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7:1-9 설교 [강해 20]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결혼에 대하여 7:1-9

사도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에게 문의한 양심의 문제에 대하여 답하고 있다. '그들이 쓴 말에' 대한 것들을 기록하고 있다(1절). 바울은 그들의 질문에 답변하기 위하여 논지를 이끌어 왔던 것 같다. 앞 장에서는 음행을 피하라고 경고했는데 본 장에서는 결혼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다.
[1] 바울은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그런데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죄가 되는 것처럼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여 많은 옛 성도들이 독신과 처녀로 지낸 극단에 흘렀다. 그러나 이 말은 지금처럼 비상한 시점에서는 그들이 절제만 할 수 있다면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믿음을 지키기에 더 유리하다는 것이다.
[2] 바울은 결혼과 결혼의 안락과 만족이 음행을 막기 위하여 제정된 하나님의 지혜임을 알린다(2절). 그래서 결혼을 했을 때는 각각 배우자에 대한 '바른의무'를 다할 것을 권한다. 따라서 '합의상 얼마동안',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혹은 신앙상의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분방하는 것 이외에는 상대방의 몸을 주관하는 것을 금해서는 안 된다. 깊이 회개하는 기간에는 비록 합법적인 쾌락이라도 삼가야 할 것이다.
[3] 바울은 자기가 한 말에(2절)단서를 둔다. 바울은 무조건 모든 사람에게 다 결혼하라고 하지 않았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7절). 타고난 체질은 다양한 것이다.
[4] 바울은 9절과 10절에서 결혼은 많은 불편이 있을지라도 불순하고 정욕적인 욕망으로 불타는 것보다는 낫다는 말로 요약한다.

#1-9 The apostle tells the Corinthians that it was good, in that juncture of time, for Christians to keep themselves single.
Yet he says that marriage, and the comforts of that state, are settled by Divine wisdom.
Though none may break the law of God, yet that perfect rule leaves men at liberty to serve him in the way most suited to their powers and circumstances, of which others often are very unfit judges.
All must determine for themselves, seeking counsel from God how they ought to act.

#10-16 Man and wife must not separate for any other cause than what Christ allows.
Divorce, at that time, was very common among both Jews and Gentiles, on very slight pretexts.
Marriage is a Divine institution; and is an engagement for life, by God's appointment.
We are bound, as much as in us lies, to live peaceably with all men, #Ro 12:18|, therefore to promote the peace and comfort of our nearest relatives, though unbelievers.
It should be the labour and study of those who are married, to make each other as easy and happy as possible.
Should a Christian desert a husband or wife, when there is opportunity to give the greatest proof of love? Stay, and labour heartily for the conversion of thy relative.
In every state and relation the Lord has called us to peace; and every thing should be done to promote harmony, as far as truth and holiness will permit.

=====7:1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 이와 유사한 구절들은 어떤 특정한 주제를 도입할 때
사용되었다(25절;8:1;12:1;16:1, 12 등). 또한 이것은 고린도인들이 바울에게 이와 비
슷한 주제들에 대하여 질문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5 : 9 주석
참조). 아마도 사도와 고린도 교인들은 본서신이 씌어지기 전에 서로의 소식을 주고
받는 서신을 교환(交換)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 이 말은 먼저 보낸 서신에서 고린도 교인
들이 썼던 내용일 수도 있고 바울이 언급한 적이 있는 주제일 수도 있다.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영지주의의 영향으로 금욕주의에 물들어 있거나 이와 반대로 쾌락주의에 빠
져 있었을 것인데(Farrar), 만약 금욕주의자라면 그들은 '가까이 하는 것이 좋지 않
다'라고 주장했을 것이며, 쾌락주의자였다면 '가까이 하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성
적인 방종으로 이해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본절에서 혼인을 금하는 것과 같은
이단 종파의 교리(딤전 4:3)를 지지하지 않으며 방종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한편 '가
까이 함'(* , 하프테스다이)은 '성적 관계를 갖는다'는 말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으로 합법적인 결혼을 뜻한다(Morris).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이 결혼에 대하
여 반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남자가 여자에게 가까이 하는 결혼
그 자체를 나쁘거나 죄악스러운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Calvin).

=====7:2
음행의 연고로 - 앞절이 결혼에 대한 근본적인 반대의 표현이 아님이 곧 증명되었
다. 바울은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부 고린도 교인
들에게 결혼의 합리성을 피력한다.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타스 포르네이아
스'(* )는 문자적으로 '음행하는 일들이 생기게 때문에'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결혼을 음행(淫行)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하지만, 이것이 결
혼을 권장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이유는 아니다. 바울은 타락하고 음란한 고린도의
일반 생활 문화로부터 어떻게 그들 자신을 거룩하게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말하
고 있다(Morris). 따라서 본절은 칼빈(Calvin)의 말대로 결혼이 꼭 필요한 자들을 위
한 것이다.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 일반적인 원리이다. 라이트푸트(Lightfoot)는 이것
을 일부 일처제에 대한 규정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문맥이 일부 일처제
를 설명하기 위한 논지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바울은 타락한 고린도에서 순결을
지키며 도덕적 질서를 유지 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뜻이 결코
결혼을 음행이나 간음을 방지하는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인간의 욕
망 속에 항상 존재하는 정욕을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 제도 내에서 충족시키지 않으
면 불법적인 음행에 빠질 것을 염려하고 있다. 따라서 한 여자와 한 남자의 결혼은 영
적 원리에 근거한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며 육체적인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Barrett).

=====7:3
의무를 다하고 - '의무'의 헬라어 '오페일렌'(* )은 '빚', '채무'를 뜻하
며 본절에서는 부부가 서로에게 져야 할 '의무', 특히 성생활에서의 의무를 뜻한다.
'다하고'의 헬라어 '아포디도토'(* , '다하라')는 '아포디도미'(*
)의 명령형으로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강제적인 명령으로서 충실한
책임 수행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당시의 고린도 교인들이 올바른 부부의 의무를 이행
하지 않고 서로에 대한 무관심과 비도덕적인 음행을 자행함으로 결혼의 고귀한 가치를
망각한 자들이 많았음을 시사한다.

=====7:4
본절은 개역 성경을 따를 경우 마치 3절의 이유인듯 느껴진다. 그리고 카우프만
(Kaufmann)같은 학자는, 본절을 1-3절에 기록된 긴급조치에 대한 설명으로 보고 5절
이하의 인구조사는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시킨 에스라의 개혁 조치(스 10장)와 관련
시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본절과 5절 이하 내용과는 직접적인 연관성
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본절은 느헤미야가 5절 이하에서 인구 조사하게 된
이유에 해당된다(Williamson, Fensham, Myers). 즉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거민의 수효
가 극히 적었던 관계로 전체 귀환자의 현황을 조사하여 예루살렘으로 이주 시킴으로써
방어상의 취약점을 보강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11:-36).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 의무의 이행은 남편과 아내 각자에게 요구되는 것으
로 제시한다. 부부는 상호 책임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자기 몸에 대한 자기 주장
을 하지 않고 배우자와의 합당한 관계 속에서 정상적인 성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다. 그래서 부부는 자신의 몸을 전적으로 자기 의사에 따라 사용할 수 없다. 순결(純
潔)한 결혼 생활은 부부의 평등한 의무가 항상 행해질 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며 부부
의 권리도 그 의무 속에서 동등하고 상호적으로 요구될 수 있을 것이다.

=====7:5
막 표현되었다. 당시의 고린도 교인들이 금욕주의의 영향을 받아 성관계를 부정한
것으로 여겨 부부 간에 지켜야 할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거나, 사도 바울을 추
종하여 결혼은 했어도 혼자 사는 것처럼 절제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분방(奔
放)하지 말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아포스테레이테'(' )는 '빼앗지 말
라' 또는 '강탈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이 명령형은 보다 일반적인 표현으로서 부부
사이의 권리나, 의무를 빼앗지 말라는 것이다(Farrar). 즉 부부가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권리와 의무를 지키라는 것이다. 바울은 때때로 아내가 싫어지는 약점을 간파하
여 서로간의 의무를 사려깊게 다루고 있다(Calvin). 결국 본문은 부부 간의 의무를 성
실히 수행하라는 명령으로 금욕 주의에 빠지지 않게 하고, 이로 인해 시험에 들지 않
게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 부부가 분방할 수 있는 경우
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기도하는 틈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기도할
때는 언제나 분방해야 된다는 것이나 기도하는 동안은 절대로 부부 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틈을 얻기 위하여'라고 번역된 '히나 스콜라세테'(*
)는 '몰두할 수 있는 여가를 얻기 위하여'라는 뜻이며 이는 일상적인
기도라기 보다는 집중적인 노력을 필요로 하는 기도를 염두에 둔 것이다. 칼빈
(Calvin)은 이러한 기도가 '재난'이나 '진노의 날' 또는 '매우 어려운 문제' 등을 결
정해야 할 때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의 기간은 한정되어 있으
며 그것은 또한 부부의 합의하에 행해져야 한다.

=====7:6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 - '권도'(' , 슁그노멘)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는 본절에만 나오는 고대 단어로 '용서' 또는 '양보'라는 뜻으로 사
용되었다(Robertson). 바울은 교회 공동체 속에서 같은 동료로서 자기의 의견을 피력
하고 있는 것이지 종속 관계 속에서 명령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곧 공동체의 질서를
추구하는 그의 사랑의 표현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권도'가 무엇에 대한 것
인가 하는 문제는 쉽지 않다. 그것은 '이 말을 함'이라는 것이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
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하나
는 앞 부분에 서술한 모든 부부 생활에 대한 의무를 지시할 수도 있으며(Barrett),
(2) 하나는 다음 절에 기록된 것과 같이 결혼이냐 독신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 그가 제
시하는 견해일 수도 있다(Farrar). 전자를 주장하는 자는 보다 구체적으로는 5절 전체
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기도하기 위하여 분방하는 것이나
또는 잠시 후에 서로 다시 합하는 것이 명령이 아니요 권도라는 것이다. 후자를 주장
하는 자는 자신과 같이 독신으로 지내기를 원하는 바울의 소신(所信)이 권도이지 명령
이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서 부부 생활에 대한 명령은 모두 강조적인
요구라고 할 수 있으나 결혼에 대한 견해, 즉 결혼을 할 것이냐 독신으로 살 것이냐에
대한 견해는 권도라는 주장이다. 사실 성경에 제시된 결혼의 질서를 생각해 볼 때 부
부에 대한 의무를 단순한 권고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따라서 본절에 제시된
그의 권도는 후자를 향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바람직할 것 같다. 그는 결혼한 사
람의 의무에 대하여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Morris). 그러나 바울이 자신
의 주장에 대한 겸손의 표현으로 '권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이
말'은 바울이 제시한 모든 복음적 내용들을 지시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7: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 이것이야말로 결코 명령이 될 수 없는
'권고'요 '하나의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당시의 박해와 시련 속에서 그리
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고대하는 심각한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구절이다. 본절
의 문자적인 뜻은 '나와 같이 결혼하지 않은 사람으로 있기를 바란다'는 간절한 요청
이지만 광의적인 의미에서 그 뜻은 다음 구문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각자 자신들에
게 베풀어주신 은사를 따라 결혼하거나 독신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이는 바울과 같
은 독신의 삶이 하나님께서 주신 독특한 은사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은사를
받지 못한 자는 결혼해야 한다. 그렇다고 결혼의 은사를 받은 자만 결혼을 해야 한다
는 의미는 아니다. 결혼이나 독신은 하나님께서 각 자에게 주시는 선물로서 하나님 편
에서 그것은 언제나 동일한 은사이다. 결혼이 완전한 결혼으로서 육체적인 욕구가 충
족되어야 하듯이 독신도 완전하고 성결한 삶으로서 영위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
은 어떠한 삶의 형태를 취하든지 음욕의 유혹으로부터 그들의 거룩한 신분을 보존시켜
야 한다는 점이다. 한 사람은 결혼이라는 은사를 통해서 또 다른사람은 독신이라는 은
사를 통해서 순결한 삶을 유지할 때 비로소 '바울과 같이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독신의 삶이 순결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타락한 고린도의 상황속에서
'나와 같기를' 바란다 라고 말한 바울의 표현은 결혼이냐 독신이냐 하는 선택의 문제
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실제적인 삶에서 음란한 유혹으로부터 순결을 유지했던 삶의 모
범을 본받으라고 하는 말이다. 따라서 결혼한 자들이 바울을 본받는다는 것은 무질
서한 방종으로부터 결혼의 순결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7:8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 본절의 '나와 같이'라는 표현은 앞절의 광
의적인 의미와는 달리 보다 개인적인 의미로서 독신의 모든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제한된다. 그의 요구는 앞절과 같은 적극적인 요
청이 아니다. 그는 단지 그들이 현재 있는 상태 그대로 있으라고 충고한다. 혹자는 이
와 같이 그대로 있기를 바라는 바울의 위치를 홀아비와 같은 상황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Barrett). 이에 대한 근거로는 (1) 결혼이 유대인들에게는 의무적인 규례였다는
것과 (2) 그가 한때 산헤드린의 회원으로서 투표를 하였다는 점이다(행 26:10). 만약
그가 실제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결혼을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산
헤드린의 회원은 반드시 결혼을 한 자들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또한 본절에서
'혼인하지 아니한 자'(* , 아가모이스)는 남성 복수로서 '과부'(* ,
케라이스)라는 말과 동격이며 그 뜻은 '홀아비'라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홀
아비들과 과부들에게 나와 같이 그냥 있으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는 결혼한 적이 있
는 홀아비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가모스'(* )는 헬라어의 관용적인 특성상
남녀 모두를 포함 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이러한 해석은 불가능
하며, 또한 '아가모스'는 32절에서 단순히 '장가가지 아니한 사람'을 뜻하는 말로 사
용된 것으로 보아 '홀아비'라는 해석은 더욱 불가능하다. 혹자는 이러한 난제를 극복
하기 위하여 바울이 결혼했으나 지금은 결혼하지 않은 자와 같은 상태에 있다는 현재
적 의미를 강조하기도 한다(Farrar). 그는 바울이 알롄산드리아의 클레멘트, 루터 등
과 같이 상처(喪妻)한 이후에 혼자 지내게 되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초대 교
부들(Tertullian, Jerome)과 칼빈은 이와 같은 바울의 결혼설에 대하여 단호히 부정한
다. 칼빈(Calvin)은 만약 그가 결혼한 사람이었다면, 아내와 자식들을 아무렇게나 팽
개쳐 놓고서 어떻게 부부에 대한 의무와 가정에 대한 질서와 사랑을 그토록 고조된 표
현으로 강조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하며 바울이 율법주의자들과 같이 스스로는 질수
없는 법들을 이웃들에게만 강요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7: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 바울은 성적인 욕구 그 자체를 금욕주의자들과
같이 금지하지 않는다(Morris). 그렇다고 해서 결혼 그 자체를 욕망의 도피처로 삼지
도 않는다. 그는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를 최대한으로 존중한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 '나으니라'의 헬라어 '크레잎톤'(* )은 독신보
다 결혼이 더 낫다거나 결혼보다 독신이 더 낫다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에
게 주신 은사의 분량에 순종하는 것이 제일 낫다는 의미이다. 한편 '절제한다'는 것과
'불같이 탄다'는 말은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절제'(* ,엥크라튜
온타이)는 '스스로를 제어하는 것'을 의미하며 '불같이 타는 것'은 실제적인 욕망에는
굴복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내적으로는 욕망이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 솟아오르는 욕망을 바울과 같이 절제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
사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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