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한흠 로마서 강해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로마서 강해 1권 <내가 얻은 황홀한 구원>중에서...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로마서 1장 1~7절
사도행전을 읽으면, 바울이 세 번째 전도 여행을 하면서 고린도라는 도시에 잠깐 머물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때는 겨울이었습니다. 그는 전도 여행을 잠깐 멈추고 겨울을 고린도에서 보내기로 작정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휴식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더 중요한 일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로마교회에 편지를 쓰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에 무척 가 보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길이 자꾸 막혀 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편지부터 먼저 써보낼 생각을 하고 '더디오'라고 하는 비서를 불러서 구술을 했습니다. 나이가 50대에 접어들고 있어서 시력이 별로 좋지 않았던 바울인지라 직접 쓰지 못하고 더디오를 시켜 받아쓰게 했던 모양입니다. 한마디 한마디 불러 주는 대로 더디오가 받아 적어서 기록을 끝내자 바울은 이 편지를 여 집사 뵈뵈의 손에 들려 로마에 있는 교회에 전해 주도록 했습니다. 그 편지가 바로 기독교 역사상 교회를 개혁하고 부흥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로마서입니다.
보배보다 귀한 말씀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오늘날까지 남아 우리 손에 들려졌다는 사실은 얼마나 기적 같으면서도 감사한 일입니까? 슈페너(Philipp J. Spener)라는 학자는, 성경을 하나의 반지라고 한다면 로마서는 그 반지의 보석에 해당한다고 표현했습니다. 바로 그 성경을 눈앞에 펴 놓고 자유로이 읽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로마서의 첫 장 첫 절을 읽으면 매우 충격적인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 그것입니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말이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때의 사정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종이라고 번역되어 있어 그 의미가 강도 있게 전달이 안 되긴 합니다. 사실 헬라어 원어로 이 말은 '노예'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지금은 노예가 없으니 노예가 얼마나 천한 신분인가를 실감할 수가 없습니다.
당시에는 로마 인구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66만 이상이 노예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공장의 기계나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일종의 생산 수단이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노예와 당나귀는 똑같은데 노예는 말을 할 줄 알고 당나귀는 말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은 사람대접을 못 받았습니다.
당시의 노예 시장에 가면 반나체가 되어서 단 위에 전시되어 있는 노예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구경을 하다가 마음에 들면 흥정을 해서 사 갑니다. 집에 가서는 이미 뚫려 있는 귓불에다 주인이 자기 이름을 새긴 귀걸이를 달아 줍니다. 그러면 그 순간부터 노예는 귀걸이를 달아준 사람의 소유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노예는 자기 이름도 없습니다. 자기 생각도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의지나 꿈, 계획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말할 줄 아는 짐승처럼 그저 주인인 귀족을 위해서 농사나 짓고 심부름이나 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바울이 한 번도 대면한 일이 없는 로마 교인들에게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소개하는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당대의 석학이었습니다. 시민권을 가진 당당한 로마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예수의 노예로 소개하기를 더 자랑스러워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강요에 못이겨 자기를 예수의 노예라고 불렀습니까? 물론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예수님을 처음 만난 것은 강제적이었습니다. 당시 그의 가슴에는 무서운 증오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앞에 있었다면 침이라도 뱉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를 만나 '너는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자, 반항할 수도 없고 도망할 수도 없어 죽지 못해 끌려가는 노예와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로마서를 쓰던 당시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죽지 못해 끌려가는 종이 아니라 주인 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드리는 자원하는 종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바울이 언제 그렇게 변했을까요? 물론 성령이 그에게 새 마음을 주신 순간부터 그런 변화가 일어났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를 종으로 누구에게 드리는 일은 절대 하루 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결단하지 않을 수 없는 분명한 계기가 생겨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당장 그러한 심령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일어난 피할 수 없는 변화를 담담하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뻐서 자원하는 심령으로 자신을 주님께 드리기까지는 얼마 동안의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절부터 4절의 내용을 보면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위해 종으로 헌신할 수 있었는지 그 과정에 대해 약간의 추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2절).
바울이 확인한 하나님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모든 선지자들의 글을 통하여 하나 하나 확인할 수 있는 메시아였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 중에 만난 예수 그리스도는 이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된 예수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3, 4절).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약 성경을 들고 아라비아 사막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3년 동안 은둔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검토하고 연구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갈 1:17, 18). 그 동안 그는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그 분이 과연 하나님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신 메시아인지, 과연 인류에게 복음이 되시는 구원자인지를 철저히 검토했을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2절에 나오는 '복의 근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지, 이사야가 예언한 '이새의 줄기에서 난 싹'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신지를 밝히는 작업을 쉬지 않고 했을 것입니다.
드디어 그는 이사야가 예언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령의 기름 부음 받은 종' (사 61:1)이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등장하는 '고난의 종'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윗이 시편 16장에서 예언한 '썩음을 당치 않을 거룩한 자'가 바로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사야 49장 6절에 등장하는 '땅 끝까지 구원을 베푸는 이방의 빛'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 자신이 강제로 만나고 강제로 믿게 된 그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수천 년 동안 변함없이 약속하셨던 인류의 메시아요, 이 세계를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복음이요, 구세주라는 것을 더 이상 의심할 여지없이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자기를 예수의 종으로 드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 바로 이때의 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틀림없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앞에 다시 한 번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뜨거운 가슴으로 "나의 주, 나의 하나님!" 하고 외쳤을 것입니다.
이제 4절을 봅시다. 다소 어려운 내용이지만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4절).
이 말씀은 두 가지 방면으로 해석이 됩니다. 우선 성결의 영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으로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부활을 통해 인정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에 나오는 "육신으로는'이라는 구절은 그의 인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 되심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안 믿으면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해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성결의 영을 성령으로 해석하는 입장이 더 옳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복잡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같은 구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는 말씀도 잠깐 생각하고 넘어갔으면 합니다. 여기서는 마치 예수님이 부활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셨던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정되다' 라는 말이 '선포되다', '확인되다', '알려지다'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전에도 하나님이셨습니다. 부활하고 나서 비로소 하나님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시기 전에도 하나님이셨지만 그 사실이 가려져 있다가 죽음을 이기고 성령의 권능으로 부활하신 다음에야 비로소 그 사실이 공공연히 온 세상에 확인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기쁘게 예수의 종이 되라
바울이 구약 성경을 놓고 이 놀라운 진리의 지성소로 한 걸음씩 발을 옮겨놓으면서 그의 마음속에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뜨거운 감격이 솟구쳐 올랐을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울었을까요? 너무도 초라하고 힘없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그분이 수천 년 동안 인류가 대망하던 메시아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을 때 얼마나 가슴이 벅차서 소리를 질렀을까요. "예수를 없애야 해. 그를 추종하는 자는 한 놈도 남겨 두어서는 안 돼" 하며 이를 갈던 자신의 옛 모습을 돌아보면서 얼마나 흐느꼈을까요? 자기를 불러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사도로 임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은혜 앞에 너무 감격해서 목놓아 울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감격이 자기를 기꺼이 종으로 팔아 버릴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드디어 그는 억지로가 아니라 자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남은 생을 살기로 가슴속에 백 번 천 번 다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디를 가나 자기를 예수의 종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는 없어지고 예수만 남은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의 종으로 가야 할 길이 몹시 험하다는 사실도 잘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미리 그에게 다 보여주셨습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 9:16).
얼마나 많이 매를 맞아야 하고 얼마나 많이 감옥에 가야 하고 얼마나 모욕과 멸시를 당해야 하는지 주님이 다 보여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여, 감사합니다. 가겠나이다" 하고 자기를 주님께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로 그는 고린도전서 4장 9절에서 토로한 것처럼 천사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롱하고 비웃는 길이었지만 그는 기쁘게 발을 옮겨놓았습니다. 결사의 각오를 가지고 충성하는 생을 살았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로마서를 읽으면서 바울이 왜 자기를 예수의 종으로 소개하는지를 잘 모른다면 편지 전체를 통해 흐르는 저자의 뜨거운 감격과 열정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야기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바울처럼 특별히 소명받은 선교사에게나 예수의 종이 되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지 나 같은 평신도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은 없습니까? 미안하지만 그것은 철저히 인간적인 생각이라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물론 우리는 바울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도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 중 대부분은 바울처럼 처음 예수 믿을 때는 억지로 믿었습니다. 저와 같이 4대째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동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믿게 된 사람들은 대개가 믿고 싶어 믿은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할 수 없이 끌려가서 믿게 되었든지 어쩌다 믿게 된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날 때처럼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온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억지 춘향으로 믿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다음 단계로 들어서야 합니다. 바울처럼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하나님이요 구원자 되심을 철저히 확인하고 감격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송두리째 예수의 종으로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바라고 계시는 믿음의 수준입니다.
로마서를 통해 흘러 넘치는 은혜의 생수를 마시기 시작하면 우리는 흔쾌히 예수의 종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6절).
여기서 말하는 "너희"는 로마서의 수신자인 로마교회 교인들로,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평신도들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나와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소유가 되었다면 그것은 노예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자신은 없어지고 주인 되신 예수의 종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사도도 아니요 선교사도 아닌 로마교회의 교인들 역시 자기와 똑같이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부인하면 로마서를 덮어버리고 일어나야 합니다.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안에는 온통 예수 믿고 그의 종 된 자들의 이야기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그리스도의 종으로 내놓기 싫어하는 자가 그것을 읽을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모두 다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의 소유가 아닌 그리스도인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뜨거운 가슴으로 우리의 달라진 신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가지는 부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우선 "나는 주인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도 아니요, 자기 생의 주인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인 의식을 송두리째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에게 있는 것은 전부 내 것이 아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유권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내 마음대로 살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생존권의 포기라 할 수 있습니다. 왜 주인 의식, 소유권, 생존권을 부정해야 합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예수의 것, 예수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분들 중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예수의 종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길을 가다가 대문에 교패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벨을 눌렀다고 합니다. 젊은 새댁이 생글생글거리며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목사님이 인사를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 댁에 주님이 계신가요?" 젊은 부인은 깜짝 놀라며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한참 있다가 자기는 모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님은 그 댁에 주님이 계시는가 하고 재차 물었습니다. 약간 화가 난 부인은 아무 말 않고 문을 닫고 들어가버렸습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새댁은 목사 딸이요, 남편은 장로 아들이었습니다. 교회에서는 둘 다 집사로, 성가대원으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의 질문에는 큰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주님이 계시느냐 하는 말은 예수님이 그 가정의 주인으로 대접받고 계시는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의 종으로 충성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교패를 버젓이 붙여 놓고 사는 집이니 그 정도의 인사를 해도 실례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자기가 예수의 종임을 잘 모르고 교회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모릅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 20).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 8).
얼마나 철저한 종의 선서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누구입니까? 저와 여러분입니다. 예수 믿는다면 한 사람도 제외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예수의 종으로 사는 삶
누구든지 억지로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그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기꺼이 던져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기를 위해서 기꺼이 모든 것을 바치는 종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되려면 가슴속에서부터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움이 솟구쳐야 합니다. 감격이 약하다면 바울처럼 성경을 안고 아라비아 사막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서 십자가의 주님을 말씀 속에서 만나고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자원하는 종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아라비아 사막은 어디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면 세상 사람과는 다른 데가 있어야 합니다. 가끔 우리는 구원받았다는 것이 세상 사람과 다른 점이라고 생각하며 만족을 합니다. 옳은 말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무슨 다른 점으로 보이겠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구원 받은 자나 그렇지 못한 자나 달라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들과 나란히 서 보세요. 구원받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무엇을 보고 분간할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삶의 방식에서 그들과 구별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사는 방식을 볼 때 세상 사람과 다른 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의 방식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인으로 산다면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삶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내가 주인 행세하며 사는 삶과 나는 주인이 아니라는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삶은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 것인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사람에 비해서 내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 사람의 삶은 분명히 다릅니다.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사람과 내 마음대로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삶의 질이 엄청난 차이를 보입니다.
최근에 제가 잘 아는 목사님 한 분이 북한에 다녀왔습니다. 북한을 방문하는 동안 고위 관료가 그를 따라다니며 함께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나 봅니다. 목사님은 그 고위 관료와 장시간 함께 지내다 보니 친근해져서 농담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수행원이 이런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뭐 우리 주체사상하고 남한에 있는 기독교하고 비교하니까 다른 것 없데요. 당신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믿는다고 그러지 않아요? 우리도 그래요, 김일성 주석이 성부요 김정일 동지가 성자입니다. 우리도 세 사람씩 조가 되어서 제자훈련하고 있어요. 당신들만 제자훈련 하는 것 아닙니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실제로 북한의 사회 구조가 전부 3인조로 조직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3인조는 서로 감시하는 것이 주된 일이지만 동시에 서로가 주체사상을 가르치면서 독려하는 점조직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탈선하지 못하도록 서로 도와 주는 것입니다. 셋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사고를 일으키면 세 사람이 운명을 같이해야 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사회입니까? 우리들이 교회에서 받는 제자훈련하고는 비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북한 지도자들의 눈에는 남한의 기독교가 형편없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그는 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네 목사들 평양의 봉수교회에 와서 예배 보는 것 자주 보았는데 당신들 별 거 없데요. 보니까 우리보다 나은 것도 없고 기독교가 정말 그 정도로 믿는 것이면 그리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소." 목사님이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는 "아니, 하나님 앞에 와서 예배를 드리려면 경건하게 예배를 드려야지... 우리가 김일성 주석에게 하는 태도 못 보았소? 당신네 목사들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린다면서 경건하게 드리기는커녕 비디오 카메라 가지고 기도 시간에 찍느라 정신이 없더군요. 본국에 돌아가서 자기 선전하려고 그러는지 예배는 안 드리고 부산을 떠는 것 보니 틀려먹었다, 별거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수다"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공산주의 골수분자들만 우리를 별 것 아닌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많은 불신자들 역시 성경 찬송 들고 교회 다니는 우리를 똑같은 시각으로 볼 것입니다. 무엇인가 그들과 다른 것이 있어야 매력이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교회가 늘어나도 세상이 안 달라지는 것을 보면 우리의 삶의 방식이 예수의 종이 아닌 것이 틀림없습니다.
작은 예를 하나 들어 봅시다. 자기는 예수의 종이요 모든 것이 주의 것이요 그분이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고 고백하는 주부라면 사치할 수 있겠습니까?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안 좋아하시는 일을 함부로 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과소비할 수 있겠습니까? 46만 원짜리 반바지 사 들고 기분 좋아하겠습니까? 못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쌓아 놓은 돈이 많아도 자녀들이 예수 믿는다 하면서 수입 명품으로 휘감고 다니도록 내버려 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함으로써 이웃이 얼마나 피해를 보며 주인 되신 예수님이 얼마나 욕을 먹는가를 안다면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정도는 알고 행동할 수 있어야 예수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예수 안 믿는 사람과 무엇인가 다른 데가 있는 예수의 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근검절약하는 것을 주님이 원하신다면 오직 그 이유 하나로 우리는 부지런히 일하고 아껴 써야 합니다. 또 주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정직하게 살아야 하고, 정직하게 살려다가 수입이 적어서 남처럼 잘살지 못해도 오히려 그것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기뻐하시는 일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만족해야 합니다.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믿는 학생이라면 학창 시절을 어떻게 허송세월 하면서 어영부영 보내겠습니까? 그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열심히 공부하며 눈물로 씨를 뿌려야 합니다.
직장을 다니는 분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자기를 예수의 종으로 아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눈치봐 가면서 태만하게 일할 수 있겠습니까? 청교도들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생업은 예배당만큼이나 거룩한 장소로 여겨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업 전체가 주님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생업이 장사라면 장사하는 일거수 일투족을 주님의 일로 알고 일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상투적인 장사치의 거짓말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이 한다고 따라서 폭리를 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종 된 기업가가 어떻게 이익 분배를 제대로 하지 않고 들어오는 대로 제 주머니에 집어넣으면서 노동자를 직접 간접으로 착취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싫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인 되신 주님이 좋아하시지 않기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안 믿는 사람과 다른 것은 그들은 자기의 인생을 사는 반면 우리는 예수의 인생을 사는 데 있습니다. 이 차이점을 확실하게 보이지 못하면 우리는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그들의 발 밑에 짓밟히고 말 것입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어느 회사 사장은 자기 집무실에 예수 그리스도의 의자를 따로 하나 두었다고 합니다. 그 회사의 회장이 예수님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회사의 소유권, 경영권을 주님께 맡기는 하나의 신앙 고백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형제는 회사에서 돌아가는 모든 일들이 주님의 기쁘신 뜻대로 되어야지 자기 마음대로 되면 안 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세상 사람과 구별되는 종의 삶입니다.
쓰임받는 종이 되려면
율법에 따르면 이스라엘에서는 자기가 스스로 자원해서 종이 되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주인이 귀에다 구멍을 내어 주인 이름이 새겨진 귀걸이를 걸어 주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새겨진 귀걸이를 걸고 다니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귀걸이는 귀에 거는 장식용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임을 증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종이 되면 무미건조하고 부담스러운 인생을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흔히 목사가 되면 세상 재미 보기는 틀렸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와 비슷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주님의 종으로 철저히 순종하면 마음에 평안이 얼마나 넘치는지 모릅니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만사가 얼마나 자유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니까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도자 잘못 만나서 비참해지는 나라들을 보면 지도자를 잘 만나는 것이 우리의 행복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새삼스럽게 깨닫게 됩니다.
세상에는 주인 잘못 만나 망한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 자신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결국은 망합니다. 결국은 허무주의에 빠지고 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위대한 지도자요 가장 안심하고 우리 생을 맡길 수 있는 주인입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사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전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를 나의 주인으로 모시면 자유함이 있습니다. 평안함이 있습니다. 능력이 따릅니다. 그리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구소련에서 보수파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저는 하도 답답해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소련에 있는 성도들이 이제 겨우 2년 가까이 자유스럽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또 보수파가 일어나면 어떻게 합니까? 거기에 있는 교인들을 생각하옵소서. 주님, 중국은 어떻게 합니까? 북한에 있는 성도들은 어떻게 합니까? 주여, 이 부족한 종의 기도를 들으시고 소련의 정변을 바꾸어 주옵소서." 이틀 동안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TV 뉴스를 보지 못하고 자리에 누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문을 열고 나가니까 아내가 "여보, 실패했대요!"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마루에 떨어져 있는 조간을 펼쳤습니다. 쿠데타 실패라는 대문짝 만한 활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잘못하면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했습니다.
그때 문득 웨일즈라고 하는 작가가 쓴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짧은 단편 소설이 떠올랐습니다. 거기에 보면 영국 대주교가 기도할 시간이 되어 대성전에 들어가 두 손을 들고 "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여!" 하고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위에서 "오냐, 내가 여기 있다. 무엇을 원하느냐?"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무 놀란 대주교는 "하나님 정말 내 기도를 듣고 계셨군요" 하고는 벌렁 나자빠져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그 꼴이 될 뻔했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기도를 듣고 하나님이 쿠데타를 실패로 돌릴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기가 막히게 들어 주시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고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왜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예수의 종답게 살면 우리를 통해 주님이 하고 싶어 하시는 일들이 공산주의 국가에 수없이 쌓여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엄청난 기회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회가 찾아와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기를 부담스러워하거나 거부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주인 되신 그분에게 엄청난 손해를 입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 교회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구름 떼와 같이 많은 사람이 모이는 교회를 원하실까요?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새겨진 귀걸이를 달고 "주여,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진실한 자기 종들을 원하실까요? 우리는 이미 여기에 대한 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대로 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의 바울이라는 이름 대신 각자 자기의 이름을 써 넣도록 합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옥한흠은..." 저는 성경에 이렇게 써 두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6절).
여기서 "너희도"는 너무 막연하지 않습니까? '너희도' 대신 각자 자신의 이름을 쓰든지 아니면 '나도'라고 쓰기 바랍니다. "나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그러면 성령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당신의 마음속에 생명을 불어넣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비슷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구별된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손에 들려 이 세상을 아름답고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을 위해 쓰임받는 영광스러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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