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9일 “옴니버스 하우스”

오늘은 베어드(William M. Baird, 1862-1931)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도착한 날입니다. 1891년 1월 29일, 베어드는 아내 애니 애덤스(Annie Adams)와 함께 부산에 발을 디뎠습니다. 베어드(우리말 이름 배위량[裵偉良])는 미국 인디애나 주에서 태어나 하노버 대학(Hanover College)과 맥코믹 신학교(McCormick Seminary)에서 공부했습니다. 결...혼 후 북장로교 선교본부의 요청을 받아 중국 선교에 대한 꿈을 접고 부산 지방 선교사로 일할 것을 결정합니다. 1890년 12월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한 베어드는 요코하마, 고베,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에 도착하였습니다.

베어드는 한국에 건너와 40여 년 동안 이 땅의 복음전도와 문명계도를 위해 헌신해 왔다. 1891년 1월 29일 부인과 함께 일본을 거쳐 부산에 도착한 후, 부산, 대구, 평양에서 전국을 순회여행하면서 선교와 교육에 헌신해왔다. 부산에서 선교지부를 조직하고 다시 대구 선교지부를 옮겨 개척하였고, 서울에서 1년 사역한 뒤, 1897년 평양에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교육선교사역에 투신하였다. 1897년에는 숭실대학전신인 평양학당을 설립하여 한국에서 근대대학 교육을 개척하였고, 성서, 교리서를 서술하여 기독교 문서출판에도 공헌하였다.[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베어드와 한국선교』 (서울: 숭실대학교출판부, 2009), 98.]

29세의 선교사 베어드는 만 4년 동안 부산에서 선교활동을 벌였습니다. 당시 부산(약 2만 명)에서의 개척사역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서상륜, 서경조 등의 한국인과 함께 순회전도여행에 힘썼습니다. 구경꾼들이 욕하고 놀려대는 어려움이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베어드 부부는 학교를 설립하여 소년들에게 한문과 우리말, 지리와 산수 등을 가르쳤습니다. 학비가 없었고, 매일 예배하며 성경을 공부하는 학교였습니다. 베어드는 1894년 부산지방 최초로 우리나라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하지만 구도자들과 회심자들을 얻은 지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베어드 부부는 사랑하는 첫 딸을 잃는 슬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베어드는 자신의 집을 전도를 위해 개방했습니다. 사생활을 보호받고 싶어 하는 요즘,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기꺼이 방문을 열어놓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또한 베어드가 우리나라 사람에게 맞는 전도법을 개발한 것처럼, 우리도 복음전도를 위해 모든 방법을 지혜롭게 동원해야 하겠습니다.

사랑방 전도는 베어드의 독특한 전도방식이었고, 그의 선교관 건축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베어드는 한국생활을 통해 남성들의 대화와 교제 공간으로서 사랑(舍廊)방의 기능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가족이 거주하는 본체와 함께 사랑채를 짓고 그곳을 개방하여 누구든지 자유롭게 모일 수 있는 공간으로 개방하였다. 이곳을 베어드는 ‘옴니버스 하우스’(Omnibus house)라고 불렀다……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이국인의 삶은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 베어드는 사랑에서 한국인과의 접촉의 폭을 확대해 갔다. 이곳에서 예배, 기도모임, 주일예배가 드려졌고, 기독교 문서를 번역하기도 했고, 또 방문자들에게 기독교 문서를 배포하기도 했다.[유영식, “제임스 게일의 삶과 선교”, 『부산의 첫 선교사들』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7), 2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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