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because of righteousness,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마태복음5:10

[새번역]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NIV]
10.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because of righteousness,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기독교인과 박해

 우리는 10절에서 팔복의 마지막 복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 대목에 이릅니다. 11절과 12절은 이 복에 대한 일종의 정교화요, 이 복의 진리와 메시지를 특히 제자들에게 적용한 것이라는 점에 대체로 의견이 일치되고 있습니다. 환언하면 우리 주님은 10절에서 기독교인의 특징 묘사를 대체로 끝냈으며 특히 이 마지막 진술을 제자들에게 적용하고 계십니다.

 첫째로, 이 복은 앞서 살펴본 기독교인의 사람됨 때문에 초래되는 것이며, 기독교인에 대한 적극적 성격 묘사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다른 복들과 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것 역시 기독교인에 대한 설명이요, 서술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일정한 형태로 처신하기 때문에 박해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이 복을 표현하는 최선의 방법은 다른 모든 복이 직접 서술된 반면, 이 복의 서술은 간접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이것은 너희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특별한 복이 화평자들에 대한 언급이 즉시 뒤이어 나온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기독교인이 박해를 받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가 화평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기독교인의 삶의 성격과 특징에 대하여 얼마나 큰 이해와 통찰을 주는 것이겠습니까! 여러분은 이 두 복 '화평케 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에서 보다 성서적 죄론과 세상에 대한 더 완벽하고 정확한 진술을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기독교인이 화평자라면 박해는 따르기 마련인 것입니다.

 예비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또 한 가지 흥미 있는 점은 이 복에 대한 약속이 첫째 복에서 하신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와 같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 복이 마지막 복이라는 사실을 다시 증거하는 셈입니다. 천국으로 시작하여 천국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다른 복들에 대하여 내리신 여러 가지 축복들이 천국에 있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거나, 그들이 축복을 얻지 못한다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이 이 특정 약속으로 시작하여 이 약속으로 끝내신 까닭은 천국 백성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청중들에게 감명 주게 하기 위함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유대인들은 천국에 대하여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러나 나는 이런 유의 천국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내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너희는 어떻게 그 나라 백성이 되는가를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천국으로 시작하여 천국으로 끝내셨습니다. 우리가 받고 있고 더욱 크게 충만히 받게 될 이 모든 복들보다도 더 큰 복은 우리가 천국의 시민이 되며 영의 나라에 소속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우리가 직면할 수 있는 최대의 탐사성 있는 시금석 하나에 마주친다고 하겠습니다. 아무도 이 복을 다른 사람들에게나 관계되는 일종의 부록이라 생각하지 맙시다. 이 복이 간접 서술이긴 해도 앞의 다른 복들처럼 그 나름으로 적극적 서술이며, 모든 복 중에서도 가장 탐사성 있는 것의 하나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 얼마나 놀랍고, 경이롭고, 예기치 못한 진술입니까? 하지만 이 복도 마음이 깨끗한 것만큼, 긍휼한 것만큼 기독교인의 성격 묘사의 일부임을 기억합시다. 이것도 기독교인의 특징의 하나임을 상기합시다. 이것은 우리가 직면하는 가장 탐사성 있는 시금석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팔복은 모두 탐사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어느 복보다 탐사성이 큰 면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복보다 더 조심해야 할 진술은 없으며, 이 복처럼 잘못 해석하고 오해하기 쉬운 것이 없다는 점을 덧붙여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사실 이 복처럼 오해를 받고 잘못 적용된 복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중하고 세심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본문은 신약 성경의 모든 가르침 중에서 매우 중요하며 본질적인 것이며 절대 불가결한 부분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복음서와 서신들을 일관하고 있음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성경 전체에서도 매우 독특한 메시지의 하나이며, 이와 함께 그 나름의 불가피한 뜻을 함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크게 강조해야 할 요점은 '의를 위하여'란 어구라는 점을 지적하는 바입니다. 본문은 단순히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가 아니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본문이 현대 모든 나라의 기독교인에게 얼마나 적중하는 진술인가를 지적하면서 시간을 많이 보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의 처음 몇 세기 이후에 있었던 박해보다 오늘날의 박해가 더 심하다고 말하려고 합니다.  이런 진술을 바르게 평가할 좋은 실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구한 교회사의 여러 시대에 있어 가혹한 여러 시대에 있어 가혹한 박해의 기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체로 다소 지역적인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박해는 세계 전역에 퍼져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에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적극적으로, 가혹하게 박해를 받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본질이 여러분과 저의 사람에서 가장 중요한 절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할 정도로 이에 대한 강한 실례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도 베드로가 기록하고 말씀한 바 불과 같은 시험에 교회가 직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한 곳이 매우 많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주로 자기 당대에 다가오고 있던 박해를 생각하고 말씀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나라에서, 일견 안전하고 편안한 가운데서 불과 같은 시험과 풀무와 같은 고난과 박해를 당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 절을 이해하고 있고 그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다.

  본장 끝까지 본 주제를 부정적인 면에서 다루어 보겠습니다. 본문은 '반대하기 때문에 박해를 받은 사람들은 복이 있다'라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까다롭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본문은 '지혜가 매우 부족하고 어리석으며 그들이 복음의 증거라 생각하는 것에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에 기독교인으로서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지도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아무에게도 없을 것입니다. 전적으로 그들의 어리석음 때문에, 그들 자신의 그 무엇이나 그들의 행위 때문에 가벼운 박해를 받는 기독교인들이 허다하게 있습니다. 그의 조건은 의를 위하여입니다. 이 점을 매우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끝없는 고난을 자초할 수 있고 전혀 불필요한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어리석고 잘못된 증거 관념을 갖고 있거나 자기의 정신에서 고난을 자초하여 뒤집어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에 매우 어리석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편견과 원칙의 차이를 올바로 분별하는 일에 더디며, 우리의 어떤 특별한 성격과 기질  때문에 불쾌감을 주는 것과 의롭기 때문에 불쾌감을 주는 것과의 차이를 분별하지 못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정명제를 하나 더 제시하겠습니다. 본문은 '광신적이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지나치게 열심 있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도 말씀하지 않습니다. 광신도 박해를 초래할 수 있으나 신약성경에서 권장을 받은 일이 없습니다. 기독교인의 삶에 닥쳐오는 시험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예배를 드릴 때에도, 이상한 어조로 '아멘' 소리를 하거나 아멘을 자주 연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봅니다. 이것을 영성의 증거라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구역질 나게 하며 말썽을 빚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권장 받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짓된 예배관입니다. 열광주의 정신이 사람들을 극심한 곤경 속에 빠뜨리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저는 어떤 가난한 사람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는 열심 때문에 고난을 자초했을 뿐 아니라, 아내에게까지도 고난을 가져왔습니다. 그는 지나치게 열심을 내었고 전도하는 데 열심이 지나쳤기 때문에 주께서 주신 명령을 바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도 불필요한 고난을 자초하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우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해야'합니다. 우리 중 누구도 이점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다시 말하면 엉뚱한 일을 저질렀거나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지혜롭게 '여러분 중에 아무도 살인자나 도둑이나 악을 행하는 자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가 되어 고난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벧전 4:15)'라고 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살인자나 도둑이나 악을 행하는 자를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와 같은 범주 속에 취급한 것을 주목합시다.

 이번에는 다른 범주에서 부정명제 하나를 취급해 보겠습니다. 본문이 '어떤 대의명분을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란 뜻이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이 명제는 약간의 성격이 미묘하므로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과 어떤 대의명분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하나로 되어 많은  순교자와 신앙 고백자들이 의를 위함과 동시에 어떤 주장을 위하여 고난을 받은 일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가 항상 같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시점에서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20여년 동안 기독교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투옥을 당하거나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이 있고 그들 중에는 매우 유명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점을 매우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들 속에 순교 정신을 발전시키려는 이 위험은 항상 있습니다. 순교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순교를 당하고 싶어 애를 씁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의 말씀하시는 뜻과 다릅니다.

 우리는 이것이 종교적이면서 정치적인 이유로 인한 그런 박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합니다. 나찌 독일에 기독교 신앙을 실천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합니다. 나찌 독일에 기독교 신앙을 실천하며 살고자 하는 태세가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신앙을 공공연히 설교하고도 박해받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있었음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감옥과 강제 수용소에 투옥되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째서 그들에게 이런 일이 발생했던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분별해 보신다면 이것이 대체로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그런 것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제가 히틀러주의를 변호하고 있지 않음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점을 구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함을 모든 기독교인에게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만일 여러분과 제가 기독교와 정치를 혼합한다면 우리가 박해를 받는다고 해서 놀라선 안 됩니다. 하지만 이 박해가 반드시 의를 위한 박해는 아니라는 점을 암시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서로 성질이 매우 다른 별개의 것이므로, 이 둘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가장 큰 위험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이것이 중국과 유럽 대륙의 기독교인들에게는 드문 문제 중에서도 가장 예리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의를 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어떤 대의명분을 위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결국 정치관과 여러 가지 견해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느 특정 국가의 시민들입니다. 저는 정치 원칙을 옹호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복에 접속되어 있는 약속은 이것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정치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편을 택한다면 그 일을 계속하십시오. 하지만 그 후에 이 복, 이 약속이 여러분의 삶에서 실형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 원한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이 복과 약속은 의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하나님께서 정치적 편견과 영적 원칙을 분별할 수 있는 은혜와 지혜와 이해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현재 이 문제에 대해 많은 혼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기독교적인 것처럼 보이고, 또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자처하는 탄핵과 고발장들이 세계적으로 성행하고 있지만 이것이 제게는 정치적 편견의 표시 이외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우리가 이렇게 심각하고 유감스런 성경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이런 오해는 쓸데없는 불필요한 박해를 유발하기 쉽습니다. 오늘의 또 한 가지 큰 위험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이 순수 기독교 신앙을 어떤 정치적이며 사회적 견해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별개의 것으로 서로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을 실례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반공산주의가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로마 가톨릭 교회나 어느 당파들로 하여금 우리를 미혹하고 잘못 인도하게 허용할 정도로 어리석고 무지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와 같이 공산주의자들의 영혼과 그들의 구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기독교가 반드시 반공산주의라는 인상을 주게 되면 우리는 그들에게 문을 닫고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구원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하는 셈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매우 조심해야 하며, 성경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부정명제를 또 살펴봅시다. 이 벅은 '선하고 고상하고 자기희생적이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다시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구별이 잘 안되는 모양입니다. 이 복은 '우리가 선하고 고상하다면 복이 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선하기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고상하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이것 역시 의심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사실을 말하면 세상은 대체로 선하고 고상한 사람들을 칭찬하고 찬양하는 법입니다.  의인들만이 박해를 당합니다. 세상에는 큰 희생을 감행하고 전 생애와 기대와 부귀를 포기한 사람들이 위대한 영웅으로 생각하며 높입니다. 오늘날 단순히 이런 희생을 하였다고 해서 위대한 기독교인으로 높임을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것들이 참으로 기독교 신앙을 실천했는가, 아니면 기독교와 다른 어떤 것인가, 즉 하나의 일반적인 고상성 뿐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면 이 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것을 다음과 같이 실례를 들어 살펴보겠습니다. 의롭다거나 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사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를 닮기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분을 닮은 사람들은 항상 박해를 받습니다. 이것을 우선 성경에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우리 주의 표현하신 말씀을 들어봅시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했다는 것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했다면 세상이 너희를 자기 사람이라고 하여 사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 택하였는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높지 못하다고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했으면 너희를 또한 박해할 것이요 또 그들이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을 또한 지킬 것이다'(요 15:18-20). 이 말씀에는 어떤 제한이나 수식이 없습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진술입니다. 그의 종 바울의 표현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바울은 디모데가 이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여 자기가 받은 박해로 불행해 했으므로 그에게 편지하는 가운데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딤후 3:12)라고 했습니다. 이것 역시 절대적인 진술입니다. 이 복이 팔복 중에서도 가장 탐사성이 큰 복이라고 제가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도 이런 까닭에서입니다. 여러분은 박해를 받고 있습니까?

 주의 가르침이 이렇습니다. 이 가르침이 성경에 일관되어 있는 것을 살펴봅시다. 예를 들면 아벨은 형에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모세도 격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다윗도 사울에게 얼마나 박해를 받았습니까? 그리고 엘리야와 예레미야가 당해야 했던 박해를 보십시오. 여러분은 다니엘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그가 어떻게 박해를 받았습니까? 이 사람들은 구약에서도 가장 뛰어나게 의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다 성경의 가르침을 실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박해받은 까닭은 까다로웠거나 지나친 열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의로웠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도 이와 꼭 같은 것을 봅니다. 사도들과 그들이 견뎌야 했던 박해를 보십시오. 바울이 부드럽고 친절하고 의로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더 박해를 받은 사람이 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이 견뎌야 했던 고난의 기록을 읽어보십시오. 그가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한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박해를 알았고 체험했습니다. 하지만 최고의 모범은 물론 우리 주님이십니다. 이 점에서 주님은 절대 완전하십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을 들으실만했습니다. 누구도 그처럼 부드럽고 친절한 분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가, 세상이 그에게 어떤 일을 했는지 보십시오.

 그리고 교회사의 긴 역사를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 이 진술이 끝없이 실증되고 있음을 아실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생애, 곧 죤 허스나 언약교파 사람들(Covenanters)이나 청교도들에 대한 기록을 보십시오. 그리고 좀 더 근대에 와서 18세기 부흥기간의 지도자들이 당한 박해를 보십시오. 20세기에 와서 허드슨 테일러처럼 박해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는 가끔 격심한 박해를 견뎌야 했습니다. 이상은 모두 이 진술의 실증인 것입니다.

 의인이 누구의 박해를 받습니까? 성경을 보고 교회사를 보시면 박해가 세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아실 것입니다. 가장 격심한 박해의 일부는  교회 자체와 종교인들에 의하여 의인들에게 가해졌습니다. 박해가 명목상의 교인들에게서 올 때가 많았습니다. 주를 보십시오. 그를 주로 박해한 자들이 누구였습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율법학자들이 아니었습니까! 최초의 기독교인들 역시 유대인들에게 잔인하게 박해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교회사를 읽어 보고, 순수한 진리를 대하고 그대로 고요히 살아 보려 애쓰고  있던 중세 시대의 일부 사람들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박해를 살펴보십시오. 명목상의 종교인들로부터 얼마나 박해를 받았습니까! 이것은 청교도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박해가 외부에서가 아니라 내부에서 올 수 있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요, 교회사로 실증되었습니다. 신약성경과는 거리가 먼 기독교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따라서 그들은 진실하고 참되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좁은 길을 걸으려고 애쓰고 있는 사람들을 박해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체험에서도 이 사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개심자들로부터 바깥 세계 사람들에게 보다 표면적 기독교인들로부터 훨씬 많은 박해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을 많이 들었습니다. 바깥사람들은 그들이 변화되는 것을 보고 기뻐한 일이 많으며, 기독교에 대하여 알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형식적 기독교는 순수 신앙의 가장 큰 원수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의인은 어째서 이렇게 박해를 받습니까? 그리고 특히 의인이 어째서 선인이나 고상인들이 보다 박해를 받습니까? 그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인과 고상인들이 박해를 받는 일이 드문 까닭은 그들은 가장 좋은 상태일 때의 우리와 같다고 우리 모두가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의인이 박해를 받는 까닭은 의인들은 그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우리 주를 미워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주님이 박해받은 것은 그가 선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네 의가 매우 값싸고 야하게 보여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싫어했던 것입니다. 의인들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말로 정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람됨 때문에 그들은 실로 우리를 정죄하는 셈이며, 우리로 비참감을 느끼게 하며, 우리는 그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그 때문에 그들을 미워하며 그들에게서 결점을 찾아내려고 애를 씁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아시다시피 저는 기독교인되는 것을 좋게 여깁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해요. 너무 지나치단 말이요'라고 합니다. 다니엘의 박해도 이것으로 설명됩니다. 그가 박해를 당한 것은 그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자기 일을 자랑삼아 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것을 조용하게 행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사람이 그의 행동으로 우리를 정죄한다. 그를 잡아야 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항상 문제거리가 됩니다. 이것이 우리 주의 경우에서도 그렇습니다. 바리새인과 기타 사람들이 그를 미워한 까닭은 그 분의 철저하고 절대적인 성결과 의와 진리 때문입니다. 제가 앞서 말씀드렸지만 허드슨 테일러처럼 부드럽고, 정답고, 사랑스런 사람들이 표명상의 기도교인들의 손에서 무섭게 가혹한 박해를 받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어떤 결론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본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품과 관련하여 우리들 나름의 생각에 대하여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만일 그 분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그가 불신자들에게 찬양과 갈채를 받을 수 있는 정도의 것이라면 우리는 그 분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동시대인들에게 끼친 영향을 많은 사람이 그에게 돌을 던졌다는 데서 나타납니다. 그들은 그 분을 미워했고, 마침내는 그 분 대신 살인자를 선택하고 그를 죽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항상 세상에 준 결과가 이러했습니다. 하지만 그 분에 대하여 여러가지  잘못된 관념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노라고 말하는 세속인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그분을 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분을 보았다면 그 분의 동시대인들처럼 그들도 그 분을 미워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변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그리스도관이 자연인이 쉽게 찬양하거나 갈채할 수 없는, 올바른 그리스도관인가 검토해 봐야 합니다.

 이것은 두 번째 결론으로 이끌어 갑니다. 이 복은 우리의 기독교관을 시험하는 시금석이 됩니다. 기독교인은 그의 주님과 같으며, 주께서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할 때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도 거짓 예언자들에게 그와 같이 행했다'(눅 6:26)라고 그에게 말씀하시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독교인이 멋지고 인기 있고 아무 사람도 성나게 하지 않고 따라서 그와 지내기가 매우 쉬운 그런 기독교인을 항상 완전한 기독교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복이 사실이라면 이런 사람은 사실은 참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진짜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 주를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를 닮은 사람을 결코 칭찬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할 때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에게는 이와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다음과 같이 추론하는 바입니다. 이 추론은 자연인인 비중생자와 관련됩니다. 바울은 '자연인은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했습니다. 자연인이 하나님을 논하긴 해도 사실은 하나님을 혐오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땅 위에 왔을 때 그를 미워하여 죽였습니다. 이것이 그에 대한 오늘의 세상의 태도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추론합니다. 곧 사람은 기독교인이 될 수 있기 전에 중생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변화되지 않고는 그리스도처럼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의를 혐오하는 옛 성품을 제거해야 하며, 이런 것을 사랑하고 주를 사랑할 새 성품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와 같아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모방하려 한다면 세상은 여러분을 칭찬할 것이요, 그리스도를 그대로 닮으려고 한다면 세상은 여러분을 혐오할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 모두 이런 질문을 자문해 봅시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우리는 그 분을 닮기 위해서 빛이 되어야 합니다. 빛은 항상 어두움을 노출시킵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은 항상 빛을 혐오합니다. 우리는 공격적 자세로서, 다른 사람에게 무례하고 화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어리석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지혜롭지 못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시위해서도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박해를 자초할만한 일을 해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그대로 닮음으로써 핍박은 불가피하게 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광스런 일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는 이것을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너희가 이와 같으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것을 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여러분이 기독교인이며, 하늘나라 시민이라는 최종적 증거를 얻는 셈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는 특권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당하는 특권도 받았습니다'고 했습니다. 저는 최초의 기독교인들이 당국의 박해를 받은 것을 봅니다. 저는 그들이 마침내 그 분을 위하여 고난당하는 특권을 받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 것을 봅니다.

 원하건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통하여 큰 지혜와 분별력과 이것을 터득할 수 있는 지식과 이해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로써 우리가 고난을 받아야 할 때 그 고난이 의를 위한 것이며, 이 영광스러운 복의 위로와 위안을 충만히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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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1월 30일, 프란시스 쉐이퍼(혹은 쉐퍼, Francis August Schaeffer) 출생, "전제가 다른 이들과도 대화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