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5일 느헤미야 3장 “해서는 안 될 일”
“해서는 안 될 일”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들의 주인들의 공사를 분담하지 아니하였으며”(느헤미야 3:5)
느헤미야 3장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그 다음은”(Next to)일 것입니다. 이 말이 3장에 28번이나 나옵니다. 성벽재건공사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모두 협력하여 자기 몫을 감당해야 완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얌체 같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귀족들은 공사를 분담하지 않았습니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섬겨야 하건만 이들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수수방관하고 있습니다. 게으름과 책임회피는 하나님 나라에서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에서 구원받아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의 특징은 팔을 걷어붙이는 섬김이어야 합니다.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 받아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the kingdom of His beloved Son)로 옮기운 사람은 기쁘게 벽돌을 굽고 한 장씩 쌓아올립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43-44)
각자의 의무를 도외시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교회 안에 있습니다. 식료품점이나 백화점을 드나들 듯 종교를 소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고통 받고 억압 받는 바다 건너 형제들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합니다. 우리 신앙공동체에는 이런 일이 없으리라고 단정 짓지 맙시다. 느헤미야 시대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떠받든 사람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모두 꽁무니를 빼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언약이라는 사랑의 끈으로 매고 기꺼이 자신의 자리를 지킨 예수님은 얼마나 아름다우신지요! 예수님은 자신의 대속사역을 천사나 의인에게 떠넘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실 수도 없었지요.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묵묵히 지는 것은 지체된 형제를 돕는 일이요, 교회 전체를 위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절대 뒤로 물러나지 않겠다고 결심합시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는 결연한 기도와 다짐이 필요합니다.
다음 원리는,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어떤 절대율(絶對律)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절대 생각할 수도, 행할 수도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우리가 해서는 안 될 일들에 대한 목록을 작성해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결코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오늘날과 같이 이혼이 증가하는 것도 바로 이 원리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서슴없이 주장하는 바입니다. 두 사람이 결혼식을 통하여 하나님과 여러 사람들 앞에서 엄숙하게 서약하고 선서하는 것은, 자기들이 다시는 뒤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뒷문에 절대로 열리지 않는 자물통을 채워 놓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결혼하고 나서 그들을 나누는 뒷문을 그냥 열어 놓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고개를 뒤로 돌리고 있습니다. 결혼 서약을 하기도 전에 이혼에 대한 생각이 들어와도 그것을 그저 방치해 두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모습이 이러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자기의 절대율이 없습니다. 전에는 그러한 일을 절대로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D. M. Lloyd-Jones, Faith on Trial, 서문강 역, 『믿음의 시련』 (서울: 지평서원, 2009), 62-63]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들의 주인들의 공사를 분담하지 아니하였으며”(느헤미야 3:5)
느헤미야 3장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그 다음은”(Next to)일 것입니다. 이 말이 3장에 28번이나 나옵니다. 성벽재건공사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모두 협력하여 자기 몫을 감당해야 완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얌체 같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귀족들은 공사를 분담하지 않았습니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섬겨야 하건만 이들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수수방관하고 있습니다. 게으름과 책임회피는 하나님 나라에서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에서 구원받아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의 특징은 팔을 걷어붙이는 섬김이어야 합니다.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 받아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the kingdom of His beloved Son)로 옮기운 사람은 기쁘게 벽돌을 굽고 한 장씩 쌓아올립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43-44)
각자의 의무를 도외시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교회 안에 있습니다. 식료품점이나 백화점을 드나들 듯 종교를 소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고통 받고 억압 받는 바다 건너 형제들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합니다. 우리 신앙공동체에는 이런 일이 없으리라고 단정 짓지 맙시다. 느헤미야 시대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떠받든 사람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모두 꽁무니를 빼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언약이라는 사랑의 끈으로 매고 기꺼이 자신의 자리를 지킨 예수님은 얼마나 아름다우신지요! 예수님은 자신의 대속사역을 천사나 의인에게 떠넘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실 수도 없었지요.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묵묵히 지는 것은 지체된 형제를 돕는 일이요, 교회 전체를 위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절대 뒤로 물러나지 않겠다고 결심합시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는 결연한 기도와 다짐이 필요합니다.
다음 원리는,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어떤 절대율(絶對律)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절대 생각할 수도, 행할 수도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우리가 해서는 안 될 일들에 대한 목록을 작성해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결코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오늘날과 같이 이혼이 증가하는 것도 바로 이 원리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서슴없이 주장하는 바입니다. 두 사람이 결혼식을 통하여 하나님과 여러 사람들 앞에서 엄숙하게 서약하고 선서하는 것은, 자기들이 다시는 뒤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뒷문에 절대로 열리지 않는 자물통을 채워 놓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결혼하고 나서 그들을 나누는 뒷문을 그냥 열어 놓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고개를 뒤로 돌리고 있습니다. 결혼 서약을 하기도 전에 이혼에 대한 생각이 들어와도 그것을 그저 방치해 두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모습이 이러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자기의 절대율이 없습니다. 전에는 그러한 일을 절대로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D. M. Lloyd-Jones, Faith on Trial, 서문강 역, 『믿음의 시련』 (서울: 지평서원, 2009), 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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