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역정 [저자의변명] 진지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바늘과 고리, 송아지와 암소...어린 양의 피 등의 비유적인 표현을 통해 자신에게...

천로역정 1. -  John Bunyan     

작가 소개

존 번연(John Bunyan, 1628 - 1688)
영국의 유명한 목사, 설교가 이며 청교도의 종교관을 매우 독특하게 표현한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ess'(1678)>의 저자.

그 밖의 저서로는 교리에 관한 논쟁적인 저서들을 비롯해 
영적인 자서전 <넘치는 은혜 'Grace Abounding'(1666)>, 
우화집 <거룩한 전쟁 'The Holy  War',(1682)> 등이 있다



작품에 대한 저자의 변명 1.



먼저, 글을 쓰기 위해 펜을 들면서, 이런 보잘것 없는 형식의 책을 쓰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다른 형태의 책을 쓰고 싶었다. 

그런데 그것을 완성하고 났더니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채 이런 형식의 책이 되고 만 것이다.



사실은 이렇게 된 것이다. 

나는 복음이 충만한 이 시대에 성인들의 생애와 행적에 대해 글을 쓰다가 

갑자기 영광에 이르는 그들의 여행과 행적에 대한 우화를 쓰게 되었는데, 

그러다보니 스무 가지도 훨씬 넘는 사건들이 연상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열거해 보았다.

 

그러고 나자 내 머리 속에 또다시 스무 가지도 더 되는 사건들이 떠올랐고, 

그것들은 다시 불꽃이 튀듯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생각들이 강렬하게 내 마음을 사로잡아 무한히 퍼져나가게 되면 

거의 탈고 단계에 이른 이 책마저 엉뚱한 것으로 만들어버릴 것 같아서 

그런 생각들만을 모아 따로 쓰기로 하고 쓰던 원고를 탈고했다.



그렇게 해서 쓴 것이 이 책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생각은 사실 없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것을 썼는지 나 자신도 모른다. 

단지 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내 이웃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쓴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나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이 글을 썼을 뿐이다.



한가한 시간을 메우기 위해서 휘갈겨 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글을 씀으로써 죄를 범하게 하는 사악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펜을 종이에 대자, 나의 생각이 줄줄 글로 표현되었다. 

생각이 떠오르는대로 쓰다보니까 마치 실타래에서 실이 풀리듯이 풀려나와 

지금 독자 여러분들이 보시는 바와 같은 길이와 두께를 가진 책이 될 때까지 써내려간 것이다.



개별적인 사건들을 연결하여 문장을 다듬은 후 나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들이 내 글을 읽고 어떤 평가를 내리나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은 괜찮다고 칭찬을 했고, 어떤 사람은 형편없다고 없애버리라고 말했다. 

또 어떤 이는 "존, 그 글을 출판하게나."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출판하지 말게나."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글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걸세."라고 말하는가 하면 

다른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걸."하고 말하기도 했다.



난처해진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마침내 나는 어차피 사람들의 의견이 이렇게 분분한 이상 

일단 책을 출판해 보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출판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다른 어떤 사람들은 출판을 하지 말라고 했으므로 누가 가장 올바른 충고를 해주었는가를 알려면 

그것을 시험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가 이 책을 출판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호의를 거절한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큰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책이 출판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여러분들을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의 형제들은 이 책이 출판되기를 바라고 있으니 

책이 나와 읽을 때까지 판단을 보류해 주시오."



 "만약 읽어보고 싶지 않다면 그대로 내버려두시오. 

살코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갈비 뜯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나는 그들의 기분을 좀 맞춰주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할 생각이었다.



"이런 문체로 써서는 안 될까요? 

이런 방식으로 글을 쓰면서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을 달성하고 동시에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는 없을까요?

왜 그렇게는 되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은 살코기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들은 갈비 뜯기를 좋아합니다."



시커먼 먹구름은 비를 뿌리지만 하얀 뭉게구름은 비를 뿌리지 않는다. 

그렇다. 시커먼 먹구름이든 하얀 뭉게구름이든 만약에 그들이 비를 뿌려주기만 한다면 

땅은 곡식을 생산함으로써 둘 다 칭찬하고, 어느 한 쪽을 흠잡는 대신 

그들이 함께 생산한 열매를 소중히 여긴다.



또한 시커먼 먹구름과 하얀 뭉게구름이 함께 작용하여 

땅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열매를 보고 

어느 구름의 덕택이라고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다. 

땅이 굶주릴 때는 그들이 필요하게 되고, 

만약 땅이 풍요로울 때는 두 구름 모두 역겨워지고 그들의 은총 또한 무익한 것이 된다.



"어부가 물고기를 잡기 위해 어떤 방법을 쓰는지 살펴보십시오. 

어떤 도구들을 사용합니까? 잘 살펴보십시오. 

어부들은 그들의 온갖 지혜와 올가미, 낚싯줄, 낚시도구, 낚싯바늘, 

그물들을 최대한 이용하여 물고기를 잡습니다. 

그러나 낚싯바늘이나 낚싯줄, 올가미, 그물이나 그 밖의 도구가 모두 갖춰져 있다 할지라도 

물에서 뛰어노는 물고기가 당신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고기를 더듬어 찾고 손으로 움켜쥐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무슨 짓을 해도 물고기를 잡을 수 없습니다."



"새 사냥꾼들은 사냥감을 잡기 위해 또 어떤 노력을 합니까? 

일일이 그 이름을 열거할 수조차 없이 많은 여러가지 도구들, 즉 엽총, 

그물, 끈끈이를 바른 나뭇가지, 등불과 방울들을 사냥에 이용합니다. 

게다가 살살 기어다니기도 하고 걸어가기도 하며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도 합니다. 

그 누가 사냥꾼의 온갖 자세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사냥꾼은 

자신이 원하는 사냥감들을 모두 다 포획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이쪽 새를 잡기 위해서는 피리를 불거나 휘파람을 불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저쪽에 있던 새는 날아가 버립니다."



"만일 두꺼비의 머리 속에 진주가 들어 있을 수도 있고

 (서양의 전설에 보석은 두꺼비의 머리 속에서 생겨난다는 것이 있음), 

조개껍데기 속에서 또한 진주를 발견할 수 있다면, 

만약 금보다 더 값진 것이 어디 묻혀 있다는 보장이 따로 없다면, 

그것에 대한 어렴풋한 눈치만 가지고 그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사람을 누가 경멸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보잘것 없는 이 책도 누구나 다 즐길 수 있는 그런 화려한 묘사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화려하기는 하지만 내용이 없는 미사여구로 가득 찬 책을 능가할 만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좋소. 그러나 그 내용을 충분히 검토해 봤지만, 

나는 당신의 이 책이 출판되는 것에 대해 매우 못마땅하오."

 "왜요? 무엇이 문제입니까?"

 "도대체 무슨 소린지 뜻을 명확히 이해할 수가 없소."

 "무슨 말씀입니까?"

 "상상해서 꾸며낸 이야기란 말이오."

 "그것이 어떻다는 겁니까? 나는 믿습니다. 

나처럼 뜻이 분명하지 않은 꾸며낸 이야기를 가지고 

진리를 번쩍이게 하는 작품을 만들어서 진리를 빛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눈에 보이는 확실한 글을 읽기를 원합니다. 

은유는 정신력이 약한 자들을 타락시키고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합니다."



신성한 어떤 것을 인간들에게 기록해 전달해 주려는 이에게 

직설적이고 확실한 문체가 좋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은유적으로 표현한다고 해서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내 글이 확실성이 모자란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옛날에 씌어진 하나님의 율법이나 복음서도 독특한 상징이나 암시, 은유 등으로 씌어져 있지 않은가? 

가장 지고한 지혜를 무조건 공격하려 드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진지하고 맑은 정신을 지닌 사람이라면 옛 성전의 은유적인 표현들을 비난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진지한 사람이라면 오히려 하나님께서 바늘과 고리, 송아지와 양, 어린 암소와 어린 양, 

조류와 목초 그리고 어린 양의 피 등의 비유적인 표현을 통해서

자신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겸손하게 찾아 구한다. 

그리고 그 안에 감춰진 빛과 은총을 발견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인 것이다.









천로역정 2. -  John Bunyan     





작품에 대한 저자의 변명 2.



그러므로 너무 성급하게 내 글이 확실성이 결핍됐고 거칠다는 결론을 내리지 말아달라. 

겉으로 확실하게 보인다고 해서 모두 다 확실한 것은 아니다. 

또한 비유법을 사용한 글이라고 해서 모두 멸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라면 우리에게 가장 해로운 것은 가볍게 받아들이고, 

유익한 것은 우리의 영혼을 빼앗아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금고 속에 금이 들어 있듯이 나의 모호하고 비유적인 글 속에는 진리가 들어 있다.



진리를 진술하기 위해 예언자들도 많은 비유법을 사용했다. 

그렇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가르침을 잘 고찰해 본 사람은 

오늘날까지도 그 진리가 옛날의 옷을 입은 채 여전히 생생하게 들어 있음을 분명히 알 것이다.

그 문체나 표현 때문에 모든 현인들을 침묵시키는 바로 그 성경 자체의 구절구절이 

온통 모호한 상징이나 우화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 책에서 영광의 빛이 샘물처럼 솟아나와 

우리들의 가장 어두운 밤을 대낮처럼 밝혀주지 않는가?

            

나를 혹평하는 사람에게 지금 자신의 글을 좀 자세히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러면 그는 내 책에서 발견한 것보다 더욱 모호한 부분을 자신의 책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그는 자신이 최선을 다한 것 중에서도 비교적 나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공평한 독자들 앞에 서서 글의 명확성에 대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나는 나의 글이 명확하지 않다고 비난하는 사람의 

모호한 글귀 하나에 내 글에서 열 개의 글귀를 걸고 내기를 하겠다. 

공평한 독자들은 그의 미사여구로 장식된 거짓말보다 

비유적인 표현을 쓴 내 글 속에서 훨씬 더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진리는 그것이 비록 갓난아기의 다 떨어진 포대기에 싸여 있다 할지라도 

인간의 판단력을 고취시키고,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아주며, 

이해하는 것을 즐겁게 해주고 자신의 의지력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우리의 상상력을 즐겁게 해주는 것으로 우리의 기억력을 채워주며, 

우리의 고통을 완화시켜 준다.



내가 알기에 디모데는 명확한 말을 사용하고자 했으며, 

늙은 부인들이 이야기하는 우화를 그는 듣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러나 진지하고 엄숙한 바울은 어느 곳에서도 비유의 사용을 금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 비유들 속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캐낼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황금과 진주 그리고 여러 가지 값진 보석들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만 더 하겠다.

 오, 목사님! 나의 글이 목사님의 기분을 상하게 했습니까? 

당신은 내가 우화적 표현말고 다른 문체로 쓰기를 바라십니까? 

혹은 좀더 직설적인 표현으로 바꾸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기 내가 발견한 우화적 표현이 적절한 세 가지 점을 밝혀 

나보다 더 훌륭한 이들에게 그것이 적합한가를 비판받도록 하겠다.



첫째, 나는 내가 사용한 방법이 부당하다고 할 만한 그 어떤 이유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내가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 어휘나 사건, 독자들을 기만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상징이나 은유적인 표현을 적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조잡하다고 볼 수 없다. 

어떤 식으로 쓰건간에 진리를 드러내는 일이라면 그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부당하다는 표현을 내가 사용했던가? 

그렇다. 내가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우화적 문체를 쓴 것은 결코 부당한 문체가 아니다. 

나는 이런 방법으로 나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을 지극히 훌륭한 당신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줄 수도 있는 것이다. 

은유적 표현을 사용하고 우화적 문체로 글을 써서 오늘날 살아 숨쉬는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기쁘게 한 사람들의 예는 많이 있다.



둘째, 나는 덕망이 있는 사람들이 대화체의 글을 쓰고 있으며, 

그들이 이런 문체의 글을 쓴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이 만약 그런 식의 글로 진리를 기만했다면, 그들은 저주받아 마땅하고 

또한 그들이 진리를 조롱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한 그 문체 또한 저주받아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런 문체를 사용하여 진리가 여러분이나 나의 마음속에서 용솟음치게 했다면 

그것은 그 문체가 어떤 것이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인 것이다. 

우리에게 맨 처음 쟁기로 밭을 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분(예수님)보다 

그 누가 우리의 생각과 펜을 그의 섭리대로 이끄는 방법을 더 잘 알겠는가? 

그리고 그분만이 비천한 것을 거룩한 것으로 이끌 수가 있는 것이다.



셋째, 나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이와 유사한 방법, 즉 한 가지 사건을 통해서 

다른 사건을 연상케 하는 방법이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나 또한 그와 유사한 방법을 사용하려 한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진리의 찬란한 광채가 가려지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이런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진리가 대낮처럼 밝게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펜을 놓기 전에 나는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강한 자를 끌어내리시고 약한 자를 일으켜 세우시는 주님의 손과 

여러분의 독자들 앞에 이 책을 맡기고자 한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대략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영원한 목표를 추구하는 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 인간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그가 행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일은 무엇이며, 

동시에 그가 어떤 일을 하는지를 이 책은 보여준다. 

또한 이 책은 그가 영광의 문 앞에 다다를 때까지 어떻게 달리고 또 달리는가를 보여준다.



이 책은 또한 영원한 왕관을 차지하려고 인생항로를 분주하게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여준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어째서 그들의 노력이 헛수고가 되고, 

그들은 왜 결국 바보처럼 죽게 되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러한 충고를 따르기만 한다면 이 책은 당신을 여행자로 만들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 책에 제시하는 방향을 이해하기만 한다면 이 책은 당신을 거룩한 땅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게으른 사람들을 활동적으로 만들고 

눈이 먼 사람들도 또한 즐거운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당신은 어떤 희귀하고 이익이 될만한 것을 찾고 있는가? 

우화 속에 들어 있는 진리를 찾아볼 생각은 없는가? 

당신은 건망증이 심한가? 

정월 초하루부터 섣달 마지막 날까지의 모든 일들을 기억하고 싶은가? 



그러면 나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읽으라. 

그 이야기들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꼭 달라붙어서 무력하고 의지할 데 없는 자에게는 큰 위안거리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무관심한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감동시킬 수 있는 그런 대화체로 쓰어져 있다. 

언뜻 볼 때 기이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안에 담고 있는 것은 건전하고 정직한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이다.



당신은 당신의 우울증을 치료하고 싶은가? 

어리석지는 않으면서 아주 유쾌한 상태가 되고 싶은가? 

당신은 수수께끼를 읽고 그 해답을 듣고 싶은가, 

아니면 당신 자신의 생각 속에만 파묻혀 있고 싶은가? 

당신은 고기를 씹어먹는 것을 좋아하는가? 

혹은 구름 속에 있는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하는 말을 들어 보겠는가? 

당신은 잠을 자지 않으면서도 황홀한 꿈속을 거닐어보고 싶은 생각은 없는가? 

혹은 잠시 동안 웃거나 울어보고 싶지 않은가? 

마력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잠시 정신을 읽고 황홀경에 빠졌다가 

아무 해를 입지 않고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와보고 싶은가? 

책을 읽으면서도 무엇을 읽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러면서도 그 글을 읽음으로써 자기자신이 축복받았는가 아닌가를 알고 싶지 않은가?

오, 그렇다면 여기로 오시오. 여기로 와서 당신의 머리와 가슴으로 함께 내 책을 읽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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