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3월 28일(음력), 박형룡(朴亨龍) 출생

 3월 28일 “박형룡(朴亨龍) 박사”

오늘은 박형룡(朴亨龍) 박사가 출생한 날입니다. 1897년 3월 28일(음력), 박형룡은 평안북도 벽동읍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감화를 받았고, 최권능 목사에게서 학습을, 양전백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박형룡은 선천 신성중학교, 평양숭실대학, 중국 금릉대학교, 프린스턴신학교, 남침례교 신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는 조국의 청년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반기독교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변증학을 연구하였습니다. 1927년 5월에 귀국한 박형룡은 자유주의적인 신학사상을 비판하고 보수 정통신학을 수립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였던 소열도(T. Stanley Soltau)는 박형룡의 유년 시절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박형룡 유년 시절에 관한 거의 유일한 자료다. “(박형룡이 말하기를) 저는 세 아들의 장남으로, 산골마을에서 부모 형제와 함께 살았습니다. 어느 날 우리 마을에 소식이 하나 들려왔습니다. 어떤 조선인 선생이 와서 산 너머 마을에서 특별집회를 하는데 사람들이 대단한 관심을 보인다는 겁니다. 나도 두 동생을 데리고 그 집회에 갔습니다. 그 날 밤, 나는 예수가 죄인들을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었고 주 예수를 믿으면 죄를 용서받고 하늘나라의 영광이 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영광의 문으로 들어가고, 믿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에 떨어진다고 얘기도 들었습니다. 우리 삼형제는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우리 형제는 주일마다 산을 넘어 예배당에 갔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주님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작정하게 되었습니다.”[장동민, 『박형룡』 (파주: 살림, 2006), 26-27.]

한국교회는 여전히 박형룡을 통해 배울 것이 많습니다. 특별히 그의 교회론이 그러합니다. 박형룡은 광대회의가 항구적인 상회가 아님을 주장했습니다. 상회란 지교회의 당회가 다룰 수 없는 사안에 대해서만 그 권세가 행사되어야 하며, 그 권세 역시 제한적이고 한시적이라고 한 가르침은 박윤선의 그것과 일치합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개혁파 교회론이며 사도행전 15장의 바른 해석과 적용입니다. 박형룡은 감독교회적이고, 로마가톨릭적인 느낌이 나는 상회라는 용어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지역교회를 섬기는 비상설기구로서 노회와 총회가 그 직무를 다하기를 기도합니다. 진리의 말씀과 성령에 사로잡힌 설교자와 양떼를 사랑하는 장로들이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박형룡의 시대와 양상은 다르나 여전히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주여, 도와주옵소서.

박형룡은……루이빌에 있는 남침례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박형룡이 미국에서 공부를 시작하던 1923년이 어떤 해였는지 혹시 기억합니까? 이 당시 미국 장로교회 내에서는 근본주의 대 현대주의 논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메이첸이 프린스턴에서 축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메이첸에게 격려의 편지를 썼습니다. 자신도 프린스턴에서 배운 바를 위해 한국에서 일하고 있노라고 했습니다. 박형룡은 메이첸이 “구프린스턴의 보존”을 위해 전투하고 있음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후일 한국에서 성경관을 둘러싼 논쟁이 일어날 때, 박형룡은 메이첸이 프린스턴에서 하던 일을 자기가 한국에서 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장동민, 『대화로 풀어보는 한국교회사 2』 (서울: 부흥과개혁사, 2009), 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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