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6일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 출생,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1월 26일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 출생
오늘은 우리나라를 사랑했던 선교사 헐버트가 태어난 날입니다. 1863년 1월 26일, 헐버트는 미국 버몬트 주 뉴헤이번에서 목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다트머스 대학과 유니언 신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1886년 7월 4일에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교사 자격으로 내한하였습니다. 육영공원은 우리나라 최초로 설립된 서양식 학교입니다. 헐버트는 이후 20년 동안 우리나라를 위해 여러 모로 봉사했습니다. 그는 조선이 살 길은 교육 밖에 없음을 강조했습니다. 헐버트는 한글이 세계 어느 문자보다도 간단하고 음운을 폭넓게 표기할 수 있음을 깨닫고는 한글 보급에 힘썼습니다. 서재필과 함께 한글로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한글 교과서를 최초로 집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한글학자 주시경을 육성한 이가 헐버트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헐버트는 주시경과 함께 한글의 문법과 맞춤법을 연구하였습니다.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을 악보화한 사람도 벽안(碧眼)의 선교사 헐버트였습니다. 1907년에는 고종의 특사로 미국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렸습니다. 곧이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파견되었으나,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미국으로 추방되고 맙니다. 86세의 헐버트는 1949년에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들이면서 이러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그는 한국 땅을 다시 밟은 지 일주일 만에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소천하였습니다.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힌 헐버트는 진정 한국을 사랑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헐버트는 남의 집에 초대 받아 하인과 함께 갔을 때는 자기 밥을 남겨서라도 항상 밥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는 하인들이 충분히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헐버트의 인간애가 알려지자 당시 외국인들 집에서 일하는 하인들이 서로 헐버트 집에서 일하고 싶어 했을 정도였다.
일제에 의해 집이 헐리고 보상도 받지 못한 어느 부인이 헐버트에 대한 소문을 듣고 태어난 지 3일밖에 안된 아이를 헐버트의 집 앞에 놓고 갔다. 헐버트는 이 아이를 거두었다. 그는 이러한 비극적 현실이 너무 슬퍼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록에 적었다.[김동진, 『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 (서울: 참좋은친구, 2010), 399-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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