이라고 한다.21) 그렇다면 어떤 대상이 향유되어야 하고, 어떤 대상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일까? 일반적인 원칙으로 말하자면, 하위에 있는 것은 보다 상위에 있는 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상위에 있는 것은 향유되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우리의 행위가 따라야 할 존재의 질서에서 가장 상위를 차지하며, 최고의 목적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신이다. 따라서 신이야 말로 절대적으로 향유되어야 하는 대상이다.22)
“왜냐하면 만일 신이 인간의 최고선이라고 한다면 […] 그 최고선을 구하는 것이 잘 사는 일이므로, 잘 산다는 것은 분명히 모든 마음을 다하고 온 목숨을 다하고 온 뜻을 다하여 신을 사랑하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가톨릭교회의 관습과 마니교도의 관습』 I,25,46)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에서 받아들인 위계질서에 대한 설명을 『자유의지론』에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에 대한 설명을 통해 분명히 밝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자기 이외의 동물들보다 월등하고 그것들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이성이 있기 때문이며, 자기가 살아 있음을 알게되는 것도 인간의 이성 덕분이라고 대답한다. 사람은 이성을 가지고 있기에 살아 있음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고, 짐승은 살아 있기는 하지만 이성이 없기에 이를 인식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언뜻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에 대한 정의, 즉 ‘이성적 동물’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으로부터 아우구스티누스는 살아 있음을 인식하는 것, 아는 것은 지성의 빛을 받아 더욱 명료해지고 ‘완전하게 살아 있음’이 되며, 여느 삶보다 훌륭한 삶이라고 이야기한다.23)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구별을 토대로 인간이 짐승뿐만 아니라 자연의 나무나 풀과 같은 인간의 하위에 존재하는 것들을 지배하고 통치할 수 있다고 밝힌다. 그는 계속해서 보다 우월한 인간이 하위의 것을 지배하는 것이 자연계의 질서라는 통찰을, 인간에게도 적용한다. 즉, 인간이 하위의 것을 지배할 수 있게 하는 이성은 인간 내면에서도 보다 월등한 위치를 지니며, 상위의 이성이 하위의 욕망들을 지배할 때 바른 질서가 생긴다고 주장한다.24)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인간의 사랑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는 ‘가치의 질서’는 반드시 ‘존재의 질서’에 따라야 한다. 인간은 이 규칙에 따라서 질서에 적합한 사랑으로써 사물을 사랑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체적으로 인간 이외의 모든 사물은 인간의 신체를 위함이고, 신체는 인간의 영혼을 위함이고, 영혼은 신을 사랑하기 위함이라는 단계를 제안했다.
이와 같이 바른 질서는 월등한 것이 열등한 것을 지배하는 것인데, 인간에게 있어서는 이성이 욕망을 지배하는 경우이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자신의 저서 여러 곳에서 영원법과 연결시킨다. 인간의 마음 안에는 신의 정신 안에 있는 영원한 근거(rationes aeternae, Logos)에 바탕을 둔 ‘영원한 도덕률’25)이 새겨져 있다.
“우리들의 마음 속에 새겨져 있는 영원법의 개념은 내가 말로써 표현할 수 있는 한에서는, 만물의 완전한 질서가 그것에 의해 올바르게 되고 정당하게 되는 바의 것이다.”(『자유 의지론』 I,6,15)
이 영원법은 자의적인 규칙이 아니라 신의 본성과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서 유래하고 있다. 영원법은 그것에 의해서 모든 사물이 질서정연해지는 것이 마땅한 그러한 법, 우주의 질서이며 결코 변하지 않는 법이다. 실정법은 현세의 법으로, 영원법으로부터 유래해야만 질서 있고 정당한 법이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 유동적일 수 있는 법이다.26) 그렇지만 모든 인간이 질서 정연한 인간은 아니며, 이성으로 욕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성이 욕망을 지배하는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를 통해 현자와 어리석은 자로 인간을 구분한다. 즉, 인간이 어리석은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비이성적 감정들을 이성적인 영혼이 지배할 수 없음을 뜻하며, 반면 지혜롭다는 것은 인간 내면의 우열이 잘 질서 잡힌 마음 상태에 이를 때 가능하다.27)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어리석은 자가 지성이 결여되어 있는 자가 아니라, ‘지성이 내재되어 있긴 하지만 지배권을 가지지 못한 자’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만일 누군가가 시간성 안에 종속되어 있는 부와 명예에서 행복을 찾고 있다면, 그는 부도 명예도 행복도 진정으로 소유할 수 없다.28) 목적으로 향유되어야 하는 영원한 것은 사랑하는 주체에게 영원성을 물들이지만, 한시적인 것은 그 주체를 사라져 버릴 일시적인 시간성으로 물들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가치나 윤리의 왜곡을 피하기 위해서, 사랑해야 할 것을 올바른 방식으로 사랑하는 사랑의 질서가 요구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물론 최고의 덕은 최고 존재인 신을 사랑하는 것이지만, 이를 목적으로 이웃과 다른 사물들을 질서 있게 사랑한다면, 그 안에서 신에 대한 사랑의 계명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은 완성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7) 『요한 서간 강해』 VII,8.
18) 참조: 박승찬 (2006), 51-54쪽.
19) 참조: 『신국론』XI,28.
20) 사랑을 표현하는 다양한 단어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를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최원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 에로스와 아가페」, 『가톨릭철학』4 (2002), 58-19 쪽; 질송, 앞의 책, 216-279쪽 참조.
21) 참조:『그리스도교 교양』 I,3,3-4; 『마니교도 파우스투스 논박』 XXII,78; 채드윅, 앞의 책, 97쪽.
22) 참조:『그리스도교 교양』I,5,5; E. L. Fortin, "Augustine and Hermeneutics of Love: Some Preliminary Considerations", in: Augustine Today (1993), Grand Rapids: Williams B. Eerdmans, p.47; Philip Cary, “Study as Love: Augustinian Vision and Catholic Education", in: Paffenroth, Kim/Hughes, Kevin L. (ed.),
Augustine and Liberal Education (2000), Hants: Ashgate, p.69; 주영흠, 「윤리적 존재양식의 교육적 의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적 존재로서의 인간이해를 중심으로」, 『교육철학』45 (2009), 232쪽.
26) 참조:『자유의지론』 VI,14,15.
27) 참조:『자유의지론』 I,9,19.
28) 참조: Danis J. Kavanagh, "St. Augustine and Education", in: Augustinian Studies, New York: Books for Libraries Press, 1967, p.30.
3.2. 세상의 가치에 대한 균형 잡힌 평가
아우구스티누스가 신만을 절대적인 향유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해서, 결코 이 세상의 다른 사물들을 경시하거나 악의 근원으로 생각하는 금욕주의자인 것은 아니다.29)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만물은 창조주가 ‘보시니 좋더라’라고 선포했던 근본적으로 좋은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에 따라 철학에 도입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하다’30)라는 원리에 따라 사유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그는 물질을 정신과 대비되는 것으로서 악의 원리로 보았던 마니교나 물질에서 악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았던 플로티누스의 입장과는 근본적으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행복론』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무엇인가 부족한 사람은 불행하다는 것이 명확하며, 또한 현자들의 육체에도 필수적인 것들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어서 그는 ‘정신의 완전함에서 행복함을 느끼는 현자이니까 그들은 완전하지는 않은 것들, 즉 육체에 필수적인 것들을 모두 거부하고 외면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볼 때 이 모든 것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음의 징표이다. 현자도 육체를 지닌 이상, 육체에 필수적인 것들을 외면하며 살 수는 없으며, 따라서 그것들이 앞에 놓여 있다면 그것들을 잘 사용하며 살아야 한다. 다만 그것들이 없다는 사실이 현자들을 약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 현자들은 그것들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이 육체에 필수적인 것들에 매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31) 만약 육체의 죽음과 고통을 피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리석음이며 이는 현자를 불행하게 만든다. 만일 피하려고 정당하게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데도 원하는 것을 할 수 없다면 오히려 죽음과 고통 등을 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현자다운 행동인데, 원하는 것을 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것을 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며 그의 의지대로 행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즉 현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의 의지는 완전히 확실한 사물에 향해 있다. 이것은 그가 무엇을 한다 해도 덕의 어떤 규정과 지혜의 신법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행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그에게서 결코 빼앗겨질 수 없다.’(『행복론』 IV,25)
결국 인간의 의지가 향하게 되는 대상들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탐욕, 사치, 폭식 등과 같은 현상에서 나타나듯, 의지를 가지고 지향하는 주체, 그것을 왜곡되게 사랑하는 주체가 잘못 사용하는 것이 문제다. 사치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운 물체들이나 음식 등이 나쁜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쾌락에 집착하여, 정신적인 아름다움과 같은 다른 가치를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32) 물론 피조물들이 신과 같은 선을 갖는 것도 아니며 또 서로 동등하게 좋은 것도 아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기에 피조물의 우두머리로서 모든 것을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허락받았으나, 중요한 것은 피조물들 사이의 질서를 올바로 파악하고 그 가치의 서열에 따라서 그것을 활용하는 일이다.33)
이런 입장에 따라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즐겨 따르던 신플라톤주의와 다른 가치를 강조하게 된다. 신플라톤주의가 제시한 형상의 위계가 차갑고 정지된 느낌을 주고, 그 배경에는 영원히 회귀하는 그리스적 우주론이 깔려있다면,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도교로부터 받아들인 세계는 인간의 선택에 따라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역동적인 무대이다.34) 이런 세계 안에서 인간은 운명론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결정하고, 자신의 결정과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자들과 달리, 평신도들이 세상에서 갖고 있는 직업이 구체적으로 많은 장점을 지닌다면서 그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평신도들이 세속적인 일을 영위해도 무방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들이 하느님을 섬길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충고하며 공적인 직무를 맡을 것을 장려했다.35)
29) 아우구스티누스가 살고 있던 4세기에 일어났던 금욕주의 운동과 제도에 대해서는 채드윅, 앞의 책, 103쪽 참조.
30) 존재자의 선성에 대한 이론의 발전사에 대해서는 레오 엘더스,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 박승찬 옮김, 가톨릭출판사, 2003, 181-200쪽 참조.
31) 참조: 『행복론』 IV,24.
32) 참조: 뱁코크, 앞의 책, 141-142쪽.
33) 참조:『그리스도교 교양』 I,27,28; 『질서론』(De ordine).
34) 신플라톤주의와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채드윅, 앞의 책, 58-61쪽: R. S. Brumbaugh/N. M. Lawrence, "Knowledge as Inner Illumination: St. Augustine", in: Philosophical Themes in Modern Education, Boston: University Press of America, Inc., 1985, p.43 참조.
35) 참조: 채드윅, 앞의 책, 104쪽.
4. 불행을 극복하기 위한 치유 방법
4.1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체험에 바탕을 둔 불행에 대한 성찰
아우구스티누스는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행복론』 제4절에서 행복한 삶의 땅인 항구에 도착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방황하고 헤맸던 자신의 생애에 대해 요약한 바 있다. 그는 계속해서 불행에 빠진 사람, ‘망한 사람’에 대해서 신플라톤주의의 ‘악은 선의 결핍’이라는 틀을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이것은 일종의 <불임성(sterilitas)>이며 허기(fames)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육체로부터 양식을 빼앗는다면 육체는 대체로 그것의 허기를 드러내는 결함들인 질병과 부스럼으로 채워지듯이 저 무지한 자들의 영혼은 완전히 질병으로 가득 차 있고 이로써 우리는 그들의 <배고픔(ieiunia)>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악덕의(omnium vitiorum)> 어머니인 바로 이 <악의(nequitia)가> [우리] 선조들이 그것을 부르고 싶어 했던 대로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부터, 곧 무(無)로부터 지칭되었다. 이 결함에 마주 서 있는 덕은 건실(frugalitas)이라고 지칭된다. 건실이 정신의 어떤 풍부함 때문에 결실에서 유래했듯이 결함은 불임성에 따라, 다시 말해서 <무, 즉 악의>에 따라 지칭되었다. 그러므로 무는 흐르는, 분해되는, 액체가 되는, 그리고 말하자면 항상 몰락하는 모든 것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망한 사람’이라고 부른다.”(『행복론』 II,8)
결핍이나 허기가 ‘망한 사람’의 조건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쉽게 모든 것을 갖춘 부유한 사람은 여기에서 제외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수정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는 행복론에서 세르기우스 오라타라는 부유한 인물을 논의에 들여온다. 오라타는 엄청 부유했고 친절했고 자신의 정욕을 만족시키고 명망을 드높이기 위한, 그리고 끊임없는 행복을 즐기기 위한 모든 것을 갖고 있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넘치는 부를 육체적인 편안함을 위해서 요령껏 잘 사용하며 그의 모든 계획과 의지를 달성한 인물이다.
불행을 부족함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의견들에 반대해서 어머니 모니카는 “부유하고 더 이상 아무 것도 욕구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손실을 두려워한다면 그에게 지혜가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어머니의 주장을 받아들인 아우구스티누스는 결국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세르기우스 오라타가 운명의 선물을 잃지나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에 불행했던 것이 아니라 그가 어리석었기 때문에 불행했다는 것을 이로부터 알 수 있다. 만약 그가 좋은 것이라고 간주한 불확실하고 일시적인 사물에 대해 정말이지 조금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가 더 불행했을 것이라는 결론이 여기에서 나온다.
[…]
지혜롭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부족하고 지혜로운 모든 사람은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어리석음은 부족함’(stultia sit egestas)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모든 어리석은 사람이 불행하듯이 불행한 모든 사람은 어리석다. 그러므로 모든 부족함은 불행이고 모든 불행은 부족함(omnis miseria egestas esse)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행복론』 IV,28)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규정 안에는 자기 자신의 부정적인 체험이 녹아들어 있다. 그는 타가스테의 학교에서 이루어진 체벌에 대한 혐오, 무려 10년 가까이 심취했던 마니교의 스승들, 소위 ‘선택된 자들’(electi)에 대한 실망 등을 거쳐 ‘모든 판단을 중지하라’는 아카데미아 학파의 회의론에 빠지고 말았다.36) 비록 회의의 상태에 있는 것이 그를 괴롭히기는 했지만, 아직 그에게 결정적인 절망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에서 신플라톤주의와 암브로시우스 주교를 알게 된 후, 자신의 인생관도 차츰 변화하는 것을 느꼈는데, 이에 따라 명예와 돈과 결혼을 추구해 왔던 자신의 위선적 모습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37) 그러던 어느 날 밀라노 거리를 걷다가 싸구려 술에 취해 웃으면서 지나가는 거지를 보았을 때,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술 취한 거지가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자신은 저 거지보다 여건이 더욱 좋은데도 왜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지에 대해서 심각히 고민했다.38)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사도 바오로의 서간을 읽었고, 영과 육의 싸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39) 바오로야말로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40) 이러한 성서 공부를 통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머리는 이미 그리스도교의 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현세적 환락과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고자 하는 그의 내적 욕구를 다스리기는 너무도 힘들었다.41)
아우구스티누스가 거주하던 곳 근처에는 깊숙하고 조용한 정원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그 곳에서 기도하며 ‘가슴 속에 응어리진 모든 고통과 고민’ 을 털어 놓았다.42) 그러던 어느 날 친구 알리피우스와 성서를 읽던 중, 갑자기 자신의 비참한 모습에 대한 절망이 북받쳐 올라, 정원의 호젓한 곳에서 폭우 같은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이렇게 극도의 절망에 빠졌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집어라, 읽어라’(tolle, lege)는 이웃집 아이들의 노래 소리를 듣고 읽게 된 성경 구절43)에 의해 마침내 회심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절규에서도 드러나듯이, 그 누구도 극도의 절망을 원하지 않지만 한 번 빠져든 절망으로부터 벗어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에게 닥쳐 온 불행이나 절망이 오히려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돌아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태도에서 초기의 순교체험에서 강한 영감을 받은 그리스도교의 불행에 대한 이해가 드러난다.
그리스도교는 악과 고통을 악신의 탓으로 돌려 무조건 피하려는 영지주의44)나 고통에 대한 무관심을 강조하는 스토아 학파에 대항해서 고통을 더욱 긍정적으로 보려는 해석을 발전시켰다.
이 해석에 따르면 인간의 불행은 구원의 필수적인 사전단계처럼 보이고 이로써 괴로움을 당하는 이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이 확인되는 것으로 간주된다.45)
이렇게 해석된 불행과 고통은 이제 더 이상 신적인 세계질서에서 벗어난 우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신이 개선(correctio)이나 시험(probatio)이라는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다. 이 고통을 통해서 장차 다가올 유혹에서 인간을 보호하고 인간의 인내를 키우며, 그의 신앙을 정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부수적인 효과에 동조하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불행과 절망 그 자체는 여전히 극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46)
아우구스티누스는 절망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적어도 모든 육체적인 것으로부터 떠날 것을 권하고 있다. 『독백』에서 그는 ‘아무리 아내가 정숙하고 똑똑하다’ 하더라도 그녀와의 성적인 사랑이나 부나 명예에 대한 욕망을 버리라고 말한다.47)
『행복론』에서 그는 건강에 좋고 유용한 영혼 의 양식을 취하라고 주장한다.
“만약 육체의 영혼처럼 무지한 사람들의 영혼이 가득 차 있다면 영혼의 양식은 두 가지 종류이다. 하나는 건강에 좋고 유용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병들게하고 해독을 끼치는 것이다.”(『행복론』II,8)
영혼에게 주어질 수 있는 특별한 양식이 있다면 그것은 사물에 대한 통찰과 앎인데, 여기서부터 벌써 행복에 대한 논의에서 인간의 이성적 능력이 강조되고 있다. 영혼에 유용한 양식을 찾는 태도는 단순히 마니교적인 금욕주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를 볼 수 있도록 기하학적 추상화와 유사한 과정에 의해서 정신을 훈련시키기 위한 과정’이다. 아마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태도를 플라톤주의자 플로티누스나 포르피리오스로부터 배웠을 법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처럼 영원한 비물질적인 실재에 비해 감각 대상을 경시하며 ‘관조적인’ 관상을 강조하면서 인식론적인 상승을 지향하여 감각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영혼의 정화과정을 통해서야 초월적인 신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주장했다.48)
그렇지만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플라톤주의처럼 관상적인 예지를 증진시키는 것이 이상이기는 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은 ‘현세 생활을 위해서 불가결한’ 가변적인 유형적 사물들을 이용하는 것을 포기할 수도 없다. 오히려 ‘현세적인 것을 가볍게 넘어서 영원한 것으로 나아간다’는 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36) 참조: 『고백록』 V,10,19.
37) 그는 당시 황제 발렌티니아누스를 찬양하는 연설을 준비하던 중 마음에도 없는 미사여구와 거짓말을 동원하여 그를 거짓되게 칭송하려는 자신의 모습에 비참함까지 느꼈다.
38) 참조: 『고백록』 VI,6,9.
39) 참조: 갈라 5,17.
40) 참조: 『고백록』 VIII,5,11.
41) 참조: 『고백록』 VIII,5,12.
42) 조용한 그곳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내면에서는 거대한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점점 “미치며 죽어가고”(『고백록』 VIII,8,19) 있었는데, 진리를 깨닫고도 습관때문에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3) 참조: 로마서 13,12-14.
44) 참조: 박승찬, 「인간 고통의 의미- 그리스도교 고통이해에 관한 인간학적 고찰」, 『인간 연구』 창간호 (2000), 163-165쪽.
45) 참조: 박승찬, 「서양철학의 역사에서 고통의 의미 찾기」, 박찬욱 외 7인, 『괴로움 어디서 오는가』, 운주사, 2013[이하 박승찬 (2013)으로 약칭], 163-166쪽.
46) 이러한 고통의 해석이 가지는 장점과 문제점에 대해서는 박승찬, 「그 자체로 악인 고통 안에서 선이 발견될 수 있는가? - 변신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 『가톨릭철학』23 (2014)[이하 박승찬 (2014)로 약칭], 9-25쪽 참조.
47) 참조: 채드윅, 앞의 책, 64쪽.
48) 참조: 『고백록』 VII,17,23.
4.2. 불행과 죄의 관계
아우구스티누스는 초기 작품인 『행복론』에서 시작한 인간 불행에 대한 성찰을 후기 작품들에서 더욱 발전시켜나간다. 인간을 ‘자유의지를 통한 결정능력을 지닌 주체’로서 인정함으로써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인간이 겪는 불행의 의미를 새롭게 설명할 가능성을 제공했다. 물론 ‘중간선’이라고 불리는 의지는 자유롭기 때문에 선도 선택할 수 있고 악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존재의 질서에서 하위의 것을 상위의 것보다 더 사랑하고 욕구하는 ‘악한 의지’ 또는 ‘사욕’이 작용하게 될 때, ‘인간이 행하는 도덕적인 악’(malum quod homo facit)이 생겨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 이 ‘도덕악’을 ‘죄’(peccatum)라고 불렀다.
이와 달리 자연 재해, 즉 지진, 화산 폭발, 홍수 등을 통해 일어나는 악을 ‘인간이 당하는 자연적인 악’(quod patitur)이라고 부르며, 이 ‘자연악’을 인간이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이라고 이해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죄란 의지의 산물이며, 본성의 산물이 아니다. 따라서 죄의 기원은 창조주인 신이 아니라 이성적 피조물인 인간의 자유의지의 잘못된 사용에 있다. 따라서 죄란 불변하는 선으로부터 돌아서서 가변적인 선으로 향하는 인간 의지의 운동이다.49)
아우구스티누스는 죄가 3단계를 거쳐서 진행된다고 보았다. 우선 마음 안에 욕정을 통해 탐하는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는 단계를 거쳐, 이러한 동요에 의해 행위할 수 있도록 유인당하는 단계가 오고, 이것을 자유의지를 통해 동의할 때 죄를 범하게 된다.50) 이렇게 죄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졌을 때는 앞으로 그러한 동의를 반복함으로써 습관적으로 죄를 범할 수 있는 위험까지 생겨난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선을 택했을 때는 그 자유가 유지될 수 있으나, 자유의지로 죄를 지었을 때는 죄가 그를 정복함으로써 그는 자유를 잃은 상태가 된다.51) 따라서 인간은 한편으로 죄라고 불리는 도덕적인 악을 행하는 주체인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 정의로운 신에 의해 죄에 대한 처벌로서 주어지는 ‘자연적인 악’을 당하는 객체이기도 하다.52)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재해가 인간이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에 현대인들은 쉽게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동료 인간과의 관계 안에서, 우주와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 안에서 때때로 자기 스스로나 다른 이들이 겪고 있는 고통, 죄에 대한 벌과 인간이 저지른 죄 사이에 설명할 수 없는 불일치를 체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왜 아무런 잘못이 없어 보이는 선한 이들이 죄에 대한 벌이라 할 수 있는 고통을 당하는가?’53)
이러한 불일치를 설명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온 세상에 고통이 등장하게 된 과정을 생동감 있게 그리는 창조설화에 바탕을 두고 원죄론(原罪論)을 체계화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은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모든 사람은 죄로 얼룩져 있기 때문에54), 죄의 용서를 통한 성화(聖化)는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할 하나의 과정이며 이를 위해서는 구속자의 겸손으로 대표되는 신의 은총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의 이론은 북아프리카에서는 광범위하게 수용되었지만, 펠라기우스(Pelagius, 360?-420?)라는 당대의 유명한 설교가와 그의 추종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과 은총론을 강하게 거부했다.
결국 ‘인간의 구원이 전적으로 신의 은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지, 이를 위해 인간의 공로, 즉 노력이 필수적인지’ 하는 문제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고 이는 매우 오랫동안 지속되었다.55) 이러한 논쟁은 인간의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시사점들을 제시하지만 그리스도교 신학 내에서의 논쟁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룰 수 없다.56)
49) 참조: 『자유의지론』 II,20,54.
50) 참조: 『산상설교』 I,12,35.
51) 참조: 『라우렌티우스에게 보낸 교리 요강』 XXX,9.
52) 이러한 구분은 라이프니츠를 거쳐 칸트에 이르기까지 악과 고통에 대한 중요한 사변적인 틀을 제공해 주었다. 이에 대해서는 박승찬 (2013), 167-178쪽 참조.
53) 참조: 박승찬 (2014), 18-22쪽.
54) 참조:『신국론』XX,6,1.
55) 410년경부터 발생한 이 논쟁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사망한 뒤에도 양측의 옹호자들에 의해 이어져서 오랑즈 제2차 공의회(529년)에서 소위 ‘온건한 펠라기우스주의’를 마침내 단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56) 펠라기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쟁에 대해서는 채드윅, 앞의 책, 175-181쪽; 피터 브라운, 『어거스틴 생애와 사상』, 차종순 옮김, 한국장로교출판사, 1992; 드롭너, H. R., 『교부학』, 하성수 옮김, 분도출판사, 2001; Gerald Bonner, Augustine and Modern Research on Pelagianism, The Saint Augustine Lecture Series, Villanova University Press, 1972 참조.
4.3. 치유를 위한 멘토의 중요성
잘못된 선생들과의 만남이 아우구스티누스가 불행에 빠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면, 그의 주변에서 좋은 모범을 보여준 멘토와의 만남을 치유를 위한 값진 자극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거리를 느꼈던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어머니 모니카가 자신을 위해서 노심초사한 모습을『고백록』의 여러 구절에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57) 더욱이 어머니 모니카가 해주는 충고를 여자들의 잔소리쯤으로 여겼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나중에 ‘음행을 하지 말라. 특히 다른 사람의 아내를 더럽히지 말라.’던 그녀의 충고를 돌이켜 보면서 그녀를 통해 하느님께서 말씀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되돌아보게 된다.58)
이러한 구체적인 충고보다도 아우구스티누스의 기억에 뚜렷이 각인되었던 것은 모니카의 꿈의 내용59)과 이를 해석하던 그녀의 단호한 태도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꿈 자체보다도 ‘하느님의 대답’을 알려준 어머님의 단호한 태도를 칭찬했다. 모니카는 참된 종교인으로서의 모범적 역할모델로서 극적인 회심 후 함께 지냈던 카시키아쿰을 거쳐, 타가스테로 귀환 도중 오스티아항구에서 별세할 때까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어머니를 제외하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의 목적을 변화시킨 중요한 전환은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라는 책을 만나면서 이루어졌다.60) 이 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의 방향, 즉 삶의 목표를 바꿀 정도로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61)
“그래서 나는 다만 키케로가 말하는 그 권유를 좋아한 나머지 그 책의 가르침을 따라 이 학파 저 학파를 초월하여 지혜 자체를 사랑하고, 탐구하고, 소유하고, 포용하고자 일어섰고 불타 있었습니다.”(『고백록』III,4,8)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책을 통해 보편적 진리에 대한 자극을 받았고, 오랜 여정을 거쳐 신에게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 셈이다.62)
이전의 사상적인 여정에서 좋은 표양을 만나기 어려웠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모델들을 단계적으로 만나게 된다. 우선 암브로시우스에게 신학을 가르쳤던 사제 심플리키아누스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자신이 개종시켰던 저명한 웅변가인 마리우스 빅토리누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63) 빅토리누스는 이미 생전에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에 입상이 세워질 만큼 최고의 명예를 얻었던 신플라톤주의자로서 이교도들의 심한 반대를 예상함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고 논리정연한 어투로 자신의 그리스도교로의 개종 이유를 밝힌 바 있었다. 금욕하면서 지혜를 찾는 삶에 대한 갈망과 아우구스티누스가 여전히 단념할 수 없는 성적 욕망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겪고 있던 내면적 모순은 신플라톤주의를 알게 되면서 극에 도달했던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빅토리누스를 자신의 삶의 모델로 삼았고,64) 자신도 그와 같이 되어 보고 싶다는 열정에 사로잡혔다.65)
또한 밀라노에 있던 황제의 궁정에서 일하던 친구 폰티키아누스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집트 사람 안토니우스(Antonius)가 모든 재산을 버리고 은수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회심의 순간에
로마서를 다시 펼쳐 읽고, 그것을 자신에게 들려주는 하느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안토니우스의 생애에 대해서 들었던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게 된다.66)
이렇게 여러 인물들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극적인 회심을 준비하는 역할모델을 했지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역시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Ambrosius)였다.67) 암브로시우스는 일요일과 대축일 및 세례 청원자의 준비 기간에 매일 명료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설교를 하였고, 특히 구약성서를 플라톤적・영적으로 해석하여 큰 갈채를 받았다.68)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를 통해 영적인 의미로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을 배웠고, 이 방법은 평생토록 그의 사고와 교육의 방향을 결정하는 전환점이 되었다.69)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모든 사목 활동과 학문에 대한 열정에 큰 감동을 받았고 비록 원하는 만큼 도움을 받지는 못했지만70), 마음 속 깊이 암브로시우스를 존경했다. 후에 히포의 주교로 서임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역할모델인 암브로시우스의 모범을 따라 가르침과 이웃 사랑의 실천에 최선을 다했다.71)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던 멘토들을 떠올리며 자기 동료들의 육체와 영혼이 모두 건강하도록 돕는 일이 모든 이의 의무라고 말한다.그는 이웃의 육체를 위해 약품(medicina)을 제공하듯이,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는 교육(disciplina)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고 충고한다.72) 그가 말하는 교육이란 가장 중요한 형태의 상호인격적인 관계이며 상호 이해와 열정을 함께 나누는 일이 다.73) 아우구스티누스는 더 나아가 신학자로서 이러한 교사와 학생 사이의 인격적인 사랑의 배후에 창조주의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가르치는 바로 그 사랑이야말로 배우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과 자기 학생들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주려는 교사의 책임감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암브로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삶 전체로부터 잘 드러나듯이, 신과 맺고 있는 인격적인 관계가 인간을 불행으로부터 치유해 주고 이웃들을 도움으로써 올바른 삶을 살 수 있게 해준다.
57) 참조:『고백록』 II,3,6; 브라운, 앞의 책, 32-42쪽; 레온 크리스티아니, 『어머니 모니카와 아들 어거스틴』, 베다니, 1995.
58) 참조:『고백록』 II,3,6.
59) 참조:『고백록』 III,11,20.
60) 참조:『고백록』 III,4,7-8; 『독백』 I,17; 『행복론』4.
61) 참조: George Howie, Educational Theory and Practice in St. Augutine,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68, p.6.
62) 참조: P. L. Quinn, "Augustinian Learning", in: O. R. Amelie (ed.), Philosophers on Education: Historical Perspective, sNew York: Routledge, 1998, p.87.
63) 참조:『고백록』VIII,2,3-4; 브라운, 앞의 책, 144-149쪽.
64) 이석우, 『아우구스티누스』, 민음사, 1995, 85쪽.
65) 참조:『고백록』 VIII,5,10.
66) 참조:『고백록』 VIII,12,29.
67) 암브로시우스의 생애와 그가 그리스도교 신학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브라운, 앞
의 책, 109-222쪽; 드롭너, 앞의 책, 참조.
68) 참조:『고백록』 VI,3,3-4.
69) 참조:『고백록』 VI,4,6.
70) 참조:『고백록』 VI,3,3.
71) 참조: 브라운, 앞의 책, 269-291쪽. 아우구스티누스가 주교로서 실행한 이웃 사랑에 대해서는 포시디우스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참조.
72) 참조:『가톨릭교회의 관습과 마니교도의 관습』 I,56.
73) 아우구스티누스의 일반적인 교육론과 구체적인 실천적 충고에 대해서는 박승찬(2011) & 박승찬, 「참된 교육을 위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실천적 조언」, 『가톨릭 신학과 사상』제69호(2012/여름),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와 그곳에 제시된 참고문헌참조.
맺음말
우리는 이제까지 아우구스티누스의 다양한 저작에 나타난 행복과 치유에 대한 생각들을 검토해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그가 사멸하는 한, 필연적으로 파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행복이 존재하지 않는다’(『신국론』 IX,15). 따라서 진정한 행복이란 다가오는 세계에서 오직 신에 대한 명상을 향유하는 것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렇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다른 곳에서처럼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의 증인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적으로 재해석된 그리스철학, 특히 신플라톤주의의 전수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의 풍부한 사상이 현대인들의 행복과 치유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점들은 무엇일까?
우선, 아우구스티누스는 현세의 행복에만 매달리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유한한 행복에 갇힐 위험성에 대한 경고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자각은 이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해서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에 이르기까지 그리스 철학 전통에서도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렇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향유와 사용에 대한 구분’이 주는 방향성과 교훈은 정신적인 치유를 위해서는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대상들을 과도하게 절대화하고 신성화하는 물신숭배(物神崇拜) 사상에 대한 경고이다. 더욱이 그가 ‘존재의 질서와 가치의 질서의 일치’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은 현대의 개인주의 윤리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인간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선에 대한 보편적 진리의 개념이 상실된 이상, 윤리적 기준이 존재한다는 사실 조차 의심하게 되었다. 현대사회에서는 아카데미아 학파의 회의론자들의 주장처럼 절대적인 윤리 판단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취향이나 얻게 되는 이익이 선과 악에 관해 결정을 내리는 윤리적 판단의 법정 역할을 맡게 되었다. 더욱이 개인주의 윤리에서는 각 개인이 다른 사람의 진리와는 다른 자기만의 ‘진리같은 것’을 갖게 된다. 개인의 자유가 절대적인 가치 기준으로 받아들여지는 이런 윤리 안에서는 선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특수한 상황에 적용하고, 나아가 지금 이 곳에서 선택해야 할 올바른 행위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기준은 의문에 처해질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진리와 자유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을 인정하는 순간, 실용주의(pragmatismus) 등으로 대변되는 윤리적 상대주의의 위험성을 경계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마음 안에는 신의 정신 안에 있는 영원한 근거에 바탕을 둔 ‘영원한 도덕률’이 있다고 밝힘으로써 실정법이 그것에 근거해야 함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속적인 행복에 매몰될 위험을 경고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라 물질들에 대한 과도한 폄하를 경계했다. 그리스도교는 일부 종교나 사상(영지주의, 마니교 등)처럼 세상에 있는물질적인 대상들을 악의 근원이라고 판단하여 경멸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지 못하며 상대적이고 부분적인 가치를 지닐 뿐이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모든 피조물이 선한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사랑의 윤리학’을 강조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 근대 낭만주의자들이 생각하듯 인간의 감정적인 측면만을 부각시킨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의 우위성이 분명해지고 신의 소유가 행복의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바로 이러한 행복을 위해서는 진리의 인식 및 소유 즉 지성적인 요소가 배제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가 참된 삶의 의미라고 보았던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궁극적인 행복이라고 보았던 철학적‧이론적인 사색이 아니라 ‘사랑에 의한 신과의 일치와 그 소유’였다. 이렇게 인간은 삶의 참된 의미를 감각 사물들로부터
떠나서 신에게로 전향(conversio), 즉 최고 원리와 일치하는 것에서 실현한다. 인간은 신을 자기 삶의 좌표 중심으로 삼음으로써 우주에 있어서의 자기의 위치를 바로 인식하게 됨과 더불어 세계를 제대로 코스모스(Kosmos)인 세계로서 알아볼 수가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지성과 감정의 긴밀한 연결을 강조한 것은 자칫 인간의 감정 상태만을 행복의 중요한 기준으로 제시하는 현대의 경향을 비판하는 준거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어떤 시대의 사람도 지니지 못한 무신론적인 분위기 속에서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74) 그러나 많은 비판적 성찰에서 강조되는 ‘현대의 위기는 의미의 위기’라는 지적에 주목해야 한다. 기존의 종교들의 여러 잘못과 부족함 때문에 거부감이 커질 수 있음은 충분히 인정할지라도 세상의 행복 안에만 인간의 생각을 가두려는 경향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영원한 행복을 누리려는 욕심을 가지더라도 유한한 인간은 자신의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적인’ 기획이 실패로 돌아감을 체험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행복 논의는 현대인들에게 근시안적으로 눈앞의 일들에 매몰되어 보다 큰 목적을 잊고 살아가는 일이 없도록 초대한다.
더 나아가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심도 있는 성찰은 현대의 자유에 대한 논의도 되돌아보게 만든다. 에디트 슈타인과 마리탱도 지적한 바와 같이, 일단 인간 존재자가 자신의 근원적인 원리를 망각하고 참된 진리에 접근할 가능성을 잃어버리면, 근대의 인간들이 지상 과제로 여겼던 온전히 자유로워지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마도 현대인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할 것이다:
“당신들은 모든 종교의 족쇄를 버렸다고 주장하지만, 이제부터 다른 그 어떤 것에 속박되지 않는 경우에만 당신들이 내세우는 찬란한 자율성도 빛을 발할 수 있다.”75)
이와 대조적으로 현대에 만연한 허무주의는 유한한 인간 존재의 근원을 제공해 주는 존재 자체를 망각하게 만듦으로써, 인간 존엄성을 지탱하고 있는 토대와의 접촉을 빼앗아 버린다. 존재 자체와의 연관성을 반성할 수 없는 인간은 점점 더 파괴적인 힘만을 추구하거나 희망 없는 고독으로 빠져들고 말 위험에 처하게 된다.
우리는 본 논문을 통해서 최소 1600여년이란 시간을 넘고, 서양이라는 장소로 향해 아우구스티누스를 만나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인터넷과 SNS를 통해 세계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도 자신 앞의 작은 일들에 매몰되어 행복을 잃은 현대인들이 자기 틀을 벗고 나오도록 초대하고 있다.
자신의 이익, 기껏해야 사랑하는 가족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익숙해 있는 현대인들에게 모든 것을 가치의 질서와 존재의 질서를 바로 세우라고 요청한다. 감각적인 사물로부터 출발해 존재 자체를 찾아 나섰던 아우구스티누스의 행복 여행기가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행복을 찾기 위한 여행에 작은 자극이 되었기를 기대해 본다.
74) 참조: 필립 반 덴 보슈, 『행복에 관한 10가지 철학적 성찰』, 김동윤 옮김, 자작나무,1999, 130쪽.
75) 채드윅, 앞의 책, 95쪽.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인간의 구원자」(12항)에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라는 표현을 분석함으로써 ‘진리와 자유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흥망을 함께 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적인 가르침을 되돌아 보게 만들었다.
참고문헌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전
- 『고백록』(Confessiones), 선한용 옮김, 대한기독교서회(개정완역본), 2003 / 최민순 옮김, 서울: 성바오로, 21986, 1991.
- 『자유의지론』 (De liberum arbitrium), 성염 역주, 왜관: 분도출판사,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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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표기가 없는 한, 기존의 번역이 나와 있는 경우에는 위의 문헌에 제시된 번역을 사용하였다. 혼란을 막기 위해 여러 번역본에서 사용된 용어 중에서 몇몇 단어는 별도의 표기 없이 다음과 같이 통일하였다: 하나님, 하느님->신; 감독->주교 등. 그러나 의미가 달라지거나 오역이 있어서 수정한 경우에는 < ... >로 변경부분을 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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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ugustine on Happiness and Healing
Park, Seung-Chan
In the overuse of words like ‘happiness' and ‘healing' in modern culture, feelings of emptiness and depression can paradoxically lie in hiding. In this article, I will try to determine what happiness is and how to heal from individual misfortunes from the work of Augustine, one of the most famous Christian teachers from Late Antiquity. As Augustine has numerous works, I will start with the ‘ De beata vita' and then extend the scope of the investigation to his other works(Confessiones, De liberum arbitrium etc.) First, investigating the various aspects of happiness, Augustine sought true happiness in ‘having the object which is eternal and has necessary relationship to us', which means ‘having God'. Second, although Augustine is known as a voluntarist, he combined tightly knowledge of truth with happiness. Third, Augustine proposed a concrete method for achieving happiness with his ‘principle of love'(Love, and do what you will) and a distinction between ‘enjoyment' and ‘use'. Finally Augustine showed, based on his personal failures, how an unhappy person can overcome his or her own misfortunes. This paper concludes by providing ways in which Augustine's broad discussion of happiness can be applied in our search for true happiness in the present day.
【Key words】Augustine, happiness, healing, principle of love, De beatavita
논문접수일: 2015년 11월 1일, 심사완료일: 2015년 12월 11일 게재확정일: 2015년 1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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