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2월 28일, 전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1868-1956)가 기록한 일기
2월 28일 “주님께 드려진 송장”
1939년 2월 28일에 전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1868-1956)가 기록한 일기를 살펴봅시다. “어제 평양에 사는 기독신자 박관준 일행 3명이 방문해서 관헌의 압박 상황을 호소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들 신자에게는 불행한 일이요, 성대(聖代)의 불상사이다. 미나미(南次郞)가 공을 세우기에 급급하다는 평을 여러 번 들었다. 그 일단(一端)이 드러난 것인가? 지나칠 수 없는 일이다!” 박관준 장로와 안이숙 선생은 효과적인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위해 일본에 건너왔습니다. 그들은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던 박관준의 아들 영창과 함께 일본 정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인사들을 찾아가 한국의 상황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미 국내에서 신사참배 거부로 두 번이나 유치장 신세를 진 박관준은 조선총독부에 수차례 신사참배 강요정책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으나 허사였습니다. 그래서 기도 중에 안이숙과 함께 일본 본토로 건너오게 된 것입니다.
우가끼 전 조선총독을 만나는 날이었다……박 장로 일행은 긴자에 있는 서점에 들러 가죽성경 한권을 샀다. 그 안에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의 죄가 된다는 박 장로의 친필들을 넣고 포장을 했다……“아니 선생같이 연로하신 어른을 유치장에 가두었단 말인가요? 내가 있을 땐 국경일에만 학교와 관공서에 한해 장려했을 뿐인데요. 사실이 그렇다면 큰일이군. 미나미군이 바보인가.”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일본의 존망이 걸린 중대사라고 생각하여 이를 경고하기 위해 왔으니 성경말씀을 한 번 읽어 보신 다음 미나미 총독과 중앙정부 당국자들에게 충고해 주길 바라서입니다.”……박 장로는 한 시간이 넘도록 자신의 신앙체험을 들려주며 기독교로 귀의할 것을 열심히 권했다. 우가끼는……아라끼 육군대신도 만나보라고 추천해 주었다. 그러나 종교 법안이 상정되는 제74회 제국회의 전에는 면회신청을 해도 만날 수가 없어 몹시 아쉬웠다.[임영옥, 『성령의 사람 박관준』 (서울: 좋은씨앗, 2006), 136-37.]
그들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던 하비키 중장도 만났는데, 그는 한국의 상황을 들으며 가슴 아파했습니다. 하비키는 안이숙에게 자신의 수양딸이 되어줄 것을 부탁했으나 그녀는 자신은 주님께 드려진 송장으로 왔노라고 고백하며 거절했습니다. 안이숙은 중장의 딸이 되어 신학교에서 공부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대신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6년간 감옥에서 지내는 편을 택했습니다. 신앙을 위해 생업을 포기한 박관준 장로, 대의를 위해 수양딸의 보장을 포기한 안이숙 선생과 같은 지조를 오늘날에도 찾아볼 수 있을까요? 아무도 보지 않는 그곳에서 충성을 다하는 자들이 분명 남겨져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바로 그 사람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박 장로에게는 숨겨 둔 마지막 계획이 있었다. 양복 하의 속주머니 밑에 다음과 같은 경고문이 적힌 종이를 말아 넣어 두었다. “일본 제국은 회개하고 폭정을 철회하라. 신토교와 기독교 중 어느 것이 참 종교인지 시험해 보라.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불을 질러 타지 않는 편이 참 종교다.” 1939년 3월, 박 장로는 일본제국의 국회의사당 방청석에 경고문을 몰래 가지고 들어갔다. 결정적인 순간에 박 장로는 경고문을 펴서 의사당 바닥으로 던졌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대사명이다”라고 외쳤다. 그리고 그들은 체포되었다.[Noël Piper, Faithful Women and Their Extraordinary God, 이지현 역, 『불멸의 신앙: 한계를 뛰어넘은 믿음의 여인들』 (경기: 살림, 2008), 215.]
1939년 2월 28일에 전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1868-1956)가 기록한 일기를 살펴봅시다. “어제 평양에 사는 기독신자 박관준 일행 3명이 방문해서 관헌의 압박 상황을 호소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들 신자에게는 불행한 일이요, 성대(聖代)의 불상사이다. 미나미(南次郞)가 공을 세우기에 급급하다는 평을 여러 번 들었다. 그 일단(一端)이 드러난 것인가? 지나칠 수 없는 일이다!” 박관준 장로와 안이숙 선생은 효과적인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위해 일본에 건너왔습니다. 그들은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던 박관준의 아들 영창과 함께 일본 정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인사들을 찾아가 한국의 상황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미 국내에서 신사참배 거부로 두 번이나 유치장 신세를 진 박관준은 조선총독부에 수차례 신사참배 강요정책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으나 허사였습니다. 그래서 기도 중에 안이숙과 함께 일본 본토로 건너오게 된 것입니다.
우가끼 전 조선총독을 만나는 날이었다……박 장로 일행은 긴자에 있는 서점에 들러 가죽성경 한권을 샀다. 그 안에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의 죄가 된다는 박 장로의 친필들을 넣고 포장을 했다……“아니 선생같이 연로하신 어른을 유치장에 가두었단 말인가요? 내가 있을 땐 국경일에만 학교와 관공서에 한해 장려했을 뿐인데요. 사실이 그렇다면 큰일이군. 미나미군이 바보인가.”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일본의 존망이 걸린 중대사라고 생각하여 이를 경고하기 위해 왔으니 성경말씀을 한 번 읽어 보신 다음 미나미 총독과 중앙정부 당국자들에게 충고해 주길 바라서입니다.”……박 장로는 한 시간이 넘도록 자신의 신앙체험을 들려주며 기독교로 귀의할 것을 열심히 권했다. 우가끼는……아라끼 육군대신도 만나보라고 추천해 주었다. 그러나 종교 법안이 상정되는 제74회 제국회의 전에는 면회신청을 해도 만날 수가 없어 몹시 아쉬웠다.[임영옥, 『성령의 사람 박관준』 (서울: 좋은씨앗, 2006), 136-37.]
그들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던 하비키 중장도 만났는데, 그는 한국의 상황을 들으며 가슴 아파했습니다. 하비키는 안이숙에게 자신의 수양딸이 되어줄 것을 부탁했으나 그녀는 자신은 주님께 드려진 송장으로 왔노라고 고백하며 거절했습니다. 안이숙은 중장의 딸이 되어 신학교에서 공부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대신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6년간 감옥에서 지내는 편을 택했습니다. 신앙을 위해 생업을 포기한 박관준 장로, 대의를 위해 수양딸의 보장을 포기한 안이숙 선생과 같은 지조를 오늘날에도 찾아볼 수 있을까요? 아무도 보지 않는 그곳에서 충성을 다하는 자들이 분명 남겨져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바로 그 사람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박 장로에게는 숨겨 둔 마지막 계획이 있었다. 양복 하의 속주머니 밑에 다음과 같은 경고문이 적힌 종이를 말아 넣어 두었다. “일본 제국은 회개하고 폭정을 철회하라. 신토교와 기독교 중 어느 것이 참 종교인지 시험해 보라.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불을 질러 타지 않는 편이 참 종교다.” 1939년 3월, 박 장로는 일본제국의 국회의사당 방청석에 경고문을 몰래 가지고 들어갔다. 결정적인 순간에 박 장로는 경고문을 펴서 의사당 바닥으로 던졌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대사명이다”라고 외쳤다. 그리고 그들은 체포되었다.[Noël Piper, Faithful Women and Their Extraordinary God, 이지현 역, 『불멸의 신앙: 한계를 뛰어넘은 믿음의 여인들』 (경기: 살림, 2008),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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