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1년 11월 24일,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Johannes Oecolampadius, 1482-1531) 별세, " “이다”(est)를 “의미한다”(significat)로 해석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11월 24일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 바젤의 종교개혁자”
오늘은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Johannes Oecolampadius, 1482-1531)가 별세한 날입니다. 1531년 11월 24일, 바젤의 종교개혁자는 눈을 감았습니다. 바인스베르크(Weinsberg)에서 출생한 그의 본명은 요하네스 후스건(Johannes Huszgen)입니다. 외콜람파디우스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수학한 후, 1510년에 고향에 돌아와 설교자로 사역하기 시작했습니다. 학위를 위해 튀빙겐에 있는 동안 그는 성경 고전어를 익히며 인문주의자가 되었고, 헬라어 강의를 위해 바젤로 가서는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성경 편집을 도왔습니다. 대(大)바실과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등의 작품을 번역한 외콜람파디우스는 1518년에 바젤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1520년에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루터의 저술들을 읽고 종교개혁 진영에 합류하였습니다.
1522년에 외콜람파디우스는 바젤의 시의회의 요청으로 이사야서를 설교하기 위해 바젤로 돌아갔다. 그곳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존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의 창세기 설교 시리즈를 포함한 몇몇 작품들을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이 작품들에 영향을 받은 종교개혁자들은 크리소스톰에 의해서 옹호된 성경의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주해 방법을 채택하였다. 또한 이미 훌드리히 쯔빙글리(Huldrych Zwingli)의 영향권에 들어가 있던 그는 바젤의 개혁 운동에 주도적으로 관여하였다. 그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자, 1525년에는 바젤 대학교의 성경학 교수로 초빙되기도 하였다. 그 후 그는 1528년에 잠시 동안 베른에 체류하였는데, 그곳에서 부처와 쯔빙글리 그리고 볼프강 카피토(Wolfgang Capito)를 도와서 베른의 개혁을 일구어 내는 데에 일조하였다.[정성구, 『개혁주의 인명사전』 (서울: 총신대학교출판사, 2001), 521.]
1523년부터 바젤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친 외콜람파디우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곳에서 개혁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재세례파(근원적 종교개혁자)들과 논쟁하면서 그들과 결별하게 되었지만, 츠빙글리보다는 관용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1528년에 열린 베른 논쟁에서 활약한 외콜람파디우스는 로마교 논객들에 맞서 토론을 승리로 이끄는데 공헌하기도 했습니다. 처벌이 아닌 치료로서의 출교에 대한 강조와 교회의 독립적인 치리권 확보에의 노력은 스트라스부르의 부처의 사역에서 공명되었고, 칼빈의 제네바 개혁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는 다른 개혁자들만큼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보물과 같은 개혁파 지도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외콜람파디우스는……터툴리안과 어거스틴의 글에 호소하면서 “이것이 내 몸이다”의 “몸”(corpus)을 “몸의 비유”(figura corporis)로, “이다”(est)를 “의미한다”(significat)로 해석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외콜람파디우스는……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임재하신다는 루터적인 성찬론을 거절했다. 외콜람파디우스가 개혁교회에 끼친 가장 큰 신학적 영향은 치리에 대한 그의 가르침일 것이다. 그는 1518년에 바젤 주교관구의 치리권을 설명하기 위해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치리에 호소한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 교회의 치리는 교회의 본질에 속한 것이라 확신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설교와 저술에서 공적인 죄에 대한 “공적인 치리” 혹은 “출교”의 근거와 당위성에 대한 설명은 점증하게 되었고, 따라서 1526년 바젤 예배규정에 출교가 중요한 문제로 취급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황대우, 『칼빈과 개혁주의』 (경기: 깔뱅, 2009), 4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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