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1일 느헤미야 9장 “주님 앞에 오래 마주앉아”

1월 31일 느헤미야 9장 “주님 앞에 오래 마주앉아”

“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느헤미야 9:3)

에스라의 설교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합니다. 그들은 금식하고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썼습니다. 성령께서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음악으로 사람들의 심리를 조정하지 않았습니다. 설교자가 청중들의 의지를 강압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자원하여 허물을 자복했습니다.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부름 받은 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로 결단합니다. 자기들의 죄뿐 아니라 조상들의 허물도 회개합니다.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말씀을 선포하자,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도 이러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사도행전 2:37)

그런데 이들의 반응 중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에스라의 회중들은 제자리에 서서 낮 사분의 일을 하나님의 말씀 읽는데 썼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1시간 이상의 설교에 집중할 수 있을까요? 매우 드물 것입니다. 그것도 서서 들을 수 있을까요? 좌석이 너무 편해서 조는 문제가 발생하는 요즘이 아닙니까? 그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남은 낮 시간의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는 데 썼습니다. 기도의 질이 기도의 시간보다 중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를 핑계로 기도시간 단축하는 일을 정당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선배들은 집중하여 오래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에스라의 설교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긴 시간 자복하며 기도한 것이 기록된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는 목적이 있지 않을까요? 길을 걸으며, 업무를 보면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복된 기도의 형태입니다. 그러나 기도 자체에 긴 시간 집중하는 것은 타협할 수 없는, 복된 성도의 삶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1743년 11월 3일 목요일에 기록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보면, 기도에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은밀한 금식과 기도로 보냈다. 아침 일찍 드린 기도시간에 도움을 받았다……아브라함의 믿음을 보고 마음이 녹았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했으며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했는지, 이 세상에서 어떻게 나그네의 삶을 살았는지를 볼 수 있었다. 그 후에 요셉의 고난과 하나님이 그에게 베푸신 선하심에 대해 읽었다. 믿음과 인내의 본을 보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기도하는 가운데 영혼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열정적으로 나 자신과 동역자들, 교회를 위해 기도했다. 어느 때보다도 영혼의 회심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싶은 뜨거운 갈망을 느꼈다. 금식과 기도의 시간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분의 선하심이 항상 나와 함께하시기를! 내 영혼을 항상 그분께로 가까이 이끄시기를![Jonathan Edwards ed., Diary & Journal of David Brainerd, 원광역 역,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 (서울: 복있는사람, 2008), 217-19.]

기도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지혜를 동원해야 하겠습니다. 설교를 듣고 기도로 소화하지 않으면 실천은 요원한 일이 됩니다. 하나님이여, 주님 앞에 오래 마주앉아 기도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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