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1일, 조지 매큔(George Shannon McCune, 1872-1941, 한국이름 윤산온[尹山溫]) 별세, "대단히 즐거운 일”
12월 1일 “조지 매큔, 많은 사람들이 성경, 찬송가, 그리고 성경 요리문답서를 구입하였다.”
오늘은 조지 매큔(George Shannon McCune, 1872-1941, 한국이름 윤산온[尹山溫])이 별세한 날입니다. 1941년 12월 1일, 조지 매큔은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미국 미주리 주에서 출생하여 파크대학에서 수학한 그는 1905년 9월에 미북장로교 선교사로서 내한했습니다. 매큔은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의 신성중학교와,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숭실중학교에서 교장직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1907년 평양대부흥의 상황을 잘 기록해놓았습니다.
사경회가 열리는 동안 매큔은……50-60명의 한국인들을 집회에 초청하였다…… “그것은 대단히 즐거운 일”임에 분명했고, 매큔이 고백하는 대로 “확실히 그것은 사도들이 옛날에 했던 그 방식 그대로이었음에 틀림없다.”……여주인이 들어오라고 청하면 앉아 간단히 자신들을 소개하고, “집주인 남자에게 인간의 타락 이야기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그가 주님을 믿기로 결심하면 가독들 모두가 “함께 고개 숙여 기도”하게 된다. 떠나기 전에 그들에게 사람을 보내 교회까지 잘 안내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저녁 집회에 나오라고 부탁하면……거의 대부분……참석한다……2월의 사경회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성경, 찬송가, 그리고 성경 요리문답서를 구입하였다.” 매큔에 따르면 복음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짧은 동안의 전도로 예수를 영접하고 가족들과 더불어 저녁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그 다음부터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 경우가 흔하게 있었다.[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3), 256-58.]
그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추방되었다가 1928년에 다시 내한했습니다. 1차 추방된 기간 중에도 매큔은 한국인 유학생들을 도왔습니다. 105인 사건 때문에 수감된 민족지도자들이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매큔에 대해 허위진술을 했지만, 그의 한국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매큔은 농촌계몽운동을 위해 숭실전문학교 교수들과 함께 “농민생활”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매큔의 기록을 읽으며 아련한 감동을 받습니다.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매큔은) 3·1운동이 발생했을 때는 뒤에서 이를 지원한 혐의를 받고 강제추방을 당했다. 그래도 그는 일제의 한국 찬탈에 맞서 한국교회를 지원하고 젊은이들에게 독립에 대한 이상을 심어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를 통해 양전백, 강규찬, 백낙준, 박형룡 등 수많은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큰 영향과 도전을 받았다. 조지 매큔은 1928년 평양숭실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학교 발전에 큰 공헌을 이룩하였으며, 1936년부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용감하게 맞섰으며, 이로 인해 조선총독부로부터……교장직 승인이 취소되고 미국으로 추방당했다……귀국한 윤산온 교장은 신사참배의 진상을 미국교회와 선교부에 알리는 일에 앞장섰다. 일제의 한국 찬탈에 용감하게 맞서며 선교지 약소민족과 교회의 보호에 앞장선 매큔의 노력은 그의 동료들에게 이어져 북장로교 선교회, 남장로교회선교회, 호주장로교 선교회 등 한국장로교는 1937-8년 한국 미션스쿨을 폐교하면서까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용감하게 맞섰다.[박용규, 『강규찬과 평양산정현교회』 (서울: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2), 299-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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