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6년 10월 27일,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Roterodamus) 출생
10월 27일 “에라스무스, 숨어 있는 루터파”
오늘은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Roterodamus)가 태어난 날입니다. 1466년 10월 27일, 에라스무스는 네덜란드의 호우다(Gouda)에서 사생아로 출생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로마교 신부였고, 어머니는 의사의 딸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참사수도회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파리 대학에서 수학한 에라스무스는 영국 여행 중 존 콜렛과 토마스 모어 등을 만나면서 성경에 대한 열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교회 개혁을 부르짖으며 1516년에 헬라어 신약성경을 출판했습니다. 이는 헬라어 성경 본문과 라틴어 번역 그리고 본문에 대한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북유럽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위대한 인문주의 학자로 불립니다.
에라스무스의 해석 중 두 가지가 특히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첫 번째는 헬라어 “로고스”(logos)를 “설교”(sermo, 혹은 대화)로 옮기어 요한복음 1:1을 “태초에 설교가 있었다”(In initio erat sermo)라고 번역한 것이다. 그는 기존의 불가타 성경이 사용한 베르붐(verbum) 대신에, 담론 혹은 대화를 암시하는 세르모(sermo)를 사용하였다……두 번째는 요한의 콤마(Comma Johanneum)라고 불리는 유명한 요한일서 5:7이었다(“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에라스무스는 자신이 살펴 본 어떤 헬라어 사본에도 이 본문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며, 이러한 주장으로 인해 그는 아리우스주의자(Arian)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Carter Linberg ed., The Reformation Theologinas, 조영천 역, 『종교개혁과 신학자들』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2), 90.]
에라스무스는 로마교 진영으로부터 “숨어 있는 루터파”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동시에 종교개혁 진영에서는 그의 미온적인 태도를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가 교육의 목표를 성경의 이해에 두고 고전을 강조한 것은 우리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부분입니다. 또한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그의 헬라어 성경을 읽고 영향을 받은 것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루터의 주장에 반박하는 에라스무스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루터가 아킬레스의 무기로 생각하는 결정적 논거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는 말씀입니다……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없이 우리는 살 수도 없고, 움직이거나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도 은총 없이는 자유 선택은 오직 죄로 향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합니다. 루터도 이것을 그의 「주장」의 머리에 적어 놓았습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가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가 없느니라”(요 3:27)는……말씀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로부터 자유 선택의 능력이나 사용이 없다는 것을 단언할 수 없습니다. 불이 따뜻하다는 사실은 하늘로부터 옵니다. 우리가 자연적으로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취하고 손해되는 것을 피하는 것 또한 하늘로부터 옵니다. 타락 이후 의지는 더 좋은 일을 하도록 강요됩니다. 이것도 하늘로부터 옵니다. 눈물로, 자선으로, 기도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은총을 얻습니다. 이것도 하늘로부터 옵니다. [E. Gordon Rupp & Philip S. Watson, ed., Luther and Erasmus: Free Will and Salvation, 이성덕·김주한 역, 『기독교고전총서 16 루터와 에라스무스: 자유 의지와 구원』 (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11), 1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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