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마태복음5:9

[새번역]
9.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NIV]
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화평케 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 기독교인의 특징을 이렇게 한 단계 더 나아가 고찰할 때 성경 전체에서 팔복만큼 우리를 탐사하고 시험하고 우리의 교만을 꺾는 말씀은 없다 하겠습니다. 우리는 여기 '화평케 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 진술에서 하나님께 채움(배부름)을 받은 결과와 그 작용을 봅니다. 앞서 10장에서 개설한 개요에 따라, 우리는 이 복이 '온유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 말씀과 부합함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본서 6장에서 6절 말씀의 앞에 온 복들과 그 뒤에 오는 복들 사이에 일치점이 있다고 암시한 바 있습니다. 곧 가난한 심령과 긍휼이 여기는 것이 서로 관계가 있고, 애통하는  것과 마음이 청결한 것과도 이와 비슷한 관계가 있으며, 온유와 화평케하는 것에도 서로 일치점이 있습니다. 이것들 사이의 연결점은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욕구 충족을 하나님께 바라며 기다린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독교인의 생활과 기능은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의 생활이나 기능과 모든 점에서 전혀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팔복의 각 복에서 거듭 반복되며, 우리 주께서 강조하고 싶어 하신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은 전혀 새롭고 다른 나라(천국)를 세우고 계셨습니다. 앞의 장들에서 살펴본 대로 자연인이 팔복을 받아들여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위태롭고 치명적인 것은 없습니다. 여기의 이 복은 이것이 철저하게 불가능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시킵니다. 새 사람만이 이런 새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진술이 유대인들에게 매우 큰 쇼크로 임하였으리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오고 있는 메시야의 나라가 군사적, 국가주의적이며 물질주의적인 나라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 백성은 성경의 위대한 약속들을 물질화할 태세가 항상 되어 있었으며(유대인들이 지금도 그러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과오에 빠져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여기서 시초부터 그들의 생각이 완전히 오류임을 거듭 그들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올 때 그가 위대한 왕으로 좌정할 것이며, 그들을 온갖 속박에서 해방할 것이며, 이렇게 하여 유대인들이 다른 모든 민족들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민족으로 세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두 제자를 예수께 보내어 '오실 그 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는 유명한 질문을 하였을 때 요한마저도 이런 생각에 집착해 있었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요한은 '저는 이 모든 이적을 압니다. 하지만 이 큰 일은 언제 일어납니까?'라고 물은 셈입니다. 우리 주님이 오천 명을 먹이신 저 큰 이적을 행하신 후에 백성들이 큰 인상을 받아 '오실 그이가 이분임에 틀림없다'고 말하기 시작하며 그들이 '그를 억지로 붙잡아 왕으로 삼으려'고 나선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들의 소위가 항상 이러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 주님은 '아니다. 너희는 깨닫지 못했다. 화평케 하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 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내 백성이 이 일을 위해 싸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그렇지 않다. 너희의 견해는 전혀 잘못된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그런 다음 주는 유대인들에게 이 복을 제시하시면서 이 원칙을 한 번 더 강조하셨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이 점에서 이 말씀에 감명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말씀보다 오늘 이 세대에 더 적절한 말씀은 없습니다. 성경 특히 신약성경의 복음서에 이 세상과 이 세상 삶에 대한 말씀 중 본문보다 더 분명한 선언의 말씀은 없습니다. 제가 앞서 여러 복을 살펴볼 때 지적한 대로 이것은 물론 고도의 신학적 진술입니다.

 지금 저는 이 점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신약성경에서 산상설교처럼 오해를 받고  남용되는 대목이 또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들이 습관처럼 자기는 신학에 조금도 흥미가 없으며 사도 바울을 철저히 싫어하며 바울이 기독교인이 된 것을 하나의 재난으로 생각한다고 하는 말을 (특히 20세기 초에 그러했고 지금도 여전히 없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그 유대인(바울)이 자기 나름의 율법 관념을 가지고 자기의 율법주의를 영광스럽고 매옥적이며 단순한 나사렛 예수의 복음이라고 속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신약의 서신들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지만 산상설교에는 대단히 관심을 가진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크게 필요한 것이다. 필요한 것은 갈릴리의 대스승이 제시한 이 아름다운 이상주의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일뿐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연구하며 사람들이 실천하도록 서로를 설득하는 일뿐이다. 교회의 저주 거리가 된 신학은 안 된다. 필요한 것은 이 아름다운 윤리적 교훈, 여기 산상설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 신기한 도덕의 개선책 뿐이다'라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그들이 성경에서 산상설교를 좋아한 까닭은 산상설교가 비신학적이며, 교리나 교의나 기타 쓸데없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의 이 영광스런 대목에 대한 그와 같은 견해가 철저하게 어리석고 쓸데없는 것임을 상기해야 합니다. 화평케하는 사람들은 어째서 복됩니까? 그 대답은 그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과는 절대로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들은 세상 나머지 사람들에게 그들과 다른 부류의 사람으로 눈에 뜨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복됩니다. 환언하면 우리는 다시 신약신학과 교리 속으로 돌입하게 되는 셈입니다.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세상에는 어째서 전쟁이 있습니까? 이 국제 긴장은 어째서 변함없이 계속됩니까? 오늘의 세계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째서 20세기의 이 많은 전쟁을 보게 됩니까? 전쟁의 위협과 이 모든 불행의 소동과 불화는 어째서입니까? 본문에 의하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 하나, 곧 죄입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즉각 인론과 죄론. 즉 신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화평케하는 사람은 이전의 사람됨과 전혀 다르게 된 사람입니다. 여기에 다시 신학이 대두됩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사람의 정욕과 탐욕과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성입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든, 어떤 사회속의 단체 사이든, 국가대 국가이든 모든 문제와 불화의 원인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신약 성경의 인론과 죄론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현대 세계의 문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세계 문제마저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살펴봅시다. 세상에는 어째서 문젯거리가 그처럼 많으며 평화를 유지하기가 그렇게 힘듭니까? 20세기에 와서 평화를 위해 모인 끝없는 국제회의들을 봅시다. 그들은 어째서 실패했습니까? 사람들이 어떤 회의에 대해서든 자신을 갖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고 있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국제 연맹(the League of Nations)은 어째서 실패했습니까? 유엔은 어째서 실패하는 것 같습니까? 그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문제의 적절한 대답은 한 가지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것도 경제적인 것도 사회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 대답은 본질적으로, 근본적으로 신학적인 것이요, 교리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어리석음과 맹복 가운데서 이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문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으며,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기까지 그들의 표면에 변화와 조작을 일으킬 수 있어도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원인이 시냇물의 근원인 샘에 있을 때 물의 상태를 고치기 위해 시냇물 속에 화학약품을 넣는다면 시간과 돈과 에너지의 낭비가 아니겠습니까? 그 원인으로 향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 원인에 있습니다. 사람이 지금의 상태 그대로 있는 한 이런 일들은 하나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20세기의 비극적인 어리석음은 이 사실을 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 세상에서 발견되는 잘못일 뿐 아니라 교회 자체 안에서도 발견되는 과오입니다. 교회가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에게 설교할 때 인간적인 노력과 열심만을 보여주고 말았던 일이 얼마나 허다했습니까? 이것은 성경 교리에 배치됩니다. 오해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국제적으로 이런 노력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일들에 신뢰를 두는 사람은 삶과 세상을 성경의 관점에서 관망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문제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으며, 새 마음, 새 사람이 아니면 아무것도 이 문제를 다룰 수 없습니다.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간통과, 시기, 질투, 악의와 기타 이런 것들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사람들이 이 같은 한 평화는 없을 것입니다.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밖으로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산상설교가 인도주의자들이 항상 애호하던 성구였음은 분명하지만 이 산상설교처럼 인도주의와 이상주의를 철저하게 정죄하는 것이 성경에 다시없다고 거듭 말씀드립니다. 인도주의자들은 산상설교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산상설교에서 교리를 빼어버림으로써 산상설교를 전혀 다른 것으로 변질시켰습니다.

 본문의 가르침이 이 시점에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산상설교를 이해할 수 있으려면 이러한 신약성경의 올바른 관점에서 현대 세계를 바라볼 때뿐이기 때문입니다. 전쟁과 전쟁의 소문들 때문에 놀라고 계십니까? 기독교인이라면 놀라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전쟁과 전쟁의 소문을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확증으로 보셔야 합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에 제가 일부 기독교인들에게 쇼크를 준 사건을 기억합니다. 저는 그때 켈록 조약(Kellogg pact)에 대해 별로 열광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켈록 조약의 소식이 전해 나왔을 때 저는 어떤 기독교 집회에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훌륭한 집사님이 일어나서, 체험담을 나누고 영적 생활을 고찰해 보는 일을 중단하고 이 켈록 조약에 대해서 토론해 보자고 제의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 놀랍게 훌륭한 일이요, 전쟁을 영원히 종식시켜 줄 것이었습니다. 그는 제가 열광하지 않는 것에 놀라워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문제에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문제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문제가 마음에 있는 한 표면을 조작하는 일만으로 이 문제를 최종적으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긍정적인 면에서 살펴봅시다. 오늘의 세계는 화평케 하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모두 화평케 하는 사람들이라면 무제가 없을 것입니다. 두통거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화평케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분명히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생래적 성품의 문제가 아닙니다. 안일무사한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화평하는 그런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말썽을 피하기 위해서 어떤 일이라도 불사하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팔복의 어느 하나도 자연 성품을 서술하는 것은 없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았습니까?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 안이하며 어떤 희생을 치루어서라도 화평하려는 사람은 공평과 정의감이 부족할 때가 많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서 있어야 할 곳에 서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맥이 없습니다. 그들이 멋있게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온 세상이 이런 원칙에 입각해 이런 사람들에 의해 움직였다면 형편은 오늘보다 더 악화됐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화평하는 사람은 '유화주의자'가 아니라고 덧붙여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유화책으로 전쟁을 지연시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분이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부정과 불의한 짓을 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단순한 전쟁 회피가 평화를 만들지는 못합니다. 전쟁의 회피가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이 세대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화책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화평케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수동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그가 평화로운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싸움 좋아하는 사람은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능동적인 의미에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 평화를 능동적으로 만드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는 '잠자는 개를 그대로 누워있게 하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는 현상 유지하는 일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는 평화를 소원하며 평화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합니다. 그는 사람과 사람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 국가와 국가 사이에 평화가 있어야 할 필요를 적극적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화평해야 한다는 사실에 궁극적으로, 최종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본질적으로 화평케하는 사람은 수동적으로 능동적으로, 부정적으로 긍정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두통거리를 만들지 않을 뿐 아니라 평화를 만들기 위해 힘쓰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암시합니까?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전혀 새로운 전망의 필연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새 성품을 의미함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새 마음, 깨끗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이 문제들에는 한 가지 논리적인 순서가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뿐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는 대로 깨끗한 마음을 갖지 못한 사람, 시기와 질투와 이와 비슷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 마음의 소유자는 화평케하는 사람들이 어째서 저 모양이지?'라고 묻지 않습니다. 화평자는 '그들은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속에서 역사하는 영인 이 세상 신의 지배를 아직 받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저 가련한 사람은 자아와 사탄의 희생물이며 지옥을 향하고 있다. 나는 그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겨야 하겠다;라고 말합니다. 화평자가 그를 이렇게 보기 시작하는 순간 그는 비로소 그를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며 그와 화해하게 됩니다. 이처럼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 대해 전혀 새로운 견해를 가지셔야 합니다.

 그것은 또 전혀 새 세계관을 갖게 됨을 의미합니다. 화평자는 한 가지 관심만을 가지는데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도 같았습니다. 주의 삶의 단 하나 관심은 자기가 아니었고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화평자는 중심의 관심사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삼으며 그 영광을 섬기기 위해 자기 삶을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화평자는 하나님이 사람을 완전하게 만드셨고 세계는 낙원이 될 것을 압니다. 그래서 개인과 국가간의 다툼을 볼 때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어지럽히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개인과 국가간의 다툼을 볼 때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어지럽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그의 관심사요, 다른 것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이상의 세 가지 관점과 함께 다음의 관점이 뒤따릅니다. 화평자는 자기를 낮출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너무 소망하므로 이 일을 위해서라면 고난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는 화평을 촉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악행과 불의를 당할 준비마저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화평자가 자기 자신과 자기 이익과 자기 관심하고 결별한 사실을 압니다. 화평자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며 사람들에게 그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것을 위해 고난을 당하게 되면 그 고난을 감내합니다.

 이상은 이론입니다. 하지만 실제는 어떻습니까? 이것이 매우 중요한 까닭은, 화평자가 되는 것은 연구실에 앉아 이 원칙을 이론적으로 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인지 아닌지 증명되는 것은 바로 실제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것을 매우 단순하게, 거의 초보적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하여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실제에 있어서는 어떻게 이루어 집니까? 무엇보다 이것은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혀를 제어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는 불화가 훨씬 적어질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의 주의를 실제적인 것에 돌리면서 이것을 완벽하게 표현했습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시오' 화평자가 되는 최선의 방법 하나는 이것 곧 말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말을 전해 들었을 때 그리고 대꾸하려는 유혹을 받을 때 대꾸하지 마십시오. 그뿐 아니라 그들이 해하려는 것을 여러분이 알 때 그 말을 되풀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친구에게 다른 사람이 그에게 한 불친절한 말을 해 준다면 여러분은 그의 참 친구가 아닙니다. 이것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이것은 가짜 우정입니다. 다른 것은 그만두고라도 무가치하고 불친절한 말들은 반복할 가치도 없습니다. 우리는 혀와 입술을 억제해야 합니다. 화평자는 말 하지 않습니다. 자연인은 우리 속에 이 처럼 강합니다. 여러분은 기독교인들이 '나는 나의 생각을 표현해야 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습니다. 모든 기독교인이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여러분은 기독교인으로서 새 사람이 되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모범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거나 노하기는 더디 하십시오' 제가 국제 정세에 대한 설교를 한다면 이 시점에서 저의 한 가지 주된 논평은 이것이 되겠습니다. 즉 오늘의 국제 사회에는 너무 토론이 많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다른 나라에 대해 항상 악담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불친절하고 불쾌한 일들을 말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전쟁을 계획할 수는 있습니다. 여러분이 평화를 계획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토론을 중단하십시오. 평화를 이루는 첫걸음 하나는 말하지 말아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아는데 있습니다.

 다음으로 말씀드리려는 것은, 어떤 상황을 놓고 보든지 그것을 항상 복음의 빛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쟁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 직면할 때에는 말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 상황을 받아들여 복음의 문맥에 비추어 이렇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이것에 함축된 의미는 무엇인가? 이 문제에 개입된 것은 나만이 아니다. 복음의 명분은 어떻게 될까? 교회는 어떻게 될까? 조직은 어떻게 되는가? 여기에 종속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교회밖에 있는 정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여러분은 화평을 만들기 시작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것을 사적인 의미로 생각하면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서 적용해 주기를 바라는 원칙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적극적인 자세가 되어 평화를 이룰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네 원수가 주리면 그에게 먹이라'는 성경의 힘찬 말씀을 기억합니다. 원수가 여러분에게 무서운 말을 한다고 합시다. 자, 여러분은 그에게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혀를 억제하였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나는 그것이 그의 속에 있는 마귀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대꾸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그를 불쌍히 여겨,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고 그가 사탄에게 속고 있음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둘째 단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단계 이상 나아가야 합니다. 그는 배가 고프며, 여러 가지로 그에게 잘못된 일들이 많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그를 구해줄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자신을 낮추어 다른 사람에게 접근해야 한다는 뜻일 때도 있습니다. 그에게 말하고, 사과하고, 친절하려 애쓰고, 화평을 가져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선수를 써야 합니다.

 실제적인 면에서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화평자로서 우리가 어디에 있든 그곳에서 화평을 보급시키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기심 없이, 사랑스럽게,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접근할 수 있을 만하고, 우리의 권위를 세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아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은 '나도  저 사람에게 접근할 수 있다. 나는 동정을 얻게 될 것으로 안다'는 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이 됨으로써 모든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고, 무정한 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도 우리를 볼 때 정죄감을 느낄 수 있게 합시다. 그러면 그들 자신과 그들의 문제에 대하여 우리에게 터놓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상 말씀드린 것을 간추려 보겠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선언된 축복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 받으리라'입니다. 일컬음 받는다는 것은 '소유된다'는 뜻입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소유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들을 소유할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자녀로 소유하시려 합니다. 이 말씀은 화평자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아버지를 닮았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성격에 대한 가장 영광스런 정의 하나는 '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화의 하나님'(히 13:20)이란 말씀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평화의 하나님'이란 말씀을 두 번 말했고 그의 독자들이 하나님의 주시는 평화를 받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강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어째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들어오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속성에 있어 거룩하시며 공의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절대적이시지만, 평화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까닭이 이러합니다. 전쟁은 어디서 옵니까? 인간, 죄, 사탄에게서 옵니다. 불화가 이렇게 해서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평화의 하나님께서는 경외하는 마음으로 말씀드리지만 '위엄을 지키시거나 점잔을 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그분이 무언가를 먼저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이 화평을 이루시기 위해 자기 아들 속에서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소위가 이러합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신 일의 반복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자기 권리와 체면을 세우셨다면 우리와 함께 온 인류는 지옥과 절대 파멸에 보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것은 그가 평화의 하나님이시며, 이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화평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닮는 것을 말합니다. 그가 '평화의 왕'이라 일컬음 받은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가 평화의 왕으로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아십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시지 않고 오하려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그가 오실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가 오신 것은 그가 평화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화평을 이루셨습니까?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그의 아들의 십자가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과 화평하며, 우리 마음속에 평안을 누리며, 서로 화평하기 위해 자기 몸을 주셨습니다. 에베소 2장의 저 영광스런 진술을 예로 들어 봅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그는 유대 사람과 이 방 사람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허시고 둘을 하나로 만드시고 서로 원수된 것을 자기 몸으로 해소시키신 분입니다. 그는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기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을 자기 안에서 새 사람으로 만들어 화평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것을 빈틈없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성구를 이렇게 뒤에 말씀드린 것도 이런 까닭에서입니다. 다른 것은 모두 잊더라도 이 사실만은 잊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화평자'는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권리를 주장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신성과 영원성의 특권을 주장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이 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했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자기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마음을 품으시오,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각각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남의 일도 돌보아 주시오' 이것이 신약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여러분은 자아와 절교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시작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평화를 얻을 수 있기 위하여 그가 여러분을 위하여 죽으신 것을 여러분은 아십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이 평화를 가져야 함을 의욕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자아를 잊어버리고 자기를 낮추고 여러분은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욕을 당하셨으나 욕으로 갚으시지 않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복되고 영광스런 진리를 볼 수 있는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으며 우리를 평화의 왕을 닮은 자와 재생자로 만드시며 '평강의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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