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7년 1월 10일, 일재(一齋) 김병조(金秉祚, 1877-1950) 출생, “격고아한동포문(檄告我韓同胞文)”

1월 10일 “김병조(金秉祚), 조선인으로 왜놈의 관리된 자야 양심에 따라 스스로 반성하라.”
오늘은 일재(一齋) 김병조(金秉祚, 1877-1950) 목사가 태어난 날입니다. 1877년 1월 10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주면 봉명동에서 출생했습니다. 1909년에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된 선생은 1917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는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임시의정원 의원 등의 직임을 수행했습니다. 1923년부터는 만주에서 광복회 활동과 목회를, 1933년 귀국 후에는 신사참배 반대를 반대하며 정주군 묘두산 밑에서 은둔하였습니다. 광복 후 반공․반소․반탁운동을 전개하던 김병조는 체포되어 소련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3·1 운동에 참여하여, 선천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1929년에는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가하였다. 학교를 세워 청소년교육에 힘쓰는 한편, 『한족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사상의 앙양에 힘썼다. 광복 후에는 조만식(曺晩植) 등과 함께 조선민주당을 창설하여 반공활동을 하였고, 1946년 광복단을 조직하여 지하운동을 벌이다가, 소련군정에 체포되어 1947년 평양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시베리아에 유형당하여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에 『한국독립운동사략(韓國獨立運動史略)』, 『대동역사』등이 있다.[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서울: 소명출판, 2008), 544.]
김병조는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시대를 살았습니다. 다른 교역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동포에게 봉사했던 그는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총살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성도는 어그러진 정의를 보고 가슴아파하면서, 구부러진 것을 올곧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김병조는 두려움 없이 믿는 바를 실천했던 목사였습니다.
3․1운동이 발발하자 선생은……동포들의 만세시위 참여를 부추기는 “격고아한동포문(檄告我韓同胞文)”을 만들어 살포하였다. “슬프다. 우리팔도의 동포여! 깊은 잠에 빠져 있음을 크게 뉘우칠 지어다. 하늘의 모습을 우러러 보아라, 동방의 밝은 별이 이미 밝았다. 시국의 형편을 두루 살펴보아라, 집집마다 경종이 스스로 울리니 휘날리는 태극기는 제군들의 조국정신을 활발하게 하고, 열렬한 만세소리는 제군들의 일체 생명의 맥박을 다시 뛰게 하도다.” 식민지 지배하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만세시위운동에 동참함으로써 일제의 강압으로 끊어진 민족의 맥박을 다시 뛰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선생은 일제 관리로 근무하는 부일배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경고관헌문(警告官憲文)”을 발표하였다……“이르노니 너희 조선인으로 왜놈의 관리된 자야 양심에 따라 스스로 반성하라……의를 의지하고 일어선 2천만 민족이 모두 너희들을 쳐 죽일 생각임을 모르는가. 아니면 절개를 지키며 숨져 간 30만 충령이 이미 너희를 죽이기로 한 결정을 모르는가. 위로는 하늘이 두렵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이 부끄럽지 않느냐. 너희 할애비 너희 애비의 피가 과연 네 골수에 흐르고, 충이니 의이니 하는 마음이 아직도 네 마음속에 남았거든 북을 치고 공격할 때를 기다리지 말고 힘을 내어 무기를 거꾸로 들고 돌이켜 길을 바꿈으로써 크게 후회하는데 이르지 않도록 하여라.”[http://www.mpva.go.kr/narasarang/month_hero_view.asp…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3월의 독립운동가 홍보자료, “일재(一齋) 김병조(金秉祚) 선생” 2015년 1월 10일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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