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3년 12월 25일, 토마스 카트라이트 (Thomas Cartwright, 1535-1603)의 마지막 설교
12월 25일
“20년의 유배, 3년의 투옥”
1603년 12월 25일, 토마스 카트라이트 (Thomas Cartwright, 1535-1603)는 마지막 설교를 전했습니다. 그가 택한 본문은 전도서 12장 7절이었습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이틀 후 카트라이트는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잉글랜드 장로교주의의 진정한 창시자였던 그는 죽음 직전까지 설교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1553년 에드워드 6세가 세상을 떠나고 메리 여왕이 등극하여 다시 로마 가톨릭으로 복귀하자 카트라이트는 대학을 떠났다. 1558년 메리 여왕이 죽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등극하자 다시 대학으로 돌아와서 공부를 마치고, 1560년 동 대학의 연구원이 되었다. 1563년에 캠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대학(Trinity College)으로 옮겨서 8명의 수석 연구원 중 하나가 되었으며, 1570년 동 대학의 신학교수가 되었다. 카트라이트는 자신의 강의 가운데 감독제도와 대주교 제도를 비판하고 세례시 십자가 사용은 미신적인 것이라고 지적하였고, 주일에 상업 행위를 하는 것은 위법이라고 말하였으며,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김홍만, 『청교도 열전』 (서울: 솔로몬, 2009), 59.]
대학의 부총장(vice-chancellor) 존 휘트기프트(John Whitgift)는 카트라이트를 면직시켰습니다. 그는 제네바에서 베자를 만나고 돌아와 “국회에 드리는 권고”(Admonition to the Parliament, for the Reformation of Church discipline)를 출판하며 개혁 작업을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불거진 휫트기프트와의 논쟁으로 인해 핍박을 당하게 되어 외국으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카트라이트는 덴마크 앤트워프(Antwerp)와 네덜란드 미들버그(Middleburg)에서 영국인들을 대상으로 목회하였습니다. 건강이 악화되어 1585년에 귀국한 카트라이트는 체포되어 투옥당한 후 풀려났지만, 설교를 금지당한 상태에서도 로마 가톨릭의 오류와 미신을 파헤치며 교회개혁을 위해 수고했습니다. 이로 인해 또다시 1년 이상을 투옥당한 그는 제임스 왕의 도움으로 석방된 후에도 계속 설교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청교도운동의 제 1세대였던 토마스 카트라이트는 역경 속에서도 성경이 말하는 바른 교회를 위해 분투했습니다. 그는 68년을 살면서 20년간은 대륙에서, 3년간은 감옥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고난 받고 있는지 돌아보기 원합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기 확신상으로는 장로교주의자였지만, 결코 국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오지는 않았다……카트라이트는 해외에서 겪었던 분리주의와 종파주의를 혐오하게 되었다. 그는 여전히 영국 국교회를 참 교회로 간주했으며, 1576년까지도 목회자는 비성경적인 불쾌한 의식들 때문에 자신의 목사직을 버려서는 안 되는데, 그 이유는 설교가 항상 예전이나 의식들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시종일관 그는 감독 체제에 호소하지 않는 방식으로의 지역 교회의 자율성과 더 넓은 관점에서 교회간의 가시적 연합의 필요성에 균형을 맞추고자 애썼다.[Joel R. Beeke and Randall J. Pederson, Meet the Puritans: With A Guide to Modern Reprints, 이상웅‧이한상 역, 『청교도를 만나다』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0), 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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