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12월 22일, 사무엘 무어(Moore, Samuel Forman) 별세, "선교와 사회개혁"

12월 22일

“소 울음소리 모(牟)”

오늘은 우리나라 백정(白丁) 해방운동의 지도자 사무엘 무어(Moore, Samuel Forman, 한국이름 : 모삼열) 선교사가 별세한 날입니다. 무어 선교사는 장티푸스에 걸려 치료받던 중 1906년 12월 22일에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14년 동안의 선교사역을 마친 46세의 선교사는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그는 무디의 부흥운동을 통하여 은혜를 받고 선교사로 헌신합니다. 무어는 시카고의 매코믹신학교를 졸업한 후 북장로교 선교사가 되어 부인(Rose Ely)과 함께 내한했습니다.

1892년에 한국에 온 무어(Samuel F. Moore, 1846-1906)의 한국 이름은 모삼열(牟三悅)이었다. 소 울음소리 모(牟)자를 쓴 이유는 백정들의 애환과 고난을 자신의 삶 안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무어는 1893년 지금의 조선호텔과 롯데호텔 중간쯤에 있었던 곤당골에다 교회를 열고 곤당골교회라 이름을 지었는데, 이는 장로교회로서는 두 번째 교회였다.[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3: 아관파천에서 하와이 이민까지』 (서울: 인물과사상사, 2007), 216.]

당시 우리나라에는 약 3만 여명의 백정이 있었습니다. 천민 중의 천민이었던 백정들은 호적도 없이 사람대접을 살지 못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백정 마을에 살던 박성춘(朴成春)이 중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무어가 운영하던 예수교 학당에 다니던 봉출이가 그의 아들이었습니다. 무어는 고종의 시의(侍醫) 에비슨 선교사를 백정 마을로 데려가 박성춘이 치료받도록 해 주었습니다. 봉출이는 후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외과의사와 대학교수가 됩니다.

박성춘은 ‘은혜를 갚는 심정’으로 무어 선교사가 사역하던 교회에 나갔다. 그런데 그 교회는 양반 마을인 곤당골(지금의 소공동 롯데호텔 부근)에 있던 양반 교회였다. 그런 교회에 ‘백정’이 나왔으니 문제가 터질 것은 당연했다. 양반 교인들은 무어 목사에게 “어떻게 양반 교회에 백정이 나올 수 있느냐?”며 박성춘을 다른 교회에 보낼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무어 목사는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이 평등했다”며 그들의 요구를 일축했고 결국 양반 교인들은 홍문수골(광교 조흥은행 본점이 있던 자리 부근)에 따로 교회를 세우고 나갔다……그리고 3년 후, 교회를 합치자는 홍문수골 교인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탑골(지금의 인사동)에 새 예배당을 마련하였다. 이것이 지금의 인사동 승동교회의 출발이다.[이덕주, 『한국교회 처음 이야기』 (서울: 홍성사, 2006), 110-11.]

일부 선교사들은 무어의 가르침에 우려를 표했지만 무어는 굽히지 않았습니다. 박성춘은 무어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백정 해방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 결과 백정차별금지법이 공포되었고, 백정들은 갓과 망건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교와 사회개혁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은 억눌린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해 합법적으로 노력합니다. 하지만 순서가 중요합니다. 개혁이 혁명과 투쟁이 되지 않으려면 은혜가 필요합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사회의 모순이 해결될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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