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2월 27일, 존 로스(John Ross, 1842-1915)가 중국선교사로 임명을 받다.

2월 27일 “2월 27일 “결혼 일 년만의 사별

오늘은 존 로스(John Ross, 1842-1915)가 중국선교사로 임명을 받은 날입니다. 1872년 2월 27일,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해외선교부에서 선교사로 임명된 로스는 다음 달에 목사안수식과 결혼식을 가진 후 바로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로스는 아내 스튜어트(M. A. Stewart)와 함께 영국에서 캐나다로, 캐나다 밴쿠버에서 일본으로, 일본 고베에서 상해로 가는 긴 여행 끝에 중국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하 25도 이하의 맹추위 속에서 무리한 여행을 한 로스의 아내는 아들 드러몬드(Drummond)를 낳은 후 건강이 악화되어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1873년 3월, 스튜어트는 번즈 선교사의 무덤 옆에 묻혔습니다. 결혼 일 년 만의 일었습니다.

아내 캐롤라인과의 사별의 슬픔을 딛고 한국선교를 향한 열정을 불태웠던 로버트 토마스처럼 로스 역시, 아내가 세상을 떠나던 그 해 가을, 장장 천릿길이나 되는 긴 전도여행을 떠난 것이다. 로스는 아내와의 사별에도 불구하고 1873년 가을,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서 산동 지역 특히 서간(西間) 지역으로 1차 선교여행을 떠나며 한국선교의 열정을 붙태웠다. 만주 우장(牛莊)을 떠난 존 로스는 봉천 홍경을 거쳐서 압록강 상류 임강 부근까지 건너갔다 거기서 우연히 한 한인촌을 발견했다. 이미 윌리엄슨에게 토마스 선교사 순교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 조선이 어떤 나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그였지만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수 없었다. 사공을 찾았지만 나서는 뱃사공이 없어 배라도 빌려 비밀리에 도강하려고 했으나 배를 빌려 주는 사람조차 없었다. 당시 한국은 쇄국정책으로 외국인과 접촉만 하면 처형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존 로스 선교사를 태워다 줄 사공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1』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4), 293-94.]

로스는 고려문에서 만난 한국 상인들과 함께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번역했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들어오기 3년 전인 1882년에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성경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읽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슴 사무치는 아픔 속에서도 사명의 길을 경주했던 로스의 삶은 작은 일에 낙망하는 나를 분발하게 합니다. 1916년 5월에 동북삼성 각 교회의 장로들이 로스를 그리워하며 심양 동관교회 세운 기념비를 살펴봅시다. 안일에 빠지기 않기를 머리숙여 기도합니다.

John Ross 박사는 도학(道學)을 졸업한 후 하나님의 뜻에 따라 31세에 바다를 건너 선교를 위해 중국 땅에 왔습니다. 처음에 교회를 개척할 때는 환경이 매우 열악했으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열심히 선교하여 결국 어려움을 극복하고 심양, 요양, 흥경뿐만 아니라 조선에도 예배당을 세웠습니다.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고아원을 설립하여 수많은 고아들을 양육하며 믿음 안에서 교육을 시켰습니다. 한편으로는 성경 번역사업과 성경 주석서 편찬사업을 사였고 더 많은 신학인재를 양육하기 위해 신학원도 개설하였습니다……우리는 John Ross 박사님을 그리워하며 여기에 기념의 글을 아로새겨 성도들의 그리워하는 마음을 대신합니다. 인자하신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떠나는 지금도 그분은 우리를 격려하고 계십니다. 비문의 글로 우리의 존경하는 마음을 대신합니다.[김수진, 『한국 기독교 선구자 서상륜』 (서울: 진흥, 2009), 105-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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