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11월 25일, 주기철(朱基徹, 1897-1944) 출생, “기철(基徹, 철저하게 기독교를 신앙한다)”

11월 25일 “주기철, 일사각오(一死覺悟)”

오늘은 주기철(朱基徹, 1897-1944)이 출생한 날입니다. 1897년 11월 25일, 주기철은 경상남도 창원군 웅읍면 북부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오산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이승훈과 조만식의 영향을 받고 세례를 받은 후 “기복(基福)”에서 “기철(基徹, 철저하게 기독교를 신앙한다)”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낙향한 주기철은 결혼을 하고 집사로 봉사하기도 했지만, 연약한 신앙을 가지고 있던 중 김익두 목사의 집회에서 크게 회개하였습니다. 그는 1922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양산읍교회, 부산 초량교회, 마산 문창교회,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사역하였습니다. 네 차례 검속을 당하며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주기철은 위대한 순교자였습니다. 동시에 그는 사랑 많은 교역자이자 교회의 권징을 중시한 목회자였습니다.

주 목사는 초량교회에서 교회법을 어긴 교우들을 엄격히 치리하여……주 목사 재임 당시 초량교회 당회록에 의하면 ‘불신자와 혼인’한 이유로 책벌을 받은 경우가 가장 많았고, ‘장기 결석’, ‘간음’, ‘목사의 허락 없이 안수기도 하는 행위’ 등의 이유로 치리를 받았다. 권징에는 책벌과 출교 두 가지가 있었고, 책벌의 기간도 무기한, 1년, 6개월로 구분되어 있었다. 또 교회 앞에 책벌을 공적으로 공고하는 경우와 본인에게만 통지하는 경우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책벌을 받게 되면 성찬식에 참석할 수 없고 공동의회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치리의 목적은 처벌이 아니라 회개의 기회와 진리 수호라는 분명한 명분이 있었다.[김인수, 『예수의 양, 주기철』 (서울: 홍성사, 2007), 66-68.]

주기철 목사는 길고 긴 수감생활을 견뎠습니다. 모진 추위와 더위, 죽음을 원하게 만드는 고문과 달콤한 회유, 홀로 남은 것 같은 외로움 속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가시밭길을 걸었던 순교자는 한국교회의 자랑입니다. 그러나 그를 구원하시고, 그에게 인내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잊지 맙시다. 맘몬이 아닌 유일하신 하나님만 섬기기 원합니다.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정신으로 나의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게 하옵소서.

그들은 아버지 엄지손가락을 뒤로 해서 공중에 매달아 놓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이른바 ‘그네뛰기 고문’을 했다……벽에는 검도 연습용 칼이 죽 꽂혀 있었다. 일본 형사들이……칼을 가지고 아버님을 내리쳤다……내가 스무 번을 세기 전에 아버지는 공중에 매달린 채 기절해 버렸다……아버지가 기절하기 전에 할머니께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어머니는 “오! 주님”하시며 기도만 하셨다. 아버지께서 기절하니까 풀어 놓고 찬물을 끼얹어 정신을 차리게 하더니, 책상 위에 놓았다. 그리고는……노란 주전자에는 물을 가득 담고……고춧가루를 풀어 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아버지의 코와 입에 부어넣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처음엔 몇 번 저항을 하시더니 기운이 떨어지셨는지 그 다음엔 그냥 꼴깍꼴깍 받아 마셨다. 한 5-6분 지나니까 배가 농구공 두 개만큼 부풀어 오르면서 기절하셨는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형사 둘이서 배 위에 조그만 의자 두 개를 얹어 놓고……그냥 짓눌러 버렸다. 그러자 뒤로 처져 있던 아버지의 입에서, 코에서, 귀에서 붉은 물인지 핏물인지 모르게 막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주광조, 『나의 아버지 순교자 주기철 목사』 (서울: 대성닷컴, 2004), 9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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