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편입니까? 결단하십시오. 그리스인임을 분명히 드러내십시오. 레위 족속처럼, 살을 도려내는 심정으로 죄와 결별하십시오 [...

모세의 분노(출애굽기 32:15-20)

여기서 우리가 살펴 보아야 할 점은 다음과 같다.

Ⅰ. 증거의 두 판을 모세에게 맡기심으로써, 하나님은 모세에게 대한 총애를 보이셨다. 비록 그 돌판은 평범한 것이지만, 아론의 흉패를 장식한 그 모든 값진 보석보다도 훨씬 더 귀중한 것이었다. 에티오피아의 황옥으로도 이에 비할 수 없었다(15,16절).

하나님께서는 사람이나 천사들을 시켜서 하지 않고 (아마 그런 것처럼 보인다) 친히 이 석판틀 위에, 곧 "그 판의 양면에" 십계명을 쓰셨으니, 일부는 이 석판에, 또 일부는 다른 석판에 쓰셨다. 그리하여 마치 한 권의 책처럼 포개 놓아 법궤 속에 안치할 수 있도록 하셨던 것이다.

Ⅱ. 모세와 여호수아 간의 친밀한 관계. 모세가 하나님의 알현실(謁見室)인 구름 속에 있을 동안, 여호수아는 되도록 가까이서 (말하자면) 대기실에서 모세가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모세를 기다렸다가 그가 나오면 시중들기 위해서였다.

비록 여호수아가 40일간 순전히 홀로 있었을지라도 (아마 만나를 먹고 지냈을 것이다.) 그는 백성둘처럼 기다림에 지치지 않고, 모세가 내려 오자 그도 함께 따라 내려왔다. 그는 먼저 내려오지 않았다.

본문에 보면, 그들이 이스라엘 진 가운데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는 것이 나타나 있다(17,18절). 비록 모세가 아주 오랫동안 하나님과 직접적인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것 때문에 자기 종자인 여호수아와 자유롭게 대화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높이 세우시는 자들은 교만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또한 모세는 이스라엘 진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축복받은 바울도 역시 자기가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말을 들었던, 삼층천에 갔다 온 적이 있다는 것으로 해서, 지상의 교회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는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여호수아는 군인이었다. 훈련 부대의 사령관이었다. 그런고로 그 소리가 "진중에서 나는 싸움 소리" 가 아닐까 하고 염려했던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그의 잘못이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바가 있으므로 그 소리를 더 잘 식별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소리가 "노래하는 소리" 라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러나 모세가 그 때 백성들이 노래 부르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호수아에게 말한 것 같지는 않다. 인간의 과오를 드러내는 데 조급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잘못이란 너무나도 빨리 알려지게 마련이다.

Ⅲ. 우상 숭배로 인해 모세는 이스라엘인들에게 분노했다. 그 분노는 극심했으나 정당했다. 모세는 이미 예측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금 송아지와 또 그 송아지를 가지고 백성들이 어떤 유희를 하는 것인지를 즉시 알아차렸던 것이다. 또한 모세는 자기가 없는 틈에 저들이 얼마나 즐거워하며, 저들이 자기를 얼마나 쉽사리 잊어버리며 또 자기 자신과 자기의 귀환에 대해 저들이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모세는 이와 같은 사실은 마땅히 자기를 모독한 것이라고 나쁘게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그의 불만에 대한 털끝 만한 이유도 될 수 없었다. 모세는 저들의 행위가 하나님께 대한 범죄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치욕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분개했던 것이다.

하나님과 교제하던 산에서 "악이 가득한 이 세상과 교제하기 위하여 내려 왔다" 는 것은, 얼마나 큰 변화인가를 주목하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순전하고 즐거운 것만 볼 수 있으나, 이 세상에서는 오염된 것과 분통터질 일만 보게 된다. 모세는 세상에서 가장 온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금 송아지와 춤추는 것을" 보았을 때는 대노하였다.

악한 자들의 악행을 목격하고 거기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온유하라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 조금도 아니라는 생각을 명심하자. 죄에 대해서 화내는 것만은 "화를 내되 죄짓지 않는 것" 이다(엡 4:26). 그런 분노는 자기들 때문에 내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 때문에 내는 것이다. 에배소 교회는 오래 참음으로 유명했지만 "악한 자들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계 2:2).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명분을 위해서, 침착해야 하나 하나님을 위해서 열정을 내어야 한다. 모세는 몹시 분노하여 율법판을 깨드리고 송아지를 불태웠다. 이런 강렬한 분노를 보임으로써 백성들이 자기들은 얼마나 큰 죄를 범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깨닫도록 하였다.

만일 모세가 그들의 참회를 진정으로 열망하는 한 나머지 이렇게 격노를 보인 것이 아니라면, 저들은 자기들의 그 같은 죄를 아마 가벼이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가 판들을 깨뜨린" 것은(19절) 그들이 이제 하나님의 은총을 빼앗기고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산을 내려 오기 전에 저들의 죄를 알고 계셨을지라도, 돌판들을 남겨 두고 내려가라는 명령을 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돌판을 손에 들고 내려가라고 모세에게 주셨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계약 맺으시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계시는가를 그들에게 깨닫게 하려 하심이요, 그 계약을 방해하는 것은 자기들의 죄 뿐 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브라임의 악이 드러났을 때(호세아 7:1 의 표현대로) 그 돌판을 그들의 목전에서 깨뜨리고자(신명기 9:17 대로) 하셨다. 그리하여 저들이 그것을 목격함으로써 더욱 큰 감동을 받고 크게 뉘우쳐서 자기들이 잃어버린 그 축복이 과연 무엇인가를 알게 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저들은 이제 막 발족한 협약을 그같이 악명높게 위배하는 죄를 범함으로써, 이미 조인될 만반의 준비가 다 갖추어져 있었으나 그 협약의 기록문은 찢어지고 말았다.

어느 개인이나 민족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발하시는 분노의 최대의 표적은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율법을 빼앗아 버리는 것임을 명심하자.

이 돌판을 깨뜨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총과 연락(유대)이라는 막대기" 를 부러뜨렸음을 의미한다(슥 11:10, 14). 즉 그 민족을 교회의 울타리 밖으로 내쫓아 버리는 것이다.

혹자는 모세가 돌판들을 깨뜨린 것은 죄를 저지른 것이며, 사람들이 노할 때는 자칫하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어기는 위험이 뒤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세의 행동은 감정의 발로라기보다는 정의의 발로로 보인다.

우리는 모세가 그 후(신 9:17) 그 일에 대하여 후회스러이 말하는 일이 없음을 발견한다.

2. 모세는 저들이 자신들을 도와 줄 수 없는 신을 의지하려고 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송아지를 불살라 버리고" 녹여서 티끌이 되도록 갈아 버렸다(20). 그리고 나서 온 진영의 사람들이 알아 볼 수 있도록 가루로 만들어 물에 타서 모든 사람들에게 마시게 했던 것이다. 모세가 송아지를 가루로 만든 것은 도대체 "우상이란 신이 아니라는 것" (고전 8:4)을, 즉 우상은 무(無)와 다름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또한 거짓 신들은 그들을 숭배하는 자들을 도와 줄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모세는 송아지 우상이 자기 자신 하나도 구해낼 수 없다는 생각을 여기서 드러내보인 것이다(사 46:1, 2).
또한 우상 숭배의 모든 유물은 파괴되어야 하며, 바알이라는 이름 조차도 없어져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그 가루를 흩어 버렸던 것이다. 금을 갈아서 나오는 줄밥은 값진 것이므로(우리는 그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것을 주의깊게 주워 모은다. 그러나 금송아지를 갈아서 나온 줄밥은 가증스런 것이어서, 증오하면서 산산히 흩어 버려야 했다. 그러므로 은금으로 만든 우상은 두더지와 박쥐들에게 던져졌음이 분명하다(사 2:20; 30:22).

그리하여 에브라임은 이르기를 "이제 내가 더 이상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 하리라.

모세가 이 가루를 저들의 음료수와 섞어 마시게 한 것은 저들이 그 때문에 스스로에게 초래한 저주가 저들의 모든 향락과 혼합되어, 그 향락을 고통으로 바꾸어 버리리라는 것을 의미해 준 것이다. 그 가루는 물처럼 저들의 배 속에 들어가고, 기름처럼 저들의 뼈 속에까지 들어갔을 것이다.

마음으로(하나님의 율법을) 물러난 자는 자기 고집으로 가득 차리라.

그들은 자기가 빚은 술을 마실 것이니 자업자득이다. 이것이야 말로 실로 "마라의 물" 이었다.

32:21
아론을 책망함(출애굽기 32:21-29)

모세는 증거판을 깨뜨리고 송아지를 불사름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에 대한 의분을 표시했다. 그러나 이제는 죄인들을 헤아려 계산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대리하여 행동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죄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또한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어, 죄악을 처벌하는 일을 영광으로 삼으시는 분이시다.(사 59:18).

Ⅰ. 모세는 먼저 아론부터 시작하였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아담부터 심문하신 것과 같다. 즉 아담은 제일 먼저 죄를 지은 자가 아니라 죄에 끌려들어간 자일망정, 그가 죄악의 주범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1. 모세는 아론에게 정당한 견책을 했다(21절). 그러나 그 범죄의 장본인들처럼(27절) 아론의 목을 베도록 명령하지는 않았다. 공공연히 죄 중으로 뛰어 든 자들과 잘못하여 얼떨결에 그런 범죄를 저지른 자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또한 자기들을 피해 달아나는 잘못을 좇아가서 범하는 자들과, 자신들은 도망하려 하나 잘못하여 악에 빠지는 자들 사이에는 역시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갈 6:1 참조).
그러나 아론이 지은 죄가 그를 목베이게 하기에는 마땅치 않다는 것이 아니라 신명기 9장 20절에 나타난 대로, 만약 모세가 그를 위해 특별히 하나님께 중재 기도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충분히 죽임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아론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여 그를 멸망에서 구출한 모세는 이제 여기서 아론이 회개하도록 훈계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일을 아론이 생각해 보도록 했던 것이다.



(1) 그가 이 백성에게 행한 일은 무엇인가? "너는 그들로 중죄에 빠지게 하였도다" 고 했다. 우상 숭배의 죄는 크나 큰 죄다. 너무나 그 죄가 커서 그 죄가 받을 화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백성들이 먼저 선동하여 아론이 그런 죄악에 빠지도록 하였다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론은 백성들을 다스리는 한 행정관이었다. 그는 마땅히 그런죄를 막아야 했었다. 그런데도 도리어 그 일을 방조하고 교사했으므로, 실상은 그가 백성을 죄에 빠지도록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론이 저들의 마음을 강팍케 하고 그 죄를 저지르도록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다. 통치자들이 백성들의 범죄 행위에 비위를 맞추고, 마땅히 이 공포를 느껴야 할 일을 하도록 장려했다는 생각은 충격적인 일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즉 유혹하였건 조장했건 간에, 남을 범죄케 하는 자는 자기들의 생각 이상으로 큰 화를 끼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실로 남을 죄에 끌어 넣거나 또 남들 때문에 죄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레 19:17). 죄에 동조하는 자들은 그 상대방을 파멸하도록 돕는 자가 되며, 실로 서로를 멸망케 하는 자들이 된다.



(2) 그가 무엇에 이끌리었는가? "이 백성이 네게 어떻게 했느뇨?" 라고 했다. 모세는 아론이 그 같은 짓을 하게끔 마음이 동요된 데에는 필경 어떤 특별한 것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기를 해명해 보라고 한 것이다. 모세는 아론의 마음이 정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들이 어떻게 하였느뇨? 저들이 너를 교묘하게 꾀어냈는가? 감언이설로 네가 죄를 짓도록 만들었는가? 그리하여 너는 백성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네 하나님을 감히 분노케 했는가? 저들의 끈덕짐에 설득되고 말았는가? 그래, 너는 백성들의 소란의 와중에 휩쓸릴 만큼 그렇게 결의가 모자랐단 말인가? 저들이 너를 돌로 쳐 죽인다고 위협하더냐? 너는 하나님께 저들에게 진노하시리라는 경고를 줌으로써, 백성들이 너를 위협하는 것 이상 너는 저들을 더욱 위협해 줄 수 없었더란 말인가?"
우리는 인간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이나 행동 때문에 결코 죄에 빠져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들 때문에 우리가 죄에 빠졌다고 변명하더라도, 우리는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죄에 빠지도록 우리를 단지 유혹할 수 있을 뿐이다. 결코 강제로 죄에 빠지도록 하지는 못한다. 사람은 (죄짓도록) 우리를 해칠 수 없다.

2. 아론은 자신을 위해 하찮은 변명을 대었다. 우리는 아론이 나중에라도 자기 죄에 대한 지금의 참회보다는 더 깊이 뉘우쳤으면 하고 바란다. 왜냐하면 여기서 아론이 말한 것을 보면, 회개에 대한 말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의로운 자는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아마 급속히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1) 아론은 모세의 노여움만 풀려고 애썼다. 그러나 실은 먼저 하나님의 진노를 풀려고 애써야 했었던 것이다. "내 주(모세)여, 노하지 마소서" 라고 했다(22절).

(2) 그는 모든 허물을 백성에게 돌렸다. "이 백성이 악하나이다. 그들이 이리기를 '우리를 위하여 신을 만들라' 하였나이다" 라고 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우리의 죄책을 남에게 전가시키려는 것이 보통이다. 아담과 하와가 그렇게 했듯이, 그것은 우리의 본성이다. 아담과 하와도 그렇게 행했던 것이다. 죄라는 것은 아무도 가지고 싶어하지 않는 놈인 것이다.
아론은 당시 수석 행정관이었고 백성을 다스릴 권력일 지니는 있었다. 그러나 백성이 자기를 휘어잡았다고 호소한다. 그들을 다스릴 권세를 가진 자의 결의가 너무나 약하여 오히려 그들에게 굴복하고 만 것이다.



(3) 만약 아론이 "이 모세는 어찌 되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고 하는 백성들의 간악한 억측을 부질없이 되풀이 한 것은 모세가 산 위에서 너무 오래 지체하였기 때문에 결국 모세 자신이 그 죄의 공범자라는 것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다행한 일이다.

(4) 아론은, 마치 그가 우선 필요한 임시 변통물을 만들고, 그 다음에 가서 그 거둔 금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를 알아 보고자 하여, 저들이 가지고 있는 "금을 빼어 내라" 고 하는 명령만 내렸다는 듯이 말함으로써, 그 범죄에 자신이 가담한 사실을 가볍게 숨기려 했다.
또 그는 금을 불 속에 던져 넣었더니, 우연히 또는 어떤 황금의 마술에 의해서(유대인 기자들이 상상하듯이) 그런 모양의 물체가 나오더라고 유치하게 둘러댔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조각하여 만들었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24절). 그러나 모세는 아론이 비록 여기서 그사실을 스스로 고백하려하지 않지만, 아론이 무엇을 했는가를 모든 세대에게 전해 주고 있다(4절).

자기 죄를 은폐시키려 하는 자는 번성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명심하자. 조만간 그 죄는 드러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아론이 자신을 위해 말한 모든 것이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의 변명은 자기의 범죄를 더 심화시켰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목숨을 건졌을 뿐만 아니라 우대를 받기까지 했던 것이다. 죄악이 많으나, 은혜는 더욱 충만하기 때문이다.

Ⅱ. 그 다음으로 백성이 그 죄에 대한 심판을 받게 되었다. 모세가 다가오자, 저들의 유흥은 즉시 깨어지고 저들의 춤은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아론을 못살게 하여 자기들의 죄에 공범으로 만들었던 자들은 감히 모세의 얼굴을 바로 보지도 못하였고, 우상과 그 숭배자들에게 대한 모세의 가혹한 처벌에 대해서도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용감히 감행한 죄악이라도 밝히 드러내어 경멸당하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니, 그때에는 그 무례한 범행자들이 스스로 당혹에 사로잡혀 슬금슬금 꽁무니를 뺄 것이라는 사실에 유의하자.

심판의 보좌 위에 앉으신 왕께 그의 눈길로 모든 악을 쫓아버리는 도다. 다음 두 가지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그들은 자기들의 죄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되었다. "백성들은 방자하였다(영문:벌거 벗었다)" 고 했다(25절). 그것은, 저들이 자기들의 귀고리를 잃게 되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이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저들이 자기들의 순결을 잃었고 그들의 가장 위대한 은인을 배신하고 그들의 의로우신 여호와께 파렴치한 반역을 했다는 비난을 받을 처지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기들의 영광을 소의 모습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저들에게 큰 수치요 영원토록 남을 오점이었던 것이다. 다른 족속들은 자기들이 자기들의 거짓 신들에게 진실하다는 것을 자랑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진실한 하나님에게 거짓되이 행했다는 것은 당연히 부끄러움이다. 이리하여 저들은" 방자하게 되었고," 자기들의 장신구를 빼앗기고 말았으며, 경멸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들의 갑옷도 빼앗기고 모욕을 당하게 되었다.
그와 같이 우리의 시조도 범죄하였을 때 "벌거벗어 수치를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는 실로 가장 큰 모독을 당하고 만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여기에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그려했다. 모세는 이 점을 알고 염려를 했던 것이다. 모세는 "저들이 방자한 것을 보았다" 고 했다.

2. 모세는 죄를 은폐하거나 위장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정벌해서 만인 앞에 고발함으로써 이러한 치욕을 씻어버릴 수 있는 방도를 취했다. 자기들에게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었다" 는 비난이 들릴 때마다, 그들은 자기들을 비난하는 자들에 응수하여서 비록 그때 거기서 그런 범죄를 저지른 것이 사실일지언정, 자기들은 거기에 대한 정의의 판결을 가했노라고, 이사실을 내세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정부(政府)는 죄를 용인하지 않았다. 또한 죄인들을 처벌하지 않은채 놓아주는 것을 묵인하지도 않았다. 이스라엘이 죄를 짓기는 했지만, 거기에 대한 막대한 대가를 치렀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같이 하여 악을 제거할지니라" 고 하셨다(신 13:5).



(1) 누가 원수를 갚았는가? 레위 자손들이 행했던 것이다(26,28절). 나답과 아비후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 자신의 눈으로 직접 행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칼로써 하셨다. 이로써 우상 숭배란 "위에 계신 하나님을 부인" 하는 일이므로 "재판관들에게 처벌을 받아야 하는 죄악" 이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다(욥 31:28; 신 13:9).
그 징벌은 자기들의 형제의 칼로 행하여졌다. 그리하여 그 정의의 심판은 이스라엘 민족의 명예에 더 큰 기여를 하게 하였던 것이다. 또 만약 저들이 인간의 손에 잡혀야 한다면, 원수들의 면전에서 도망하는 것보다는 그것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그래야 그 무죄한 자들에게도 더욱 효과적인 경고가 되어 차후에도 그런 죄를 범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 레위 자손들에게는 그들의 이웃을 살해하는 불쾌하고도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 맡겨져야 했다. 이것은, 레위인들이 그 범죄를 방지하기 위하여 보다 일찍이 나타나지 아니했고, 또 그것을 하지 말라고 경고도 하지 아니했다는 이유로 레위인들에게 내려진 형벌이기도 했다. 레위인들만이 처형을 실행했다. 그것은, 그 전염병에 물들지 않는 사람들이 다른 지파보다 그들 지파에게 더 많았기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거들의 우두머리 아론은 그렇게 깊이 개입되었는데, 저들이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장한 일이었을 것이다.



[1] 레위 지파는 어떻게 그 일에 대한 부름을 받았는가?
" 모세가 진문(陣門)에 섰다" 고 했다. 곧 재판정에 섰다는 것이다. 거기서 그는 "군기를 세웠다" (사 13:2). 말하자면 진리를 위해 싸울 하나님의 군병을 모집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포고했다. "여호와의 편에 선 자가 누구인가?" 우상 숭배자들은 그 금송아지를 그들의 깃발로 세웠다. 그리고 모세는 그들에게 대항하여 자기의 깃발을 세웠던 것이다. 이제 모세는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았고" (사 59:17), 금송아지에 반대하고 하나님 편으로 나아올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예후처럼 외치지는 않았다. 예후는 "내가 받은 모욕을 복수하기 위하여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 고 외쳤다(왕하 9:32). 모세는 "누가 여호와의 편이 되겠는가?" 고 외쳤던 것이다. 모세가 "행악자를 칠" 사람들을 (시 94:16) 채용한 것은 하나님의 명분을 위해서 였다.

주목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첫째로, 세상에는 근본적으로 두 개의 대사업이 있다. 모든 사람의 자녀들은 이쪽 편이거나 혹은 저쪽 편에 가담해 있다. 죄와 악을 경영하는 사업은 악마의 것이고, 모든 악인들이 그편에 속한다. 그러나 진리와 성결을 경영하는 사업은 하나님의 사업이요, 모든 신앙의 백성들이 가담해 있는 편이다. 여기에 중립이란 허용되지 않는다.

둘째로, 여호아의 편에 가담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우리가 대답해야 할 관심사이다.

세째로, 하나님의 편에 속한 사람들은 비교적 소수이다. 게다가 종종 실제 보다도 더 적게 보이는 수가 있다.

네째로, 때때로 하나님은 당신을 위한 증인이나 병사나 또는 중재자로 나서서 당신의 편에서 일할 사람을 모집하신다.



[2] 그들은 이 직분을 어떻게 수행하라는 위임을 받았는가? "각자 그의 형제를 살해하라" 고 했다(27절). 즉 "너희가 아는 바대로 금 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는 데에 활약한 모든 사람들을, 설령 그들이 너희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거나 가장 친한 친구일지라도 그들을 모두 죽여라" 는 것이다.
우상 제조와 그 숭배의 죄는 공공연히 범해졌다. 그러므로 레위족들은 그들의 친지들 중 누가 거기에 개입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알고 있는 자들을 살해하라는 것 외에는 다른 지시가 필요 없었던 것이다. 또 그 죄인들의 대다수가 그 범행의 처결을 맡은 레위족의 어떤 사람에게 알려졌었거나, 누군가가 그것을 알려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문 밖 길거리에서 두루 발견되는 사람들만 죽이도록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자기들이 행한 일을 부끄러워하여 천막 안으로 물러나서 무릎을 꿇고 회개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계속하는 자들, 그리고 자기들이 범한 가증한 짓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자들에게는 멸망의 징표가 찍혀 있다(렘 8:12).

그러나 어떻게 감히 레위족들은 저들의 송아지를 불태움으로 해서 성이 날대로 나있던 그 많은 자들과 대결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 대한 설명은 어렵지 않다. 죄 의식은 범죄자들의 기를 죽게 했고, 하나님의 주신 사명은 그 수행자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그들에게 활기를 준 것은, 모세가 "오늘날 너희들이 여호와께 헌신하였느니라. 그가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고 말해 주었고, 그 말은 그들이 지금 승전을 눈 앞에 둔 유리한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또한 그 말은 만약 이 기회를 통하여 자신들을 밝히 드러내기만 하면, 하나님과 그의 일을 위해 자기들을 성별한 일이 될 것이며, 자기들의 지파에게 대한 영원한 영예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해 준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호아께 헌신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성별하실 것이다. 그 위무를 다하는 사람은 존귀를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뚜렷한 봉사를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특별한 축복을 내리실 것이다.

또 거기에는 레위 지파에게 주는 축복의 말이 있었다. 모세는 "너희는 여호와께 헌신하라. 그리하여 너희는 축복받을 자격을 얻을 것이니라" 고 말했다. 레위족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도우라고 했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의 정의를 위하여 이 희생물 제물을 드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거룩한 일에 봉사할 사람들은 신실하고 성실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신앙을 위한 뜨거운 양심과 담대한 용기가 또한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히 목회자들은 "분노를 버려야" 하며, 자기들의 가장 가깝고 친한 친척들 보다도 그리스도에 대한 봉사와 그의 사업을 우선적으로 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보다 우리의 친척들을 더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에게 합당치 않다" (마 10:37). 레위족들의 열심이 얼마나 칭찬받았는가를 보라(신 33:9).



(2) 누가 보복을 받았는가? "그 날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고 했다(28절). 아마 이들은 죄지은 많은 사람에 비해서는 적은 수이리라. 그러나 이들은 그 반역자의 두목들이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해서 본보기가 되어야 했던 자들이었다. 아침에는 노래를 부르고 춤추던 자들이 밤이 되기도 전에 동족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러한 갑작스런 변화가 죄 가운데서 안심하고 즐거워하는 자들에게 불원간 떨어질 하나님의 심판이 주는 변화이다. 손으로 벽에 씌어진 글씨에 의해서 벨사살왕이 심판을 받았던 것과 같다. 우리를 경고하기 위하여 이러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고전 10:7).
 
32:30
사생 결단의 중재 기도(출애굽기 32:30-35)

Ⅰ. 백성에 대하여는 회개를 요구한다(30절).

1. 어떤 자들은 죽임을 당했는데도 또 어떤 자들은 사형을 면했기 때문에 자기들에게는 죄가 없다고 착각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모세는 생존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그러므로 너희가 지금은 죽음을 면하였을지라도, 너희가(하나님과) 화해하지 않았으면 너희 모두가 마찬가지로 멸망할 것이니라."
또한 모세는 그들이 자기들의 죄 자체를 가볍게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큰 죄" 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은 죽은 사람들처럼 그렇게 큰 범죄는 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자기들이 결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게 하려고, 모세는 그들 모두에게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고 말했다.

교역자들의 할 일은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죄를 알려 주는 것이요, 그들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너희는 범죄하였도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용서받지 못하는 한 너희는 파멸이다. 구원주가 계시지 않는 한 영원한 파멸이니라. 그것은 큰 죄이다. 그러므로 크게 슬퍼하라. 그 죄가 너희를 큰 위험 속에 빠뜨렸기 때문이니라."

모세는 그들의 죄가 매우 크다는 것을 깊이 깨우쳐 주기 위해, 그 죄로 인하여 생긴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불화를 다시 화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암시해 준다.



(1) 모세가 직접 일부러 "여호와께 올라가서," 율법을 받기 위하여 했던 것처럼 오랜 기간의 엄숙한 대기를 하지 않는 한, 화해는 될 수 없다고 했다.

(2) 또한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신다고 해도, 그것은 우연적인 것이었다. 그것을 기대하기란 극히 어렵다고 했다. 이것은 죄 속에서 큰 화가 깃들어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 저들을 속죄하는 일을 떠맡았던 모세는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기의 동족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올라가야" 했다. 그 죄의 악성(惡性)은 용서를 위해 치른 값에 나타나 있다.

2. 그러나 (그들이 "큰 죄를 범했다" 고 하는 말 들었지만)그 때에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저들에게 진정한 애정을 지니고 있는 그 모세가 그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여호와께로 올라가리라" 고 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 백성에게는 용기를 주었던 것이다. 위로는 회개가 있어야 온다. 먼저 상처를 입고, 다음에 치료가 온다. 먼저 백성들에게 그들의 죄가 큼을 보여주고 그리고 나서 자비를 바랄 희망을 준다.
" 모세는" 죄의 용서를 받는다는 것은 우연(개연성)에 불과할지라도, "여호와께로 올라갈 것이다."

대중보자이신 그리스도는 이보다는 더 큰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올라갔다. 그는 전에 하나님 아버지의 품 안에 계셨었고, 그의 모든 뜻을 완전히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 많은 간청자 우리로서는 절대적인 약속이 아니라, 우연에 속한 것이기는 하더라도 특별한 자비를 기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용기를 받는다. "너희가 혹시 숨김을 얻으리라" (습 2:3).

다른 사람을 위한 우리의 기도 중에서, 우리는 그것이 비록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를 주실런지 의문" 이라 할지라도(딤후 2:25) 우리는 남을 위해 하나님께 겸손하고 열심으로 간구해야 한다.

Ⅱ. 모세는 자비를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중재에 나섰다.

1. 모세의 청원은 얼마나 감동적이었는가? "모세는 여호와께 돌아갔다." 그것은 장막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를 더 받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 문제에 관하여는 더 이상의 의논이 없다.
이렇게 인간의 죄와 과실들은 그들의 친구들과 교역자들에게 일거리를 만들어 주며, 또한 그것은 불쾌한 일이요, 여러 차례 반복되는 일이요, 그들이 즐겨하는 일을 크게 훼방하는 그런 일거리를 준다. 모세는 이 청원에서 다음의 사실을 밝혔다.



(1) 백성들의 죄에 대한 그의 큰 증오심이다(31절). 그는 자기가 그 죄로 인하여 무서워 위축당한 사람처럼 말한다. "오! 이 백성이 큰 죄를 범하였도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먼저 모세에게 알려 주셨었다(7절). 그런데 지금은 그가 애통함으로 하나님께 그 일을 아뢰었다. 그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불리울 자격이 없다는 것을 모세가 알았기 때문이다. "이 백성" 이라고 했다. 곧 이 감사할 줄 모르는 배은의 백성은 자기들을 위하여 황금신을 만들었던 것이다. 황금으로 우리의 신을 삼는다면 황금 우상을 자기들의 희망으로 삼고 거기에 그들의 마음을 쏟은 자들과 마찬가지로 참으로 큰 죄이다. 그는 죄를 변명하거나 가볍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판결을 내렸던 그 죄를 이제는 하나님께 죄의 고백으로 말한 것이다. "그들이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라고 했다. 또 그는 변명하러 온 것이 아니라 속죄를 구하러 왔다. "주여, 죄가 중대하오니 용서하소서" 라고 했다(시 25:11).



(2) 그는 그 백성들의 행복을 간절히 빌었다(32절). "그러나 아직도 무한하신 주의 자비가 용서할 수 없을 만큼 그 죄가 큰 것은 아니니이다. 그러므로 합의하시면 사하옵소서" 라고 했다. 여기서 모세는 무슨 말을 했는가? 이것은 무뚝뚝한 표현이다. "합의하시면(If thou wilt) 사하옵소서. 나는 더 이상 원치 않습니다. 합의하시면 주는 찬양받으실 것이요, 나는 기뻐할 것이요, 나의 중재에 대하여 충분한 응답을 받으리이다" 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포도원지기의 말과 같다. 즉 포도원지기는 "만일 실과가 열면" 이라고 했다(눅 13:9). 또 "만약 주께서 용서하시면" 하는 말은, "오! 주는 용서하실 것입니다" 하는 뜻이다. 즉 "만일 네가 알았더라면" 하는 말이다. "오! 또한 주는 알게 되리이다" 와 같은 뜻을 의미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사오면, 즉 이미 처형의 결정을 내렸다면, 그들은 멸망할 수밖에 없나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가한 처벌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면(고후 2:6), 그들은 모두 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우소서" 라고 했다. 즉 그들이 끊어져야 한다면 나도 그들과 함께 끊어지게 하시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소서. 만약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해야 한다면, 나도 그들과 함께 멸망되기를 바라나이다. 그리하여 나 혼자 살아서 그 약속의 땅을 소유하게 하지 마소서."
이 표현은 에스겔서 13장 9절의 빛에 비추어 설명할 수 있다. 즉 거기에는 이 말이 거짓 예언자들을 위협하는 말로 쓰인다. "그들은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라" 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이 일에 나서지만 않는다면 그를 "큰 나라" 가 되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셨다(10절). 그러나 모세는 말한다. "아닙니다. 나는 나의 이름과 가족이 이스라엘의 멸망 위에 세워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차라리 그들과 함께 몰락하기를 택하겠습니다. 내가 그들의 파멸을 막지 못한다면, 내가 그것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민 11,15). 생존자 중에 나의 이름을 기록하지 마소서(사 4:3). 또 생명을 보전하기로 구별한 자 중의 하나가 되지 말게 하소서. 끝까지 싸우다가 죽게라도 하소서" 라고 했다. 이것은 그 백성에 대한 그의 따뜻한 애정을 표현해 준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며(요 10:11), 나의 백성의 허물을 인하여 산 자의 땅에서 끊어져야" 했던 (사 53:8; 단 9:26) 선한 목자(예수님)의 한 모형이 되었다.

또한 그는 모든 사람에게, 특히 공적인 신분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적인 자세를 보여 준 모범이었다. 모든 사적인 이익은 공동체의 이익과 복리에 종속되어야 한다. 세상에 있는 우리와 우리의 가족이 어떻게 되는가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이득이 되고 이스라엘에겐 평화가 오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모세는 이렇게 끈덕지게 용서를 조르면서 하나님과 씨름을 했다. 모세는 (" 만약 주께서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주는 불의하고 무자비하나이다" 라고) 하나님을 규정하지 않았다. 그것과는 정반대이다.

모세는 "그렇지 않으려면, 나를 이스라엘과 함께 죽게 하소서. 그리하여 여호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라고 했다.

2. 그의 청원의 효력은 얼마나 크게 미쳤는가를 관찰하여 보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말대로 모세를 처리하시지 않으셨다.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의적인 불순종으로 인하여 자기들의 이름이 생명책안에 기록되었던 그 영광을 빼앗긴 사람 외에는 어느 누구의 이름도 그의 책에서 지우려 하지 않으신다(33절). 범죄한 사람은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러나 결백한 자가 죄책을 지고 죽을 수는 없다. 그 백성들이 모두가 통째로 멸망하지 아니하고, 죄와 관련된 자만 죽게 된다는 자비를 암시해 준다.

이와 같이 모세는 점차적으로 지반을 굳혔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당신께서 그 백성과 화해하시려 한다는 절대적 확신을 모세에게 주지는 않으셨다. 만약 용서의 위안을 너무나 쉽게 받게 되면, 그런 죄를 또다시 범하는 데에 담대해지고 죄의 벌에 대한 충분한 의식이 생기지 않을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죄의 뉘우침이 좀 더 깊이 새겨지게 하기 위하여, 위로가 잠시 보류되었던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그들의 위대한 중재자 모세의 신앙과 열심을 시험코자 하셨다. 모세의 청원에 대한 응답을 계속해서 살펴보자.



(1) 하나님께서는 이럼에도 불구하고, 당신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그 땅, 곧 가나안 땅을 주는 자비를 베풀겠다고 계속 약속하셨다(34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비록 이스사엘이 하나님께 합당치는 않지만 모세에게 그들을 인도하라고 돌려 보내시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위한 일반적인 일을 맡고 있는 몇몇 피조된 천사들을 그들 앞에 보낼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일반적인 길을 벗어나서는 저들의 장래를 위해 어떠한 것도, 아무런 특별한 일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모세는 나중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저들과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을 받는다(33:14, 17).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모세가 약속받은 전부였다.

(2)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이후에 다른 죄를 지어 그들을 벌한 일이 생겼을 때에는 이 죄를 기억하시노라고 경고하셨다.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다음 번에 내가 막대기를 손에 들 때에는 이것 때문에 그들에게 매 한 대를 더할 것이니라."
유대인들은 이 사건에 근거를 두고 금 송아지 가루 한 온스 안에 벌이 내려진 것 외에는, 그 후에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벌이 내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나는 다음과 같은 자들의 생각이 성서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금송아지를 숭배함으로써 하나님을 분노케 하지만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많은 희생물들을 가져오게 하고 여러 가지 의식과 제도를 줌으로써 그들의 짐을 무겁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히려 스데반은 말하기를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고, 그 우상에게 제사를 드릴 때에, 하나님은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라고 했다(행 7:41-42). 그리하여 그 백성들이 빠진 바 우상 숭배 죄에 대한 이상한 중독성은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숭배한 데 대한 공정한 심판이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감으로써 비로소 해방된 그런 심판이었다(롬 1:23-25 참조).

죄값으로 당장 죽지 않은 많은 사람들도 이후에 언젠가 계산하기 위하여 잠시 보류된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벌은 서서히 다가오나 분명히 찾아온다.

당분간 "하나님께서 백성을 치셨다" 고 했다(35절). 그들은 아마 페스트나 그 밖의 어떤 전염병에 걸렸을 것이다. 그 질병은 하나님의 진노의 사자요, 장차 나타날 더 큰 진노의 증거였다.

아론이 그 송아지를 만들었지만, 여기서는 백성들이 만든 것이라고 말해졌다. 그것은 그들이 그것을 숭배했기 때문이다. Deos gui rogat, ille facit-신들을 찾는 자가 그것들을 만든다. 역병에 걸린 자는 아론이 아니라, 백성들이었다. 아론의 죄는 의지 박약에서 온 죄였고, 백성들의 죄는 고의적인 죄였다. 거기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 차이가 우리에게는 불분명하나, 하나님께는 명백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사실대로 내려진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이리하여 모세는 집행유예와 형벌의 완화를 성취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분노를 완전히 돌이키게 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어떤 이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완성케 하는 데는 모세의 율법이 무능력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런 일은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로 보류되었던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여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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