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fore, if you are offering your gift at the altar and there remember that your brother has something against you, leave your gift there in front of the altar. First go and be reconciled to your brother; then come and offer your gift.

마태복음5:21-26

[새번역]
21.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24.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25. 너를 고소하는 사람과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 얼른 그와 화해하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겨주고, 재판관은 형무소 관리에게 넘겨주어서, 그가 너를 감옥에 집어넣을 것이다.
26.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NIV]
21.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to the people long ago, 'Do not murder, and anyone who murders will be subject to judgment.'
22. But I tell you that anyone who is angry with his brotherwill be subject to judgment. Again, anyone who says to his brother, 'Raca,' is answerable to the Sanhedrin. But anyone who says, 'You fool!' will be in danger of the fire of hell.
23. "Therefore, if you are offering your gift at the altar and there remember that your brother has something against you,
24. leave your gift there in front of the altar. First go and be reconciled to your brother; then come and offer your gift.
25. "Settle matters quickly with your adversary who is taking you to court. Do it while you are still with him on the way, or he may hand you over to the judge, and the judge may hand you over to the officer, and you may be thrown into prison.
26. I tell you the truth, you will not get out until you have paid the last penny.

살인하지 말지니라

 21절에서 26절을 포함하는 이 문단(paragraph)에서 주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해석과 대조해서 하나님의 율법의 해석으로 주신 이상의 여섯 가지 실례 중 최초의 실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이 본장 나머지와 본 산상설교의 나머지 부분의 해석 방법임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이것은 모두 어떤 의미에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놀라운 진술의 해석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대조가 아니요, 모세 율법에 대한 거짓된 해석과 우리 주께서 주신 율법의 참된 제시와의 대조인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지어준 구별입니다. 거기서 바울은 자기가 한때 율법을 완전히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한 뜻을 갑자기 깨닫고 즉시 정죄감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율법의 정신(영)이었다는 것과 탐심이야말로 탐심의 실제 행위가 율법 아래서 정죄 받아 마땅한 만큼 정죄 받아야 함을 바울은 깨닫지를 못했었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여기서 주신 율법의 해석을 통하여 흐르고 있는 원칙에서 이것을 보게 됩니다.

 율법에 대한 자세를 이와 같이 정죄하시고 나서, 주는 율법을 성취하러 오셨다고 선언하시고, 청중들에게 그 의미를 정확히 깨달아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나서 이것의 실례들을 주시는 일에 착수하셨습니다. 주는 여섯 가지 대조를 제시하셨는데 이 대조들은 각기 다음의 형식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즉 '옛 사람에게 말한 바 ...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입니다. 이제 첫째 실례를 살펴보겠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항상 율법의 의미와 요구마저도 감손시킨 죄책이 있습니다. 여기에 그 완전한 실례 하나가 있습니다. 주는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올바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할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에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살인하지 말라'고 가르쳤던 그들은 분명히 율법을 가르치고 있었습니까? 이 점에서 바리새인과 석관들이 어떤 비판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이렇게 물어볼 유혹을 이 점에서 받습니다. 그 대답은 그들이 이 말씀에 그 무언가를 추가시켰다는 데 있습니다. 즉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되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에서도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하지 않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이것에 대한 대답은 율법이 사실 그렇게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민수기 35: 3-31절에서 이것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에 잘못된 것은 무엇입니까? 잘못된 점은, 바리새인들이 이 두 가지를 병치시킴으로써 '살인치 말라'는 계명의 뜻을 감소시켜 실제 살인을 범하는 문제로 격하시켰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들은 둘째 것을 첫째 것 바로 뒤에 덧붙임으로써 이 명령을 약화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둘째로 한 일은, 이 명령에 붙어있는 재가를 치안판사(civil magistrate)의 손에 벌하는 것으로 격하시키고 제한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에서 '심판'은 지방 재판소를 의미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단순히 이렇게 가르치고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즉 '너희가 살인하면 치안판사에게 형벌받을 위험이 있기 때문에 살인하면 안된다'라고 말입니다. '살인치 말라'는 이렇게 큰 계명에 대한 그들의 해석이 이러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이 계명에서 참된 내용을 비워서 한낱 살인의 문제로 격하시켜 버렸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지방 재판소의 심판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계명을 순전히 법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므로 '네가 살인을 범하면 어떤 결과가 따를 것이다'라는 하나의 법조문에 지나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기네가 살인을 범하지 않는 한 이 점에 있어 율법에 대해  완전히 만조감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사람이 살인을 범하는 것은 그들에게 무서운 일이었기 때문이며 만일 살인을 범하면 법정에 소환을 받아 이 죄에 상당하는 판결을 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살인죄를 범하지 않는 한 만사는 잘 되어가고 있고, '살인치 말라'는 계명을 대면하여 '나는 율법을 지키고 성취하였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는 결국 '아니다. 아니다.'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특징이 되는 의와 율법관이 철저한 조작(travesty)임을 너희는 여기서 보게 된다. 그들은 율법을 너무 감손시키고 제한했으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법을 공포하셨을 때 의중에 두신 진짜 명령을 전달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기네가 속 편할 수 있도록 계획된 한계와 한도 안에 하나님의 율법을 속 편하게 제한시켰다'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범한 율법에 대한 이 잘못된 해석을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원칙들의 하나를 여기서 보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이것은 우리들도 여전히 범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성경에서 보는 그대로의 하나님의 율법에 직면하고서도 그것을 우리가 부정으로만 지키기 때문에 매우 쉽게 지킬 수 있는 것으로 만들 정도로 율법을 해석하고 정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만사가 잘 되어 간다고 우리 자신을 설득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사도 바울은 바로 이 과정의 결과로서 그가 회심하기 전에는 율법을 완전히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부자 청년 역시 이런 식으로 배웠고 동일한 거짓 해석을 믿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율법 조문(letter)을 받아들이고 영과 그 내용과 의미를 온통 잊어버리고 있는 한 율법에 대하여 완전히 의롭다고 우리들 자신을 설득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자, 주님이 이 허위를 어떻게 노출시키시며, 율법을 그와 같이 보는 태도가 하나님의 거룩한 법의 의미를 완전히 오해하는 것임을 어떻게 보여주시는가를 살펴봅시다. 주님은 세 가지 명백한 표제 아래 그의 견해와 해석을 진술하셨습니다.

 첫째 원칙은, '중요한 것은 율법 조문뿐 아니라 영이다'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살인치 말라'(Thou shalt not kill)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살인을 범하지 말라(thou shalt not commit murder= 불법적이며 미리 계획된 살인)는 뜻만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해석을 한다면 우리가 살인을 피한다고 생각하도록 율법을 정의하는 것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우리가 바로 이 법을 가장 심하게 깨트리는 것이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주는 이 점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즉 이 계명은 실제 살인을 포함할 뿐 아니라 형제에 대하여 마음속에 까닭 없는 분노감을 품는 것도 포함합니다. '살인치 말라'는 계명을 바로 이해하는 방법은 이와 같습니다. 즉 '누구든지 형제에게 까닭 없이 성을 내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되리라' 주는 결국 '너희가 실제로 살인을 할 때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말하는 이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말을 듣지 말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마음속에 성을 내면 너희는 이 율법의 똑같은 요구와 꼭 같은 형벌을 받게 되리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우리가 율법의 참된 영적 내용을 보기 시작하게 되는 것은 이 지점에서입니다. 동시에 주께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 하신 뜻이 무언가를 봐야 하는 것도 이 지점에서입니다. 모세를 통하여 주신 옛 율법에는 이 영적 내용이 모두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 점을 놓친 것은 이스라엘의 비극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모세의 율법과 일단락을 짓고 있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그렇습니다. 옛 법은 마음속에 형제에 대하여 까닭 없는 분노감을 품지 말 것을 요구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마음속에 적대감을 느끼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살인에 해당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어떤 사람을 까닭 없이  미워하고, 통렬감을 느끼며 몰인정한 분개감을 느끼는 것은 살인입니다. 그런데 '까닭 없이'란 수식어가 거기에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일부 권위자들이 있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어떤 사본에는 이 어구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포함되어야 하는지 아닌지를 본문 비평을 근거로 해서 정확히 결정짓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이 어구를 있는 그대로 취한다 해도 이것은 엄청난 요구가 되며 이 수식어구를 제외하면 더욱 엄청난 요구가 됩니다. 여러분은 형제에게 성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에 대하여 마음속에 성내며 특히 믿음의 집식구들에게 성내는 것은 주님에 의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살인에 해당하는 형벌을 받아야 할 죄가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까닭 없는 분노감을 느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멸시적 표현을 범해도 안됩니다. '누구든지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리라' '라가'는 쓸모없는 놈'이란 뜻입니다. 멸시의 태도를 들어내는 말인데, 우리들 마음속에 이런 경향이 있음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라가' 곧 '쓸모없는 놈'이라고 말하는 것은 주님에 의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무서운 죄가 됩니다. 우리 주는 이것을 자주 지적하셨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죄의 목록을 주목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다음 진술을 예로 들어봅시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 살인과 도적질과 술 취함과 기타 죄들에 대하여 말하는 우리의 태도가 이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눈에 띄게 같음을 여러분은 아십니다. 하지만 주는 악한 생각을 항상 살인과 함께 포함시켰으며 다툼과 원한과 속임과 기타 우리가 그처럼 무섭고 더러운 죄로 여기지 않는 많은 것들을 포함시키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잠깐 멈추고 생활을 분석해 보는 순간 이것이 얼마나 완벽한 진술인가를 보게 됩니다. 멸시, 경멸, 조롱감은 궁극적으로는 살인으로 유도되는 바로 그 영(정신)인 것입니다. 이것을 실제 살인으로 표현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러 가지로 있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과 생각에서 서로 살인을 범할 때가 허다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살인만큼 무섭고 더러운 생각들을 품습니다. 영의 영역에도 이런 소동이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라가'라고 말한 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살인까지는 안 가더라도 사람들이 파멸될 수 있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명성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비판의 말을 속삭이거나, 다른 사람의 허물을 일부러 찾아내어 다른 사람의 신념을 흔들어 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여기서 바로 이런 우를 지적하고 계십니다. 주의 목적은 살인치 말라는 계명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보여 주시는 데 있었습니다. 즉 살인은 육체적 생명을  파괴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살인은 그 이상으로, 사람의 영과 혼을 파괴하며 어떤 모양 어떤 형태로든 그 사람을 파괴하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주는 셋째 문제로 나아가십니다. '누구든지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입니다. 이것은 욕설의 표현, 곧 다른 사람을 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음속의 증오와 매서움이 표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분석해감에 따라 1장에서 이미 제가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산상보훈이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거나 이것이 현대 기독교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무섭고 위험한 과오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산상보훈은 오늘의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산상보훈은 우리의  존재 깊은 밑 바다까지 탐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실제 살인의 문제에 대면할 뿐 아니라 살인이 온통 우리 마음과 감정과 감성과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영 속에 있음을 직면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는 살인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술입니다. 개중에는 '성내는 것은 항상 나쁘다는 뜻입니까? 무릇 모든 성냄은 금지되고 있습니까"라고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약성경에 주님이 이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강한 표현을 사용하신 실례도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주님은 그들이 "소경"이니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백성에게로 향하여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O fools, and slow of heart to believe)라고 하셨고 또 "우맹이요 맹인들이요"(You fools and blind)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금지령을 발하신 동시에 그 자신이 그런 말을 하실 수 있습니까? 그가 바리새인들에게 화를 선언한 마태복음 23장과 이 가르침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는 난점이 없습니다. 주께서 이 화를 선언하셨을 때 주님은 재판장의 신분으로 선언하신 것입니다. 주는 하나님께 권세를 받으신 분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최후 심판을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는 메시야로서 그렇게 하실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주는 그들에게 복음을 제공하신 바 있습니다. 온갖 기회를 그들에게 제공하신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복음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주는 거짓 종교와 위선을 반대한 진술을 늘 말씀하신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체를 정당화시키려 하여 하나님을 배척하는 자기 의를 고발하고 계십니다. 그의 이 말씀은 재판적인 의미의 선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나 제가 그와 같은 표현을 그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한다면 이 특정 죄책을 면제받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문제 되고 있는 이른바 저주적 의미의 시편에 있어서도 정확히 같습니다. 시편 기자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 자신의 원수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와 하나님의 교회와 하늘나라를 저주하고 욕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선언하고 있는 셈인 것입니다. 그것을 이렇게 표현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분노는 죄에 대해서만 나타내져야 합니다. 죄인에게 분노감을 느껴서는 아니 되며, 그에게 슬픔과 동정의 염을 가득 품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라고 시편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죄와 위선과 불의와 기타 악한 모든 것을 볼 때에는 분노감을 느껴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하신 사도 바울의 명령을 성취하는 방법임은 물론입니다. 이 두 가지는 조금도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의 분노는 항상 의분이었으며, 거룩한 분노였으며,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노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1:18)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이것에는 의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죄에 대하여 나타나며 그의 진노는 죄위에 쏟아져 내려옵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지면 거룩해질수록 죄에 대하여 더욱 분노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거듭 말씀드리지만 죄인에게 분노감을 느껴서는 안 됩니다. 사람에게 분노감을 느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람과 그의 행하는 바를 구별해야 합니다. 멸시감이나 혐오감을 품거나 이런 욕설의 표현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것들을 구별하는 선을 그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는 결국 '너희가 단순히 살인을 범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 명령에 대하여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상태는 어떻습니까? 이런 일들에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다른 사람이 여러분에게 그 무언가를 행했을 때 여러분은 미친듯 맹렬한 노염 속으로 빠져듭니까? 여러분에게 사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분노감을 느끼십니까?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때 의중에 두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감찰하시며, 외부의 행동에만 관심을 가지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우리가 이미 지켰다고 알고 있는 그 무엇으로 혹은 우리가 범하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그 무엇으로 감손시킴으로써 일종의 자기의 의를 만들어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각자 자기를 검토해 봅시다.

 두 번째 진술로 나아가 보겠습니다. '우리의 태도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것을 이런 말씀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주는 부정적인 것을 강조하시고 나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적극적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것은 가장 의미심장하고 중요한 진술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살인과 악한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은 우리가 형제와 바른 관계를 가지기 위하여 적극적 단계를 취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위험은 우리가 부정적인 입장에 머물러 서서 우리가 실제로 살인을 범하지 않은 이상 만사는 잘 되어 간다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어온 두 번째 단계가 있습니다. '좋아, 나는 실제 살인을 범하면 안 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불친절한 일들을 말해서도 안된다. 나는 입술을 조심해야 한다. 생각이 거기에 있긴 있어도 나는 그것을 말해서는 안된다'라고 우리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멈추어 서서 '내가 이런 것들을 말하지 않는 한 만사는 잘 되어 간다'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가 여기에 멈추어서는 아니 되며 마음속에 그런 생각과 느낌을 품어도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에 이 자리에 멈추어 서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추하고 하잘것없는 생각들이 마음속에 들어오려는 순간 그들은 그들의 마음을 적극적이며 아름다운 것으로 방향 전환을 시킵니다. 우리가 이것에 머물러 있지 않은 한은 모두 괜찮습니다. 하지만 이 불친절하고 하잘것없는 생각들을 억제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 이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문젯거리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하여 실제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적극적인 목표를 노려야 합니다. 형제와 우리들 사이에 영에 있어서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는 단계에 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는 23절과 24절에서 영적 생활에서 매우 미묘한 위험 곧 악을 선으로 상쇄함으로써 도덕상의 과실을 보상(속죄) 하려고 애쓰는 이 무서운 위험을 상기시킴으로써 이점을 강력히 주장하셨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것에 대해 죄책이 있음을 고백하야 할 것입니다. 위험은 도덕상의 과실을 덮어버리기 위해 어떤 의식상의 희생을 고안해 내는데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일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규칙 바르게 성전에 갔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세부와 사소한 일들의 문제에는 항상 꼼꼼했습니다. 하지만 내내 그들의 동료들을 멸시하여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양심의 동통을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모면하였습니다. 즉 '나는 결국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으며 나는 예물을 제단에 가져가고 있다'라고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일으키시는 가책에 직접 직면하지 않고 우리들 자신에 대하여 '자, 지금 나는 이러저러한 일을 행하고 있다. 나는 이 점에서 큰 희생을 하고 있다. 나는 그 점에서 도움이 되고 있다. 나는 기독교 사역을 위하여 이러저러한 일에 바쁘게 종사하고 있다고'고 말하는 경향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고 거듭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기독교인이나, 우리들 개인의 사생활에서 느끼는 시기에는 우리가 정면으로 대하지 않는 실정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저것으로 균형 잡으러 하고 있습니다. 즉 이 한 가지 선행이 저 한 가지 악행을 대신해 줄 것이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주님은 아니다. 아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다'(눅 16:15). 이 문제는 너무 중요하므로 내가 비록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는 제물과 함께 제단 앞에 있다 하더라도, 내가 한 말이나 행한 일 곧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했거나 잘못되게 한 일을 갑자기 기억하거나, 내가 그에 대해 불친절하고 수치스러운 생각을 품고 있거나, 어느 모로든 그의 삶을 방해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거기에 버티어 서 있기보다는, 경외감을 품고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을 기다리시게 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형제와 바르게 된 후에 돌아와서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알려져 있는 죄를 품고 있는 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예배 행위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예배를 드리려고 애를 쓸 때 처리하지 않고 고백하지 않은 죄가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을 알게 되면 예배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 예배는 전혀 무가치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적대 상태에 있다면, 만일 여러분이 다른 사람과 말을 하고 있지 않다면 만일 여러분이 불친절한 생각들을 품고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장애와 방해가 되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예배 행위가 조금도 가치가 없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 예배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주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20절 말씀을 봅시다.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보냐'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형제와 잘못되어 있는 것을 여러분 마음속에 알고 있는 이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헛되며 효과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와 부정을 처리하시기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보실 수 없을 만큼 순결하십니다. 우리 주님에 의하면 이 문제는 너무 중요하므로 여러분은 기도를 중단해야 하며, 말하자면 하나님을 기다리시게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가서 바로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과 올바로 되기까지는 여러분은  하나님과 올바로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사무엘상 15장에 있는 이것의 실례를 여러분들에게 상기시킴으로 이것을 간추려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시고 우리에게 지키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한때 사울이 아말렉을 모두 진멸하라는 명령을 하나님께 받은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여 말하기를 '나는 백성들의 일부를 살려주고 하나님께 드릴 제사용으로 짐승과 가축을 일부 남겨 놓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잘 되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며 찬양을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 사무엘이 갑자기 나타나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사울은 대답하여 '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요'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말하기를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다면 내 귀에 들리는 양과 소의 울음소리는 어떻데 된 것입니까? 당신은 무슨 일을 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사울은 '그들의 일부를 남겨 두기로 결정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중대하고 무서운 말을 발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사울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사울왕에 대하여 항상 측은한 느낌을 가집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는 행하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의 명령을 제한하면서도 우리는 어쨌든 그에게 예배 행위를 베푸는 것으로 그의 명령을 보상할 것이며,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느낌을 가지며, 번제나 다른 제사를 주의 음성을 순종하는 것만큼 기뻐하시리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주께서 그러시지 않는 것은 물론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나으니라'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제물을 놓아두고 가서 여러분의 형제와 일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장애물을 제거하십시오. 그 후에 다시 돌아와서 예배를 드리십시오. 그래야만 가치가 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입니다.

 마지막 원칙에 대하여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역설하는 까닭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 때문입니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그렇습니다. 이 문제는 이처럼 긴박하고 절박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이 일을 즉시 행하셔야 합니다. 한 순간도 지체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여려분의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관계를 항상 기억해야 한다고 주께서 말씀하시는 식이 이러합니다. 우리가 그에 대하여 죄를 범하고 있거나 그와 무언가를 잘못되어 있는 형제의 관점에서만 생각해서는 아니 되며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의 우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재판장이시오, 변호인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항상 요구하고 계시며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법정을 지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재판장이시요, 그의 법은 절대적인 법입니다. 하나님은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으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과 할 수 있는 한 급히 사화하십시오. 주님은 여기서 우리가 '길에 있을 때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길을 걷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갑자기 우리의 대적이 와서 '네가 빚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할테냐?'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그와 급히 사화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법대로 처리하여 호리라도 다 갚으라고 여러분에게 요구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비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 세상을 걷고 있습니다. 여기서 법은 그 권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 법은 말하기를 '너와 네 형제와의 관계는 어떠하냐? 네 마음속에 있는 것들은 어떠하냐? 너는 이것들을 수행하지 못했다'라고 합니다. 주님은 이 문제를 즉시 해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내일 아침에는 여기에 있지 않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영원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이 점에서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가지십니까? 이 거룩한 율법에 대한 주의 해석을 살펴 본 그대로 율법의 요구를 느끼고 있습니까? 정죄감을 느끼십니까? 우리는 어떤 것을 말하고 생각하고 행한 것입니까? 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정죄받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까? 그의 율법을 통하여 이렇게 요구하고 계신 것은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길에 있을 때 할 수 있는 한 속히  행동하라고 말씀하시는 명령을 주신 데 대해서 저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의 조건은 매우 쉽습니다. 그의 조건은 이와 같습니다. 곧, 나는 이 죄를 인정하고 그것을 철저히 고백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들볶고 도발한다 해도 여하한 자기방어나 자기 의를 중단합니다. 나는 주저함 없이 이것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겸손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장애물과 장벽을 제거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는 한,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고소하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너와 화해하겠다. 내가 그것을 모두 용서하려는 것은 네가 더러운 죄인이요, 네가 내게 빚지고 있는 청구서를 네가 결코 지불할 수 없으나 내 아들을 너희 세상에 보내어 너 대신 그것을 갚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청구서를 말소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네가 사랑스럽고 친절하고 선하기 때문이 아니며 네가 내게 대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네가 원수 되어 너 자체로써도 가증하고 네가 나를 미워하고 다른 사람들을 미워할 때 그렇게 한 것이다. 내가 그를 보낸 것은 네가 더럽고 쓸모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한 것이다. 그는 일부러 와서 자기 몸을 죽음에 내어 주었다. 내가 너를 철저히, 대가 없이 절대적으로 용서하는 것은 모두 이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이런 조건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히리로다! 파산한 더러운 죄인에게 이런 조건을 제시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 조건이란 철저하고 절대적인 고백과 회개이며, 우리가 이것으로 모든 것을 상환할 수 있다는 것이며, 십자가 위의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과 자기를 주심과 자기희생에서 완전히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만 용서받음을 인정하면 된다는 조건입니다. 급히 사화합시다. 이 순간 여러분이 어떤 죄책을 느끼던 예물을 놓고 가서 그것을 바로잡으십시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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