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5년 9월 1일,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 별세, “태양왕”

9월 1일 “루이 14세. 왕도 하나, 법도 하나, 종교도 하나”

오늘은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가 사망한 날입니다. 1715년 9월 1일, 루이 14세는 임종 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가지만, 국가는 영원할 것이다.” 절대왕권을 강화한 루이 14세의 때에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였습니다. 그는 약 2천만 명의 백성들을 “왕도 하나, 법도 하나, 종교도 하나”의 정신으로 다스렸습니다. “태양왕”으로 불린 루이 14세는 중상주의 정책을 실행하고, 바로크 양식의 호화찬란한 베르사유 궁전을 지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치세 때 프랑스의 탐험가 르네-로베르 카블리에 드 라 살(Rene-Robert Cavelier de La Salle)은 지금의 루이지애나 주를 발견한 후, 왕의 이름을 본떠서 “루이지애나”라고 불렀습니다. 절대왕정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루이 14세는 낭트칙령을 폐지하여 로마교 복원 정책을 폈는데, 이때 수십만 명의 개신교도가 프랑스를 떠났습니다.

낭트칙령으로 위그노 전쟁은 수습됐지만, 왕 자신이 가톨릭으로 개종해 가톨릭을 실질적인 국교로 규정한 셈이어서 구교도는 신교도보다 유리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칙령의 내용은 파리 시내 이외에서는 신교의 예배 의식을 올릴 수 있고, 위그노에 대해서도 재산 상속·대학 입학·공직 취임의 권리를 인정하며, 신구교간의 분쟁을 심리하기 위해 가톨릭교도 10명과 신교도 6명으로 구성된 특별법정을 파리 고등법원 안에 둔다는 것이었다. 특별법정의 구성은 가톨릭에게 크게 유리했는데도 가톨릭측은 계속 불만을 드러냈고, 마침내 절대군주 루이 14세가 이 칙령을 폐지함으로써 신교도의 종교적·시민적 자유를 박탈하기에 이르렀다. 낭트칙령이 폐지되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프랑스 신교도 가운데 30만 명가량이 영국·네덜란드·프로이센 등 이웃나라로 망명했는데, 이들은 대개 뛰어난 기술자·상인·군인들이어서 프랑스는 막대한 산업적·군사적 손실을 입었다.[고종석, 『히스토리아』 (서울: 마음산책, 2003), 310.]

프랑스 혁명의 싹은 루이 14세의 힘과 화려함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는 왕에게 집중된 정치를 강조했습니다. 절대 왕정 속에서 수많은 국민들이 고역을 치렀음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통치자에게 권세를 맡기시고, 그에게 공의(公義)를 요구하십니다.

루이 14세는……1681년에는 스트라스부르를 점령했다. 세 번째 전쟁은 1688년부터 1697년까지 계속된 팔츠 계승 전쟁이었다. 이때 루이 14세는 팔츠를 불태운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슈파이어, 보름스, 하이델베르크와 그 외 많은 도시들이 잿더미로 변했다. 불타는 팔츠의 연기는 그 후 오랫동안 태양왕의 명성에 그늘을 드리웠다……루이 14세는 가톨릭의 한 파인 얀센주의에 대해서도 위그노파의 경우처럼 폭력을 동원하여 배척했다. 얀센주의자들은 내면화된 경건을 주장했으며, 예수회 교단과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 얀센주의자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수학자요, 철학자였던 파스칼(1623-1662)이다. 왕은 이들을 1660년부터 탄압했으며, 1709년에는 베르사유 근처에 있던 이 파의 근거지 포르 루아얄 수도원을 파괴했다.[Alexander Demandt, Kleine Weltgeschichte, 전은경 역, 『16일간의 세계사 여행』 (서울: 북로드, 2005), 283,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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