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t because Jesus lives forever, he has a permanent priesthood. Therefore he is able to save completely those who come to God through him, because he always lives to intercede for them.
로마서8:26-27
[새번역]
26.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27.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NIV]
26. In the same way, the Spirit helps us in our weakness. We do not know what we ought to pray for, but the Spirit himself intercedes for us with groans that words cannot express.
27. And he who searches our hearts knows the mind of the Spirit, because the Spirit intercedes for the saints in accordance with God's will.
히브리서7:24-25
[새번역]
24. 그러나 예수는 영원히 계시는 분이므로, 제사장직을 영구히 간직하십니다.
25. 따라서 그는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늘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중재의 간구를 하십니다.
[NIV]
24. but because Jesus lives forever, he has a permanent priesthood.
25. Therefore he is able to save completely those who come to God through him, because he always lives to intercede for them.
‘이와 같이’ - 이 말에 의해서 연결 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
첫 번째, 그들은 ‘소망’이 우리를 도와서 시련을 대처하도록 할 뿐 아니라 성령께서 역시 우리를 돕고 우리를 이끌어 주어서 특별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믿음만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우리의 기도 생활과 관련하여 성령의 역사로 제공되는 이보다 더 많은 도움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진리이다.
두 번째, 이 연결고리에 정확한 해석은 사도가 이제까지 말해왔던 것을 계속하거나 부가적인 위로를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 자신에 관해서 행했던 일련의 진술들을 계속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존재하는 환난과 시련에 관해서 말해왔던 것에 첨가해서 어떤 것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확신과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또 다른 다른 측면을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8장의 중추적인 테마는 구원의 확신이기 때문이다. 이 확신에 대한 다른 모든 국면에 있어서 가장 주도적인 요인은 성령의 역사였다.
2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4절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행한다”고 말한다.
10절에서 우리가 지금 성령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성령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보며 영적으로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의 최종적인 구원에 대한 보증이다.
11절에서 사도는 몸의 부활의 입장에서 그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3절에서 실제적인 차원에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영으로 말미암아서 이다.
14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궁극적인 영화와 완전한 구원에 대한 영광스러운 증거들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양자의 영’을 주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더 나아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가장 고차원적인 확신의 형태이다. 이러한 모든 방식으로써 성령께서는 우리의 궁극적인 영화의 보증이 되신 것이다.
23절에서는 성령께서는 그 영광에 대한 ‘처음 익은 열매’를 우리에게 주신다.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완전한 보증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한 1차적인 계약금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성격이 그 서약 속에 내포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또 다른 면이 있다. 특별히 기도와 관련하셔서 성령께서 또 다른 일을 하고 계신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순례자로 나아가는 동안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는가? 하나님과 늘 가까이서 접촉하는 방식을 아는 것이 아닌가? 기도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우리의 연약한 것 가운데서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연약은 영적인 것으로 아담의 원죄의 결과로 오는 여러 가지의 제한들을 의미한다. 그것들 가운데 중요한 것은 무식하고 이해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고민은 ‘우리가 마땅히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모른다’는 데 있다. 그것은 일반적인 기도의 문제가 아니고 어떤 주어진 특별한 상황 가운데서 특별하게 기도할 바를 모른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을 안다. 그러나 문제는 ‘합당히’ 기도해야 할 바를 정확히 아는 것이다.
신명기 3장 23-26절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행사를 감탄하며 그래서 간구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강하고 엄중한 책망을 하신다. “여호와께서...진노하사 내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모세는 드리지 말아야 될 간구를 드렸던 것이다.
고린도후서 12장 1-10절은 로마서 8장 이 구절에 대한 완전한 주석이다. 사도는 육체 속에 있는 가시로 인해 걱정하며 사람의 차원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행동을 하였다. 자기의 일을 방해할 것으로 느꼈고 자기의 능력에 제한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주님께 그것을 제거하여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였다. 그러나 허락되지 않았다. “내게 이르시기를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그래서 그는 그의 상황을 보다 영적인 방법으로 살펴보기 시작했고 주님의 방식이 옳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전에 그가 하나님께 없애 달라고 기도했던 것을 자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누가 바울에 있어서 육체의 가시가 유익한 것이라고 상상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존전에 생각없이 마구 뛰어 나가는 어리석음에 대해서 인식하라. 우리는 입심 좋게 ‘그것에 대해서 기도하라’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 없는 문제이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고백하라. 빌립보서 1장 23절에서 바울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곤란했었다.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었으니” 그런 경우에 있어서 우리가 당황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여 주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긴다고 하는 것이 훨씬 좋고 현명한 것이다.
요한복음 12장 27절의 말씀으로 인자로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마저도 이 당혹함을 아셨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는 그런 지위에서 눈물로 기도하며 간구하였다. 그가 그러한 체험을 한 결과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일하시게 더욱 더 합당하게 되셨다. 그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위기와 당황에 처하여 있을 때 우리를 돕고 북돋아 주실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온전한 확신과 거룩한 담대함으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지성소로 나갈 수 있음을’ 안다. 문제는 어떻게 정확히 간구하고 어떠한 축복을 구하느냐하는 것이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해가 될 수 있다. 내가 이것저것을 구하지만 하나님은 ‘다시는 그런 일로 내게 고하지 말라’ 고 하시며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고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사도는 우리에게 그 문제에 대하여 영광스러운 해답이 있음을 알려 주기 위해서 그것을 거론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알리운 바 됨이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우리의 궁극적인 영화의 한 과정으로서 주어진 것이다.
(1)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령께서 이루시는 바램의 강도와 열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갈 만하다. 한마디 말을 내뱉지 않는 곳에도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수가 있다. 모세가 그랬고(출 14:15) 한나가 그랬다(삼하 1:13). 대언자로서 우리 속에서 성령이 이루시는 것은 우리 기도의 열변과 웅변이 아니라 이 기도의 믿음과 열정이다. "말할 수 없는," 영혼은 시험과 고통의 뒤범벅 속에 갈피를 잡지 못한 나머지 우리는 뭘 얘기해야 하고 어떻게 얘기해야 할 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언의 기도를 드리는 성령이 등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아바, 아버지"하는 정도에 그치고 그에게 겸손한 용기를 가지고 나머지를 맡겨 버릴 때 성령의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뜻대로"(27절). 마음 속의 성령은 말씀 속의 성령을 거스리는 법이 없다. 하나님의 뜻에 거스리는 바램이 성령에게서 나올 수 없다. 우리 속에서 일하시는 성령은 더더욱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녹여 버리는 것이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3. 이 대언의 기도의 성공은 틀림없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27절). 그의 모든 종교가 입에 달린 위선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그의 모든 위장을 속속들이 알고 계시다는 사실보다 더 더러운 게 없다. 반대로 자신의 일을 마음으로부터 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꿰뚫어 보신다면 자기가 표현할 말이 없어 못 표현하는 자기의 바램을 보시고 들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구하기 전부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알고 계신다(마 6:8). 그는 우리 속에 있는 자신의 영의 마음이 무엇인지도 알고 계신다. 그리고 그는 아드님의 우리를 위한 기도를 언제고 들어주시듯이 마찬가지로 우리 속에서 대언의 기도를 하고 있는 성령의 기도도 언제고 들어 주신다. 그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말에 있어서 이보다 더 주의 백성에게 위로가 되는 게 또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에게 그의 뜻대로 구하면 주실 것이다"고. 그러나 어떻게 하면 그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인가? 이 사람아, 성령께서 그걸 가르쳐 주시잖는가! 야곱의 후손이 구한 것이 결코 허사로 끝나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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