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5월 28일, 이수정(李樹廷, 1842-1886)의 귀국

5월 28일 “이수정, 일본에서 성경을 번역한 선교사”

오늘은 이수정(李樹廷, 1842-1886)이 일본에서 조선으로 돌아온 날입니다. 1886년 5월 28일, 이수정은 몇몇 유학생들과 함께 귀국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이수정의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많은 이들은 그가 법으로 금한 기독교로 개종하고 성경번역을 한 것, 여러 일본 유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들이 보수파를 자극했으리라 추측합니다. 그가 울산에서 자객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설이 있으나 사료가 충분치 않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수정은 44세의 젊은 나이에 이 땅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죽기 일 년 전 제물포에 들어온 최초의 목사 선교사인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를 기억하기에 주님을 송축할 수 있습니다. 26세와 27세의 청년 선교사들의 손에는 이수정이 회심하고 번역한 마가복음 한글번역 성경이 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암흑기에 있었던 조선의 상황 속에서 이수정은 개척자적인 순교정신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는 두 번이나 미국 선교부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선교사들을 파송해 달라는 요청이었지요. 그의 선교사 요청 편지 까닭에 이수정은 ‘조선의 마케도니아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수정의 꿈은 조선도 기독교를 받아들여 일본처럼 개화되는 것이었다. 그는……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미국인 선교사들을 통해 미국 교회에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 달라”는 편지를 썼다. 그 편지는 미국에서 발행되는 선교 잡지 <The Gospel in All Lands>에 실렸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된 나 이수정은 미국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문안합니다……아직도 수천만 우리 민족은 하나님의 참된 도를 모른 채 이방인처럼 살고 있습니다……그래서 저는 성경을 한글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는데 이것을 통해 복음이 확산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저는 비록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지만 여러분이 선교사들을 파송만 해 준다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이덕주, 『한국교회 처음 이야기』 (서울: 홍성사, 2006), 38-39.]

이 편지에 감동받은 선교사들은 내한 전, 일본에서 그에게 우리말을 배웠습니다. 이수정은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요리문답과 소책자 번역을 진행했을 뿐 아니라, 유학생들을 전도하여 주일학교를 열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선진문물을 견학하러 갔다가 예상치 않게 성경을 접하고 세례를 받은 이수정은 40개월가량 선교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들을 돌아봅시다. 그들이 이수정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도웁시다. 이수정을 도와주었던 일본과 미국의 형제들이 있었기에 성경번역과 선교사 파송이 가능했음을 잊지 맙시다.

이수정의 경우……한자어의 형식적인 수용성을 거부하고, 국문으로서 자연스러운 어휘와 문법형태의 선택을 시도하였다. 이수정의 마가복음의 번역문체는……한자와 한글이 섞여서 쓰인 문체이며……한자에는 독음이 달려 있어 낯설고 어색한 한자어일 경우 친숙한 고유어로 표현하려고 하였다. 덧붙여 1882년 존 로스 역인 누가복음에 비해 활자의 인쇄된 상태라든가 면모가 현저하게 세련되어 있었다……고유명사는 헬라어 원문에 따라 표기했는데 오른쪽에 우리 음을 부기하고 있음이 특징적이며, 일본어와 영어, 그리고 헬라어 원문을 대조하면서 번역하였다.[이수환, 『이수정 선교사 이야기』 (경기: 목양, 2012), 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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