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not think that I have come to abolish the Law or the Prophets; I have not come to abolish them but to fulfill them.
마태복음5:17
[새번역]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NIV]
17. "Do not think that I have come to abolish the Law or the Prophets; I have not come to abolish them but to fulfill them.
제18장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앞장에서 구약성경과 복음과 관련해서 두 가지 원칙을 설정한 바 있습니다. 이제는 이 주제를 다시 세밀하게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우선 주께서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기록한 것을 어떻게 성취하셨으며 실현하셨는가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주제의 하나가 됩니다. 여러분은 사도 베드로가 그의 제이 서신(베드로후서)에서 이 주제를 다룬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베드로는 매우 힘들고 어려운 시대에 살며 박해를 당하고 있던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쓰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노인이 되었고 자기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떠나기 전에 마지막 위로를 그들에게 주고 싶어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에에게 여러 가지 일들을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와 야고보와 요한이 우리 주의 변화산상의 변화를 본 특권을 가졌던 것과 그들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한 바 영광의 음성을 들은 일들을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하지만 나는 이것보다 더 좋은 말거리를 갖고 있다. 너희는 나의 증거와 체험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다. 구약선지서로 돌아가 그것을 읽어보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들이 입증된 것을 보라. 그러면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가장 강한 믿음의 보루를 얻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은 자기가 구약 선지자들의 가르침의 성취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1:20절에서 하나의 위대하고 포괄적인 진술을 했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우리는 그의 안에서 "아멘"하며 ...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최종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이 놀라운 인물(person)안에서 "예"와 "아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이것을 충분히 논할 수가 없습니다. 자세한 점들은 여러분들께서 혼자서 해결하셔야 합니다. 예언의 성취야말로 앞서 자주 지적한 바와 같이 사람이 만나 볼 수 있는 가장 놀랍고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의 하나입니다. 주의 탄생과 탄생 장소 곧 베들레헴 유다에 관한 정확한 예언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모두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 그의 인물에 대해 예언된 바 이상한 일들로 봐서 유대인들이 어째서 그에게 걸림이 되었는지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입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잘못된 생각 때문에 잘못된 길로 나갔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세속의 왕으로나 정치적인 인물로 생각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선지자들은 그와 반대되는 것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선지자들의 글을 읽긴 했지만 편견 때문에 눈이 멀어 말씀을 보는 대신 그 말씀 위에 그들 나름의 첨가된 사상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지서에서 가장 세밀한 항목에 이르기까지 기록된 예언의 기록을 봅니다. 그가 살으신 삶에 대한 이상할 정도의 정밀한 서술을 생각해 보십시오.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 하시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 그리고 다시 이사야 53장에서 그의 인물됨과 삶의 서술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행하시려 한 것의 기록과 그가 이적을 행하시겠다고 한 예언과 그 행하시려 한 일과 그 속에 내포된 가르침을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것이 거기에 있습니다. 복음을 구약성경에서 인출해 내어 설교하는 일이 항상 그처럼 쉽고 놀라운 일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이것 때문에 몹시 놀라워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여러분은 신약 성경에서는 물론 구약성경으로부터도 복음을 설교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복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그의 죽으심과 그의 죽으심의 양태의 예언을 보시게 됩니다. 예를 들어 시편 22편을 읽으십시오. 그러면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실제로 발생한 사건이 문자 그대로 정밀하게 서술된 것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예언은 선지서에서뿐 아니라 시편에서도 발견됩니다. 주님은 거기에 자기에 대해 예언된 것을 문자 그대로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주께서 세우려 하신 나라에 관한 놀라운 가르침과 함께 부활마저도 구약성경에 명백히 예언된 것을 보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더욱 놀라운 것은 이방인들의 들어옴에 관한 예언입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이 특별히 어떤 한 나라 곧 유대인들에게 기록됐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이처럼 이상한 방법으로 이방인들에게 펴시겠다는 명백한 예언들도 있습니다. 또 성령이 최근 기독교에 임하시고 백성들이 당황하고 놀라워했던 오순절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사건의 명백한 기록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도 베드로가 이것에 직면해서 '여러분은 이 일을 놀라워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선지자 요엘을 통해서 말씀해 주신 대로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예언의 성취 이외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씀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것을 알마든지 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즉 그의 인격과 사역과 행동에서, 그에게 있었던 일에서, 그리고 이 사건들에서 초래된 것에서, 우리 주님은 어떤 의미에서 율법과 선지자를 성취하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시지 않았음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사이에 쐐기를 박아서는 안됩니다.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을 무용지물로 만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신약성경만 따로 인쇄해서 내어놓는 것을 정말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까닭은, 우리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구약성경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심각한 오류에 빠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되었던 초대교회로 하여금 구약성경을 신약성경과 결합시켜 이 둘을 하나로 간주하도록 인도하신 이는 성령이십니다. 이 둘은 불가분리적으로 한데 뭉쳐있습니다. 구약성경이 제공하는 빛에 비추어 보지 않고는 신약성경을 참되게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구약성경을 알지 못한다면 히브리서에 대하여 그 무언가를 생각해 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어떻게 성취하셨는가를 속히 살펴봅시다. 이것 역시 너무 놀라워서 우리는 마땅히 경배하고 찬양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먼저 주님은 '율법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기한이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 하셨습니다'(갈 4:4). 우리의 유한한 마음이 이 말씀의 참뜻을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율법 아래 있게 되셨던 것은 성육신에 관한 중요한 진리의 하나가 됩니다. 주님은 율법 위에 무한히 높으신 분이지만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고 율법 아래 있게 되셨고 율법을 실현하셔야 했던 분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율법 아래 두셨을 때보다 그분의 거룩한 율법의 불가침성과 절대성을 더욱 분명히 보여 주신 때는 없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개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복음서들을 읽으시면 이것이 얼마나 완전히 참된가를 발견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께서 율법을 얼마나 세밀히 지키셔야 했는지 주목해 보십시오. 주는 율법을 세밀한 항목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주는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쳐 사랑하게 하였고 율법을 설명하셨으며 변함없이 율법을 확립하셨으며 율법의 절대 순종의 필요를 주장하셨습니다. 주께서 생에 마지막에 이르러, 아무도 그에게서 어떠한 잘못도 발견할 수 없었으며 아무도 그를 고소할 수 없었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주는 그들에게 그렇게 해보라고 도전하셨습니다. 아무도 그가 죄를 지었다고 규탄할 수 없었습니다. 주는 율법을 충분히 사셨고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주께서 가장 경미한 정도로도 율법을 범하거나 성취하지 못한 것은 하나도, 아니 일점 일확도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탄생에서는 물론 그의 생애에서 그가 율법에 종속되어 있었음을 아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한번 신앙의 중심인 갈보리 언덕 위 십자가에 이르게 됩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만일 율법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를 결코 이해할 수 없으리라고 거듭 말씀드립니다. 십자가에 대하여 말할 뿐 아니라 십자가의 교리를 선언하는 것이 복음의 본질입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말은 하되 순전히 감상적인 태도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꾸짖으신바 예루살렘의 딸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비극을 생각하면서 울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올바로 보는 방법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일종의 도덕적 감화를 발휘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전 목적이 우리의 굳은 마음을 깨뜨리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 의미에 있어서나 가르침에 있어서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목적은 우리 속에 연민의 정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사랑을 그저 일반적으로 시위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결국 율법의 관점에서만 최종적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발생하고 있던 것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정한 형벌을 그의 거룩한 몸으로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정죄하며, 율법이 선언하는 정죄는 죽음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범하고 그의 거룩한 율법을 깨뜨린 모든 사람에게 죽음의 판결이 내려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을 성취하는 방법 하나는 죄의 형벌을 수행하는 방법입니다. 이 형벌은 죽음입니다. 그가 죽으신 까닭도 이 때문입니다. 율법은 성취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점에서든 한쪽에 치우칠 수 없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심에서 그가 선언하신 형벌을 강요하지 않기로 결정하심으로 용서하시지는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신다면 이것은 그분의 거룩한 성품과 모순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성취되고 실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말씀하신 바를 철회하심으로써 자기를 배반하시지 않습니다. 죄는 죽음으로 처벌받아야 한다고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처럼 형벌이 죽음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처벌하심에서 하나님의 법은 완전무결하게 성취되었습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 자기 아들의 성스럽고 점 없고 흠 없는 몸에 죄를 벌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율법을 성취하고 계셨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십자가와 그 위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율법을 성취한다는 관점에서 엄격히 해석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십자가 위의 죽음에 대하여 성서의 견해를 견지하지 않고 있는 것이 됩니다.
주님은 가장 이상하고 놀라웁게 십자가 위에 죽으시고 죄로 인한 형벌을 자기 위에 지심으로써 구약 성경의 모든 모형을 성취하신 것을 우리는 봅니다. 레위기와 민수기서로 다시 돌아가 읽으십시오. 번제물과 희생제물들에 관한 기록을 읽어보십시오. 장막과 성전의 의식과 제단과 정결을 위한 놋대야에 관한 기록들을 읽어보십시오. 이 상세한 기록으로 돌아가 '이것들은 모두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설병과 대제사장과 각종 그릇들과 기타 이것들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것들은 다 무엇을 하기 위한 것인가?'라고 자문해 보십시오. 이것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침내 궁극적으로 행해져야 했던 것의 그림자, 모형, 예언 이외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참으로 문자 그대로 이 모형들을 낱낱이 성취하셨고 실현하셨고 수행하셨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가질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의 상세한 설명과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책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p. 훼어베언 Fairbairn의 성서의 예표론 The Typology of Scripture을 보십시오) 하지만 그 원리, 곧 진리는 바로 이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죽으심과 그가 이루신 모든 것을 통하여 이 모든 모형(혹은 예표)과 그림자의 완전무결한 성취이십니다. 주님은 대제사장이시오, 제물이시오, 희생이십니다. 주님은 하늘에 그의 피를 바치심으로 의식법을 자기 안에서 전부 성취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주님은 그의 죽으심과 부활과 그리고 하늘에 자기를 바치심으로 이 모든 것을 성취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들 속에서, 우리를 통하여서도 율법을 성취하신다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8:2-4절에서 전개한 사도 바울의 논증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우리 주께서 돌아가신 이유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을 하나라고 분명히 말해줍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가장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는 여기서 두 가지를 한 군데로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주님이 자기 속죄로 율법을 성취하신 방법과 그가 우리 속에 율법을 성취하시는 방법을 연결시키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마태복음 5장의 이 지점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정확히 이것입니다. 그는 율법의 의를 성취하셨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 둘은 함께 다닙니다. 그는 성령을 주심으로 우리 속에 이것을 성취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에게 율법을 사랑할 마음과 이 사랑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라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을 받은 우리들은 이와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법에 굴복합니다. 자연인은 하나님을 미워하며 그의 법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율법에 굴복합니다. 기독교인은 이렇게 되기를 원하며 그렇게 될 능력을 받았습니다. 즉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인 것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큰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이렇게 말씀하신 셈입니다. '내가 새 언약을 만들고자 한다. 새 언약과 옛 언약과의 차이는 이것이 될 것이니 나는 내 법을 너희의 생각과 마음에 새기려고 한다. 내 법은 이제 다시는 너희 밖의, 석판에 쓰지 않고 마음판에 새기겠다'라고 말입니다. 히브리 서신의 저자는 이것을 8장에 기록했는데 그는 새 언약 곧 새 관계를 자랑하며 기뻐했습니다. 새 언약 아래서는 율법이 우리 밖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율법을 성취하는데 열심을 내며 또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율법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쓰여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질문을 하나 드림으로 이상의 모든 것을 요약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율법과 선지자들과의 위치는 어떤 것인가? 저는 이미 선지자들의 예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해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여러분에게 보여드렸습니다. 하지만 아직 성취되어야 할 것이 남아있습니다. 율법은 어떻습니까? 제가 보여드린 대로 의식법은 이미 완전히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곳 지상에 계실 때 의식법을 준수하셨고 제자들에게도 같은 일을 하도록 권면하셨습니다. 그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에서 의식법은 전부 성취되었습니다. 성전이 뒤에 가서 파괴된 것은 말하자면 이것을 확정한 셈이었습니다. 성전의 휘장은 이미 그가 죽으실 때에 둘로 찢어졌고 마침내 성전과 그 성전에 속한 모든 것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단이시요, 희생물이시오, 정결을 위한 놋대야요, 향이시오, 기타 모든 것임을 보지 못한다면 나는 아직 레위기의 율법 의식에 묶여있는 것이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을 내가 보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가 나의 번제물이시오, 나의 희생제물이시오, 나의 모든 것임을 보지 못한다면, 이 모든 의식법은 아직도 나에게 적용되는 셈이며, 내가 이것을 이행하지 않을 때는 내가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실현된 것을 보면서 나는 그분을 믿음으로, 나를 그분에게 굴종시킴으로 이 모든 것을 성취하고 있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식법의 위치는 이상과 같습니다.
민법은 어떻습니까? 민법은 원래 특별히, 하나님의 신정국으로써, 그때의 특수 상황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국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제 신정국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께서 사역의 말기에 이르러 유대인들을 향하여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아십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21:43절 말씀이요, 성경에서 예언과 관련해서 가장 결정적이며 중요한 진술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9-10절에서 새 나라는 곧 교회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이제는 신정국가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민법 역시 성취된 셈입니다.
이제는 도덕법이 남았습니다. 도덕법의 위치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기서 영원하고 영구적인 관계, 곧 자기와 사람 사이에 항상 있어야 할 관계를 세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관계가 우리 주께서 첫째 가는 큰 계명이라 부르신 것에서 발견되어야 할 것은 물론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계명은 영원한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신정국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계명입니다. 둘째로 큰 계명은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계명 역시 신정국가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옛 의식법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영원한 상태요 우리의 영원한 관계의 일부인 것입니다. 이처럼 신약성경에 해석된 바와 같이 도덕법은 옛부터 지금까지 항상 그랬던 대로 오늘에도 유효하며 세상 끝까지, 우리가 완성될 때까지 유효할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에서 사도 요한은 자기 독자들에게,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죄는 여전히 '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우리는 여전히 율법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봅니다. 왜냐하면 죄는 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 셈입니다. 율법은 아직 거기에 있습니다. 내가 죄를 범할 때, 내가 기독교인이며 유대인인 적이 없으며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나는 율법을 깨뜨리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도덕법은 여전히 우리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재의 위치입니다.
미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진술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그 나라가 마침내 온 땅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다니엘서 2장에 기록된 돌은 온 세계를 가득 채울 것입니다. 이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 과정이 지금 진행되고 있으며, 마침내는 완성될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일점일획도 이와 같이 완전히 수행될 것입니다. 율법을 깨뜨리는 자들은 마침내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이 점에 과오가 없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죽는 자들은 율법의 정죄를 받고 있습니다. 종말에 그들에게 선언될 선고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가 될 것입니다. 율법은 그들에게 이렇게 정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은 어느 점에서나 완전히 수행되려 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의된 것을 이용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의의 표현인 율법의 정죄를 달게 받을 것입니다.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기독교인의 율법에 대한 관계는 무엇인가? 다음과 같은 형태로 답할 수 있겠습니다. 기독교인은 율법이 행위언약이라는 의미에서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 3장의 논증입니다. 기독교인의 구원은 율법을 지키는 것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은 율법의 저주에서 구출 받았습니다. 기독교인은 이제는 자기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써의 율법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의 규범으로써의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문제거리가 일어나는 것은 율법과 은혜와의 관계에 대하여 우리가 혼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이렇게 표현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그릇된 견해를 갖고 있으며 율법을 은혜와 반대되는 무엇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율법은 한때 율법의 언약이 있었다는 의미에서만 은혜와 반대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은혜 언약 아래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은혜와 동일시해도 안되겠습니다.
율법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율법은 결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사람을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국가에게 '내가 지금 너희에게 율법을 주고 있다. 너희가 율법을 지키면 율법이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관념은 우스꽝스럽습니다. 아무도 율법을 지킴으로 자기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이 추가된 것은 '범죄함을 인함'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약속이 있은지 430년 뒤에 온 것이며, 율법이 온 것은 율법이 하나님의 요구의 참 성격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죄의 엄청난 사악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어떤 의미에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의롭다 할 수 없도록 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이끌리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바울의 말씀을 빌리면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school master)'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아시다시피 율법은 그 속에 많은 예언과 많은 복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율법에는 은혜가 가득하여 나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율법과 관련된 모든 희생제물과 의식 역시 같은 일을 하도록 계획 되었었음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의 비평가들은 말하기를 자기들은 번제물과 의식에는 관심이 없으며 이런 것은 유대인과 기타인들이 사용한 이교도 의식(pagsn rites)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비교종교의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신약의 복음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의식과 예식은 세부에 걸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산으로 부르시고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보인 식양대로 할찌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이 모든 면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우리의 몽학선생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거짓된 율법관에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동시에 거짓된 은혜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은혜는 율법과 별개의 것이며 율법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도덕률 폐기론(antinomianism)이라 불려지는 바, 되는대로, 태만하여 빈둥거리며 죄 짓는 사람을 살기 위해 은혜론을 악용하는 사람들의 태도라 하겠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나는 은혜 아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문제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며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God forbid)'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절대 그릇되고 거짓된 은혜관입니다. 은혜의 전 목적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로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표현해 보겠습니다. 우리에게 문제되는 것은 우리가 이 지점에서 거짓된 성결관을 가지는 경우가 너무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성결과 성화를 (그에게서) 받아야 할 체험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오류는 없다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결은 의롭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말하는 소위 그 은혜가(여러분이 받았다고 말하는 그 은혜) 여러분으로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한다면 여러분은 은혜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심리적 체험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은혜란 무엇이겠습니까? 은혜란, 사람을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여 그로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며, 그리스도가 의로웠던 것처럼 의롭게 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은사)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는 그것인 것입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나는 그의 계명을 지키기로 열망합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를 분리시켜서는 결코 안됩니다. 은혜는 감상적인 것(sentimental)이 아닙니다. 성결은 하나의 체험이 아닙니다. 우리로 율법을 사랑하며 이 율법을 지키도록 의욕하게 하는 이 새 마음과 성향(disposition)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그의 능력으로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성취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주께서 돌아가시기까지 삼 년의 짧은 세월 동안 주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영원하고 영속적인 말씀입니다 주는 이것을 다시 마태복음 7장에서 강력히 주장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입니까? 십계명과 도덕법입니다. 이 법들은 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있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하심이니라'라고 바울은 디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뒤에 가서 생각해 보려 합니다만 우리 주님은 그렇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장은 여러가지로 어려운 문제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장은 영광스러운 진리 하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율법과 선지자를 보고, 이것들이 그 안에서 성취된 것을 보고, 여러분에게 보다 심오한 견해를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의 일면을 보셨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십자가 위에서 집행되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거기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처형하신 것이 하나님의 율법이었음을 여러분은 보시지 못합니까? 대속적 속죄론은 그가 율법을 완전히 수행하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기 몸을 율법에 완전무결하게, 능동적으로, 수동적으로, 소극적으로, 적극적으로 굴복시키셨습니다. 모든 예표(types)는 그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예언도 확실히 수행될 것입니다. 이 영광스런 구속사역의 결과는 하나님을 향하여 법을 깨뜨리고 있는 우리 비참한 반역자들에게 용서를 주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로, 즉 율법을 즐거워 하며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며' 성결을 열망하며, 놀라운 느낌 혹은 체험을 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으며, 모든 점에서 그와 같이 살기로 열망하는 사람들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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