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will be comforted.

마태복음5:4

[새번역]
4.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NIV]
4.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will be comforted.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세상이 피하려고 애쓰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애통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체계가 바로 그것을 피해야 할 것으로 보는 사고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골치거일랑 잊어버려라, 그런 것에 등을 돌리고, 할 수 있는대로 그런 것을 보지 말아라! 이것이 세상의 철학입니다.

곧, 정죄가 회심보다 필연적으로 선행한다는 사실입니다. 죄에 대한 진정한 인식이 먼저 있어야만 비로서 진정한 구원의 기쁨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익서이 복음의 본질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문제의 원인은 백 중의 아흔 아홉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쁨을 체험하기 전에 먼저 정죄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지를 못한 것입니다. 이들은 죄의 교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너무나 혐오해서, 죄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조차 반대합니다. 정죄와는 상관이 없이 그냥 기쁨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쁨을 얻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회심하여 진정한 행복과 축복을 얻기를 소원하는 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애통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정죄야말로 진정한 회심에 필수적인 예비 단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라?’라는 울부짓음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바로 이것이 본문의 ‘애통하는 자’에 대해서 말씀해주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 비탄에 빠져서 고통 중에 부르짓는 사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그와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자기 자신에세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이러한 비참한 느낌을 몸소 체험해서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에 대해서 바울처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말합니다. 그는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라고 말하는 심정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곧, ‘애통하다’는 것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상태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거룩하심을 대면하고 내가 살아야 마땅한 삶을 생각해보고, 그리고 나 자신의 모습을 보면, 결국 어쩔 수 없는 나의 처절한 상태와 비참함을 볼 수밖에는 없습니다. 나의 심령의 본질을 직시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애통이 나올 수밖에는 없습니다. 내가 그런 모습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정말로 자시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여 자기 자신과 생활을 점검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또한 자기의 죄 때문에, 자기가 행하는 일들 때문에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의 죄로 인해서도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똑같은 것을 봅니다. 사회의 현실에 대해서도, 세상의 형편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갖습니다.

우리 주님이 애통하신 까닭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가 ‘슬픔을 많이 겪었고 질고를 아는 자’이셨던 연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주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신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무섭고 추하고 더러운 죄라는 것이 인생 속에 들어와서 죽음을 가져다주었으며 또한 인생을 온통 망쳐놓고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 때문에 우셨고, 심령으로 고뇌하셨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바로 죄의 본질 그 자체 때문에 애통합니다. 왜냐하면 죄가 세상에 들어와서 그로 인하여 이런 무서운 결과들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또한 과연 하나님이 죄를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때문에 애통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철저하게 혐오하시고 미워하십니다.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마음까지도 찌르고자 철저하게 하는 그런 무서운 죄와, 사단에게 귀를 기울인 결과로 나타난 인간의 반역과 오만함 때문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그 때문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왜 복있나? 어떻게 위로를 받는가?) 자신의 죄악된 상태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회개할 사람입니다. 아니, 이미 실질적으로 회개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분명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함을 받을 사람입니다. 자신의 처절한 죄악성과 비참함을 보았으니 이제 주님을 바라보고, 그리스조 안에서 주님을 찾습니다. (중략) 이것은 낮이 지난 후에 밤이 오는 이치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애통하면, 우리는 기뻐할 것이요, 행복해질 것이요,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회심 때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인의 전 생애 동안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자기에게 죄책이 있음을 깨닫게 되면, 처음에는 그것으로 인하여 마음이 무거워지고 애통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인하여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게 되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순간 그에게 평안과 행복이 돌아오며 그렇게 해서 위로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이 이때에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애통하는 사람은 위로를 박으며 그리하여 행복을 누립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런 식으로 진행됩니다. 곤, 애통과 기쁨, 슬픔과 행복이 즉시로 교차되는 그런 삶의 모습을 띄는 것입니다. 


(세상엔 소망이 없음을 이야기하고) 그러나 죄 때문에 애통하고 세상의 현 상태 때문에 애통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위로가 있습니다. 곧, 복된 소망의 위로요, 아직도 남아있는 영광이 주는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비록 탄식하는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은 그와 동시에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왜요? 그의 앞에 소망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원한 궁극적인 소망이 그에게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상태에 들어갈 때에, 우리는 완전하게 전적으로 복된 상태가 됩니다. 삶을 망치거나 거치를 떨어뜨릴 것이 전혀 없게 됩니다. 슬픔과 한숨이 사라지고, 모든 눈물이 씻음을 얻고, 영원토록 황한 빛 속에 거하며, 그 순결하고 완전한 기쁨과 환희와 영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애통하는 사람)는 슬픔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병적으로 슬픔에 젖어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슬픔이 가득한 사람이지만, 결코 비참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진지한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침울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위엄 있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냉정하고 부정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이러한 위엄과 함께 따뜻함과 사람을 끄는 힘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람은 언제나 진지합니다. 그러나 일부러 진지해지려고 노력하는 법은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겉으로 슬픈 모습이나 쾌활한 모습을 가장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중략) 과연 그는 우리 주님처럼 탄식하며 울면서도 ‘그 앞에 놓인 즐거움을 인하여’ 십자가와 조롱받는 부끄러움을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4절). 이것은 또 다른 이상한 축복으로서 앞의 축복에 적절히 뒤따르고 있다. 가난한 자는 애통하는 데 익숙해 있으며, 가난한 자는 은혜스럽게 애통한다. 우리는 자칫하면 "즐거운 자"가 복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위대한 애통자이셨던 그리스도는 "애통하는 자"가 "복"되다고 말씀하신다. 축복과는 적대가 되는 애통, 즉 죄악스러운 애통도 있다. 그것은 "세상의 슬픔"이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사건에 대한 절망적인 울적함과 세속적인 사건에 대한 슬픈 고뇌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축복에 도움이 되는 이른바 자연스런 애통이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역사 한다. 그리고 그 축복은 우리의 애통의 원인인 그 고난을 성화 시켜 준다. 그러나 또한 은혜스러운 애통이 있는데, 이것은 축복을 받기에 적합한 것으로서 습성적인 진지함이며, 환락을 억제하는 마음, 실제적인 슬픔이다.

1. 우리 자신의 죄를 위한 참회의 애통. 이것은 "경건한 슬픔," 하나님께 속한 근심이며, 그리스도를 염두에 두고 죄에 대해 슬퍼하는 것이다(슥 12:10). 그들은 하나님의 애통하는 자들로서 회개의 생활을 하며 그들의 성품의 타락성과 실제적인 많은 범죄들과 자신들에게서 하나님이 물러서 버린 것에 대하여 애통한다. 또한 타인의 죄에 대해 애통하며, "그들의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운다"(겔 9:4).

2. 타인의 고통을 위해 동정하는 애통.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자들의 애통은 "경건한 대회를 인하여," "시온의 파괴를 인하여" 슬퍼하는 것이다(습 3:18; 시 137:1). 특히 그들은 "예루살렘"을 보면서 우신 그리스도와 같이 멸망하는 영혼들에 대해 동정심을 가지고 바라보며 그들에 대해 "애곡하는" 것이다.
이제 이 은혜스러운 애통자들은,



(1) "복이 있다." 헛되고 죄스러운 "웃음"을 짖지만 그 마음은 슬플 수 있는 것처럼 은혜스러운 애통은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진정한 즐거움, 은밀한 만족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복이 있는"것은 "슬픔의 사람"이었으며 종종 우셨다는 것 이외에는 웃으셨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그리스도와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헛된 환락을 수반하는 많은 유혹들에 대항할 수 있는 무장을 갖추고 있으며, 도장이 찍어진 용서와 정해진 평화의 위로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

(2) "저희는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비록 그들이 즉시 위로를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위로를 위하여 많은 준비가 되어 있다. 영광이 그들을 위해 심기워진다. 확실히 그들은 나사로(눅 16:25)와 같이 하늘에서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늘의 행복은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위로 받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기쁨"이며, 완전한 즐거움이며 영원한 만족이다." 그것은 이 "경건한 슬픔"에 의해 그들을 위해 준비된 자들에게 갑절이나 즐거운 것이 될 것이다. 천국은 참으로 애통하는 자들이 가는 천국이 될 것이다. 그것은 즐거움의 수확, 즉 눈물로 씨를 뿌린 것에 대한 댓가가 될 것이다(시 126:5, 6). 즐거움의 산은 우리들의 눈물의 골짜기를 통해 그 대로가 놓여있다(사 66: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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