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3년 1월 1일, 테어도르 운데어아익(Theodor Undereyck) 별세, "개혁파 경건주의 창시자"
1월 1일 “테어도르 운데어아익, 브레멘 경건주의의 아버지”
오늘은 테오도르 운데어아익(Theodor Undereyck, 1635-1693)이 별세한 날입니다. 1693년 1월 1일, 운데어아익은 브레멘(Bremen)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독일 알트슈타덴(Altstaden)에서 출생한 그는 채 2살이 되기 전에 부모를 잃었습니다. 운데어아익은 위트레흐트 대학교, 레이던 대학교에서 수학하며 스승 푸치우스와 코케이우스에게 영향을 받았고, 영국 청교도에게서 진정한 기독교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개혁파 경건주의 창시자로 불리는 그는 브렌멘에서 목회하며 경건모임을 힘있게 이끌었고, 학교설립에도 앞장섰습니다.
장소는 운데어아익 목사 자신의 사택이 제공되며, 참석자들은 전적인 자유의사로 참석여부를 결정하며, 남녀노소와 사회적 신분에 관계없이 참석할 수 있고, 참석자들의 교회소속 여부는 묻지 않으며, 경건 모임의 주된 목적은 성경을 보다 깊게 깨닫는데 있다고 설명하였다. 운데어아익은 성인 남자들과 같은 또래 젊은 남자들로 구성된 경건 모임을 위해 하루 세 시간씩 투자하고 있으며, 교리교육을 위해서는 하루에 한 시간 반을 할애하고, 주일 예배 후에도 정기적으로 경건 모임을 갖는다고 답하였다. 교재는 성경이며, 요한 서신들과 잠언서 등이 이미 함께 읽혀졌음을 답하였다. 정해진 성경 본문을 교독한 후 자신들이 중요하며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서로의 경건을 위해서 나누는 시간으로 진행한다……마지막으로 운데어아익이 이를 반복하고 정리한 후, 기도, 찬송 그리고 권면으로 마무리하였다. 또 다른 형식으로는 묻고 답하는 형식의 교리공부 식의 경건 모임도 실시하고 있었다.[주도홍, 『개혁교회 경건주의』 (서울: 대서, 2011), 225.]
운데어아익은 바른 지식을 추구하는 데에 우선권을 두었습니다. “브레멘 경건주의의 아버지” 운데어아익은 성도들의 무지가 부패한 삶으로 이어진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교회 안에 남아있던 사죄헌금을 없애기도 하였습니다. 운데어아익의 부인은 처녀들과 어린이들, 하인들을 위한 경건모임을 이끌며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운데어아익의 경건모임을 통해 오늘날 시행되는 제자훈련을 모습을 봅니다. 성도들이 경건한 삶을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은 교역자의 사명입니다. 설교와 경건훈련이 균형잡힌 교회를 꿈꿉니다.
운터라이크는 1660년에 뮐하임(Mulheim) 지역의 목사로 초빙되어 목회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는 회심에 관한 진지한 설교를 전하면서 화석화되어 버린 성도들의 신앙을 일깨우는 데에 전념했다. 그 이듬해부터는 교리문답을 가르치기 위한 모임을 시작하였는데, 이로써 그는 최초로 교회 안의 교회(Konventikel)를 시작한 경건주의자로 자리매김했다. 그 후 1668년에 그는 헤센 주에서 잠깐 동안 궁중목사로 일하다가 1670년에는 브레멘 성 마티니 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여 그가 사망한 1693년까지 목회에 전념하였다. 특히 그는 브레멘에 화란의 개혁주의 정신을 뿌리내리게 하는 데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훗날 운터라이크의 모든 사역은 그의 제자인 코넬리우스 드 하제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특히 운터라이크는 생존 당시 하제와 함께 교회의 자유와 장로회 정치 체제를 요청하고 불신자의 성찬 참여를 금지해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정성구, 『개혁주의 인명사전』 (서울: 총신대학교출판사, 2001), 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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