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2:4-13 설교/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
히브리서12:4-13
[새번역]
4. 여러분은 죄와 맞서서 싸우지만,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 대항한 일은 없습니다.
5. 또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하여 자녀에게 말하듯이 하신 이 권면을 잊었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라.
6.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을 징계하시고,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신다."
7. 징계를 받을 때에 참아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녀에게 대하시듯이 여러분에게 대하십니다.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자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8. 모든 자녀가 받은 징계를 여러분이 받지 않는다고 하면, 여러분은 사생아이지, 참 자녀가 아닙니다.
9. 우리가 육신의 아버지도 훈육자로 모시고 공경하거든, 하물며 영들의 아버지께 복종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더욱더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10. 육신의 아버지는 잠시 동안 자기들의 생각대로 우리를 징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징계하십니다.
11. 무릇 징계는 어떤 것이든지 그 당시에는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으로 여겨지지만, 나중에는 이것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에게 정의의 평화로운 열매를 맺게 합니다.
12. 그러므로 여러분은 나른한 손과 힘 빠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똑바로 걸으십시오. 그래서 절름거리는 다리로 하여금 삐지 않게 하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
[NIV]
4. In your struggle against sin, you have not yet resisted to the point of shedding your blood.
5. And you have forgotten that word of encouragement that addresses you as sons: "My son, do not make light of the Lord's discipline, and do not lose heart when he rebukes you,
6. because the Lord disciplines those he loves, and he punishes everyone he accepts as a son."
7. Endure hardship as discipline; God is treating you as sons. For what son is not disciplined by his father?
8. If you are not disciplined (and everyone undergoes discipline), then you are illegitimate children and not true sons.
9. Moreover, we have all had human fathers who disciplined us and we respected them for it. How much more should we submit to the Father of our spirits and live!
10. Our fathers disciplined us for a little while as they thought best; but God disciplines us for our good, that we may share in his holiness.
11. No discipline seems pleasant at the time, but painful. Later on, however, it produces a harvest of righteousness and peace for those who have been trained by it.
12. Therefore, strengthen your feeble arms and weak knees.
13. "Make level paths for your feet," so that the lame may not be disabled, but rather healed.
고난의 이유와 그것이 주는 이유(히브리서 12:4-17)
본문에서 바울은 히브리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생활하는 가운데 겪는 고난의 정도가 가벼운 것이며 또 그들에게 유익한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인내할 것과 믿음이 흔들리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
Ⅰ. 그들이 겪는 고통의 정도가 가벼운 것으로 참을 수 있는 것임을 바울은 먼저 말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는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4절)라 하였다.
1. 바울은 그들이 많은 고난을 받았고 죄를 대항해서 싸우느라고 고통이 컸음을 인정한다.
(1) 싸움의 원인은 죄이다. 그리고 죄와 대항해 싸우는 것은 선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대한 가장 나쁜 적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적 전쟁은 존귀한 것이며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넘어뜨리고 멸망시키려 하는 것과 대항하여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해야만 하며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
(2) 모든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징병된 군사들이다. 그들은 죄와 싸우기 위해 또한 죄된 가르침과 행실과 자기나 또는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죄된 습관이나 관습과 싸우기 위해 징병된 군사인 것이다.
2. 바울은 수신인들에게 그들이 더욱 많은 고통을 겪여야 할 것과 또한 그들이 지금까지는 다른 구약의 성도들처럼 대단한 고통을 받지는 않았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아직 순교가 요구되기까지는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 그들이 이러한 고난에 처하게 되겠는가 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배울 수 있다.
(1) "구원의 주인"이신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처음부터 혹심한 시련 가운데로 불러내지는 않으신다. 그는 나중에 올더 큰 고난을 예비하여 작은 고난으로 믿는 자들을 단련시키신다. 그는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지 않으신다.
(2)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는 선하시어서 시련을 주시는 만큼 또 그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겪는 고통을 자랑스럽게 여겨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 고난 속에 깃들어 있는 그리스도의 긍휼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피를 흘리기까지 하는 " 무서운 고난에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을 동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의 적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피를 흘려 자신들의 증언을 수호하는 사람들을 동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3) 그들은 자신보다 더 큰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보고 또 그들도 언젠가는 더 커다란 고난을 당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자신들이 보잘 것 없는 고난 앞에서도 기진맥진해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만일 우리가 사람과 달리기를 하다가 지쳐버린다면 어떻게 말과 달리기를 하겠는가? 또한 우리가 살기 좋은 기름진 땅에 살면서도 곤비하게 된다면 우리가 살기 좋은 기름진 땅에 살면서도 곤비하게 된다면 요단강이 범람하는 땅에서는 어떻게 하겠는가?(렘 12:5)
Ⅱ.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닥칠 고난이 은혜로운 성격의 것임을 들어 인내할 것을 권면한다. 박해자들과 그리스도인의 적들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을 주는 도구 역할을 할 것이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채찍의 역할을 하는 것일 뿐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모든 박해자들까지 다 주관하시며, 그들까지 자신의 선하신 목적에 쓰여지게 하신다. 이 사실을 바울이 그들에게 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들은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5절).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인간들이 볼 때는 박해라고 생각되어지는 고난도 실상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염려하셔서 내리시는 징계요 채찍인 것이다. 신앙에 대한 박해는 종종 신앙을 고백한 자들이 범하는 죄에 대한 선도의 질책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신앙 고백자들이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그들을 박해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앙 고백자들이 더욱 굳은 신앙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박해자들을 통해 그들을 질책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믿는 자들이 신앙 고백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박해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앙 고백자들이 그 신앙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응징하시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고난 속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지시하셨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을 받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좌우로 치우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1)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의 질책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을 경시하지 말고, 고난 앞에서 어리석어지거나 둔감해지거나 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 고난은 하나님의 회초리요 죄에 대한 질책이기 때문이다. 고난을 멸시하는 자는 곧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며 죄를 가볍게 여기는 자인 것이다.
(2) 반대로 하나님의 백성은 질책 받을 때 낙심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고난받을 때 낙심하거나 절망해서는 안 되며, 불평하거나 조바심해서도 안 된다. 다만 믿음과 인내로 견뎌야 한다.
(3) 만약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위의 두 가지 경우 중의 어느 한 쪽으로라도 치우치게 되면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진실하고 온화하신 애정으로써 그들에게 내려 주신 약속과 권면을 잊었다는 표시인 것이다.
3. 고난도 바르게 견디기만 한다면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불만의 표시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돌보아 주시며 사랑해 주신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6-7절). 그러므로 본문에 "주께서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고 하였다. 다음을 관찰해 보자.
(1) 아무리 훌륭한 하나님의 자녀일지라도 그에게는 징계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들도 결점과 어리석은 면이 있는데 이런 것들은 시정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자들은 죄를 짓게 내버려두시지만 그의 자녀들의 죄는 반드시 시정케 하신다는 사실이다. 자녀들은 하나님의 가족의 한 구성원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징계가 있어져야 할 때 그들에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3) 징계하는 아버지만이 아버지다운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현명하고 좋은 아버지 치고 그가 비록 남의 자식의 잘못은 눈감아 버릴지라도 자기 자식들이 잘못할 때 묵인해 주는 아버지는 없다. 아버지는 자녀에 대해 부자라는 인연 때문에 또한 자녀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다른 아이들의 잘못 보다는 특히 자기 자녀들의 잘못에 대하여 민감한 법이다.
(4) 죄를 지었는데도 책망 받음이 없이 사건이 무서워 무마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버림받았다는 슬픈 표시인 것이다. 그렇게 된 자는 아들이 아니라 사생아이다. 그러한 자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씨, 다른 자녀인 것이다(7,8절).
4. 육신의 아버지의 징계에 대하여 우리가 공경하는 자세로 감수해야 한다면 하늘 아버지의 징계에 대하여는 우리가 더욱 공경하는 자세로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9,10절).
(1) 바울은 자녀들이 지상의 부모에게 의무를 다하며 복종하는 것을 마땅한 것으로써 말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는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이라고 하였다. 부모의 정당한 명령에 대해 공정하므로 복종하는 것은 자녀들의 의무이다. 또한 자신들이 불복종하였으므로 부모에게서 징계가 주어질 때 그 징계를 공경하는 자세로 받아들임 역시 자녀들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이다. 부모는 필요할 때 자녀들에게 징계할 권위와 책임을 하나님께로부터 전해 받았다. 또한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부모의 징계를 바르게 받아들일 것을 명하셨다. 만일 자녀들이 응당한 징계가 주어지는 대도 완고한 자세를 취하고 또 불만만 품는다면 이는 이중적인 잘못을 범하는 것이 된다. 즉 징계가 주어지는 것은 이미 잘못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인데 게다가 부모의 징계권에 대하여 항거하므로 한 가지 죄를 더 범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2) 바울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대하여 더욱 겸손하여 순종하는 태도를 취해야 함을 재 권고한다. 그는 이러한 권고를 작은 자에 불과한 육신의 아버지에게 복종해야 한다면 더욱 크신 분의 하나님께 복종함은 더욱 당연한 것이라도 논리에 의하여서 행하고 있다.
[1] 지상의 아버지는 우리 "육신의 아버지"에 불과하시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 영의 아버지"시다. 지상의 아버지는 우리의 몸을 낳는데 도구의 역할을 하신 분이다. 그러나 이 몸은 고깃덩이에 불과하며 천하고 가시적이며 악한 것이며 짐승의 육체나 다를 바 없이 흙으로 이루어진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육체는 신비한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고 우리의 인격의 중요한 일부를 구성할 뿐 아니라 영혼이 거하는 장막이요 영혼으로 역사하게 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이 육신을 우리에게 부여하는데 도구 역할을 한 부모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영혼의 아버지 되신 자에게는 더욱 더 큰 존경과 사랑을 드려야 하는 것이다. 우리 영혼의 본체는 물질적인 요소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물질이라도 물질로는 영혼을 만들 수가 없다. 영혼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유래된 것이다. 그는 흙으로 사람의 몸을 만드신 후 인간의 몸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다. 그리하여 인간은 생명을 지니게 된 것이다.
[2] 지상의 부모는 "자기들의 마음 내키는데 따라서" 자녀들을 징계한다. 때때로 부모들은 자식들의 태도를 고치기보다는 감정에 치우쳐서 벌을 주는 수가 없다. 육신의 아버지들은 이러한 결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감정에 치우쳐서 부모들이 자식을 구타할 때 부모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부모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또한 정작 있어야 하겠으므로 가한 징계까지 그 효력을 잃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영의 아버지는 자신의 자녀들이라고 해서 기분 내키는 대로 자녀들에게 괴로움을 주거나 고난을 주시지는 않는다. 그는 언제나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만" 견책하신다. 또한 그가 견책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로 그의 거룩하심에 동참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의 견책은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은 죄된 요소들을 시정하고 치료하며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인 아름다운 요소들을 개발 증진케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보다 하늘 아버지를 닮고 그와 같이 행동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이들이 가능한 한 자신을 닮게 하려고 하신다. 이러한 목적으로 필요할 때면 그는 자녀들을 징계하시기도 한다.
[3] 육신의 아버지는 우리가 아직 어린애인 미성년일 때만 우리를 견책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잠시 동안"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투정부리는 연약한 아이일 때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또 우리가 성인이 되었을 때는 아버지가 우리를 견책해 주신데 대하여 고마웁게 여기게 된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일생이란 저 세상에서의 삶에 비할 때 유년기와 같은 것으로 짧고 불완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견책을 통해 단련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저 세상에서의 완전한 상태에 이르게 되면 그때에야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견책이 얼마나 필요한 것이었는가를 깨닫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
[4] 하나님의 견책은 저주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의 자녀들은 처음 견책을 당할 때는 그 견책이 자기를 향한 저주인가 하여 두려워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처음 견책을 당할 때는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욥 10:2)라고 부르짖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징계하시는 것은 저주받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로 세상과 함께 죄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인 것이다"(고전 11:32). 그는 그들의 영혼의 파멸과 죽음을 막고 그들로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을 닮으므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하시기 위해 견책하신다.
5. 하나님의 아들들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그들에 대한 처사를 느낌에 의해 판단할 것이 아니라(즉 육신에 느껴지는 대로) 이성과 믿음과 경험에 입각하여 판단해야 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는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11절)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알 수 있다.
(1) 고난을 느낌으로만 판단할 때 어떠한 마음이 주어지는지를 생각해 보자. 고난이 가해지면 육체는 감사한 생각보다 먼저 괴로운 생각을 가지게 된다. 육신의 감관은 고난을 느끼고 고난에 의해 괴로워하고 신음한다.
(2) 고난을 믿음으로 판단할 때 와지는 마음의 변화를 생각해 보자. 믿음은 감각에 의해 느껴지는 괴로움에 대한 불평을 제거시켜 주고 거룩하게 하는 징계는 의의 결실을 준다는 것을 마음에 설득시켜 준다. 이러한 의의 결실은 평온을 주며 영혼을 안정시키고 위로한다. 고통은 더 많은 의를 낳게 하므로 오히려 평화를 준다. 왜냐하면 의의 열매는 평화이기 때문이다. 만약 육신의 고통이 이와 같이 마음의 평안을 주는데 기여한다면 그리고 현재의 짧은 괴로움이 오래 지속되는 축복의 열매를 맺어 준다면 고통을 당함으로 괴로워하거나 낙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들이 견책을 당할 때 오직 관심을 두어야 할 사실은 어떻게 하면 그 고난을 잘 인내해 내고 그 고난을 통하여 보다 거룩함에 이를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1]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그들은 인내로써 견뎌내야 한다. 바울이 이 주제를 논한 목적은 그들로 고통을 인내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고난이 그들을 낙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울 것"(12절)을 재차 권고하였다. 무거운 고통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두 손을 내려뜨리게 하며 무릎을 끓게 만들고 그를 낙담시키고 실망시킨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고난에 이같이 지지 말고 대항해서 싸워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 영적 경주를 좀 더 잘 달릴 수 있기 위해서이다. 믿음과 인내와 거룩한 용기와 결단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보다 굳굳하게 해줄 것이며 곧 바로 앞을 향해 걷게 해 줄 것이요 방황하거나 흔들리지 않게 해 줄 것이다. 둘째, 그와 함께 같이 길을 달려가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고 낙심시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향해 간다고는 하지만 절뚝거리면서 또는 힘없이 비틀거리며 걷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태는 다른 사람들도 낙심시키고 또 서로에게 장애가 된다. 그러므로 용기를 얻고,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늘 나라로 더욱 진진하게 서로를 도웁는 것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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