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5월 31일, 스크랜튼(Mary Scranton, 1832-1909) 부인이 이화학당(梨花學堂)을 시작하다.

5월 31일 “이화학당(梨花學堂)의 시작과 메리 스크랜튼”

오늘은 이화학당(梨花學堂)이 시작된 날입니다. 1886년 5월 31일, 스크랜튼 부인은 학생 한 명으로 교육을 시작했으니 이것이 이화학당의 첫 수업이었습니다. 학교의 시작은 이렇듯 초라했습니다. 메리 스크랜튼(Mary Scranton, 1832-1909)은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여성 선교사이자, 한국최초의 근대식 여학교인 이화학당(현 이화대학교)과 최초의 여성병원인 보구여관(이화여대 병원 전신)의 설립자입니다. 그녀는 1872년 남편과 사별한 후 1884년 52세의 나이로 미국 북감리회에서 파송 받아 아들과 함께 조선에 왔습니다. 명성황후는 스크랜톤 부인의 교육·의료사업을 지지하였고, 직접 학교와 병원의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학생들은 대부분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여사는 처음 학교가 시작되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우리 학교 사업은……스크랜톤 박사 집에서 시작되었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학생이 한 사람뿐이었다. 그 학생은 어떤 정부 관리의 첩이었는데, 그 남편은 자기 첩이 영어를 배워 후일 왕비의 통역이 되기를 바랐다. 그 여자는 우리와 약 석 달 동안만 같이 지냈다. 제일 처음 재학생으로 입학한 생도는 김생여보다 한 달 늦게 1886년 6월에 왔다. 그 색시는 집안 살림이 몹시 구차하여 우리에게 온 것이 분명했다. 허나 한 달도 못 되어 그의 어머니는 제 딸을 외국 사람에게 맡기느니보다는 가난을 참고 견디는 게 낫다고 느꼈다. 고약한 이웃 사람들은 그 어머니를 나무래, 이 여인이 어머니답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딸을 노부인에게 맡겼을 것이라고 시비했다. 잘 먹고 잘 입고 살고 있으니 얼마 동안은 좋겠지만 조금 있다가 미국으로 끌려가서 그 신세가 어찌 될는지 누가 아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아이들을 절대로 이 나라 밖으로 데려가지 않는다는 각서를 써 보냈더니 이것이 효과를 얻어 한동안 그의 어머니를 안심시킬 수 있었고, 몇 달이 지나서야 완전히 안심시킬 수 있었다. 두 번째로 들어온 생도는 조그만 어린 거지 아이였다. 아이의 어머니는 병자였는데 스크랜톤 박사가 발견하여 병원에 데려다가 치료해 주던 여인이었다.”[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1』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4), 550.]

이 나라의 교육을 위해 헌신한 스크랜튼 부인의 헌신이 아름답습니다. 자신의 50대를 아들과 함께 선교지에서 보낸 부인의 삶은 조용하지만 강력한 도전입니다.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위해,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여생을 드리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도 그렇게 늙기 원합니다.

유교 교육은 지나치게 현학적이어서……새로운 교육 이념과 제도가 필요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선교사들의 육영 사업은 보수층을 제외한 많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환영을 받았다……이렇게 시작한 학교들은 초기에 학생들을 전적으로 기숙하게 하면서 교육하였다. 이화학당의 경우 학생들의 연령은 8세부터 17세까지였고, 그 중에서 나이 많은 학생이 반장이 되어 반 학생들을 통솔하였다. 나이 많은 학생들은 어린 학생들의 빨래와 바느질까지 돌보아 주었다. 8-9세 때 학교에 입학하면 10년 정도 머무는데, 재능이 있는 학생에게는 유학 가는 길을 열어 주고 혼처가 생기면 바로 시집을 보내는 것이 곧 졸업시키는 것이었다. 선교사들과 교회는 인도적이며 실리적인 입장에서 남자들의 교육뿐 아니라 여자들의 교육을 위해서도 똑같은 노력을 기울였다.[김영재, 『한국교회사』 (수원: 합신대학원출판부, 2009), 101-102.]
1886년 5월 31일 이화학당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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