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번연 (John Bunyan, 1628-1688)
[천로역정]의 작가로 잘 알려져 있는 존 번연은 1628년 영국의 베드포드 근방의 엘스토우에서 가난하고 비천한 땜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6세에 군에 입대하고 20세에 고아 출신인, 훗날 눈먼 딸과 세 아이를 두고 사별한 첫 번째 아내와 결혼하게 된다. 이후 그의 아내가 결혼 지참물로 가지고 온 두 권의 서적(아더 덴트의 ‘보통 사람이 천국으로 가는 길’과 루이스 베일리의 ‘경건의 연습’)이 그의 삶의 행로를 변화시키는 커다란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 무렵 그에게 또 다른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베드포드교회의 목사인 존 기포드의 목회였다. 그리하여 그는 베드포드로 이주, 1655년 설교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해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1660년 두 번째 아내인 엘리자벳을 맞는다. 1656년에는 번연의 첫 번째 저서인‘Some Gospel-Truths Opend'가 출간되었다. 1660년 11월 그는 불법 집회 및 설교 혐의로 투옥되어 1672년까지 12년 동안 수감되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몇권의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의 영적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Grace Abounding to the chief sinner’가 그때 저술된 책이다. 1672년 1월, 베드포드교회가 그를 목사로 초빙하였고, 그해 3월 그는 방면되었다. 같은 해 5월 찰스 2세의 관용론에 의거, 그는 설교자로서의 정식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1675년 그는 또 다시 설교건으로 6개월간 투옥되었는데, 이때 기독교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천로역정’을 집필하였다. 그후 그는 60여권에 달하는 책들을 저술하였다. 설교자이자, 복음전파자, 목회자로서 헌신 봉사하면서도 일생을 통해 수많은 역작을 저술한 존 번연은 1688년 8월, 런던으로 가던 중 심한 비를 맞고 열병에 걸려 런던의 한 친구집에서 치료를 받다가 영면에 들었다.
* 저서 [천로역정] -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하늘가는 마부] - 도서출판 세복
[상한 심령으로 서라] - 지평서원
[경외함의 진수] - 지평서원
[하늘 문을 여는 기도] - 작은행복
[존 번연의 기도] - 생명의말씀사
존 번연의 생애
* 저서 [천로역정] -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하늘가는 마부] - 도서출판 세복
[상한 심령으로 서라] - 지평서원
[경외함의 진수] - 지평서원
[하늘 문을 여는 기도] - 작은행복
[존 번연의 기도] - 생명의말씀사
존 번연의 생애
존 번연은 1628년 11월 영국의 농경 지대 베드퍼드(Bedford) 근교인 엘스토(Elstow)에서 태어났다. 성인이 되었을 때 “그는 외모상 키가 크고 뼈대가 튼튼한 사람이었지만 살은 찌지 않았고, 반짝거리는 눈에 비교적 좋은 혈색을 하고 있었다.
또한 고대 영국의 유행을 좇아 윗입술 부분까지 그의 머리를 늘어뜨렸다. 그의 머리는 불그스레한 갈색이었는데, 생애 후반기에는 나이가 들어 회색으로 변했다. 그의 코는 잘생겼으며 구부러지거나 비뚤어지지 않았고 입은 좀 컸으며 앞이마는 약간 넓었다.”
번연의 아버지 토머스 번연은 떠돌이 땜장이여서 자녀들에게 충분한 교육을 시킬 능력이 없었다. 번연은 겨우 읽고 쓰는 것을 문법 학교에서 배운 후 일찍 아버지의 직업을 전수받았다.
번연은 소년 시절을 엘스토 농경지 소작농의 아이들과 어울리며 보냈다. 그는 감수성이 뛰어났으며 비록 정규 대학 공부를 하지는 못했지만 독서열이 대단하였다.
번연은 케임브리지 근처 스타워브리지(Stourbridge)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책들을 닥치는 대로 구해 읽었다. 햄프턴의 베비스(Bevis of Hampton)나 그리스도교의 7용사 같은 모험담이 주제가 된 책들을 통해 번연은 풍부한 상상력을 길렀다.
이 외에도 번연은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목판본으로 출판된 존 폭스의 순교자 열전(Book of Martyrs), 쉬운 말로 된 설교집, 일상의 도덕적인 대화록, 하나님께 나아가는 감상적인 판단과 행위를 다루는 책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흠정역 성경을 탐독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책들에서 번연은 영웅 심리, 인문주의적 로맨스 그리고 영국 민담과 전승이 주는 시민의 일상 생활을 접할 수 있었다.
번연은 부모를 따라 영국 성공회에 출석했으며, 9세 때 죄 때문에 고통당하는 영혼의 자각이 있었다. 번연은 이 상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주님에게 큰 잘못을 범했으므로 나의 어린 시절에도 주님은 무서운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고 겁을 먹게 하셨으며, 두려운 환상을 통해 나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셨다.
즉, 나는 종종 죄 가운데서 나날을 보낸 후 잠자리에 들었을 때 악령들에 대한 불안으로 아주 큰 고통을 맛보았던 것이다······
내가 9세나 10세의 어린 아이였을 때 이러한 생각들이 내 영혼에 큰 고통을 주었으므로, 그때 나는 많은 오락과 유치하고 보잘것없는 일들을 즐기고 나의 헛된 동무들과 어울리면서도 종종 심하게 낙담이 되었고 그로 인하여 극심한 괴로움을 맛보았다. ]
번연의 감수성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1644년 곧 번연이 16세일 때 어머니가 6월에 돌아가셨고, 7월에는 누이동생 마거릿이 죽었다. 8월에 아버지는 새 어머니를 데려왔다. 이 일련의 처참한 상황에서 번연의 감수성은 어떻게 표출되었는가? 번연의 전기 작가 해리슨은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감수성이 강한 소년[번연]이 광폭하게 되었다는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번연은 [동네] 청소년들의 선동가가 되었고, 불경건하고 못된 짓을 하는 데 있어서 골목 대장이 되었다.]
1644년 11월 우리는 번연이 뉴포트 파그넬(Newport Pagnell) 의회군 수비대의 보충병으로 일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의회군은 청교도 지도자 크롬웰을 중심으로 영국 왕 찰스 1세에 대항하고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번연은 가정을 떠나 내란의 한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위직 보충병의 지위에 있었던 번연에게 어떤 특별한 임무가 부여된 것 같지는 않다. 번연은 1647년 7월까지 의회군에 있었으나 오직 한번 레스터셔 포위 공격 중 옆에 있던 동료가 총에 맞는 사건을 제외하곤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았다.
3년의 군복무 중에 번연은 다양한 분파의 청교도 교리를 접할 수 있었고, 크롬웰의 신형군(New Model Army)이 가진 경건한 신앙 생활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크롬웰의 철기병대는 “전장에서나 막사에서나 고도로 엄격한 훈련을 실시했다······노름도 하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았으며” 촌락에 접근해도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 이때 받은 인상들이 후에 거룩한 전쟁(The Holy War)에 표현된다.
제대 후 번연은 마리아라고 하는 매우 경건한 여성과 결혼했다(1649). 그녀는 결혼 혼수감으로 접시나 숟가락 같은 가정 용품 대신 번연에게 큰 영향을 줄 두 권의 책을 가져왔다.
한 권은 아더 덴트(Arthur Dent)의 평범한 사람이 하늘에 이르는 좁은 길(The Plain Man’s Pathway to Heaven)이었고, 또 한 권은 루이스 베일리(Lewis Bayly)의 경건의 훈련(The Practice of Piety)이었다.
번연은 덴트의 글에서 쉽고 친숙한 격언을 가지고도 통렬한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또한 덴트와 베일리가 사용한 대화 형식의 글들이 아름다우나 예리하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도 알게 되었다. 번연이 천로 역정이나 다른 글에서 왜 대화체를 애용하게 되었는가를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겠다.
마리아와의 결혼은 번연에게 영적 성장을 가져왔다. 마리아는 거친 남성인 번연을 조용한 인내와 섬김으로 품었다. 번연에게 말싸움을 걸기보다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약점을 스스로 깨닫게 도왔다.
예를 들면, 마리아의 아버지(번연에게는 장인)의 신앙 생활에서 그녀가 어떻게 은혜를 받았는가를 이야기하는 식으로 번연을 부드럽게 충고하였다.
번연의 신앙 성장은 결혼 후 약 5년 동안(1650-55)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즐기던 춤, 종치기, 운동 경기와 같은 오락들을 서서히 포기하였다.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도 이 시기에 읽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죽고 사망 권세의 두려움에서 빠져 나오는 비밀도 깨닫기 시작했다.
번연의 일생에 금을 그을 중요한 영적 선생인 존 기퍼드(John Gifford) 목사도 이때 알게 되었다. 기퍼드는 의사였고, 한때 왕당파 군의 소령이었다가 1650년 개종하여 침례교 목사가 되었다.
기퍼드는 번연에게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구원의 확신을 심어 주었다. 칭의는 그리스도를 단순히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며 그리스도 밖에서 어떤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기퍼드의 성경 강해로 인해 번연은 광명의 길로 들어섰다. 후에 번연은 은혜의 교리를 이렇게 정의했다.
[자기의 선행으로써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그럴 때 그들은 은혜로써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행위로써 구원받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행위와 은혜는 이 문제에 있어서······서로 상반된다. 만약 [우리]가 행위로써 구원을 받는다면 은혜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교리를 연구하라.
당신이 이 약 저 약을 써 보지만 치료되지 않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다면, 치료를 위하여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약에 대하여 알아보는 일이다.
이것은 우리의 문제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라고 확신한다. 우리의 상처받은 양심을 치료하기 위한 최초의 조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특별히 그의 시선에 있는 저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는 것에 대하여 아는 일이다.
상처받은 양심 아래 사는 사람은 자연히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게 되며, 그가 마땅히 행하여야 하는 그 행위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만족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말씀에 이르기를,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고 하셨다. 그러므로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배워야만 한다. 마음을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다운 것이다.]
1653년 번연은 기퍼드의 성 요한 교회에 정규 회원으로 가입했다. 1655년 번연은 엘스토에서 베드퍼드로 이주했고 평신도 설교자로 봉사했다. 이때 건강이 나빴던 마리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기퍼드가 죽은 후 번연은 더 한층 설교할 기회가 많아졌다. 그러나 1660년 찰스 2세의 왕정 복고로 청교도 전성 시대가 끝나 가고 있었다. 찰스는 성공회를 영국의 유일한 교회로 복귀시키고 비국교도 성직자들을 교회에서 축출하였다. 크롬웰 치세에 사용했던 베드퍼드 성 요한 침례 교회는 다시 성공회의 교회가 되었다.
번연같이 비국교도이고 아울러 성직을 받지 못한 자로서 설교한다는 것은 국법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 되었다. 설교 금지령을 위반한 번연은 12년 동안(1660-72)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
감옥에 들어가기 1년 전 번연은 엘리자베스를 새 아내로 맞이했다. 엘리자베스는 총명하고 용기 있는 여성이었으며 번연을 구하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항소하였다. 그녀의 항소는 묵살되었다.
번연의 오랜 수감 생활은 상당히 자유스러운 것이었으며 때로는 밖으로 가족이나 친구를 만나러 나갈 수도 있었다. 우리는 번연의 수감 생활이 융통성 있는 것임을 한 간수와 번연 사이의 일화에서 볼 수 있다.
[번연이 종종 감옥 밖으로 나간다는 사실이 런던에 있는 번연의 박해자들 중 몇몇 사람에게 알려졌기 때문에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해 간수와 이야기할 관리를 내려 보냈다······번연은 그때 그의 가족과 함께 집에 있었는데 마음이 불안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내에게 말하기를, 비록 간수가 다음날 아침까지 집에 머물 수 있는 자유를 주었지만 왠지 불안하므로 즉시 돌아가야 겠다고 했다. 번연은 감옥으로 돌아갔고, 간수는 그렇게 좋지 않은 시간에 번연이 돌아온 것에 대해 싫은 소리를 했다.
이른 아침에 그 관리가 도착했고, 그는 간수에게 물었다. “모든 죄수들이 잘 수감되어 있는가?” “그렇습니다.” “존 번연도 안전하게 수감되어 있는가?” “그렇습니다.” “그를 봤으면 한다.” 번연은 불려 나왔고 그래서 만사가 잘 해결되었다.
그 관리가 돌아간 후 간수는 번연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당신은 당신이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때에 다시 나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언제 돌아와야 하는지를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까요.” ]
번연은 양심수로서 심지어는 일부 간수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옥중에서 번연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였다. 그의 육체는 감금당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딤후 2:9). 그는 감옥에서 60여 명의 양심수들에게 소망과 위로의 말씀을 전해 주었다.
또 한편 자신과 가족의 생활을 위해 장식이 달린 레이스(long Tagg’d laces)를 뜨기도 했다.
1672년 3월 찰스 2세는 비국교도들에 대한 종교 관용을 선포하였다. 동년 5월 번연은 석방되었다. 출감 즉시 번연은 베드퍼드의 비국교도 침례교회 목사로 임직되었다.
1676년 다시 비국교도 박해가 시작되어 번연은 6개월 간 짧은 투옥을 당하는데, 이때 천로 역정 전반부를 쓴 것으로 생각되고, 후반부는 1684년에 완성하였다. 천로 역정에 버금가는 대작 거룩한 전쟁은 1682년에 썼다.
번연의 천로 역정은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이것 때문에 그의 유명세는 높아만 갔다. 영국 왕 제임스 2세는 번연을 비국교도 진영에서 빼내려고 관직을 제의하는 등 여러 모양의 회유를 시도했으나 번연의 지혜로운 저항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번연은 유명해졌지만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켰다. 1688년 8월 31일 번연은 재산 상속 관계 때문에 생긴 어떤 부자간의 갈등을 화해시키러 런던에 갔다가 심한 비를 맞고 열병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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