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I tell you that unless your righteousness surpasses that of the Pharisee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you will certainly not enter the kingdom of heaven.

마태복음5:20

[새번역]
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NIV]
20. For I tell you that unless your righteousness surpasses that of the Pharisee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you will certainly not enter the kingdom of heaven.

제19장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하는 의

 우리는 이제 20절의 진술을 특별히 다루려고 합니다. 이 진술에서 주님은 율법과 선지자들에 대한 그의 태도, 특히 율법에 대한 태도를 정의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17절과 20절까지의 이 짧은 문단이 주의 사역에서 얼마나 중요하며 이 문단이 복음에 대한 우리의 전망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 보았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그의 사역의 특징을 매우 분명하게 터놓고 말씀하셔야 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어째서 이것에 대해 여러 가지 오해를 품어야 하는가 하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은 유별난 데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사회에 속하여 있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공인된 율법 박사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앞에 한 분의 교사로 서 계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주는 공인 받은 가르침을 비판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으며, 어떤 의미에서 백성들의 공인된 교사들을 서슴치 않고 비판하셨습니다. 더구나 그의 행동은 어떤 점들에서 이상했습니다. 죄인들과 교제 관계를 피하기는커녕 이 관계를 일부러 택하셨습니다. 그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의 가르침 가운데는 '은혜론을 강조한 요소도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 일들은 그의 말씀과, 백성들이 그들의 지도자들로부터 이때까지 들어온 것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의 메시지와 그 메시지의 일반적 의미와 관련하여 중요한 오해에 빠지기가 쉬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께서 두 가지 원칙을 설정하여 그의 가르침을 정의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첫째로 그의 가르침은 결코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둘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 매우 달랐습니다.

 율법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율법을 우리에게 쉽게 만드시기 위해서나 우리에 대한 율법의 요구를 어느 의미에서든 덜 엄중하게 만드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오신 목적은 율법을 폐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여기서 율법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알아야 하고 그런 다음 율법을 지켜야 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즉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여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라고 하십니다.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과 '지극히 큰 것'이 무슨 뜻인지를 고찰하면서 시간을 보낼 필요는 없습니다. 이 둘 사이에 어떤 의미의 구별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계명이며, 주께서 여기서 강조하시는 바와 같이 '지극히 작은 계명'도 매우 중요합니다. 더구나 야고보가 상기시키는 바와 같이 '누구든지 큰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에는 일종에 구분이 있으며 두 가지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와 관련되고, 둘째 부분은 우리의 다른 사람에 대한 관계와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중요성에 있어 우열의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계가 사람에 대한 관계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서기관이 우리 주님께 와서 가장 큰 계명이 어느 것이냐고 물었을 때 우리 주님은 그에게로 향하여 '너희는 크고 작은 계명을 운운해서는 안됩니다. 첫째 가는 계명이라거나 둘째가는 계명을 운운해도 안된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기억하실 것 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율법을 읽으실 때 계명 중에 지극히 작고 지극히 큰 계명에 있어서 이런 구별에 어떤 의미가 있음을 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가 율법의 모든 부분 모든 대목을 지켜야 하며 그것을 모두 행하고 모두 가르쳐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지점에서 주님은 우리의 생각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으로 향하게 하십니다. 그 까닭은 율법이 이처럼 우리에게 사활로 중요한 것이라면, 그리고 분석을 낱낱이 한 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은혜의 전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의를 성취하고 지킬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면 우리는 율법이 무엇이며 율법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를 분명히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상으로 성서의 성결론을 살펴보았습니다. 성결은 우리가 하는 어떤 체험이 아닙니다. 성결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성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을 지키는데 체험이 도움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결과 성화를 체험으로 받을 수는 없습니다. 성결은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결은 하나님의 아들이 여기 세상에 계실 때 율법을 지키신 바와 같이 율법을 높이고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결은 주를 닮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성결입니다. 그러므로 성결은 율법과 밀접히 관계되어 있으며 항상 율법을 지키는 관점에서 생각되어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세력을 잡은 것도 바로 이 점에서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장 성결한 사람들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들이 의와 성결이 부족되고 있음을 매우 분명히 보여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 까닭은 율법에 대한 그들의 비극적인 오해와 그릇된 해석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두 점에서 주님은 부정어를 사용하시어 그의 가르침을 강화시키셨습니다. 20절의 말씀은 이 말씀을 들은 사람에게 가장 놀랍고 쇼킹한 진술로 임했음에 틀림없습니다. 주님은 '내가 온 것은 율법의 요구를 경감시킴으로써 여러 가지를 쉽게 만들려고 온 것이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만약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하지 못하면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가 되는 것은 그만두고 너희는 천국에 들어갈 소망이 전혀 없다'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자기 나라의 눈에 가장 두드러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시간의 대부분을 율법을 가르치며 해석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전체 삶을 율법 연구와 해석에 바쳤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누구보다 율법과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크게 주의를 기울여 율법을 전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율법과 함께 사는 삶이었으며 다른 모든 사람은 그런 이유로 그들을 우러러보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소위 그들의 거룩함 때문에 눈에 띄는 유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란 말은 '분리주의자'란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네와 다른 사람들을 분리시켰으며 그들이 그렇게 한 까닭은 그들이 모세 율법보다 더 준열한 법과 관련된 의식행위법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이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더 엄격한 삶과 행동의 규칙 및 규례를 작성했습니다. 예를 들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과 서기관에 대한 말씀에 보면 바리새인은 자기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한다고 말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일주일에 두 번 기도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말씀이 없습니다. 사실은 구약성경은 일 년에 단 한 번만 금식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점차 율법 체계를 정교화하여 일 년에 한번 금식하는 대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라고 권장하고 명령하는 지점으로까지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윤리와 행동에 대하여 지나치게 엄격한 법전을 만들었으며 그 결과로 모든 사람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덕행의 모범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평민들은 '아, 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선하게 될 소망이 없다. 그들은 눈에 뜨인다. 그들은 신성하고 거룩하게 되려는 목적으로 살고 있다. 이것이 그들의 고백이다. 이것이 종교적, 도덕적, 영적 의미에서 그들의 전 목적이요 대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우리 주님이 오십니다. 주님은 이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고찰해 봐야 할 가장 중요한 점입니다. 우리의 성결관과 성화관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의 신앙관은 어떠합니까? 우리 주님은 여기서 기독교인의 의, 곧 가장 작은 기독교인의 의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나아야한다는 것을 전제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고백을 주의 분석에 비추어서 검토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복음서의 많은 지면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관한 주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는 사실에 자주 인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는 항상 그들에 관해 언급하셨으며 그들을 다루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그를 비판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이 사람들과 그들의 가르침에 의존하고 있는 것을 주께서 아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주님이 하셔야 했던 한 가지는 그들의 가르침이 공허한 것을 보여주고 백성들에게 참된 가르침을 제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께서 여기 이 말씀을 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리새 종교의 결점을 보고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기 위하여 바리새인의 종교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데 가장 편리한 방법 하나는 우리 주님이 기도하러 성전에 함께 올라간 바리새인과 세리에 대해 하신 말씀의 내용을 보는 일입니다 기억하다시피 바리새인은 크게 눈에 띄는 곳에 우뚝 서서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는 것, 특히 저 세리와 같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런 다음 자기 일신상에 관한 일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자기는 착취자가 이니며 부정한 자가 아니며, 간음자가 아니며, 저 세리와 같지 않았습니다. 이 진술들은 사실입니다. 우리 주는 이 점을 인정하셨습니다. 주께서 반복해 말씀하신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렇게 외적 의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들은 제가 상기시킨 대로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습니다. 그들은 십일조도, 즉 그들이 소유했던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하나님의 대의를 위해서 바쳤습니다. 그들은 식용식물인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이르기까지 가졌던 모든 것의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추가해서 그들은 극히 신앙적이었고 예배와 종교의식 준수에 매우 정확하고 엄격했습니다. 이 모든 것에 바리새인들은 말로만이 아닌 실제로 행하였습니다. 하지만 네 복음서를 대중없이 읽든 마구잡이로 읽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종교처럼 주님으로부터 분노를 자아낸 것이 없었음을 보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선언된 무서운 화가 기록되어 있는 마태복음 23장을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우리 주님이 이 사람들을 들추어낸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과 종교에 대한 그들의 자세에 대하여 주께서 비판하신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 보실 것입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모두 이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함께 생각해 봐야 할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의 하나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착각하고 스스로 속을 가능성이 무섭게도 실재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우리 주님에게 위선자들로 탄핵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위선을 의식하지 못한 무의식적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사실을 만사가 잘 되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성경을 보시면서 이 무서운 위험을 늘 상기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것을 의지할 가능성이, 참된 예배의 자리에 서기 보다 참된 예배에 관계되는 것들에 의지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길에 다음의 위험을 여러분들에게 상기시켜 드리겠습니다. 즉 복음주의자들이라고 주장할 뿐 아니라 이 점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우리들이 매우 범하기 쉬운 것이 바로 이 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종교에 관한 우리 주의 분석을 살펴봅시다. 저는 어떤 원칙들을 도출해 내보려고 하였는데 그것을 다음의 형태로 여러분들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어떤 의미에서 그들에 대한 근본적인 비난은 그들의 종교가 마음의 종교가 아니라 전적으로 외적이요, 형식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주께서 어떤 날 그들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 우리 주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이 모든 진술은 사법적 정죄(judicial condemnation)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진노 사이에는 모순이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이 가득하셨으므로 자기에게 어떤 일이 행하여졌던 거기에 불평하신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신앙을 잘못 풀이한 사람들을 사법적으로 탄핵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그의 성격상 어떤 모순이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성결과 사랑은 함께 다닙니다. 거짓된 자와 가짜 의의 가면을 벗기고 외식자를 탄핵하는 것은 거룩한 사랑의 일부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어느 때엔가 그들에게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바리새인들이 시장에서 돌아와서 식탁에 앉아 손을 씻지 않고 먹기 시작한 주의 제자들의 행동을 보고 놀랐습니다. 주는 그들에게 '아, 너희 바리새인들은 외부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세심하면서 내부에 대해서는 어쩌면 그렇게도 무관심하냐.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사람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간통과 도둑질과 거짓 증거와 기타 이런 것들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뒤에 가서 마태복음 23장의 기록이 어떤 것인지 기억하십니다. 우리 주는 바리새인들에게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외부는 그럴듯하나 속을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 규칙적으로, 꼬박꼬박 출석할지는 몰라도 시기심이 강하고 심술궂고 앙심 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바리새인들을 탄핵하신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가 만일 이 외식 종교의 요구를 능가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늘나라 시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외적 행동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한때 신앙에 대한 최상의 정의는 이것이라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즉 '신앙은 사람이 자기 혼자 있을 때 행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환언하면 여러분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싶으면 여러분의 생각과 욕망과 상상과 함께 혼자 있을 때 그때에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 대하여 어떤 말을 하는가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때에는 얼마나 조심합니까?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어떤 것을 말합니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가 혼자 있을 때 무엇을 행하는가입니다. 우리가 부끄러워 외부 세계에서 숨기는 우리의 내부에 있는 것들, 이것들은 우리가 실제로 어떤 존재들인가를 최종적으로 선언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가한 두 번째 비난은 그들이 도덕보다 의식에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의 두 번째 비난이 첫 번째 비난을 뒤따르고 있는 것은 물론입니다. 이 사람들은 외적 행동에는 조심스럽습니다. 그들은 손을 씻는 일과 율법의 의식적 면에는 아주 꼼꼼했습니다. 하지만 율법의 도덕적 면에는 조심스럽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지금도 무서운 위험이 되고 있다는 것을 제가 여러분에게 상기시킬 필요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주일 오전에 하나님의 집에 가는 한, 주일 나머지 시간에는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치기를 주저하지 않는 종교가 있긴 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점점 더 성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해서 오전 예배에 참석하고 난 뒤에 여러분의 주일의 나머지 시간을 멋대로 지켜도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러고도 이것에 양심이 아주 편한지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물론 오전 예배입니다. 내게는 가르침과 교훈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저녁 예배는 순전히 전도 목적을 위한 예배이니까 편지나 쓰고 독서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려고 합니다'라고들 말하는 경향이 커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의 잘못이었습니다. 저는 말씀드립니다. 주의 날은 가능한 하나님께 많이 받쳐야 할 날이라고 말입니다. 이날에는 할 수 있는 대로 만사를 제쳐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뜻이 성하고 번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네와 외적 의무만을 다하는 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예배에 다녀왔으며 그들에게 그것으로 충분하였습니다.

 바리새 종교의 또 한 가지 특징은 그들의 종교가 그들 서로가 서로에게 허용하기로 결정한 어떤 세대(dispensations)에 기초를 둔 사람이 만든 규칙과 규례의 하나였다는 것과 이 규칙과 규례를 수단으로 하여 그들이 지키는 척 가장한 율법을 깨뜨렸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일부는 자녀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이것을 무시한 죄책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자, 우리는 주께 일정 몫의 돈을 받쳤으니 부모를 돌보거나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잘 해드리기가 힘들다'라고 했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는 이런 식으로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한 율법의 요구를 피하고 있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신 셈입니다. 그들은 전통을 세공화하였으므로 이 전통의 대부분은 사실 율법의 요구를 피하기 위한 매우 영리하고 교활한 계교 이외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특별한 방법으로 이행했다고 말함으로써 사실상 율법의 요구를 피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은 그들이 율법을 전혀 이행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개신교들은 로마 가톨릭에 대해서 그리고 특히 결의론자들이라 불리운 중세 로마 교사들에 대하여 비판적입니다. 이 사람들은 교묘하고 미묘한 구별을 짓는데 전문가였습니다. 특히 양심과 품행에 관계된 문제에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가망없을 정도로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것들을 조화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 때가 허다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신문 지상에서 보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혼을 믿지 않는 로마 가톨릭 교인이 이혼한 사례를 보십니다. 이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결의론(casuistry)에 의해 - 일견 율법의 문자를 만족시키는 것 같아 보이는 일종의 서류상의 설명이 되어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단순히 가톨릭 유의 종교를 비난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도 이점에서는 모두 전문가들임을 하나님은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죄를 합리화할 수 있고 그 죄를 잘 변명하여 빠져나갈 수 있으며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에 대하여 구실을 늘어놓기 일쑤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에게 전형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께서 그들에게 던진 또 다른 비난은 그들이 근본 그들 자신과 그들의 의에만 관심을 가졌다는 것인데, 이것은 그들이 거의 자기만족에 빠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환언하면 바리새인들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 종교의 의무를 이행했을 때도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을 높이는 일은 생각지 않고 자기 자신과 의무 이행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에 대해 말씀하시는 가운데 바리새인은 하나님께는 조금도 예배함이 없이 모든 것을 행하고 지껄였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바리새인은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음을 당신께 감사드립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모욕입니다. 거기에는 예배라고 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의 활동과 자신의 종교와 그가 행하고 있던 것으로 충만했습니다. 만일 여러분도 그와 같이 하고 여러분 나름의 표준을 갖고 있다면 여러분이 행해야 하겠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선택하실 것은 물론입니다. 그리고 그 특정 목록에 일치하기만 하면 여러분은 만사 ok며 그것으로 만족해 버립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관계보다도 항상 그들 자신의 업적에 만족했고 주의를 집중했습니다. 우리들도 가끔 이와 같은 짓을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이 복음주의자들이라 불리우는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붙어 다니는 죄가 아닐까요? 다른 사람들이 신앙을 명백히 부인하고  불경건한 일을 하고 있음을 우리는 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 보다 훌륭하기 때문에 자기만족에 빠지기는 얼마 쉽습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고 특히 저 현대주의자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우리에게 문제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성격과 존재와 성품을 상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종교는 우리가 해야 한다고 결정한 일들의 일정수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것들을 행하면 그것으로 만사는 잘 되었다고 생각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혼자 잘난 체, 점잖은 체 하는 것과 입담(glibness) 및 자기만족은 우리들 사이에서 너무도 크게 눈에 띄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히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가엽고 비극적인 태도를 고찰하게 해 줍니다. 바리새인들이 궁극적으로 정죄를 받은 까닭은 팔복에 묘사된 영(spirit)이 그들의 삶에서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과 기독교인들과의 차이점이 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팔복을 예시하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은 '심령이 가난'합니다. 기독교인은 '온유합니다' 기독교인은 '긍휼합니다' 기독교인은 규정된 어떤 임무를 수행했다고 해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인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합니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를 닮고자 의욕합니다. 그의 속에는 만족감이 없음을 깊이 느낍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을 시험해야 할 시금석이 됩니다. 우리 주님은 최종 분석에서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받쳤으나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보다 중요한 문제를 잊고 무시했다고 말씀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종교의 중심이요, 예배의 목적의 전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우리의 목숨을 다하고 우리의 뜻을 다하고 우리의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하는 것임을 여러분에게 다시 상기시켰으면 합니다. 여러분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받치고, 이 십일조 바치는 일들을 가장 미미한 세목에 이르기까지 고집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여러분의 성결은 아닌 것입니다. 성결의 시금석은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관계요,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인 거입니다. 여러분은 이 특정 시금석에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거룩해지는 것은 어떤 일들을 단순히 피하거나, 어떤 일들은 생각도 하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거룩은 거룩하시며 정다우신 하나님에 대한 궁극적인 마음 자세를 말하며, 둘째로 우리의 동료 남녀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문제 되던 것은, 그들이 원칙보다 행동에 관심을 가지며, 사람됨(being) 보다 행동(doing)에 관심을 가졌다는 데 있습니다. 본 산상설교는 나머지 부분은 바로 이것의 해석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결국 그들에게 '너희는 간음을 범하지 않는다고 해서 너희 자신에게 만족하나 만일 너희가 너희 눈 속에 정욕을 가지고 바라본다면 그것이 간음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원칙이지 행동만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무엇을 생각하며 소원하는가, 즉 여러분의 마음 상태가 어떤가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일들은 삼가고 어떤 일들은 한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일은 이른바 시간제 직업(a part - time job)이 아니며 주일의 일부를 지킨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모든 시간과 주의를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종들의 전기를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이것이 항상 눈에 띄는 원칙임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이번에는 이 지점에서 여러분 속에 있음직한 질문을 물어보겠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무엇을 가르치고 계신가? 주님은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가르치시는가? 주님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바리새인들의 보다 더 훌륭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심인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법은 온 세상을 정죄했습니다. '이는 모든 입을 막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자신의 행위나 우리 나름의 의에 의한 칭의나 구원을 가르치시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의 반대파는 말하기를 '좋습니다. 주님은,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의하므로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가르치시지 않습니까? 주님이 다 하셨으니 우리는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또 다른편의 극단이요, 오류입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이 있을 수 없는 까닭은 20절 서도에 'for'(... 이므로)라는 작은 낱말이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주장합니다. 이 낱말은 19절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거기서 주님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율법을 실제로 행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문단의 목적입니다. 이것은 율법의 행함을 쉽게 만들거나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것을 모두 해주셨으니 우리가 무엇을 하든 상관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이런 일들을 보충해야 할 반제(antitheses)를 항상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받은 증거는 우리가 의로운 삶을 살고 있는 데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신앙과 행위에 관한 옛 논증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신앙)이 중요한 전부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행위가 중요한 전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두 견해가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즉 기독교인의 표식은 행위로써 나타내 보이는 믿음이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내가 조작해낸 교리로 생각하실까 해서 사도 바울의 말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믿음의 사도요, 은혜의 사도였습니다. 그는 '속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세상을 향해 하신 말씀이 아니요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가 내가 명한 일을 행하지 아니하면' "주여, 주여"라고 해야 소용없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만일 나의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개심했다고 주장하기 전에 조심해야 하겠다는 결론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은 내 죄가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서 그가 나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에 용서받았음을 의미할 뿐 아니라 내가 새 생명과 새 성품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내 속에 이루어지고 있으며 내가 하나님의 성품의 참여자가 되었으며 옛것들은 지나갔고 모든 것이 새로워졌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내 속에 거하시며, 하나님의 성령이 내 속에 계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중생한)사람, 그 속에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며  그의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합니다. 그는 이제 자아와 자기의 업적이나 성공을 위해 살지 않으며, 자기 의적이며 자기만족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는 심령이 가난해졌고, 온유하며, 긍휼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릅니다. 그는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청결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 자기의 사랑이 하찮은 것이긴 해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열망하는 것입니다. 그의 의욕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의 법을 지키고 영예롭게 하고 그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의 십계명은 '가혹하고 고통을 주는'것이 아닙니다. 그는 십계명을 지키고자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율법의 성결함을 보며 그의 매일의 삶에서 이 율법대로 살며 그에게 율법을 예증하는(exemplifying) 일처럼 호소력있고 마음에 드는 일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훨씬 능가하는 의입니다.

 우리에게 사활로 중요한 질문들을 이와 같이 표현해 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은 삶에서 가장 크고 첫째 가는 일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여러분이 이것을 너무 소원하므로 그것이 여러분에게 어떤 희생을 치르게 하더라도 개의치 않는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아십니까? 즉 여러분이 다른 사람보다 훌륭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아나라, 여러분이 하나님께 심히 죄를 지었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어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신 그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며, 영화롭게 하며, 사랑할 수 있으며 여러분이 용서받을 수 있으며, 그가 여러분을 자기의 위치에까지 회복시키실 수 있음을 믿으십니까? 각자 자기 자신을 검토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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