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g/Chn.Sub] 시편 4편 [우리말성경] Psalm 4 [내가 편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한 곳에 살게 하시는 분...
시편 4편
[개 요]
주제-이 시는 시 3편과 짝을 이루는 시이다. 시 3편을 "아침의 시"라고 한다면, 이 시는 "저녁의 시"라고 부를 수 있다. 저녁에 잠을 잘 때 8절이 성도들에게 안식을 주는 노래가 되기를 바란다:"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내 평안한 마음으로 안식하며
눈을 감고 잠을 자리니
주의 손이 나를 지키시며
내게 잠을 주심이니이다.
이 시의 머리말은 "다윗의 시,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다. 영장이란 성전에서 음악을 인도하는 책임자를 말한다. 이 사람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다음의 성경 구절을 참조하라:역대상 6: 31, 32; 15:16-22; 25:1, 7. 시편은 거룩한 노래이다. 시편을 사랑하는 자들은 이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흥미를 느낄 것이고, 성전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했는지에 대해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어떤 시편들은 성전에서 노래하는 자들의 이름을 따라 머리말을 붙였을 것이다.
"현악"이란 히브리어로 "네기노트"(twnygn)라고 하는데, 이는 하프나 심벌즈처럼 손으로만 연주하는 현악기나 손으로 다루는 악기를 말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넘치는 기쁨을 표현하고,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악기를 사용했다. 영적 세대에 사는 우리들도 영혼의 기쁨이 더욱 충만하며, 이것을 더 영적으로 표현하기를 바란다. 손으로 다루는 악기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이렇게 말했다:"여호와여, 나로 주께서 다루는 악기가 되게 하소서." 이제 성령의 손길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 노래를 부르자. 우리 안에 믿음과 사랑이 충만해서 살아 있는 악기가 되기를 바란다.
구성-이 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절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2-5절원수들에 대한 충고가 계속된다.
6-8절자신의 안전과 만족은 원수들의 가장 풍요로운 때보다도 더 좋다고 대조적으로 말한다.
이 시는 시 3편과 동일한 상황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며, 고난의 정원에서 꽃을 피운 아름다운 시이다. 다윗이 고난을 받았던 것은 또한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가 고난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이처럼 아름다운 믿음의 노래를 들어볼 수 없었을 것이다.
[강 해]
1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푸신 자비로운 구원을 근거로 현재 당하는 어려움에서 구원을 베푸실 것을 간구한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에벤에셀'을 돌아보고, 거기서 위안을 찾는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여섯번씩이나 구원을 베푸셨다면, 이제 일곱번째 당하는 어려움에서 우리를 버리실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시작했다가 중단하시는 일은 없다. 그분은 우리가 고난에서 벗어날 때까지, 우리를 돕는 일을 결코 중단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요단을 건너기까지, 매일 아침 '만나'는 내릴 것이다.
다윗은 사람을 향해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향해 말을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늘 대화를 나눈다면, 사람들을 향해서도 더 담대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 앞에 감히 서는 자는 사람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다.
1절. "내 의의 하나님이여." 다윗은 하나님을 "내 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이 구절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말씀은 "당신은 나로 하여금 의로운 일을 시작하게 하시고, 나를 지켜보시고, 이 일을 하도록 도와주시고, 심판자가 되시고, 내게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사람들이 나를 훼방하고 비방하오니 이 문제를 해결해 주소서"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 여기에 성도들이 본받을 지혜가 있다.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과 문제가 생겼을 때, 이 문제를 인간 재판관이 있는 법정으로 가져갈 것이 아니라 더 권위 있는 법정, 하늘에 계신 왕의 법정으로 가져가야 한다.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이 표현은 군대가 대적들에게 둘러싸여 압박을 받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하나님께서 대적들의 포위망을 깨뜨리시고 나를 높은 곳에 두셨다고 고백하는 말씀이다. 또한 이 구절을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다:"내가 슬픔과 탄식의 포로로 사로잡혔을 때에 하나님은 기쁨과 안위로 내 마음을 넓히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나의 위로자가 되신다.
"나를 긍휼히 여기사." 여호와여, 내가 죄를 범하였으므로 주께서 내 대적을 들어 나를 곤고케 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주의 자비를 내 피난처로 삼았사오니, 내 기도를 들으시고 종을 모든 고난 가운데서 구원하소서.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듯이, 또한 가장 선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야 한다. 죄인에 대한 용서뿐만 아니라 성도들을 구원하심도 모두 하늘에 계신 분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선물이다.
2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셀라)
1절에서는 기도의 골방에 대한 묘사가 있었으나, 이제 2절부터는 야전의 전투장으로 장면이 바뀐다. 하나님의 사람의 용기 있는 모습에 주의하라. 그는 원수들이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한다(여기서 "인생"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벤아담"<mdanb>인데, 이는 '사람의 아들'이란 뜻이고, '위대한 사람'을 지칭하기도 한다-역자 주). 그러나 다윗은 그들을 어리석은 자들로 생각하고서 마치 어린아이를 책망하듯이 책망하는 것이다. 그들은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한다. 그들은 거짓말을 지껄이고, 공허한 꿈을 꾸며, 악한 마음으로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2절. "어느 때까지." 다윗은 원수들에게 "어느 때까지?"라고 묻는다. 어느 때까지 그의 영광을 조롱하며, 그의 명예로 웃음거리를 삼겠느냐는 말이다. 왜 이처럼 못된 짓을 계속해야만 하느냐는 것이다. 그들이 주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조롱하고 억울하게 하여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아직도 모른단 말인가? 이처럼 못된 짓을 하다가 영혼이 지옥에 빠져 들기를 원한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급한 심판으로 그들의 웃음이 슬픈 울음으로 변하기를 바란다는 말인가?
"셀라." 그들이 추구하는 거짓 되고 헛된 일들을 상고하다가, 시편 기자는 엄숙하게 "셀라"를 삽입한다. 이 말은 잠시 쉬라는 뜻이다. 우리도 역시 이곳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어야 하겠다. 그리고 악인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잘못된 생각, 계속되는 악행, 그들에게 임할 파멸을 묵상해 보아야겠다. 하나님은 우리로 그들과 다른 사람이 되게 하셨다. 우리로 진리를 사랑하게 하시고, 의를 추구하며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께 찬양을 돌려야 하겠다.
3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3절. "알지어다." 바보들은 배우려 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계속해서 듣고 또 들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로 의인을 택하시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분해 놓으셨다'는 영적 진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교리는 아직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용납하기 어려운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영광스러운 진리이며, 성경적인 가르침이며, 고난받는 성도들을 위로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선택은 사람의 온전한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며, 이것 때문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는 정죄받지 않으며, 하나님은 그들의 눈물 어린 기도를 들어 주신다.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명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원수들이 우리의 영혼을 대항해 싸울 때, 그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원수들에게 알려야 한다.
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요, 하나님의 귀한 보물처럼 특별히 구별된 자라는 것을 기억하라.그리고 용기를 가지고 믿음의 기도를 더욱 열심히 드리라. 주야로 하나님께 울며 부르짖는 택하신 자를 하나님이 신원하여 주시지 않겠는가?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택하셨으니,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수 없는 것이다.
4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셀라)
4절.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교훈을 뒤바꾸어 놓는지 모른다. 그들은 범죄하고도 떨지 않는다. 아! 사람들이 이 교훈을 받고서, 그들 자신의 심중에 대화를 나누었으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그분의 자비를 무시하는 것은 그들의 사고가 빈약하기 때문이다. 아! 그들이 한 번이라도 악한 정욕을 억누르고 잠잠할 수 있다면! 그래서 잠잠히 그들의 과거를 돌아보고, 그들이 당할 운명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기만 한다면! 사고하는 사람이라면 죄악이 헛된 것이며 이 세상이 덧없음을 분명히 알 것이다.
서둘러 허둥대는 죄인들아, 그곳에 멈추어 서라. 마지막 발걸음을 움직이기 전에 그곳에 서라. 너의 침실로 들어가 너의 행한 길을 상고해 보라. 침대에 누워 교훈을 받고, 밤의 적막함 중에서 책망을 받으라! 네 영혼을 쓰레기처럼 버리지 말라. 네 이성의 소리를 들어 보라. 이 요란한 세상을 잠시 떠나, 네 불쌍한 영혼의 소리를 들어 보라. 네 운명이 영원한 파멸에 처하기 전에 너 자신의 운명을 생각해 보라. 셀라! 오, 죄인들아! 잠깐 멈추어서 내 시에 귀를 기울여 보라.
죄인들아, 네 마음은 안식을 얻었는가?
네 가슴에 두려움은 없는가?
죄책감에 괴로움도 없는가?
네 양심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세상이 네게 복을 내릴 수 있는가?
세상이 네 근심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가?
세상은 거짓 되고 헛된 것
세상에 임할 파멸을 생각하고 떨라!
오, 죄인들아, 네 종말을 생각해 보라
심판의 날이 이르고 있음을 알라
네 영혼은 그날 심판의 장소에 나타나리니
그곳에서 의로운 심판을 듣게 되리라.
슬픔과 탄식과 고독에 빠진 영혼이 있는가?
구세주의 피를 바라보라
그분만이 너를 온전케 하리니
날아가라 죄인들아, 예수께 날아가라!
5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
5절. 반역자들이 구원받기를 원했다면, "내가 무엇을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을 것이다. 5절에서는 이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을 보내 주셨다. 이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구세주이시다. 시편 기자는 "의의 제사"를 드리라고 했다. 그의 말에는 온전한 복음이 들어 있다. 오, 죄인들아! 갈보리 언덕에 있는 제물에게 피하라.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분을 의뢰하라. 사람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분은 여호와이시다.
6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6절에서 이 시의 세번째 부분이 시작된다. 시편 기자는 고난받는 자가 믿음으로 만족과 평안을 누리는 것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6절. "여러 사람의 말이." 다윗을 따르던 자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려 하기보다 보이는 것을 따라 살려고 했다. 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같이 살지 않는가! 중생한 영혼들까지도 때로는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부귀와 영화를 추구하지 않는가! 어두움이 그들에게 닥쳐서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가려 눈에 보이지 않게 되면, 탄식하며 슬퍼하지 않는가!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은 끊임없이 이렇게 말한다. 무엇에도 만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영혼들, 그들은 입을 벌리고 그들의 공허한 마음을 채우고자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그들은 공허한 마음을 채우고자 사기꾼의 속임수도 마시려 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 모든 일이 허사로 드러날 때, 그들은 절망하고 하늘에나 땅에나 선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선언한다.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그러나 진실된 성도는 이들과 매우 다르다. 그는 짐승처럼 땅을 바라보지 않고 천사처럼 위를 바라본다. 우상에 속한 더러운 우물에서 마시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오는 생명의 샘에서 마신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의 빛으로 만족한다. 이것이 그의 부요함이요 영광이며,그의 건강이고, 그가 바라는 바이며, 그의 평안이다. 그에게 이것을 줘 보라. 그는 다른 무엇을 더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며, 충만한 영광이다. 아! 우리 마음 가운데 성령이 더 충만히 임하셔서, 우리가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끊임없이 교제를 나눌 수 있다면!
7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7절.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회개하는 마음으로 한 시간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는 것이 평생 동안 이 세상이 주는 태양빛으로 만족하며 앉아 있는 것보다 낫다." 우리 마음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곡간의 곡식보다, 술통의 포도주보다 나은 분이시다. 곡식과 포도주는 이 땅에서 나는 열매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에서 나오는 빛은 하늘의 익은 곡식과도 같다. "주께서 나와 함께하시나이다"라는 고백이 "내 곡간이 가득 찼나이다"라는 말보다 훨씬 더 복된 말이다. 내 곡간이 모두 빈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미소를 보내신다면 내 복은 넘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세상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그분이 없다면 난 가련하고 가난한 자일 뿐이다.
이 구절은 의로운 자의 고백이다. 이 고백은 세상 사람들의 말과는 대조적이다. 우리가 하는 말은 우리의 성품을 드러내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어린아이에게 "네가 말을 해야 내가 알 것이 아니냐!"라고 했다. 종은 그 소리가 울릴 때에야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다. 새들도 그들의 노래로 그들의 특성을 나타내 보인다. 올빼미는 종달새의 지저귀는 노래를 부를 수 없다. 또한 뻐꾸기는 올빼미처럼 부엉부엉 노래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입으로 하는 말을 조심하자. 우리가 하는 말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기업에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것을 드러낸다면, 이는 슬픈 일이 아닌가!
8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8절.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아름다운 저녁의 시! 나는 두려움으로 서 있지 않고 누우리라. 세상의 번잡스러운 소리를 들으며 깨어 있지 않고 평안한 가운데 누워 자리니, 이는 내게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 거하는 자는 다른 커튼이 필요 없다. 여러 가지 건축 자재로 쌓은 벽보다도,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더 훌륭한 보호자가 되어 주신다. 솔로몬은 무장을 한 군인들이 지키는 침실에서 잤다. 그러나 다윗은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원수들의 추적을 받으면서 딱딱한 땅바닥에서 단잠을 잤다. 솔로몬이 다윗보다 더 깊은 잠을 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오직"이란 말에 유의하라. 하나님 그분만이 그를 지키는 분이시다. 하나님과 함께라면 세상에서 아무도 그와 함께하지 않아도 안전한 것이다. 조용한 양심은 좋은 친구이다. 우리가 잠을 이룰 수 없었던 날들을 돌아보라. 이날들은 우리의 마음에 평안이 없던 때가 아닌가? 믿음을 가진 자는 단잠을 잔다. 하나님의 약속처럼 부드러운 베개는 없으며, 그리스도처럼 우리에게 따뜻한 이불은 없다.
오, 주여! 우리로 당신을 의지하며 평안한 안식을 누리게 하소서. 다윗처럼 우리도 사는 날 동안 평안히 누워 잠자게 하소서. 그리고 때가 되면, 우리로 기쁨 가운데 죽음의 잠을 자게 하시고,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안식하게 하소서.
호커(Hawker) 박사는 이 시를 읽고서 묵상의 글을 남겼다. 이 글을 따라 우리도 기도하며 기뻐하자.
독자들이여! 이 시를 읽으면서 눈을 주님께 돌리자. 그분은 우리의 "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 예수는 우리의 의로우심"이라고 고백하며 속죄소로 나아가자. 이 세상의 사람들은 재물을 추구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사라져 가는 것들이다. 곡식과 포도주보다 무한히 더 나은 그분의 은총을 사모하자.
오, 주여! 당신의 은총이 생명보다 낫습니다.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또한 물질로 축복하시고 그들의 곡간을 채워 주십니다. 오!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당신은 당신을 위해 한 분을 구별하셨나이다. 당신이 구분하신 그분은 진정 아름답고 순결하십니다. 당신은 그분을 백성과의 언약으로 주시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그분 안에서 기뻐하시지 않았습니까? 오, 여호와여! 그렇다면 내 영혼도 그분 안에서 즐거워하게 하소서. 이제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여호와를 바라보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을 아나이다. 오, 여호와여! 내 마음이 확정되고 확정되었나이다. 예수는 내 소망이요 의가 되셨나니,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는 응답하시리이다. 이제부터 나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 예수의 사랑 가운데서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할 것입니다.우리 주님은 피곤한 자에게 쉼을 주시나니, 주께서 주시는 안식은 내 영혼을 새롭게 하나이다.
[주해와 설명들]
1절.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믿음이란 곤란한 지경에 빠진 자를 돕는 유창한 변사와도 같다. 믿음은 우리가 곤경에 빠졌을 때에 다음과 같이 우리를 교훈한다. 믿음은 하나님이 곧 응답하신다는 것을 말한다:“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믿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 하시고 사람에게 허락하신 영원한 의를 말한다:“내 의의 하나님이여.” 믿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을 위해 종의 의로움을 변호하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공의를 말한다:“내 의의 하나님이여.” 믿음은 과거에, 그리고 현재 당하는 고난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자비를 말한다:“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믿음은, 사람이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데에 반해서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분임을 말한다:“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데이비드 딕슨(David Dickson, 1653).
1절. “응답하소서.” 자연계와 세상 만물을 다 지으신 조물주는 헛된 일을 행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기도를 헛된 것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기도로 가장 위대하고 행복한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신다. 기도는 천국의 창고를 열고 보화를 가져오기 위한 열쇠와 같다. 기도는 원수들의 추잡하고 기분 나쁜 무기를 제거하고, 우리에게 가장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것을 가져오는 강력한 도구이다. 하늘과 땅도 간절한 기도를 드리기 위해 하늘을 향해 들린 손을 수종든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 하시는 말씀도 기도하는 자를 위한 것이다. 성경에서 모세와 여호수아의 이야기가 그 예를 보여준다. 야고보도 엘리야에 대해 말하면서 그도 우리처럼 연약한 존재로서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졌으나 기도의 놀라운 힘을 보여주었다고 했다(약 5:17). 안토니우스(Antonius)가 이끈 크리스천 군대도 기도하는 군대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 군대는 ‘천둥 군대’라는 별명을 얻었다. -로버트 레이턴(Robert Leighton, D.D., 글래스고의 감독, 1611-1684).
2절.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셀라).” 기도는 사람들의 난폭함과 불경건함을 뚫고 하늘 보좌에 도달한다. 간절한 기도는 강하고 큰 날개를 가져서 어떤 새들보다도 높이 날아 하늘 보좌에 닿으며, 기도하는 사람은 이 낮은 세상의 쾌락과 위험을 모두 떠난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거룩한 사람은 그가 간구하는 모든 것을 얻은 듯, 왕궁에서도 원수들을 담대하게 꾸짖는다. -로버트 레이턴.
2절.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우리 주님은 성전을 떠나 쉬시기 위해 여느 때처럼 베다니로 돌아가시면서 이 말씀을 하셨다. 그분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온 종일 훈계하셨으나 아무런 열매도 없었다. 이때 인용하신 이 시편의 말씀은 사람들을 보시며 안타까워하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분만의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분과 마음을 같이하는 성도들이 해야 할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배척한다. 성도들은 그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슬픈 마음으로 이 시편을 묵상해야 한다. 또한 이 세대와 오는 세대에서 여호와만으로 만족하며 이 노래를 불러야 한다. 이 세상에서 인생의 황혼을 맞이할 때에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며 믿음과 소망의 확신으로 이 노래를 불러야 한다.
아침 그림자가 사라지기까지
그분의 은혜 가운데 잠들겠네.
-앤드류 보나(Andrew A. Bonar, 1859).
2절. “허사를 좋아하고.” 죄를 사랑하는 자는 헛된 것을 사랑한다. 그들은 거품을 추구하고, 갈대를 의지하며, 거미집에 소망을 둔다. “허사”란 고대 색슨계 말로서 거짓을 말한다.
2절.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이것을 알고서 둘째 아들을 아벨이라 불렀는데, 이는 ‘헛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솔로몬은 이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서 그것들이 모두 헛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 설교를 두고 두고 반복했다:“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자와 같이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선포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것을 생각하면 슬픈 일이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하면서도, 이것들 외에는 다른 영광도 행복도 없는 것처럼 그들이 헛되다고 말하는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도 팔아 버리고, 하늘이나 그들의 영혼까지도 그들이 헛된 것이라고 말하는 지극히 작은 것과 바꾸어 버린다. 그들은 입으로는 헛된 것이라고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이것이 헛된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 이것이 그들의 면류관이나 되는 것처럼, 그들의 모든 영광이나 되는 것처럼 추구한다. 오! 해 아래 있는 이 모든 헛된 것들이 참으로 헛된 것임을 알라! 그래서 이것들을 밟아 버리고, 발등상으로 삼아 그리스도를 위해 일어나라.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거룩한 승리를 얻으라.
반달족(Vandals)의 왕 길레멕스(Gilemex)는 벨사리우스(Belsarius)에게 포로로 잡혀 가면서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외쳤다. 우리가 노예처럼 집착하는 이 모든 피조물들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변덕스럽고 불성실한 것인가! 사람이 겪는 고통을 그가 받은 보상과 비교하고, 그가 겪은 슬픔을 기쁨과 비교해 본다면, 사람이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서 이렇게 결론을 내릴 것이다:“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이렇게 말했다:“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한 곳으로 모으고, 커다란 산을 강대상으로 삼아 설교를 하며, 산에서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천사장의 소리만큼이나 큰 소리로 설교할 수 있다면, 나는 바로 이 시편의 말씀에서 이렇게 설교를 할 것이다:이제 죽어 갈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 -토머스 브룩스(Thomas Brooks, 1608-1680).
2절. “허사를 좋아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어떤 원칙을 따라 좋아하는 것을 결정한다. 마음속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나 영적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헛된 것도 마찬가지다. 헛된 사람들은 헛된 것들을 좋아한다. 철없는 아이들처럼 그들은 애들에게나 맞는 것들을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토머스 호턴(Thomas Horton, 1675).
3절.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실 때, 그분은 자신을 위해 택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분의 친구처럼, 동료처럼 대화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사람으로 기쁨을 삼고자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살려면 무엇보다도 우리는 거룩해야 한다. 거룩함이 없으면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히 12:14). 우리가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보다도 먼저 거룩해지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신 목표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양자로 삼아 우리 기업의 후계자로 삼기 원한다면, 그는 먼저 사람이어야 하고, 이성과 영혼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나님의 첫번째 목표가 우리가 경건한 자가 되는 것이라면, 우리도 이것을 다른 무엇보다도 첫째 되는 목표로 삼아야겠다. -토머스 굿윈(Thomas Goodwin, 1600-1679).
3절.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경건한 자들은 수가 많지 않다. 의로운 자들은 이웃보다 더 훌륭한 자들이다(잠12:26). 의인은 레바논의 술과도 같다고 했는데, 이는 경건한 자를 칭찬하는 동양적인 표현이다. 경건한 자는 귀한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구분하셨다. 우리는 귀한 것들을 구분해 놓는다. 하나님은 경건한 자들을 구분하시되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시 135:4), 그분이 기뻐하시는 정원으로(아 4:12), 그분의 면류관으로(사 43:3), 땅의 존귀한 자로(시 16:3), 정금으로(애 4:2), 연단된 은이나 금으로(슥 13:9) 구분하신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의 영광이다(사 46:13). 오리겐(Origen)은 성도를 사파이어나 수정과 비교했고, 하나님은 그들을 보배라고 부르신다(말 3:17). -토머스 왓슨.
3절.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어떤 성도가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임을 체험하고 또한 주의 백성들에게 허락된 특권을 체험했다면,다른 모든 성도들도 이와 같은 약속과 특권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백성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할 수 있고, 고난에 처했을 때는 누구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다는 소망을 품을 수 있다. -데이비드 딕슨(1653).
4절. “심중에 말하고.” 이 구절은 이성을 따라 판단해 보라는 뜻이다. -알버트 반스.
4절.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경건을 연습하고 싶으면 너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라. “자신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는 자는 결코 게으를 수가 없다.” 이 말은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가 그가 배운 학문을 통해 무엇을 알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답한 유명한 이야기다. 그는 학문을 하면서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혼자 하는 독백이 가장 좋은 토론이며, 자기 자신이 자신에게는 가장 좋은 친구이다. 다윗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으면 자신과 대화하라:“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너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물어 보라. 네가 살아온 삶이 어떠한지 평가하고, 잃어버린 시간은 없는지 생각해 보라. 네가 악용한 사랑은 무엇인지, 마땅히 받았어야 할 심판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너 자신에게 있는 달란트는 어떻게 개발했는지, 친구들에게 성실했는지, 죽음을 당할 준비는 되었는지, 마지막 심판 날에 주님을 만날 준비는 되었는지 생각해 보고 자신과 대화를 나누어 보라. “자리에 누워”자신과 대화를 나누어 보라. 은밀한 시간이 좋다. 조용한 날, 아무것도 방해하는 것이 없는 시간을 택하라. 세상의 잡다한 것들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라. 방해받지 않는 밤 시간에 자신을 돌이켜 보는 것이 좋다. -조지 스윈녹(George Swinnock, 1627-1673).
4절.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우리가 세상에서 돌아서면 하나님과 가장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수면을 줄이고 거룩한 생각으로 자신을 깨우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로서 오는 환상을 받을 것이다.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와 능력의 환상을 보여주시고, 그분의 뜻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 다윗은 우리가 휴식을 취할 때에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침대는 잠만 자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잠잠히 있으면서 우리는 자신의 마음과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마음과 대화를 나눌 때 하나님께서도 그 자리에 오셔서 우리와 대화를 나누시고, 성령께서도 사랑의 역사를 보이실 것이다. -조셉 캐릴.
4절. “너희는 떨며.”
우리의 말로도, 생각으로도 다다를 수 없는
그분의 존귀하신 이름을 경외함으로 부르라.
-존 니덤(John Needham, 1768).
6절.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조금만 계시해도 큰 만족이 있으나, 그리스도가 없으면 어떤 것이 있어도 공허할 뿐이다. -알렉산더 그로스(Alexander Grosse, on Enjoying Christ, 1632).
6절.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다윗은 많은 사람들이 부와 명예와 쾌락을 바란다고 했다. 이런 것들이 정말 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경건한 것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여러 사람”을 언급하지 않고, 단지 그의 입술로 기도를 드릴 뿐이다:“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그의 기도를 보면, 마치 아무도 그와 함께 경건한 것을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헨리 스미스.
6절.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사람은 좋은 것, 선한 것을 원한다. 그들이 악한 것을 미워하는 까닭은 이것을 통해 고통과 죽음이 오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음으로부터 만족할 수 있고, 자신들을 악에서 구원할 가장 선한 것을 바란다. 그러나 사람들은 선한 것이 무엇인지 오해한다. 그들은 자신의 욕정을 만족시킬 수 있는 선한 것을 바란다. 그들의 오감을 통하지 않고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적으로 선한 것을 배척하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사람의 영혼에 진정한 만족을 주시는 하나님을 배척한다. -아담 클라크.
6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이것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내리는 축복이다. 이 축복은 화목, 확신, 영적 교제를 포함하며,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다. 아! 이 축복으로 충만할 수 있다면! -C. H. S.
6-7절. 물질과 부가 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것들을 때로는 의인에게도 주신다. 또한 이것들이 가장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이것을 악한 자에게도 주신다. 그러나 이것들은 의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로 원수들에게 주어진다. 아! 우리가 받아야 할 것들, 또 받지 않아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세상의 축복을 추구하다 유황불로 목욕을 한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로서 영원한 불행을 당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이 세상은 떠다니는 섬과 같다. 그래서 그 위에 닻을 내리면 섬과 함께 표류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과 그분이 만드신 모든 것을 다 합한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 한 분보다 더 귀한 것은 아니다. 그분은 금광을 가진 사람의 지갑을 원치 않으신다. 그분은 피조물이 없어도 부족함이 없는 분이시다. 그러나 피조물은 그분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즐기다가 하나님을 잃는 것보다 아무것도 없이 그분을 즐기는 것이 더욱 복되다. 목선에 술이 가득한 것이 금으로 만든 배에 물만 있는 것보다 더 낫다. -윌리엄 세커(William Secker, 1660).
7절.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많이 받은 자들이 축복을 조금 받은 자들을 부러워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세상에서 얻은 재물이 뼈다귀와 같다면, 영적인 축복은 골수와도 같다. 뼈다귀를 먹는 개를 사람이 부러워할 수 있겠는가? 성도들이 영적인 것을 즐기면서 이 세상에 속한 것을 먹는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할 수 있겠는가? -토머스 브룩스.
7절.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애통하는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는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위로다:“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롬 15:13);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하나님께서 하늘의 기쁨을 마음에 부어 주실 때는 넘치도록 부어 주신다:“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고후 7:4). 이 구절의 헬라어의 의미는 포도주의 잔이 차고 넘치듯이 기쁨이 넘친다는 뜻이다. 삼각형으로 원을 채울 수 없는 것처럼 세상에서 오는 위로로는 마음을 채울 수 없다. 영적 기쁨은 사람에게 만족을 준다:“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시 63:5). 세상의 즐거움은 얼굴에 기쁨을 나타내나 하나님의 영은 마음을 기쁘게 한다:“여호와를 인하여 마음에 즐거워하리라”(슥 10: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눅 1:47). 이러한 기쁨이 마음에 넘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시편 기자는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라고 했다. 포도주와 기름은 기쁘게는 하지만 마음을 만족케 하지는 못한다. 이것들은 그 자체에 공허함과 가난함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스가랴 10:2은 “그 위로함이 헛되다”고 말한다. 세상에서 받는 위로는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싫증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채우기보다는 피곤하게 한다. 아하수에로 왕은 새로운 기쁨을 찾아 내는 자에게는 커다란 상을 내리겠다고 했다. 그러나 성령의 위로만이 영혼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이다:“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시 94:19). 하늘의 기쁨과 땅의 기쁨의 차이는 풍성한 잔치에서 음식을 먹는 것과 종이 위에 그려진 음식을 보는 것의 차이와도 같다. -토머스 왓슨.
8절.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농부가 땅에 씨를 뿌린 후, 밤낮으로 자고 깨는 가운데 씨가 싹이 트고 자라지만 그는 어떻게 이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다(막 4:26, 27). 이처럼 의인은 믿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그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긴 후에는 밤낮으로 자고 깨며,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거룩하신 뜻을 따라 행하시도록 맡겨 버리면 된다. -매튜 헨리.
8절.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과 동행했다면 저녁에는 휴식을 취하며 하루를 잘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첫째, 하루를 돌아보고 반성하며 잘못된 것은 고치도록 하라. 은혜 가운데 일을 잘했으면 기뻐하고, 잘못했으면 슬퍼하라. 둘째, 하나님은 당신을 지키시는 분이심을 기억하라(시 111:4, 5). 그분이 깨어 지키시지 않으면 당신은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없다(시 127:1). 당신이 잠을 자는 동안 하나님께서 당신을 지키신다. 그런데 그분이 당신의 원수라면 당신은 안전하게 잠을 잘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밤이 되면 믿음의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과의 평화를 새롭게 하라. 침실로 가기 전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를 통해 그분의 가르침을 받으라(시 3:4, 5; 92:2). 그리하면 안전히 자리에 누울 수 있으리라(시 4:8). 하루의 모든 일을 행하고서 의복을 벗기 전, 자리에 눕기 전이나 자리 위에서도 당신의 마음과 대화를 나누도록 하라(시 4:4). 주님을 생각하고 잠들 수만 있다면 깊은 잠을 자게 될 것이다(잠 3:21, 24, 25). 당신은 더욱 안전하고(잠 6:21, 22), 꿈을 적게 꾸며 더욱 편안한 잠을 자게 될 것이다. 당신은 더욱 좋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며(잠 6:22), 밤이든 아침이든 잠을 깰 때에 당신의 마음이 기쁠 것이다. -헨리 스커더(Henry Scudder, Daily Walk에서 요약한 것, 1633).
8절.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시편 기자는 원수들과 다투고 그들을 대적하던 행위에서 이제는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자는 것에 대해 말한다. 여기서도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하나님께서 조용한 방에서 그를 친히 보살펴 주시는 모습이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세밀하게 돌보시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심은 더할 수 없이 감미로운 사랑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땅에 내려오셔서 굽어 살펴보시고, 큰 일뿐만 아니라 작고 사소한 일까지도 도와주신다. 그분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얻을 큰 일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잠을 잘 때에도 보호와 돌봄이 필요한 연약하고 가련한 자들, 그들의 사랑과 감사 외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작은 일도 친히 도와주신다. 우리의 골방에서 그런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의지한다면 얼마나 복된 일인가! 우리가 아플 때나 피곤할 때에도, 또한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도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그분이 연약한 성도들을 돌보시며 함께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복된 사람이다. 시편 기자는“내가 평안히 눕고”라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감동적인 표현이다. 이처럼 자발적으로 누우면서 그는 스스로 자신을 지키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긴다. 이렇게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잠을 잔다는 말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눕기는 하지만 잠을 자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기는 하겠지만, 모든 염려와 걱정이 침실에까지 들어와 그들이 온전히 믿고 신뢰하는지를 시험한다. 이런 염려는 그들을 위협하고, 놀라게 한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지속적이고 강력한 시험 앞에 신뢰를 잃고 만다. 그러나 많은 가련한 사람들이 “내가 눕기는 하겠지만 잠을 자지는 않겠다”고 말한다. 필자는 어느 나이 드신 사역자가 병이 들었을 때, 그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궁색한 가운데서 살고 계셨고, 가족은 큰 시련을 당하고 있었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의사는 내게 잠을 자라고 한다네. 하지만 염려가 내 베개 곁에 있는데 어떻게 잠을 자겠나?”
주의 백성들은 크게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는 잘 견디면서도, 정작 그 어려움이 지나고 난 후에 염려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혼자 있게 되면 의기소침해지고, 어려움이 극에 달했을 때에 느끼던 하나님에 대한 신뢰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느끼지 못한다······적막함 가운데 시험이 있다. 우리는 인생 전투장보다 조용한 골방에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신뢰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 우리가 지극히 개인적인 일에도 하나님을 의지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골방에서도 우리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면! 아! 지극히 사소한 일에도 우리가 그분께 맡길 수 있다면!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는 정말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골방에서 지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몸과 영혼으로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 밤은 내가 누워 자고, 내일은 하나님께 맡기리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리들리(Ridley)의 형제는 그가 순교 당하기 전날 그와 함께 지내려고 했다. 그러나 리들리 감독은 예전처럼 잠을 자야 하겠으니 함께 지낼 수 없다고 하며 이를 거절했다. -필립 베넷 파워, ‘I Wills’ of the Psalms.
8절.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일들을 자세히 관찰하면 우리는 이 불안정하고 헛된 세상에서, 여러 가지 소란스러운 일들 가운데서도 마음의 평정을 누릴 수 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여호와만이 나로 안전히 거하게 하신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일에 대해 죄스럽게 두려워함으로 내면의 평안을 잃거나, 그의 마음을 불안으로 괴롭게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염려를 지금까지 인도해 오신 신실하신 아버지의 손에 모두 맡기는 자이다. 그는 저녁에 허락된 안식을 잃지 않고, 내일의 염려를 오늘로 가져오지 않기로 작정한 자이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의 뜻을 포기한 자에게 허락된 감미로운 행복감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섭리에 마음을 쏟을 때,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존 플라벨(John Flavel, 1627-1691).
8절. 이 구절을 암송하고 마치 무덤에 자신을 맡기듯 침대에 자신을 맡기는 자는, 마침내 같은 구절을 암송하며 침대에 눕듯 무덤에 들어갈 것이다. 그는 때가 되면 이 무덤에서 다시 일어나 부활의 자녀들과 함께 아침의 노래를 부를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조지 혼(George Horne, D.D., 1776).
9절. “자기도 하리니.”
이 잠은 아름다운 잠이네
주님은 폭풍도 개의치 않으셨네!
죄 없으신 주님은 깊이 잠드셨네
그분이 일어나 파도를 잠재우시니
모든 사람들이 기이히 여기네.
이 잠은 아름다운 잠이네
성도들은 잠을 잔다네!
애곡하는 자들은 슬퍼하지 말라
구세주의 가슴에 고개를 묻으면
의인은 끝없는 안식에 빠져든다네.
-매카트리(Mrs. M’Car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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