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0년 5월 29일, 찰스 2세(Charles II, 1630–1685) 출생

5월 29일 “찰스 2세와 왕정복고”

오늘은 찰스 2세(Charles II, 1630–1685)가 태어난 날입니다. 1630년 5월 29일에 태어난 찰스 2세는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궁에서 국왕 찰스 1세의 아들로 출생했습니다. 그는 올리버 크롬웰의 공화정 시기에 프랑스로 탈출했습니다. 크롬웰 사후 1660년 5월에 왕으로 선포된 찰스 2세는 백성들의 환호 속에서 런던에 입성했습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그의 서른 번째 생일인 1660년 5월 29일이었습니다. 찰스 2세의 통치기에 존 번연과 같은 비국교도들이 투옥되었고, 청교도주의는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의 문은 영국 성공회 교도들에게만 열려 있었습니다.

1658년에 크롬웰이 사망하였다. 리처드 크롬웰(Richard Cromwell)이 자기 부친의 자리를 채울 수 있는 리더십이 없다는 것은 금방 드러났다. 그래서 또 다른 시민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군주제를 회복하기로 하였다. 찰스 2세는 네덜란드의 브레다(Breda)에서 신앙의 자유를 존중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세력을 잡고 있는 성공회 쪽에서 보복을 강력하게 밀고 나옴으로써 좌절되었다……1662년에 잉글랜드 국교회(The Church of England)를 엄격하게 따르게 하는 법령이 통과되었다. 만약 목회자가 감독 체제하에서 안수를 받지 않았으면 국교회의 의식에 따라서 다시 안수를 받아야 했다……목사는 누구나 국교회 법에 순종할 것을 서약하고 엄숙 동맹 언약서(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를 부인해야 했다.[Erroll Hulse, Who are the Puritans?, 이중수 역, 『청교도들은 누구인가』 (서울: 목회자료사, 2001), 73-75.]

마틴 로이드 존스는 찰스 2세의 복귀를 도왔던 장로교도들을 비판했습니다. 그들이 정치적인 편법을 사용했고, 영적연합을 도외시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찰스 2세는 전제군주정치를 지향하는 왕권신수설자였습니다. 그는 임종 시 로마가톨릭으로 개종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찰스 2세의 치세 기간은 청교도들에게 시련의 시기였다는 것입니다. 설교단을 잃어버린 그들은 펜을 들어 계속해서 말했으며, 그 작품들은 지금까지 상당수 남아있습니다. 세상주관자들의 핍박 속에서 탄생한 진주와 같은 청교도 고전들을 읽어보시지 않겠습니까? 영혼에 양약과 같을 것입니다.

찰스 2세는 잔꾀가 많고 매력적이나 이기적이며 사생활은 몹시 음란하였다. 장로교도들과 칼빈주의 극단파를 혐오하였으며, 입으로는 영국 국교도라고 부르짖었으나 가톨릭에 대해 항상 동정적이었다. 그는 공화정 시대에 사역했던 개신교 지도자들을 면직시키고 이들에게는 설교와 학교의 교사 생활도 금지시켰다. 그리고 국교회 전성시대에 마련했던 통일령(Act of Uniformity)과 공동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 사용을 복원시켰다. 또한 청교도들을 단속하기 위해 1664년과 1670년에 비밀 집회 금지령(the Conventicle Act)을 반포하여 5명 이상이 모이는 것을 금했으며, 만일 모일 때는 국교회에서 사용하는 기도서(the Prayer Book) 외에 다른 종교 서적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5마일 퇴거령(the Five Mile Act)을 1665년에 반포하여 비국교도 성직자는 도시에서 5마일 이상 격리하여 살도록 했다. 5마일 이내 도시에서 가르칠 때는 국교회와 정부에 반대되는 이야기를 일체 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만 허용되었다.[정준기, 『청교도 인물사』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6),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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